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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행문]인도 카레와 인도의 세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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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촌사람 2012. 11. 12.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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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도 카레와 인도의 세 여인  

                                                                                 최   종   희


  최근 인도에 다녀왔습니다. 삼십여 명이 넘는 인도 투자환경 조사단에 끼어 보름 동안 돌고 왔습니다. 전직 차관이 인솔단장이었습니다. 방문 결과를 숫자로 나열해서 요약한 보고서는 이미 작성한 지 오래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에 대한 느낌을, 나의 개인적인 정서를 정리해 달라는 뜻하지 않은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런 부탁을 해온, 꽤 오래 전에 게재한 뱅글라데쉬의 팔 없는 소년 얘기를 기억하고 있음직한, 편집자의 깐깐한 기억력을 잠깐 원망했습니다. 좀처럼 인도에 대한 생각이 잘 정리되지 않은 터라 더욱 그랬습니다.

  

  그동안 여러 나라를 오가면서 각각의 나라들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느낌을 재빨리 정리해온 편이지만, 인도처럼 손쉽지 않은 나라도 없습니다. 나라가 크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내용물이 하도 복잡해서 아직까지도 뇌리에서 서성대고 있고, 느낌들이 정리되지 않은 채 아주 진한 선으로 서로 엉켜있기 때문입니다. 원고 청탁을 받고 날짜를 미루기만 하다가 마감에 쫓겨서 다시 생각을 정리해보고 있는 지금도 그건 여전합니다. 

  인도에 관해서 할 얘기가 없는 건 아닙니다. 그 나라에는 아직도 2천 마리쯤의 호랑이가 남아 있고, 물소나 코뿔소와 비슷해 보이는 희귀한 것들이 다섯 종류나 있을 정도로 야생동물이 많은 나라여서, 코브라의 천적인 몽구스까지도 쉽게 볼 수 있는 곳입니다. 한 해에만도 우리나라 인구의 삼분지 일이 넘는 1800만 명이나 늘어나서 이제는 10억 가까운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통일된 경전도 없고 종교 조직도 없어서, 그런 것들에 익숙한 우리로서는 희한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힌두교를 인구의 75%가 믿고 있습니다.

 

  그런 힌두교에는 신이 아주 많습니다. 브라마, 시바와 더불어 삼대신의 하나인 비쉬누만 해도 열 가지의 화신으로 숭앙됩니다. 그 중에서도 여덟 번째의 화신인 크리쉬나가 가장 인기가 있다고 하더군요. A.L.바샴이 묘사한 대로 '신격화된 애인으로서 인도 여인들의 부드러운 물적 충동을 만족시켜‘ 주기도 합니다.

  불교의 발원지이면서도 막상 불교신자는 인구의 8%도 안 되고, 되레 유입종교인 이슬람교도가 불교신자의 15배나 됩니다. 그 바람에 술을 팔지 않는 무슬림 지역으로 가서 운 좋게 맥주 한 병이라도 먹게 되면 계산서에는 음식 이름이 찍혀 나옵니다. '맛쌀라 도사이' 두 개라거나 차 한 주전자 등으로요.

 

  그러나, 인도는 그런 것들만 늘어놓을 수 있는 곳은 아닌 듯합니다. 지금 가만히 돌아보면, 인도는 자연지리적 환경이나 인문지리적 퇴적물들보다는 그 땅에 든든한 뿌리를 내리고 있는 어떤 느낌들의 정체에 접근해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도록 유혹하는 곳입니다. 그런 것들이 떠나온 사람을 붙들어둡니다. 그 나라를 두고 흔히 하는 말, 곧, 크기만 하고 더러운 나라, 빈부차가 지구상에서 가장 현격하고 당당하게 인용(認容)되는 곳, 원자탄의 첨단과 구정물로 변한 갠지스 강의 후진(後進)이 동거하는 나라...라고 하는 것들과 조금 비슷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꼭 같지는 않은 그런 느낌에서, 나는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방식을 바꾸어보기로 합니다. 엉켜있는 느낌들을 펼쳐보는 것으로 이야기의 실마리를 풀어내보고 싶어집니다. 그게 그 큰 나라에 걸맞게 복잡다단한 나의 정서를 정리하는 일이 될 듯도 싶고, 원고량의 제약을 받는 이번 작업에도 손쉽게 한계가 정해질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써내려 가면서 매듭을 다 풀지 못하면 거기서 중지할 요량입니다. 

