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穗談]호박꽃 예찬

카테고리 없음

by 지구촌사람 2012. 9. 9. 05:11

본문

728x90
반응형
SMALL

 

 

 

 

            고정관념 뒤집어보기 : 호박꽃 예찬

                                                                                최 종 희

 

  호박꽃도 꽃이냐? 입모양부터 빙충맞게 돌아간 사내들 입에서 흔히 나오는 빈정거림입니다. 언제 누가 들어도 그다지 듣기 좋은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나라에서는 오랫동안 아무 생각 없이 그 말이 잘도 통용되어 왔습니다. 분명치도 않은 연유들이 후련하게 까발려지지도 않은 채, 그리고 아무도 책임지려 하지 않은 채......

  그냥 어림짐작으로 늙은 호박의 주름과 퍼짐새를 성급하게 호박꽃에 매달아대고 사내들은 그런 낡은 구호를 재미삼아 마냥 흔들어 대왔습니다. (구호는 세월이 지나고 나면 항상 허망한 것들로 판명되어 발에 밟히거나 구겨져 쓰레기통으로 들어가곤 했지요

 

  ‘너를 안고 뛴다’를 네 글자로 줄이면? 정답 : 호박서리

  요건 신판입니다. 아마도 덩달아 베끼는 데에 유독 소질들을 보이는 젊은 사람들이, 그것도 사내 녀석들이, 지들끼리 더 많이 히죽거리며 만들어낸 말일 게 분명합니다. 바로 그 말의 대상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특정 여인 앞에서는 찍소리도 못했거나 지금도 하지 못하고 있을 녀석들이 말입니다. 하하하.

 

                                               *

 

  지난 8월의 일입니다. 일요일 오전이면 아내를 교회 중책에 뺏기는 나는 유아 예배실에서 우리 딸내미 진이를 안고 교회 밖으로 나왔습니다. 미안하게도, 그 두어 평 되는 유아실에서 차고 넘치는 것은 생명의 말씀이라기보다는, 지나치게 냉각되어 소름이 돋는 찬 공기와, 두 개의 스피커에서 난청을 유발할 정도로 내쏟는 왕왕거림이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낯설기만 한 교회를 벗어나 밖으로 나온 진이는 살 판(?) 난 듯했습니다. 종종걸음으로 주변의 화단과 언덕 앞을 신나게 쏘다녔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러다가 잘못하면 다칠 것 같아서 나는 얼른 진이의 손을 잡았습니다. 길가 한쪽으로 길게 깔린 하수구 덮개 벽돌에 걸려 넘어질 수도 있었으니까요. 그 벽돌들은 하수구 바닥이 보일 정도로 구멍을 큼직큼직하게 뚫어놓은 것들이었습니다.

 

 

  내가 진이 손을 잡고, "아빠 손자압고오..." 노래를 선창하며 걷기 시작하자, 나의 ‘따개비’ 진이는 옆에서 혼자서 뭐라고 웅얼거리며 신나 합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아직 나는 정확히는 모릅니다.

  하기야, 우리 나이로 세 살이기는 하지만 진이는 "아빠"의 발음을 정확히 하지 못하고 그저 ‘압빠빠’ 소리를 해댈 뿐이었으니까, 노래를 따라 한다고는 해도 옹알이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건 분명합니다.

 

  그렇게 우리 둘이서 교회 아래쪽으로 조금 내려갔습니다. 길가에서 산 쪽으로 이어지는 나지막한 언덕에는 짙푸른 카펫이 아무렇게 깔린 채 심한 요철을 보이며 너울거리고 있었습니다. 널따란 이파리를 펑퍼짐하게 매달고 있는 호박들이 제멋대로 가지를 뻗으며 서로 어깨를 겯고 있었습니다.

  서울 한 구석에서 손바닥만 한 빈터만 보아도 그냥 넘기려 들지 않는 나이 지긋하신 분들이 아직도 많이 계신 신정3동의 시골답게, 대여섯 평 남짓한 언덕에다가 어느 분인가가 호박을 심어놓으신 것이었지요.

 

  그때였습니다.

  "꼬옷, 꼬옷, 꽃"

  우리 진이의 입과 손이 바빠했습니다. 입으로는 연거푸 어설픈 <꽃> 소리를 밀어냈고, 손가락에 힘까지 잔뜩 준 두 손은 연달아 위아래로 크게 흔들렸습니다. 진이의 온몸은 여기저기 솟아있는 호박꽃들 앞에서 부산해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 중 하나를 향해 다가진이와 함께 그 앞에 쭈그리고 앉았습니다.

