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준어와 관련된 몇 가지 생각
흔히들 쉽게 하는 말로, 다른 나라에는 우리나라처럼 까다롭게 표준어를 정하고 고치고 하는 제도나 규정이 없다는 말을 한다. 천만의 말씀이다. 그건 사실 확인을 건너 뛴 무책임한 태만을 드러내는 말이다. 맨 아래에 붙인 표에서 보듯, 표준어 관리를 깔끔하고도 엄격하게 하는 나라들, 아주 많다.
표준어 규정이 없는 나라일수록, 그 나라의 국어 체계에 문제가 많은 나라다.
빌어온 말들 혹은 그 교배 잡종이라서 손대기 어렵거나(미국), 자랑스럽지 못한 잡종 수입어들의 혼거 형태여서 그 뿌리 밝힘이 오히려 득이 되지 않거나(영국*), 언어 통합을 강제할 경우 그것이 간접적인 계층, 인종, 국적 차별로 쓸데없는 큰 문제가 일어날까봐 눈치 보는 나라 (미국), 혹은 언어 통합의 필요성이 적거나 힘들어서 포기하는 후진국들 (아프리카의 소수 인종 국가 혹은 극빈국)... 등등처럼, 언어 관리 곤란국 내지는 혹은 잡종 언어 국가들이다.
[*영국에 표준어가 없는 것은 아니다. 표준영어(Standard English)라는 게 있다. 그런데, 그것이 예전에 제정된 것이어서 ('챈서리 법정에서 사용되는 언어') 현대 영어 표준으로는 좀 문제가 있다. 영국에서는 미국과 마찬가지로 교과서 사용 영어에 대한 점검으로 표준어 지침을 적용하는 실질적 방식을 택하고 있다.]
그런 나라들을 예로 들면서, 우리나라의 표준어 제도를 공박하는 사람들, 적지 않다. 그건 심하게 말해서 사고력 부족이거나 게으르거나 무식하거나, 무책임한 비틀기로 시비나 걸어보려는 그런 사람들이다.
그렇지 않은데도 그걸 고집한다면, 그건 무뇌아가 하는 짓이다.
언어통합은 문화통합이다. 문화 유통에서 낭비와 비효율을 사전에 제거하고 얼른 쉽게 단일통로로 나아가게 하는, 고급문화 지향의 언어문화 통일국가 직행 좌석버스 승차권이다.
중국 같은 나라에서, 표준어로 언어가 통일되지 않았다면, 중국은 어쩌면 아직도 70년대 수준의 위상에 머물고 있을지도 모른다.
언어 통일 없이는 경제 성장, 과학발전, 문화 확장... 모든 것들이 삐걱거린다. 언어 충돌, 의미 상충의 비효율 때문에... 그 낭비는 우리의 일반적 상상을 훨씬 뛰어 넘는다. 심할 경우, 일상생활에서조차도 통역을 대동해야 할 터이므로.
만약 우리나라에 표준어 제도가 없다면, 육지 사람들은 제주도에 가서 밥 한 끼니도 제대로 사 먹지 못하지 싶다. 표준어가 없으니 제주도 사람들은 표준어를 배울 수도 없었을 터이고, 육지 사람들이 제주도 말을 알아들을 재간은 어떻게 해도 없을 터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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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도량형에서 참으로 후진국이다. 미터법 대신 파운드법을 쓴다. 즉, 길이는 인치와 피트, 야드. 무게에는 온스와 파운드, 부피에는 갤론을 주로 쓴다.
그런데, 이게 얼마나 골 때리는 일인지 모른다. 온스만 해도 일반적인 무게로는 1온스가 1/16파운드, 즉 28.35g 정도인데 이 온스는 귀금속용의 트로이온스(oz.t.)와 약품계량용의 약용온스(oz.ap.)도 있다. 이 온스가 부피를 표현할 때도 있다. fl.oz로 표기한다. 셋 다 1/12파운드, 곧 31.103g이다.
즉, 값이 좀 나가거나 정밀도를 요하는 것에서는 1/16파운드가 아닌 1/12 파운드를 쓰고, 미터법으로 환산할 때는 소수점 세 자리까지를 유효숫자로 한다.