                                                   *


  돌아온 지 이 주일이 넘은 지금도 제게서 떠나지 않는 음식 냄새가 있습니다. 인도 하면 떠오르는 것 중의 하나, 곧 우리가 흔히 카레(curry)라고 불러 온 바로 그것에서 나는 냄새입니다. 그러나, 지금 내가 떠올리는 그 냄새는 인도에 머물 때 고생으로만 기억되던, 역겨울 정도로 강렬하던 그것과는 사뭇 다릅니다. 

  이 나라 저 나라 떠돌이 생활이 몸에 밴 덕분에 어느 나라에 가도 음식을 앞에 두고 고생은 하지 않으리라고, 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부지게 마음먹고 다니는 사이에, 아닌 게 아니라 그동안 어떤 나라에서고 간에 음식 때문에 고생을 해본 적은 없었던 나도, 이번 인도에서는 정말 혼났습니다. 거북이 통구이에 뱀 스프까지도 눈감고 먹으면 먹어대던 내가, 인도 체류 일주일을 넘기고서는 아주 안달을 했습니다. 바로 그 카레 때문이었습니다.


  밥에도 빵에도 스프에도 생선에도 어김없이 카레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것도 향미가 아주 강한 인도식 고유 향신료를 사용한 카레. 널리 알려져서 유통되고 있는 종류만도 사십 종이 넘는다더군요. 나중에는 하도 향미가 강해서 도대체 뭐뭐가 들어가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주욱 이름을 대는데 대부분 C자로 시작되는 것이었습니다. 해서, 그 C자들이(Cs) 날 죽인다고 농담을 했더니, 그 말을 들은 현지 기자 한 사람이 그걸 자칫 잘못 발음하면 힌두어로 욕이 되기도 하고 좋은 말도 된다고 해서 찔끔하기도 했습니다.

  그 C자들이란 cardamom, cinnamon, cloves, cumin, coriander, chill, curry leaf들인데, 그때 대강 알아들은 것은 생강, 계피, 정향, 미나리과의 고수풀...... 정도입니다. 그 중에서도 처음의 네 가지와 까만 후추가루를 많이 넣어 만든 것을 힌두어로 '가람 마쌀라'라고 부르는데 아주 독합니다. 우리가 고수풀이라 부르는 coriander는 베트남에서 그 유명한 월남 국수를 맛볼 때 고명처럼 얹어주는 것과 비슷한데 향기는 그보다 훨씬 더 강합니다.

  

  인도에서 대한 카레들은 너무 향취가 강합니다. 하도 직설적이어서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나중에 사전을 찾아보니까 식황(turmeric)이라든가 회향(fennel), 샤프란(saffron)이라고 번역되어 있긴 했지만,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온갖 약재들까지도 향미료로 쓰이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세 끼니 내내 먹어야 하는 일. 그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내게 여간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중국식당에 기대를 걸어보기도 했지만, 그곳에서 나오는 음식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카레나 그와 비슷한 강한 향신료가 들어가 있지 않은 것이 드물었습니다. (아마, 그때쯤에는 모든 음식을 대하기만 하면 카레 냄새부터 풍기기 때문에, 카레가 실제로 음식에 사용되지 않고 종업원 복장에서 그 냄새가 나는데도 음식에서 나는 냄새로 오인하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더구나, 우리는 가는 곳마다 관공서나 대기업에서 환대하는 의미로 베푸는 식사 대접을 받아야 하는 처지였습니다. 장소를 옮길 때마다 우리를 접대하는 곳에서는 그 지방 고유 음식을 대접하려고 애를 쓰더군요. 그러니, 그 지방의 온갖 특산 카레가 다양함을 뽐내는 데 사용되었을 터이니, 오죽 했겠습니까. 


