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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 들어가도 되겠소이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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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촌사람 2012. 7. 28. 0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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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인, 들어가도 되겠소이까?

 

                                                                                                      최  종  희

 

 

 

  나는 사극을 즐겨본다. 그렇게 해서 논네 티를 낸다. 티를 내지 않으려 해도 그리되는 것이 그 시간대에 티브이를 대하게 되면, 케이블 티브이의 영화들 빼고는 달리 마땅한 채널도 없다.

  얼라들이 국산말인지 외제 부스러기인지 짐작도 할 수 없는 노랫말로 꽥꽥 소리를 질러대고 천지사방을 찔러대며 찧고 까부는 것에 머리 박고 있어봐야 5분을 넘기기 어렵다. 특히, 가사에서 죄다 너, 너, 너! 하는 식으로 삿대질하듯 상대방을 지칭하는 걸 듣다보면, 저러다가 시집 장가라도 가서 아내와 남편의 위치에 서게 되면 어떤 꼴이 날지 눈에 선해서 얼른 채널을 돌려버린다. 배알이 뒤틀리는 걸 자청해서 대하고 있을 필요는 없다. 

 

  일반 드라마 역시 거기서 거기다. 극소수를 빼놓고는 엉터리 천지다. 우연의 남발이나 비현실성 따위야 워낙 기본적인 지적사항이니 건너뛴다 하더라도 극중에 나오는 특수한 환경이나 상황에 대해서 상상만으로 적당히 써대는 데는 입이 쩌억 벌어진다. 모르면 치열하게 공부를 한 다음 쓸 일인데 우선 쓰고 보는 간 큰, 얼치기 작가들 때문이다.

  (일례로 <호텔리어>와 같이 특수한 영역을 다루려면 작가가 최소한 몇 달 정도는 실제로 호텔 생활을 해보거나 공부한 다음 써야 한다. 그만큼 호텔이란 곳은 일거수일투족이 특수문화로 규제되거나 재단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다른 드라마에서도 나왔듯이 평직원의 호텔 정문 출입 같은 걸 예로 들자면, 부서장급 이상의 고급 간부가 아니고는 절대로 손님들이 드나드는 정문을 이용할 수 없다는 것쯤은 호텔리어에겐 상식이다. 뒤쪽이나 옆구리에 따로 마련된 직원 출입구만 이용해야 하는 것은 불문율이다. 고의 위반은 징계대상이 될 정도로 엄중한 규칙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극이 다른  프로들에 비해서 월등하게 낫다는 말은 아니다. 일반 드라마들보다 품질이 뛰어나기 때문도 아니다. 사극을 볼 때마다 딱 한 가지 내  맘에 드는 게 있어서다.

  그것은 어투다. 상하관계나 수직관계라 할지라도 말을 함부로 하지 않고 서로 맞존대를 하는 그 어투 말이다.

 

                                                                   *

  고증의 완벽성에 의구심이 전혀 들지 않는 바는 아니지만 사극을 보면 임금과 신하와 같은 수직관계에서도 명령조의 -해라체가 아니다. 시어미와 며느리 사이인 대비와 왕비도 서로 맞존대를 한다. 게다가, 사대부 집안쯤 되고 나면 부부간에도 맞존대를 한다. 나는 특히 그 부부간의 맞존대가 그처럼 좋아 보일 수가 없다.

  그런 걸 보고 있노라면, 일부종사와 여필종부라는 굴레를 씌우고 거기에다 남존여비의 못질까지 해서 숨도 제대로 못 쉬게 한 것처럼 일방적으로 여성성의 핍박만 강조해서 왜곡되게 가르쳐온 우리 교육의 허가 보인다. 봉건시대라는 딱지로 무조건 봉인부터 하려들었던 편벽된 태도들에 서운해진다.


  게다가 근년에 발견된 문서나 서간을 통해서 여성의 상속 권리가 일찍부터 존중되어 온 일이라든지, 당시의 부부간 사랑이 요즘 못지않게 치열했음을 알게 되는 일 등도 지금까지 우리들에게 일방적으로 제시된 굴절된 여성상의 수정에 적지 않게 한몫을 한다. 그래서만은 아니지만, 나는 되레 그 봉건시대의 여인들이 치마끈으로 가슴을 옥죄기만 하면서 살지 않았다는 생각으로 안도한다.

  여인네의 안집 살림과 남정네의 바깥 생활이 엄격하게 구분되는 가운데 서로 그 영역이 존중된 집안 구조나 태도, 그리고 어투를 보면 외려 그들의 삶 내면을 관통한 그 상호 존중의 의식이 아름답기까지 하다. 부부간의 어투 하나만 보아도 요즘 점점 얄팍해지기에 바빠하는 세태들과 대비될 때 특히 그렇다.