1/16파운드로서의 1온스를 28.35g '정도'라고 한 것은 1파운드가 453.59237g이어서다. 미터법으로의 환산이 필요할 때, 일상생활에서는 소수점 이하 두 자리까지만 유효숫자로 해도 통용할 만해서다.
하지만, 이 파운드를 킬로톤 등으로 환산할 때는 달라진다. 4.5359e-7 킬로톤으로 표기하는데, 그램 기준으로는 453.59까지를 유효숫자로 하겠다는 뜻이다.
1갤론은 3.785412리터(ℓ )인데, 유효숫자는 필요(?)에 따라 정해진다. 우스갯소리로 하자면 주유소에 가서 기름을 넣는 사람은 3.785리터를 요구할 것이고 주유소 주인은 3.78리터를 고집할지도 모른다. (우스갯소리라고 했지만, 이것이 대량으로 유통되는, 갤론을 기본으로 한 배럴제로 계약한 경우에는 그 유효숫자를 얼마로 정했느냐에 따라서 엄청난 양이 차이난다.)
여기서 미국 도량형 내역을 공부하자는 얘기는 아니다. 쓰임마다 이처럼 복잡하게 수치가 통일되지 않다 보니 생기는 문제점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어서, 하는 얘기다.
예컨대, 가장 흔히 쓰이는 인치만 해도, 우리는 1인치를 대개 2.54cm라고 하지만 이것은 2.539cm를 반올림한 수치다. 그래서 미국에서 금속 공구나 물건의 가공 단위로 일상화되어 있는 3/8인치, 1/2인치, 3/4인치 등의 경우에 유효숫자를 얼마로 하느냐에 따라서 큰 차이가 난다.
즉, 3/8인치, 1/2인치, 3/4인치로 흔히 표기하는 나사 간격, 금속 띠 두께, 드릴 비트의 제품에서 품질 문제가 생기고, 그런 일상적인 제품 하나를 두고도 0.01mm의 차이 때문에 사용불가 판정도 그래서 나온다.
한때, 우리나라 수출업체들이 미국 수입업체들을 상대할 때 아주 쓰디쓴 수업료를 내고 배운 것들 중의 하나가 바로 미터법으로 환산했을 때의 유효숫자 문제였다. 품질불량 판정을 받는 원인 중의 하나가 바로 그것 때문이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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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뿐만 아니다. 초창기 인공위성/우주개발 경쟁에서 미국이 소련에 뒤졌을 때 대외적으로는 미국의 수학교육 체계가 잘못되어서 뒤쳐졌다고 자기반성들을 했지만, 그 실패 원인 중의 하나가 바로 이 도량형 문제도 있었다.
수십만 개의 정밀 부품들이 들어가야 만들어지는 작품(?)에서 이 인치 표기법을 쓰다 보니 서로 부품들이 안 맞았던 것이다.
그래서, 위성이나 로켓 발사를 맡고 있는 미항공우주국 NASA에서 시행한 것이 NASA에 공급되는 모든 부품들을 미터법으로 통일한다는 것이었다. 부품뿐 아니라 모든 통제시설이나 매뉴얼 등도 미터법으로 모두 바꿨다. 정확도를 높이고 단위의 통일성을 위해서.
그 바람이 과학계에도 불었고, 미국에서 유일하게 미터법이 지켜지고 있는 곳이 바로 과학 실험 관련 데이터 관리다.
그런 것이다. 과학계의 기본 언어라고 할 수 있는 도량형이 통일되지 않으면 큰 사달이 난다. 아예 일이 되질 않는다. 그래서 과학계의 표준 언어를 심사/제정하여 국가 간에도 통일된 도량형을 사용하도록 하기 위해서 마련한 국제기구가 바로 국제도량형위원회다.
예컨대, 1960년에 길이의 기준으로 크립톤(krypton)의 주황색 스펙트럼선(線)의 파장을 선택해 이것의 165만 763.73배를 1m로 하기로 결정한 것이라든지, 1967년에 표준 초를 바꾼 것도 거기서 한 일이다. 천문시에 의한 초를 폐지하고 원자시에 (세슘) 의한 초를 채택해 1972년부터 국제 원자시(TAI)를 정식으로 사용하도록 한 것 등이 그런 일이다.