  우리 한국 음식점을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아,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우리나라 면적의 15배나 된다는 그 넓은 나라에서 꽤나 살아왔다는 우리 교민들조차도, 한국 음식점을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참다못해 중부 지역인 봄베이에 내려갔을 때, 살짝 물어봤는데 그런 대답을 들었습니다. (참, 그 무렵에 서구인들이 아무렇게나 부르기 시작한 봄베이를 예전 이름인 뭄바이로 부르자는 운동이 결실을 맺어서, 봄베이가 아니라 뭄바이로 불려지고 있었습니다.) 

  요즘은 세계 어느 나라를 가더라도 우리나라 사람들의 발길이 닿고 있는 곳에 한국 음식점이 없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 우리나라 사람에 필적하는 인종으로 다른 나라들에서 꼽혀온 게 유태인과 아르메니아 사람들인데, 그들의 본거지에도 한국 식당이 있습니다. 이십여 년 전 알프스 산맥의 골짜기에서 리프트를 타고 오르는 가장 높은 곳에 내리면 그곳에서 입가심용 된장국까지 팔던 것도 한국 음식점이었습니다.

  그런 자랑스런(?) 우리 음식점들인데, 인도에서는 그처럼 전멸하다시피 한 한국음식점의 퇴조가, 진출 좌절이, 혹시나 인도 음식을 완곡하게 지켜내고 있는 카레 때문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매운 맛으로 단순화될 수도 있는 김치로는 인도의 그 다양한 카레 앞에서 게임이 되지 않을 것 같아서였습니다. 그때쯤은 내게, 인도에서의 카레는 우리 어머니들이 떠받들던 조왕신 못지않은 역할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고 있었습니다.


  하기야 밀려나고 있는 건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전세계에서 한국 음식점 못지않게, 혹은 더 많이 번져 있는 동양 음식점 중의 하나가 일식집인데, 수도인 델리만 해도 관광 안내 책자에 '긴자'나 '아까사카'로 표기되어 있는 집들은 있었지만 생선회를 먹을 수 있는 곳은 없었습니다.

  인도 남쪽에서 제일 번성한 도시인 마드라스에 가서야 인도 여자와 결혼한 사십대 일본인 남자가 운영하는 일식집에 갔습니다. 그 집에서 나눠준 메뉴판에는 인도에서 유일한 일식집이라는 문구가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행들이 허겁지겁 들어가서 맛본 회맛은 미지근해서 별로였습니다. 거기서도 희미하게 카레 냄새가 났습니다.)

 

                                                             *

  이처럼 음식 문제로 ---정확하게는 카레의 그 강한 냄새 때문에--- 은근히 애를 먹기 시작하면서 나는 슬슬 인도라는 나라에 대해서 조금은 고개를 갸우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무엇이든 배부르게 잘 먹고 나야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고, 우선 기분이 좋아져야 바라보이는 것들도 이쁘게 보이는 법인데 말이지요. 

  게다가, 아그라를 다녀온 다음 날, 그러니까 월요일의 일입니다. 그날 아침 호텔 주변을 벗어나 좀 멀리 산책하다가 나는 그 천막촌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아그라는 인도를 선전할 때 빠지지 않고 나오는 그 유명한 타지마할이 있는 곳입니다. 타지마할 얘기는 이따 하겠습니다.) 우리가 머물던 호텔은 국빈급도 머무는 곳이었습니다. 호텔 직원들은 우리보다 한발 앞서 인도를 방문했던 김영삼 대통령도 거기서 머물렀다며 우리를 반겨했습니다. 하지만 유서 깊은 호텔답게 늙어서인지 몰라도 눅눅해서 별로였습니다. 자고 나면 몸이 찌뿌드드해서 아침 산책을 해서라도 풀어야했는데, 그 전날 쉬지 못하고 몇몇 사람만 아그라까지 다녀오는 욕심을 내는데 끼였던 터라 더 피곤해서 아침 일찍 일어나 평소보다 더 멀리 산책에 나섰던 참이었습니다.