 

                                                                   *

   처남들은 희한하게도 부부간에 존대어를 쓴다. 사십대 근방에 머물고 있는데도... 그들의 어법을 대하고 오는 날은 내가 되레 부끄러워진다. 내가 아내에게 존대어를 사용하는 때는 장난을 치고 싶을 때이거나, 기분이 조증(躁症)에 접어들 때뿐이므로. (그러나, 하대는 하지 않는다. '접니다' 대신 '나요'를 쓰는 정도다.) 

  처남들의 그러한 뿌리는 그들의 부모, 곧 장인 장모로 이어진다. 그 두 분이 오래 전부터 맞존대를 해왔기에 자식들은 일찍부터 그게 아예 몸에 배어 있다.

   

  어투는 언어 사용자의 태도를 압축한다. 듣는 이에 대한 인식의 골격이, 사고방식의 기본틀이, 가치판단의 내용물이 그 안에 요약되어 있다. 그러므로 부부간에 쓰이고 있는 어투는 서로에 대한 전반적인 태도의 요약판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게 자식들에게 그대로 대물림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일상생활에서 아내에게  마구잡이 하대어를 남발하는 남편이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사랑한다는 말을 한다면 그건 새빨간 거짓말에 가깝다. 자식 교육과 관련해서 보자면, 그런 이들은 어버이날에 꽃 받을 자격조차도 의심스런 사람들이다.     


  어떤 조사에 따르면 한 주일 동안 서로 주고받는 단어의 숫자가 100개에도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 나라 부부들의 절반에 육박한다고 한다. 게다가, 그처럼 대화가 적은 부부들일수록 평어체나 하대어를 주로 쓴다던가. 결국 대화가 적은 부부일수록 서로에 대한 태도는 상호관계가 아니라 상하관계라고 할 수 있고, 언어가 거기에 단단히 한 몫을 하고 있다.

  거기서 불필요한 긴장까지 조성하게 되는 것은 주고받는 어투에 숨겨진 불온한 낌새를 눈치챈 상대방이 섭섭함을 간직하게 되고, 그것이 말끔히 지워지지 않은 채 쌓여갈 때다. 대체로 당하는 입장인 여인쪽에서 보자면, 그게 언젠가는 가슴을 에는 찬바람이 부는 벌판에 홀로 내쳐지는 기분으로 확실하게 전화(轉化)된다.

 

 

   그 시작이 바로 남정네의 말 한 마디가 아닌가 싶다. 어투가 결정적이다. 우리네 부부사랑은 주로 남자편의 말씨를 먹고 자라는 듯하므로. 때문에 그런 불필요한 긴장을 풀어줄 수 있는 것도 바로 남편의 말 한 마디가 아닐까. 

  아내의 가슴 깊숙이 쌓여 있는 섭섭함의 실꾸리를  단번에 내칠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 그게 바로 집안팎에서 아내에게 건네지는 남편의 말속에 들어 있는 셈이다. 그리고, 그 손쉬운 시작은 아내에게 어떤 경우에도 하대어를 사용하지 않는 일이다. 어떤 경우에도 <너>라는 흔한 지칭을 절대로 쓰지 않는 간단한 일부터 해보면 된다.

      

                                                                    *

  며칠 전 아내와 함께 <여인천하>를 보고 있을 때다. 중전을 만나고 온 이덕화가 아내를 보려고 별채의 방문 앞에 이르러 말한다.

  <부인, 들어가도 되겠소이까?>

  그 말을 듣고 있던 나는 킥킥거렸다. 그리고 얼른 아내를 힐끔거렸다. 내 웃음이 유난히 천박스럽게 보이지 않기를 은근히 바라면서. 언젠가 아내에게 그 말의 중의법(重意法)을 가지고 장난 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다. 존대어를 쓴다고 해서 늘 점잔만 떨게 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즉, 부부처럼 무난하기도 하고 어렵기도 한 사이에서 존대어를 쓴다고 해서 그걸 닭살이 돋는다고 무조건 호들갑부터 떨고 볼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뒤이어 떠올랐다.

  나는 아내에게 "그 드라마 다 보시고 주무실 건가요?" 하고 물었다. 어깨를 살살 흔들며 물었다. [9/5/2001] 

 

* 옮겨오기용 글창고를 들여다보다가, 눈에 띄는 걸로 아무 거나 가져와 봤다.

  하기야, 오늘은 가볍게 살고 싶은 날이기도 하다. 사랑하는 이를

  간지럼 태우고 싶을 만큼...  [Dec.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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