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제목은 목하 작업 중인 단행본 책자의 제목이다.
가벼운 대화체 기록이지만, 보기에 따라서는 무거운 내용도
꽤 많이 들어 있다. 참고 기록과 자료 인용이 적지 않게 들어 있고.
당초 대선 투표 전 발간을 목표로 작업해 왔는데
<친절한 우리말 도우미>의 저자 교정 작업을 5회나 하는 바람에
거의 두 달 반 정도를 '까먹어서', 초고 마무리를 아직도 다 못 하고 있다.
전재하는 부분은 책자의 일부 내용이다.
읽는 이들에 따라 서로 다른 시각들이 있을 수 있지만
그 또한 민주주의의 덕분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통치하는 존재들일 수 있음이므로.
논쟁을 야기하자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냥 읽을거리의 일부로만 가볍게 대해 주시면 고맙겠다.
이런 시각도 있구나 정도로만 봐 주시길, 부탁드린다.
서민에 의한, 서민을 위한 서민 대통령
-로또복권을 사는 이들의 심정, 대통령은 알까
[前略]
[최] 서민들이 제대로 서민 대통령을 뽑는 일, 곧 서민 의식을 지닌 대통령을 만드는 일은 대통령 자신에게도 아주 큰 자산이 돼. 다시 말해서 기득권층이나 특권층이 아닌 서민을 위한 정책(콘텐츠) 목표와 수단, 그리고 철학을 굳게 보듬는 일은 대통령 자신을 위해서도 엄청 중요한 일이라는 거지. 좋은 예로 퇴임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지탄과 조롱 속에 있는 전직 대통령들, 곧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을 보라고. 그들의 공통점은 대통령 재직 기간 내내 기득권 세력을 주된 지지기반으로 삼고 있었거나 그들의 눈치들을 주로 봤다는 점이야.
그러다 보니, 퇴임 후 그 대통령들은 서민의 눈길에서 기름 위의 물 같은 존재로 떠돌다가 결국은 맹물 같은 존재로 평가절하 되었지. 그런 결과는 그들의 자업자득이야. 왜냐 하면, 그런 대통령들이 지니고 있던 국민 읽기 철학의 빈곤, 곧 정치 철학 콘텐츠의 빈곤과 결핍을 대통령 자신은 잘 모르지만, 국민들은 손쉽게 읽어내거든. 그래서 그렇게 평가절하 된 것이기도 하고. 그런데, 문제는 대통령이라는 사람들이 그 자리에 있을 때, 바로 그런 점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는 것이야. 퇴임 대통령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그걸 알게 되고 후회해 보지만, 이미 버스는 떠난 다음이지. 그래서, 현직에 있을 때 그런 사실을 알아두는 게 중요해. 엄청.
거듭 강조하지만, 대통령의 역사적 위상을 평가하는 것은 이 나라의 99%를 차지하는 서민들이지, 1%의 특권파/상층부가 아니야. (나중에 그들을 ‘금권파(金權派)’라는 이름으로 자세히 해부해 보겠지만 말이야) 그들은 대통령이 바뀌면 과거의 대통령들에 대해서는 입 싹 씻기에 더 바쁜 사람들이야. 새 대통령하고 놀기에만도 바쁘니까. 본래 그런 특권층들은 진정한 충성심이라곤 꽝이지. 마키아벨리가 일찍이 “특권층은 지도자와 대등한 자격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잘 따르지 않는다. 반면에 서민층은 충성심이 강하다”*고 설파했듯이 말이야. [*마키아벨리와 군주론 : 우리나라에는 <군주론> 번역서가 넘쳐날 정도로 많다. 여기서는 김영국, <마키아벨리와 군주론>, 서울대 출판부, 1995를 저본으로 삼는다.]
[중략]
[최] 전문가는 무슨 전문가.(웃음). 얘기를 계속할게. 내가 얘기하는 서민들이란 (조금 뒤에 어떤 이들이 여기에 속하는 그런 서민들인지 자세히 얘기하겠지만), 착하기만 해서 이 지배자들의 역사에 늘 당해온 사람들이야. 그들의 역사에 군소리 없이 봉사한 사람들부터, 안에서 끓어오르는 건 있지만 그래도 참아내면서 그 체제를 받쳐오거나 유지해 나갈 수 있도록 애쓴 사람들이지. 좋은 게 좋다는 생각에서부터 내 고생을 후대에 물려주지 않으려는 그런 생각들까지 하면서 말이야.