  천막촌 사람들. 그들은 오가는 길거리나 담장 같은 곳에다 3-4인용 천막을 쳐 놓고 생활합니다. 더러운 인도 얘기만 나오면 그것부터 떠올리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어지럽습니다. 왕복 8차선 도로를 바라보는 보도 위에다 천막을 죽 쳐놓고 그 안에서 일가족이 생활하는 걸 상상해보십시오. 고추를 내놓고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어린아이들도 빠지지 않고 꼭 있어서 천막 주변에는 배설물들이 그대로 있을 때도 있습니다. 

  천막에서 멀찍이 떨어져, 나는 걸음을 멈춥니다. 가족들이 세수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예전에 쓰던 노란 알루미늄 세수 대야의 절반쯤 되는 크기에 물이 담겨 있고, 그 물로 온 가족이 차례차례 세수를 합니다. 자그마치 아이들이 다섯이나 되었습니다. 어린 막내는 맏이인 듯한 처녀 아이가 안아 들고 맨 먼저 씻겨주었고, 그 물에다 차례차례 세수들을 합니다. 맨 마지막으로 맏이가 했고, 세수가 끝나자 그 물로 빨래를 했습니다.

 

                                

                      <인도의 도시 외곽에 공통적으로 펼쳐져 있는 슬럼가.

                              아이들에게는 위험한 철길이 놀이터다.>

 

  그 광경을 바라보면서 나는 그 나라에서 물이 그처럼 귀한 것인지, 아니면 물값이 비싼 것인지, 그도 아니면 물 길러 가는 게 귀찮아서 그런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얼른 돌아서서 호텔로 향했습니다. 더 이상 지켜보는 게 편치 않았습니다.

  펑펑 쏟아지는 물로 샤워를 하고 지낼 수 있는 내 처지가 저절로 떠오르더군요. 비교 우위가 주는 행복감을 맛보자는 것이 아니라, 안쓰러운 마음을 그런 생각으로라도 서둘러 지워버리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서둘러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내 머릿속에서 어째서 카레 냄새가 설핏 떠올랐는지 당시는 잘 몰랐습니다. 그날 저녁 호텔 근처에서 중세 시절의 장원(莊園. manor)과도 같이 너른 집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 나를 초청했지만, 나는 가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동행의 하나인 동창 친구를 보냈습니다. 다녀온 친구는 그 집 정원에서 사냥도 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그날 저녁에 신문사의 기자 한 사람에게 저녁을 사주어야 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초대에 응하지 않은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습니다. 금박(金薄) 초대장을 보내온 사람이 자신의 존재를 소유한 부의 크기로만 넌지시 그리고 자꾸만 얘기해서 슬슬 그 사람이 넌덜나기 시작했던 것이지요. 개별 상담 시간에 처음 만났을 때, 회사의 내용보다는 자신의 소득 랭킹 얘기를 더 먼저 꺼냈고 집으로 나만 초대하겠다는 말을 되풀이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날 내가 저녁식사를 대접했던 사람은 유력 일간지의 여기자였습니다.  그 다음날 타지마할을 둘러보고 오니까, 호텔에서 머물며 쉬고 있던 친구가 내게 영문 기사를 하나 내밀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친구는 기자에게 저녁이라도 사야겠다고 하더군요.