언어에서의 표준어 제정과 심사, 그리고 꾸준한 사후관리. 거기엔 다 목적이 있다. 과학계의 도량형 통일 제정/심사와 꾸준한 사후관리가 어떤 목적으로 이뤄지고 있는지를 잘 생각해 보면 그 답이 쉽게 나오리라.
이런 관점에서, 많은 사람들은 중국이 언젠가 국력의 총화에서 미국을 쉽게 앞지를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 이유로 제시되는 것은 중국의 3통정책(三通政策)의 효율성이다. 언어 통일(표준어인 백화 채택), 시간 통일(중국 전역이 동일 시각), 그리고 이념의 통일.
그에 비해 미국의 실정을 돌아보면 중국에 비해 한참 뒤져 있다. 보이지 않는 낭비가 엄청 심하다. 미국의 문맹률은 약 4%. 천만 명이 넘는 인구가 까막눈이다. 시간대 하나만도 나라 하나가 5군데로 나뉘어 있다. 중국이 미국을 추월하는 데는 그다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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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계약을 할 때 흔히 쓰는 영문계약서를 보면, 계약 당사자들 이름과 주소가 나오고 그 바로 아래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게 바로, ‘정의’(Definition)이라는 조항이다. 즉, 그 계약서에서 사용하는 영어 낱말들의 뜻을 명확히 특정하는 내용이다. 전 세계 공용으로 쓰이다시피 하는 영어조차도 경우에 따라서는 그 의미 해석이 상황과 당사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그런 조항을 가장 먼저 넣는 것이다.
그 계약서에서 사용되고 있는 주요 낱말들에 대한 표준어 정의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도 계약서 말미에 가면 또 한 번 못 박는 규정이 나온다. 즉 ‘해석(Interpretation)'이라는 조항인데, 대개 거기에는 분쟁이 생길 경우 관할법원의 해석에 따르고, 거기서도 합의되지 않을 경우는 ’국제상사중재조약‘의 내용에 따른다고 되어 있다.
즉, 사용 언어의 의미까지도 특정해놓은 계약서에서조차도 그 내용의 진정한 의미를 두고 법원의 표준 해석까지 요구하게 되는 일. 그런 일은 생각 외로 많다. 법적인 해석까지는 아니더라도.
예를 들어보자. 좀 황당한 경우이긴 하지만, 서울 거주 사업가와 제주도 연구자 사이에 “앞으로 1년 내에 미리내에서 새로운 항성을 그대의 천체망원경으로 발견하여 학계에서 인정받게 되면 계속 연구비 조로 얼마를 지급하겠다.”라는 약정을 했다고 치자.
그리고, 연구자가 약속한 신성을 발견하고 약정대로의 연구비를 요구했을 때, 만약 서울 거주 사업가가 나중에 그와 사이가 틀어졌거나 했을 경우에는 계약 이행 의무가 없다. 왜냐. ‘미리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미리내’는 제주도 방언으로 은하수를 뜻하는데, 설령 서울 사업가가 그 의미를 어떤 식으로든 조금은 알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런 정황이 객관적으로 증명되지 않는 한은(그런 의식/무의식 인지 상황은 객관적 증명이 거의 불가능하다) 계약서상에 표기된 ‘미리내’ 자체가 원천적으로 약정 내용이 될 수 없는 부존재 대상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사업가 측에서 사용할 수 있는 또 다른 방어수단도 있다. ‘미리내’라는 것을 연구자가 뜻하는 은하수가 아니라 다른 것으로 알고 있었다고 항변해도 된다. 이 모든 것은 바로 ‘미리내’라는 비표준어의 사용에서 비롯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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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얘기를 하나 더하자. 미국 대통령 오바마의 연설을 들으면 발음이 뭔가 조금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 것이다. 입안의 소리통에서 한 번 더 울려 나오는 듯해서 명료성이 조금 떨어진다는 그런 느낌.
이런 사례가 유난한 것이 작가 겸 배우이자 제작자이기도 한 실베스터 스탤런이다. 그의 발음은 끝까지 신경을 써서 들어야 할 정도로 구강 내 울림이 심하다.