하지만, 이제는 아니야. 여기서 잠깐 멈춰 서서 우리들 서민의 모습을, 진상/진실을, 우리들 자신이 제대로 살펴보고 바라보고 가야 한다고 생각해. 그리고 ‘서민의 진짜 힘’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해. ‘서민들의 진짜 힘’이 무엇인지를 돌아보고 그걸 되찾아서 보여줘야 할 때야. 그럴 때가 되었어. 자신의 개인적인 아픔을 이제는 복수(複數)화해서, 집결해서, ‘서민들의 힘’으로 만들어야 해. 말하자면, 지금까지 혼자서 끌어안거나 소규모로 나눴던 의식의 생채기를 이제는 확실하게 기립시켜야 할 때가 온 거지. 이걸 ‘고상하게’ (웃음) 표현하자면, <이제는 성질 좀 제대로 내보자. 감정 있으면 확 제대로 좀 쏟아내 보자...>쯤이 돼.
[김] 옛? 감정 있으면 쏟아내 보자니요... 그것도 ‘확’씩이나요. (웃음) 감정 있다고 불끈 하면 사고뭉치 되는 길 아닌가요? 그런 짓 하지 말라고, 그리 하면 안 된다고 훈육되어온 게 우리들인데요...
[최] 맞아. 우리들은 지금까지, 가급적 감정을 드러내지 말라거나, 참으라거나, 감정 있다고 욱 하지 말라는 식의 화법으로 감정이라는 말 자체를 억누르면서 살아왔거나 훈련되어 왔지.
하지만, 이제는 그 감정이라는 말도 필요에 따라서는 두 눈 크게 뜨고 똑바로 정시할 필요가 있어. 감정(emotion)이 있어야 힘이 생기는 법이거든. 떼를 지어 무얼 하거나 집합적으로 뭔가를 이뤄내는 그런 일에서는 특히나 더. 정치가 아주 대표적인 그런 경우지. 전문 학자들도 그렇게 말하고 있는 걸. 예컨대, <열정적 정치 Passionate Politics>를 외쳐온 폴레타와 재스퍼가 대표적인데, 이렇게 말했어.
개념들에 부여된 인과적 힘 중 많은 것이 그러한 개념들 (예컨대 집합적 정체성, 정치적 기회 등)과 연관된 감정에서 나온다. (J. 굿윈/J.M.재스퍼/F. 폴레타 편, 박형신/이진희 역, 열정적 정치, 2012)
말이 좀 까다로운 편인데 이 말을 좀 쉽게, 서민적으로 (웃음), 풀이하자면 이런 거야. ‘집합적 정체성’(collective identity. 물질적 이해관계를 떠나 그룹/동아리/집단이 꾀하고자 하는 운동 목표)이나 '정치적 기회' 등과 같은 것들에 대해 지니게 되는 감정이 그것들을 향한 의식화/행동화 등의 힘이 된다는 거지. 감정을 품고 키워야 변화고 저항이고 등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는 거야. ‘고상하게’ 말해서(웃음) 무슨 일이고 간에 저지르려면 감정을 키우고 쏟아내라... 그런 말이지.
그렇게 해서 감정이 키워지면, 딸랑 하나뿐이라서 무력감만 되씹던 개인조차도, 한 사람의 서민일 뿐이어서 맥이 빠지곤 하던 사람도, 불끈 일어나 참여하게 된다는 거야. 설사 개인적으로는 손해를 보는 일이 될지라도 말이야. 그런 참여 과정을 연구한 끝에 폴레타와 재스퍼는 이런 말로 그걸 요약했어. ‘개인 수준에서 비용-이익 계산이 유리하지 않을 때조차, ‘집합적 정체성(collective identity)’에 대한 충성은 개인에게 참여를 고무하기도 했다.’고. 이걸 쉽게 말하자면, 여럿이 함께 무슨 일을 이뤄내기로 작심만 제대로 하면, 유/불리를 떠나 설령 개인에게 손해가 되더라도 그 일에 뛰어든다는 거지.