  기사를 보니 그럴 만도 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인도 방문을 다룬 기사였는데, 막상 내용을 보니 그 친구 말이 일리가 있었습니다. 우리의 방문 목적을 몇 줄의 서두로 장식한 그 취재기사는 나와 그 기자가 나눈 얘기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입니다. 내 이름과 소속까지 밝히면서 말입니다. 초청 간담회 사진과 함께 대문짝만 하게 나와 있었습니다.

 

  그 전날 정부 기관에서 베푼 리셉션장에서 그녀는 내게 다가와 자신의 신분을 밝힌 뒤, 투자를 고려하고 있는 외국인 입장에서 볼 때 인도의 투자환경에서 가장 모자란 것이 무엇인 것 같으냐고 물어왔습니다. 나는 겨우 며칠을 둘러본 것에 불과해서 내 대답이 지나치게 주관적일 수도 있다며 사양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자신이 무엇이냐고 묻지 않고 무엇일 것 같으냐고 물었다면서, 바로 그 주관적인 내용을 알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다른 건 아직 잘 모르겠지만, 인도에서 외국인 투자 유치를 목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각종 제도나 법규, 정책들에서 투명성(transparency)과 예측 가능성(foreseeability)이 다소 모자라는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나라도 아직까지 그것이 말끔히 해소되지 않은 편이라고 하면서, 조심스럽게 말했습니다. 그녀는 뒤의 낱말이 익숙하지 않은지 되묻기에, 철자를 불러주었더니 고개를 크게 끄덕였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쓴 기사에는 내가 짧은 기간의 체류 때문에 망설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고까지 나와 있었습니다.


  내가 그녀에게 식사 대접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바로 그 구절 때문이었습니다. 기자치고는 사려 깊은 것 같았습니다. 나는 그날 저녁 식사를 마치고 그녀를 호텔 문앞에서 배웅하면서 그녀가 사라진 어둠 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인도의 모습이 왠지 오래 기억될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녀는 어느 편이냐 하면, 인도에 대한 내 관찰에 적극 찬동하면서, 내게 개인적으로도 호감이 갈 정도라고까지 말하면서 배시시 웃었습니다. (그때 그녀를 다시 보니 동그래서 참 이쁜 얼굴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인도 진출을 하게 되면 우리 회사에서 일하고  싶다는 말도 잊지 않았고, 유럽식 메뉴로 준비된 식사를 맛있게 그리고 아주 말끔하게 먹고 돌아갔습니다. 인도 사람들이 머리가 좋다는 말을 흔히 하는데, 그녀 또한 무척 총명한 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전날의 내 얘기와 식사 시간에 토막말로 던진 내 말들을 연결시켜서, 음식을 씹는 사이사이로 잊지 않고 대꾸할 때 알아봤습니다.

  

  델리에서 며칠 머물던 우리 일행은 그 후 중서부의 뭄바이를 거쳐 중남부 한 가운데의 고원지대에 있는 무슬림의 도시 하이드라바드와, 인도 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신산업단지인 뱅갈로어, 그리고 남부의 유명도시인 마드라스를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싱가포르를 거쳐 귀국길에 올랐을 때, 그때서야 카레 냄새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생각을 제일 먼저 했습니다. 

  인도 안에서 이동한 거리는 어림잡아 4000킬로 정도인 것 같습니다. 인도의 철도 요금표에는 구간이 5000킬로 이상도 표시되어 있긴 합니다. 그 짧지 않은 여로 내내 들러붙어 있다고 느꼈던 카레 냄새를 귀국길에서야 떨쳐 버린 것입니다. 싱가포르의 창이 공항에서 햄버거로 한 끼니를 때우면서, 내가 싱긋 웃지 않았나 모르겠습니다.  

  

                                                           *

  행로로 보자면 잘 짠 관광 스케줄에 의해서도 최소 20일이 소요되는 일정이었습니다. 델리에서 맞이한 일요일 하루를 빼고는 강행군으로 나머지 일정을 마쳤습니다. 업무에서 손 놓고 지낸 날은 그 일요일 하루뿐이었습니다. 