  "그래. 이거 꽃이구나, 응?"

  말은 못해도 말귀는 제법 알아듣는 것 같은 진이가 연신 고개를 크게 끄덕입니다.

 

  "이건 호박꽃이라고 하는 건데......"

  그러자, 진이의 입에서 단호하게 ‘꼬옷’소리가 나오며 내 말을 자르고 듭니다. 위아래로 흔들리며 전폭적인 동의를 보내오던 진이의 끄덕임도 신통치가 않았습니다.

  그때서야 생각났습니다. 진이가 집안에서나 바깥나들이 길에 이런저런 꽃들을 대할 때마다 우리가 그 꽃 이름을 열심히 가르쳐 줘도, 그때마다 우리 진이는 그저 ‘꽃’이라는 말로만 단순화시켜서 응답해오던 일말입니다.

 

  손에 잡히는 작은 국화꽃이나 목을 빼고 바라봐야 하는 그 크고 높은 해바라기 꽃도 진이에게는 그저 꽃일 뿐이었습니다. 꽃의 크고 작음, 색깔, 모양 등이 죄다 무시되고 일체의 차별화가 거부된 채 꽃의 아름다움만 취해지는 꽃의 평준화가 진이의 꽃나라였습니다.

  "그래. 맞다. 이게 꽃이야. 차암 이쁘지?"

 

  말해놓고 보니 호박꽃도 정말 예쁩니다. 당돌하게도 담대한 그 색깔부터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하도 짙고 선명해서 샛노란 색깔의 원형질들을 모아놓은 듯합니다.

  그렇지만 그 호박꽃에서는 자극적인 원색들이 흔히 던져오기 마련인, 그래서 이따금 천박하게도 보이는 그 도발성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감춰두고 보여주지 않는 게 아니라, 햇빛을 받고 있는 꽃잎들의 투명성이 그러한 어두운 정서들을 한 달음에 몰아냅니다. 관념이 아닌 실체로 호박꽃을 직시할 때면 말입니다.

 

  호박꽃에 담겨 있는 진주황색은 우리들 인간의 손으로는 어떻게 해도 만들어낼 것 같지 않습니다. 인공(人工)은 감히 범접할 엄두도 낼 수 없어서, 오직 자연만이 잉태할 수 있는 순수의 또 다른 응결체입니다. 잡초에 불과한 닭의장풀 꽃에 매달린 그 현기증 나는 맑은 파랑처럼 말입니다. 하기야, 자연 속에 깃들어 있지만 들여다보는 이들에게만 드물게 아는 체를 하는 순수의 색깔들이 모두 그러하긴 합니다. 그리고 그건 자연과 한 몸이 되어 우리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몇몇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그렇습니다.

  그래서인가요. 모든 꽃들을 피워내는 식물들은, 특히 그 색깔을 두고 보면, 신과 동격이거나 동업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신이 하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까이에서 지천으로 함께 하고 있음을 문득문득 떠오르게 합니다.

 

  호박꽃을 더 자세히 들여다봅니다. 별 모양으로 끝에서만 갈라진 꽃잎들은 서로가 결코 떨어질 수 없다는 듯이 꽃잎 다섯 개가 한 통속으로 단단히 어깨동무를 하고 있습니다. 통꽃이지만 참 다부지게 결속한 5형제입니다.

  뜬금없이 나의 5형제 모습이 스쳐갑니다. 원주민 차모로 족에 희생되어 아직도 이국땅에 묻혀 있는 동생. 이국땅이나 진 배 없는 이 나라로 돌아와 두 해전에 비명횡사로 생을 마감한 형님의 모습이 5각형 호박꽃에 어른거리는 순간, 아직도 그런 아린 말귀들을 못 알아들을 우리 진이가 다행스럽기만 합니다. 나는 우리 딸내미를 힘차게 껴안았습니다.