이번 대선 이틀 전에 모 신문에 기고한 도올 김용옥의 혁세격문(革世檄文) 제목이 “분노하라! 직시하라! 투표하라!"였어. 도올이 피를 토해내는 심정으로 쓴 글인데, 어쩌면 후대에 선거를 통한 혁명을 부추긴 격문 중 최고의 명문으로 꼽힐 만한 글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야. 그 글 제목의 첫 마디, ‘분노하라!’가 바로 이 감정을 겨누고 한 말이야. 그래야만 지난 역사와 현재의 상황의 연관 관계를 직시하게 되고, 그 성찰이 투표를 통한 혁명으로 이어지게 되니까. 전문을 살펴보고 가기에는 장문이어서 무리지만, 그 중 몇 군데만 인용해 볼게. 그래도 짧은 편은 아니야. 본래 폭포수처럼 쏟아내곤 하는 도올 식의 어법이라서... 그래도 우리가 얼마나 감정을 확 쏟아내야 하는지, 그처럼 감정을 쏟아내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글을 대하면 저절로 그 답이 나오지 싶어. 글 속에 나오는 '민중'을 우리가 말하는 '서민'으로 바꾸면 완벽해지지.
...[전략] 지금 우리는 홍익(弘益)이 아닌, 홍해(弘害), 홍살(弘殺)의 정치를 자행하고 있다. 서로가 서로를 해치고, 서로가 서로를 죽이려고 광분하고 있는 것이다. 왜 그런가? 정치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현 정권은 여민동락(與民同樂)의 인의(仁義)를 망각하고 솔수식인(率獸食人)의 사리(私利)를 앞세우며, 진현(進賢)의 정도(正道)를 거부하고 착복과 부패의 한계를 없이 하며, 국고를 털어 치자(治者) 본인의 사욕을 충족시키며 주변의 승냥이들에게 떡고물을 분배하고 있다. 국토의 산수대강(山水大綱)을 파괴하고 4대강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왜곡·오염시키며, [중략] 인천공항과 같은 공익의 자산을 사유의 질곡으로 전락시키려 하고 있다. 농촌을 해체시키고 도시의 삶을 황폐화시키고 있다. 양극화의 괴리는 재벌의 독재를 흥륭(興隆)케 하며 서민대중의 삶을 노예 이하의 나락으로 추락시키고 있다. 추락은 영락이요 죽음이다. 그런데 서민대중의 죽음을 현 정권의 치자들은 환호하고 재벌은 환희의 박수를 친다. 그리고 전국 골목골목의 상권을 대형마트라는 탱크와 기관총으로 후려 갈겨대고만 있다. 어찌 미국의 총기난사를 강 건너 불구경 하듯이 쳐다보고만 있는가? 자기 가슴에 총알이 박히고 있는 바로 그대들이!
[중략] 왜 이 모양 이 꼴인가? 우리가 지도자를 잘못 뽑았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대통령이 되어서는 아니 될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국민이 교사(巧邪)와 허언(虛言)의 달인(達人)을 지도자로 떠받들 수 있는가? 민주라는 허명에 사기를 당했기 때문이다. [중략] 자본이 지배하는 메이저 언론의 정보조작과 선거를 둘러싼 가치의 혼란이 민중의 너무도 정당한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민중이 민주의 주권을 행사하는 것을 호도하는 온갖 정교한 부정이 민주주의라는 타자(他者)의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는 것이다.
민중이여! 또 당할 셈인가? 현 정권의 죄악을 반성 없이 반복할 셈인가? [중략] 민생의 감언에 또다시 도덕을 망각할 셈인가? 민중이여! 두 손에 가슴을 얹고 잘 생각해보라! 누가 과연 그대들의 민생을 도와주었는가? 누가 과연 그대들에게 돈 한 푼이라도 거저 준 적이 있는가? 민생은 아사달의 신시로부터 지금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 민중 스스로 해결해온 것이다. 착각하지 말라! 정치는 민생을 해결하지 못한다. 민생은 어디까지나 민중 스스로의 결단에 의한 것이다. 민중의 간절한 염원이란 그 민생결단의 번영을 훼방하는 행위를 정치가 제발 하지 말아 달라는 것일 뿐이다. [중략] 기업과 정부권력의 유착, 자본의 끝없는 폭리확대와 공무행정의 부패의 연환(連環)은 대중민생의 희생을 담보로 하는 것이다. 이 희생에는 이제 부르죠아와 프롤레타리아의 구분도 의미가 없다. [중략] 따라서 선거공약으로 "민생"을 우선시 한다 하는 자는 거짓말쟁이요 위선자일 뿐이다. 민중이 원하는 것은 민생이라기보다는 도덕의 구현이며 정의의 확립이요 인정(仁政)의 구체적 실천이다. 위장된 웃음의 눈꼬리를 가장하며, 정의와 도덕을 외면하고 반성과 실천을 거부하는 위선의 심장에 이제 종지부를 찍자! 더 이상 속지 말자! 민생이 아닌 도덕의 기강을 바로잡자! 그리하면 민생은 저절로 해결된다. 도덕이 바로서고 민생이 풍요롭게 되지 아니 하는 역사는 인간세에 있어본 적이 없다.