 그 일요일에, 나는 일행 중에서 호텔에서 쉬지 않고 아그라를 다녀오겠다는 세 사람과 함께 이른 새벽 델리역에서 기차를 탔습니다. 특급열차를 이용해서 당일치기를 하려면 이른 새벽에 떠나야 한다고 해서 새벽 다섯 시부터 설쳤습니다. 아그라는 델리에서 200킬로미터 떨어진 남쪽에 있습니다. 타지마할(Taji Mahal)이 그곳에 있거든요.


  타고르의 시, <백조의 비행(飛行)>에서 "난 잊지 않았노라, 잊지 않았노라, 사랑하는 그대여"라며 외치던 황제가 '영원의 얼굴에 떨군 눈물'로 묘사되었던 그 건물은, 궁전이 아니라 사랑하던 왕비의 무덤용으로 지은 집이라지요. 그런 게 타지마할('궁전의 왕관'이라는 뜻인데 그 올바른 표기는 Taj-i-mahal)말고도 비슷한 게 여러 개 더 있는데, 그 중에서도 그게 가장 아름답다고 하더만요. 그리고 그 정경은 해질 무렵 다섯 시 쯤에 사진을 찍어야 연못에 어리는 근사한 모습이 나오기 때문에 관광객들이 그 시간대를 노려서 몰리기도 한다더군요.

 

<타지마할이 기운 건 아니다...그걸 바라보는 순간들의 기울음일 뿐.

       타지마할은 보는 이에 따라 천만 각으로 分射되는 思念덩이>.

                 

  하지만, 그 무덤의 주인공 얘기는, 인도에 관한 두꺼운 책자에서 제가 처음 대했습니다. 그 여인의 이름은 뭄타즈 마할(왕궁의 보석이라는 뜻). 나이 서른아홉에 아이 열넷을 낳고 죽었답니다. 아내가 죽고 나자 하룻밤 사이에 머리가 허옇게 변한 황제는 2년 동안 정사를 돌보지 않고 아내를 위해 울기만 했다고 되어 있더군요. 그의 이름은 무갈 제국의 역사에서 아래로 두 번째에 있지만, 아주 뚜렷한 모습으로 등장하는 황제 샤 자한(1618-1666)입니다.


  그리고, 관광 가이드들이 삼십 분 넘게 설명해도 다 못하는 얘기 중에서도, 이건 얘기해도 될 것 같습니다. 그게 범람이 잦은 강변에 세워진 건물인데, 그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지반 침식이나 함몰, 이동으로 인한 구조물 손상이 일어나지 않은 까닭 말입니다. 그것은 그 지반 공사를 할 때 그 아래에 흑단목을 넣고 공사를 했기 때문에, 그 나무가 썩지 않고 물위에 약간 뜬 채로 그 부력으로 지반 자체의 유동성을 유지해주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자료에는 수많은 구멍을 파고 그 안을 전부 동전으로 채워 넣었다는 기록도 있긴 합니다만.) 

  그리고, 또 한 가지. 그걸 짓고 맞은편 궁전에서 바라보면서 죽은 아내를 내내 그리워만 하던 황제는 결국 아들에게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고 (아들이 아버지를 감옥에 감금했습니다), 그렇게 죽고 나서 아내 옆에 묻혔습니다. 야무나 강을 끼고 그  맞은편에 아내의 무덤과 똑같은 모습으로 짓되, 순백의 아내 것과는 달리 까만 대리석으로만 짓고 그 강 사이로 다리를 놓아 영혼으로라도 아내와 남편으로 교통하고 싶어 했던 황제가 말입니다.

 

   

    <야무나江을 가로질러 타지마할을 바라보는 궁전.