이것은 날씨가 추운 미국 서북부 지방의 방언 탓이다. 발음 습관 중에 그처럼 구강내 공명의 일부를 끌고 나오는 게 있다. 오바마가 근거지로 삼고 지내왔던 시카고 토박이들의 경우, 이런 현상이 많다.
이런 발음 성향은 그 지방의 사투리와도 연관된다. 우리나라에서도 전라도 방언을 많이 사용할수록 어미 부분에서의 단모음 발음에 복모음 발음 일부가 섞이듯이. 표준어인데도 발음만 듣고 출신을 짐작하기에 어렵지 않은 일들은 그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의 방송계 종사자들은 표준어가 없는데도 발음들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동부지역에 위치한 주요 방송사의 직원들도, 계층간의 위화감이 들게 하는 동부 발음을 버리고 중서부지역 (미시건, 오하이오, 인디애나, 일리노이즈, 미주리, 아이오아, 그리고 때로는 네브라스카도 포함) 발음을 꾸준히 연습하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남부 발음은 투박하고 억센데다 촌스런 어투가 깔리게 마련이고, 북부 발음은 다소 투박하면서도 위에서 말한 울림 현상이 옅게 따라 나와서다.
서부 지역은 본래 미국에서도 잡탕 동네로 여겨져 언어에서도 한 수 밀렸는데 요즘은 돈이 그곳으로 몰리다 보니, 서부지역 언어도 덩달아 힘을 얻고 있다.
그럼에도 방송인들이 중서부 지역의 발음을 연습하고 매달리는 것. 그것은 그들 나름대로 그 지역의 발음이 명료하고 품위가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동부지역의 젠 체하는 그 유럽식 잔재 발음은 시청자들로부터 외면 받을 수도 있고, 서부지역의 말들은 아직도 품위 차원에서 좀 거리를 두는 게 좋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그런 것이다. 인종과 국적, 출신, 계층의 다양성을 인정하기 위해서 표준어를 제정하여 강제하지 않는 미국에서도 알게 모르게 비공식 표준어가 유통되고 있는 것처럼, 품위 있고 명료해서, 누구나 따라 배우고 싶은 말은 있는 법이다.
그런 말을 표준어로 정하고 따르는 일, 그건 참으로 좋은 일이다. 조금 귀찮고 자기 자신이 편치 않다고 해서 표준어 관리 제도까지도, 못하거나 안 하는 나라를 배우려 들어서는 안 된다. 절대로. [July 2012]
<각국의 표준어와 표준어 제정 기관>
언어 표준어 제정/규제 기관
Arabic Standard Arabic the Qur'an, several Arabic Academies
Afrikaans Standard Afrikaans Die Taalkommissie
Dutch Standard Dutch Nederlandse Taalunie
Catalan Standard Catalan, Standard Valencian Institut d'Estudis Catalans, Acadèmia
Valenciana de la Llengua
Chinese Standard Chinese National Language Regulating Committee(PRC), National
Languages Committee (ROC/Taiwan), Promote Mandarin Council
(Singapore)
Farsi(Persian) Farsi (Persian) Academy of Persian Language and Literature
French Standard French Académie française, Office québécois de la langue
française, Council for the Development of French in Louisiana
German Standard German, Swiss Standard German, Austrian German Rat für
deutsche Rechtschreibung
Greek Standard Modern Greek official introduction under Constantine Karamanlis
in 1976
Hindustani Standard Hindi, Urdu Central Hindi Directorate, National Language
Authority of Pakistan
Macedonian Standard Macedonian Institute for Macedonian language "Krste Misirkov"
Malay Standard Malay (Bahasa Baku, includes Bahasa Malaysia/Melayu and Bahasa Indonesia) Dewan Bahasa dan Pustaka, Majlis Bahasa Brunei–Indonesia–
Malaysia
Norwegian Nynorsk, Bokmål Språkrådet
Portuguese Standard Portuguese Academia das Ciências de Lisboa, Classe de Letras,
Academia Brasileira de Letras
Serbian Standard Serbian Matica srpska, Serbian Academy of Sciences and Arts (SANU)
Swedish Standard Swedish Swedish Language Council, Svenska språkbyrån
Spanish Standard Spanish Real Academia Española, Association of Spanish
Academi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