 

                                              *

  호박꽃은 참으로 맑고 곱습니다. 그 꽃을 실물로 대하고, 정면으로 껴안으면요. 그 순간 우리들 머릿속에 인각되어 있던 호박꽃이라는 낱말 자체도 잊어버린다면 더욱 좋겠지요. 우리 딸내미 진이의 웃음처럼 해맑습니다. 그 밝은 색깔을 손바닥에 옮겨 담으면, 평생을 하늘과 논밭의 가장자리를 향해 허위허위 내젓고만 살아오시느라 손금조차 제대로 구분이 되시지 않던 우리 어머님의 손바닥을 수의로 싸기 전에 한 번 더 제대로 읽어낼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호박꽃은 내숭을 떨지 않습니다. 암수 구분에조차 호들갑이 없습니다. 암꽃은 동굴처럼 숭숭 뚫린 모습을 부끄러워하지 않은 채 씨방을 훤히 드러내고 있고, 수꽃은 그저 제 몫을 하려는 듯이 꼿꼿함을 드러낸 채 꽃가루를 아주 무심하게 매달고 있습니다. 자세히 보면 암꽃은 조금 옆으로 펑퍼짐하고, 수꽃은 홀쭉한 모양새가 암꽃보다 조금 깁니다. 그처럼 처음부터 암수표지를 내걸고 있는데도 무심한 우리들만 그 안을 들여다보고서야 알아챕니다.

 

 

  대개의 꽃들이 생식기를 드러내고도 아무렇지도 않아 하듯이, 호박꽃 역시 그처럼 엄청 천진합니다. 목욕탕에서 만난 유치원 동급생 여자아이와 아무렇지도 않게 신나게 놀더라는 사내조카의 모습을 뒤늦게 떠올리게 합니다. 그리고, 그럴 때면 사람들 앞에서 어쩌다 아래옷 걷어 올리는 속도가 조금 늦어질 때, 벌레 들어간다는 둥의 거짓말로 진이 앞에서 호들갑을 떨어대는 우리의 얄팍함이 호박꽃의 의연함에 견주어져 조금은 부끄러워집니다. 그리고 어른들이라는 우리에게서 그 원형질마저 고갈된 천진이라는 낱말을 새삼스럽게 떠올리게도 됩니다.

  천진함을 잃어버렸거나 박제해버린 우리 어른들. 그들은 이따금 불필요한 내숭으로 시도 때도 없이 자신을 여미느라고 호들갑을 떨어댑니다. 어찌 보면 불쌍한 하류인종이기도 합니다. (다른 예는 들 것도 없이, 수영복 차림의 다른 여자들은 내놓고 완상하면서도, 남 앞에 실수로 제 여인의 팬티 끝자락만 내보여도 노발대발 해대는 남정네들의 그 불쌍한 내숭이 그 좋은 표본이지요.)

 

  그런저런 것들을 돌아보게 하는 호박꽃은 우리에게서 떠날 때 더 많은 것을 조용히 남기고 갑니다. 제 꽃의 크기보다도 몇 백 배, 몇 천 배는 되고도 남을 결실이 그것입니다. 여름 요리에 요긴하게 쓰이는 애호박뿐만 아니라 아름이 넘는 늙은 호박에 이르기까지 말입니다.

  호박꽃이 만들어낸 열매 호박의 미덕은 아주 많습니다. 호박죽 한 그릇으로 배를 때워도 힘쓰기에 지장이 없을 정도로 몇 가지 곡류 다음으로 많은 탄수화물을 지녔다고 하더군요. 비타민 A의 함량은 다른 어느 것과 견줘도 상위에 든다지요.

 

  뿐인가요. 호박은 그것을 즐겨먹던 우리네 어머니들에게 알게 모르게 자연치유법까지 전수했습니다. 부기를 빼는데 호박처럼 좋은 게 없다는 데에 한의학자들은 요즘도 동의하고 있고, 어린이 천식에 호박식혜가 아주 좋다는 것도 이미 검증이 이뤄진 민간의학의 일부입니다.

  그 광범위한 효용과 활용법에 대해서 뒤늦게나마 연구들이 이뤄지고 있는 것은 슬그머니 호박 앞에 부끄러워하는 우리들 후손들의 부산한 자책골 만회 대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이러한 호박꽃 앞에서 요즘의 우리네 여인들은 어떠할까, 또는 어떠했을까를 생각해볼 필요도 조금은 있지 싶습니다. 일례로, 혹시 호박꽃도 꽃이냐는 남정네들의 습관성 비아냥거림에 얼른 치마를 걷어 올려 얼굴부터 가리려 들지는 않았는지 자문해보고 싶습니다. (그러면, 그 순간 속옷이 보일 수도 있는데, 뒤늦게 그 생각이 들면 그때서야 다시 얼른 치마를 내리지는 않았는지요.)