         남편이던 샤 쟈한 황제는 정사를 폐한 채 이곳에서 죽은 아내를 바라보기 하다,

         결국은 아들 손에 의해 망부석(望婦石)이 되어야 했다.>

 

  그런데 말이죠. 타지마할에 들어갔을 때 자세히 보니 왕비의 관은 정면에서 보아 정중앙에 놓여 있지만, 그 남편의 관은 한쪽으로 밀려나게 안치되어 있어서 보는 이들에게, 특히 남자들에게, 측은한 마음이 들게도 했습니다.

  헌데, 거기서 그런 것들을 지적하는 건 관광객 중에서도 여자들뿐이었으니 그도 좀 이상하더만요. 


  그리고, 얘기에 보태야 할 게 있다면 치장석 이야기입니다. 22년이나 걸려서 지었다는 그 건물의 내부는 온통 보석에 가까운 귀한 돌들로 치장되어 있습니다. 울긋불긋해서 햇빛을 받으면 아름답게 빛납니다. 온통 보석으로 치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그런데, 그 중에서 인도에서 난 것을 사용한 것은 다이아몬드밖에 없습니다. 바그다드의 홍옥, 펀잡의 삼색 벽옥, 아프가니스탄과 실론에서 가져온 유리(琉璃), 티벳의 터키석, 이집트의 황금빛 감람석, 페르시아의 연수정, 예멘에서 가져온 각종 색깔의 마노가 있고 중국의 비취, 러시아의 공작석까지 있습니다.

  외벽을 치장한 그 아름다운 흰 대리석은 300킬로나 떨어진 마크라나라는 곳에서 코끼리 천 마리를 동원해서 날라 왔다니 그다지 놀랄 일은 아니지만, 각종 보석들을 이곳저곳에서 가져다 치장한 걸 보면 그 공력이, 황제의 아내 사랑이 커 보이면서도 그 건물을 지은 것도 이유의 하나가 되어 남편이 씁쓸한 최후를 맞이한 것을 떠올리자 나는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착잡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참 이상하게도 그곳에서는 카레 냄새가 하나도  안 난다는 게 생각났습니다. 주변이 아주 반들반들하고 말끔했습니다. 하기야, 바닥까지도 고급 대리석으로 꾸며놓은 곳이었습니다.  

 

 

    <바닥은 대리석.벽체 또한 최소한의 치장이 대리석.

      이런 것들이 아그라에만 대여섯 개 있다.>

                                                           *

  인도에서 돌아온 지 두어 주일이 지난 지금, 나는 그 사이 베트남과 뱅글라데쉬를 3-4일간씩 다시 방문하고 돌아왔습니다. 그 두 나라에는 약속이나 한 듯이 고수풀 비슷한 것이 전통 음식에 들어갑니다. 미나리와 비슷하지만, 향취가 훨씬 강하고 아주 억세 보이는 우리의 고수풀보다는 조금 더 부드럽고 여린 줄기를 가졌습니다.  

  그것들을 대하고 나자, 나에게 인도에 관한 어떤 생각이 뒤늦게 떠올랐습니다. 그 쓰임새가 향신료의 역할도 있지만, 식품 위생이 완벽하지 못한 나라에서는 음식을 먹고 나서 탈이 날까봐 그걸 방비하는 약재 효과로도 그 풀들을 넣어먹는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을 때입니다. 


  그와 함께, 인도 여행의 마지막 기착지였던 남부 도시 마드라스를 떠나오면서 인도를 감싸고 있는 삼면의 바다가 저마다 다른 이름을 달고 있지만, 결국 그 바닷물들은 구분도 되지 않는 같은 물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떠올랐습니다. 벵갈만과 아라비아해가 인도의 동서 바다에 각각 붙여진 이름인데, 그 두 바다는 모두 남쪽 한곳으로 모이고 하나의 바닷물이 되어 인도양으로 태어납니다.

   그런 생각들을 한데 어우르자, 인도의 세 여인이 고수풀과 그 바다 위로 차곡차곡 눕혀졌습니다.