  우습기만 해서 어찌 들으면 기분 좋지 않은 사례일 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곰곰 생각해 보면 그것이 호박꽃의 희생을 감내해온 데만 익숙한 우리 여인네들의 무력한 반응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된 데는 더 이상의 노력 없이 인습의 틀 안에서 무저항으로 감내하는 게 미덕이라는 수동적인 습성을 북돋워온 이 나라 제도, 그 중에서도 특히 교육이라는 문화적 틀이 알게 모르게 판박이로 찍어낸 정서의 주류(主流) 탓도 적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비근한 예로, 달빛 아래 활짝 피어있는 박꽃의 모습을 은근히 상찬(賞讚)하면서 거기에다 다소곳하고 이쁜, 그리고 어딘가 비애(悲哀)가 어려있을 듯한 여인을 견주어 미화하는 그런 남정네들의 글발을 주로 보고 배워서, 지금도 그런 정서에만 기울고 있는 이 나라 여성들이 여간만 하게 많은 편이 아닌가요?

  그처럼 괴상하게 조장된 편협한 주류(主流)가 같은 박과에 속하는 호박을 드러내놓고 하대하는 남정네들의 기를 북돋우고, 여인네들의 정서를 푸르스름한 달빛 아래로 끌어내어 약화시키거나 센티멘털리즘으로 화장(化粧)하도록 이끄는 사이에, 여인들을 무조건 호박꽃에서 외면하도록 만든 건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호박꽃 내지는 호박꽃을 빌어 풍유(諷諭)되는 여인에 대한 무조건적인 폄하는 좁디좁은 언어의 경계선 속에 호박을 감금하고 구박해온 우리들의 편협한 시선과 다르지 않습니다. 실체의 규명은 뒷전으로 미루고 우선 비틀어보고 만지작거리는 일에 덩달아 뛰어들곤 하던 우리네 언행의 부박(浮薄)이 그대로 엿보이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속 좁은 짓이라고나 할까요.

  다른 예를 들 것도 없이, 바다 건너의 다른 나라에서 같은 호박(pumpkin)을 두고, 그것도 여자와 연관 지어 얼마나 값있게 치는지를 힐끔거리는 것으로도 그걸 이내 알 수 있습니다.

 

  That girl is some pumpkin!

  지나가는 여인을 향해 사내 중의 하나가 그런 말을 했다고 칩시다. 우리식대로 한번 짐작해 볼까요? "와, 저 여자 완존히 호박일세"일까요?

  실제 뜻은요 그렇지 않습니다. 정반대입니다. "저 여자 정말 대단한 사람이야"의 뜻입니다. 영어에서 여인을 두고 호박이라고 칭할 때는 아주 예쁘거나 대단한 어떤 상태를 뜻하는 말이거든요. 그러고 보면, 호박도 (아니 여인들도) 심어질 장소를 미리 가려서 태어나야 제대로 된 대우를 받게 되는 것일까요.

 

 

                                                  *

  호박꽃 하나를 두고 내가 너무 장황하게 편애하거나 미화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호박꽃은 우리 주변에 가까이 하고 있음에도 그 이름조차 모르고 있는 요긴한 풀꽃이나 미세 생물에서부터 크게는 등허리가 부드러운 산줄기까지, 말이 없이 우리를 지켜주는 것들의 대표선수일지도 모릅니다.

  외관만 훑고 가거나 겉으로만 판단하는 데 날마다 더 익숙해져 가는 우리의 눈길에서 쉽사리 제외되거나 소거되는 것들의 지표(index) 식물로 어느 날 내게 불쑥 다가온 것일 겁니다.

 

  그리고 더 크게는 우리 주변에서 호박꽃들처럼 스쳐 보내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정작으로 호박꽃 같은 사람일랑 가려내어 기억하고 함께 하거나 그들을 본뜨기 위해 애쓰라는 말없는 교시일는지도 모릅니다.

  지각없는 인간들로부터 천대와 멸시를 받거나 무시되면서도 사라질 때는 제 몸피의 수백 수천 배 크기로 그 이로운 결실을 남기고 가는 호박꽃처럼, 우리들 세상에는 드러내지 않고 말없이 사라지면서도 우리들 모두에게 알찬 거름이 되어주는 속 찬 진짜 어른들이 적지 않은 것을 기억하라는 가르침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나 혼잣말로 감당하기에는 벅차기만 한 감동을 가져다주는 분들이 요즘도 하나 둘이 아닌 탓입니다. 멀리에 계시지 않고, 바로 우리들 주변에 그런 분들이 적지 않거든요.

  그런데...... 참 고민이네요. 그런 분들한테 호박님이라거나 호박 같은 분이라고 부를 수도 없잖아요. 그거 참.   [Nov.2002]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