  남편의 사랑을 사후에도 독차지했던 부러운 여인은 온갖 외제 보석으로 치장된 궁궐 같은 무덤의 한 가운데에 누어서 관광객들을 불러 모으고 있습니다. 한 옆으로 내몰린 듯한 불쌍한 남편을 거느리고 말입니다.

  인도화된 무갈제국의 문화, 토착화된 무슬림 문화를 인도 사람들은 무갈리 인디언 문화라고 하는데, 은연 중 사회의 최상층부에까지도 스며들어 있습니다. 그녀는 그런 외래문화가 은밀하게 흠모되는 인도의 최상부에 지금도 여전히 자리잡고 있습니다. 인도를 선전하는 포스터 한 가운데에 늘 머물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렇습니다. 그녀에게서는 카레 냄새가 그다지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세 여인 중 맨 아래에 눕힙니다. 


  머리가 좋고 글 솜씨도 좋은 영문 일간지 여기자. 그녀는 외국인 투자 회사에 취업할 때까지만 인도인을 위한 기사를 쓰겠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녀 역시 카레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유럽식 식사가 참으로 맛있었다면서 치하하고 돌아갔습니다. 인도식 금박 장식 그릇에 담아온 외래 음식을 핥다시피 말끔히 비우고 돌아간 그녀를 나는 두 째 단에 세웁니다.


  델리의 천막촌에서 어린 동생들을 차례차례 씻겨주던 처녀 모습이 떠오릅니다. 이미 시꺼매진 물에 자신의 얼굴을 씻고 어미를 대신해서 빨래도 했습니다. 그녀를 보고 돌아올 때 언뜻 그녀에게서 카레 냄새를 맡았던 듯 했던 건  왠지 인도의 카레와 그녀가 무슨 관련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였던가 봅니다. 너무나 직설적이어서 처음에는 외지인을 놀라게 만들고 도리질을 치게 만들었던 그 카레 가루를 앞으로 오랜 시간에 걸쳐 껴안고 두고두고 아낄 사람은 천막촌의 그 처녀, 지금은 더러운 인도라는 손가락질 끝에서 위태롭게 흔들리는 그 어린  처녀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그게 더욱 확실해져갑니다. 그래선지 그녀가 인도 여인들의 맨  위로 올라가는 모습이 보입니다. 입성도 더 이상 추레해 보이지 않습니다. 내가 잘못 본 것일 수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그녀의 모습 뒤로, 신이 많은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순박하다고, 그래서 신이 3300명이나 된다는 티벳 사람들이 그토록 착한 것이라고 말했던 어느 나그네의 말이 떠오릅니다. 삼신할미, 조왕신, 터줏대감과 서낭당에까지 머리를 조아렸던 우리네 착한 어머니들의 모습이 길게 끌려 나옵니다.

   

  이번 기회에 인도를 관통하는 카레 하나는 확실하게 공부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 다시 그 카레 앞에 서게 된다면 그때는 이전과는 달리 내가 찾아낸 완연한 느낌으로 그 인도 카레를 대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고 싶고, 그래야 하지 싶습니다. [1996.5]              

 

 

        <타지마할을 둘러보러 들어가기 전 찍은 사진인데,

          구석구석 돌고난 뒤의 생각은, 타지마할 전체를 번쩍 들어서

          어디 쯤에 멀찍이 내던져 두어도 될 거 같다는 거였다.>

  

 [옮겨오면서]

 13년전의 일인데도, 인도 진출과 관련된 고려사항에서 아직도 크게 개선되지

  않은 건, 내가 예측했던 그 '예측가능성foreseeability'의 문제인 듯하다.

  인도내 최대의 외국인투자사업에 드는 포스코의 대규모 제철소 건립 프로젝트만

 해도, 부지확보 문제로  2년을 넘길 공산이 크다. 몇 개월이면 'no problem'이라고

  인도인들이 장담했었는데...    [Aug.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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