[중략] 그렇다면 도덕을 어떻게 바로잡는가? 그 너무도 쉬운 해결방안이 그대 손에 쥐어져 있다. 부패와 사악의 정권을 바꾸면 된다. 어떻게 바꾸는가? 투표장으로 가라! 그대의 신성한 혁명의 권리를 행하라! [중략] 이 인간 오성의 보편적 권리에 대한 신념은 반만년 인문정신의 기나긴 투쟁의 결과로서 획득된 것이다. 어찌 이 고귀한 권리를 나태와 냉소와 방임으로 포기할 셈인가? 혁명은 어렵지 않다. 유권자의 90%만 매번 투표에 참여한다면 역사는 항상 선을 지향하며 뒤바뀌게 되어있다. 그런데 유권자 한 명이라도 더 투표장에 오는 것을 두려워하는 정치세력이 과연 수권(受權)의 자격이 있을 수 있겠는가? 모든 국가기관이나 공영언론조차도 투표를 독려하는 데 적극적이지 않다. 직무유기를 일삼는 것이다. 국민이여! 분노하라! 분노하라! 실상을 직시하라! [중략] 과거에는 최고의 권좌, 그 천명(天命)을 바꾸는 혁신(革新)의 대업에는 수없는 인명의 희생이 있어야만 했다. 삼일운동을 기억하라! 동학의 우금치 전투를 상기하라! 정주에서 폭파된 홍경래의 염원을 다시 한 번 상상해보라! 그 얼마나 처절한 고립무원의 항쟁이었던가? 그대들이 손에 쥐고 있는 투표용지는 이들 선열(先烈)의 잘린 모가지처럼 피가 흐르고 있다. [중략]
체제 밖에서 천 리를 가는 것보다 체제 안에서 한 치를 가는 것이 어렵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체제 안에서 천 리를 갈 수가 있다. 우리 민중 모두가 19일 투표함으로 가기만 한다면 혁명은 이루어진다. [중략] 이제 혁명은 폭력이 아니다. 이제 혁명은 광포한 영감이 아니다. 이제 조선의 혁명은 체제의 룰에 따라 도덕의 기강을 바로잡는 정의로운 상식적 작업이다. [중략] 동·서의 언어적 편견에서 인간을 해방시키며 남·북의 불필요한 이념의 기미(羈縻)를 절단하며, 문명과 자연의 조화를 회복하고, 도농(都農)의 균형을 꾀하고, 세조의 찬탈 이래 끊임없이 왜곡되어온 정의의 패배를 설욕하는 대업이다.
물론 미국은 우리의 우방이다. 그러나 우리의 친미는 미국과의 정당한 거리감을 확보함으로써 미국을 도덕적으로 만들어주는 인도주의적 친미가 되어야 한다. 미국과 중국이 남·북한의 화해를 돕도록 만들어야 하며, 역으로 우리는 남·북한 화해의 주도권을 장악함으로써 미국과 중국이 협력하여 세계평화를 이끌어가도록 만드는 21세기 인류 최대의 염원을 달성케 해야 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민생(民生)이라기보다는 민본(民本)이다. 민중 스스로가 자결의 주체성을 갖는 역사를 갈망하는 것이다. 이제 여러분들은 여러분들 손에 쥔 투표용지 하나로 인류의 역사를 전쟁과 대결의 국면에서 평화와 화해의 국면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 그리고 우리 민족사의 기나긴 좌절과 절망을 승리와 희망으로 회향시킬 수 있다. [중략]
진실은 반드시 승리한다! 투표장에 국민이 오는 것을 꺼려하는 모든 반민족행위자들의 생애에 종막을 드리워라! 그것도 아주 평화롭게! 19일 새벽 6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이 땅의 깨인 자들이여! 모두 남김없이 투표장으로 가라! 그대들의 투표가 이 민족 모두에게 승리의 기쁨을 안겨 주리라. 주변의 모든 동포를 설득하여 투표장으로 가라! 이 민족의 기나긴 불의와 독선과 배타와 불인(不認)의 역사를 끝장내자! 우리는 반드시 승리한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되돌아갈 수 없다! 모든 반동은 그 자체의 힘에 의하여 분쇄된다. 우리는 반드시 승리한다! 투표장으로 가라! [밑줄은 필자]
[김] 가슴이 벅차서 뭐라고 말이 안 나오는데요... 정말 격문이군요. 그것도 피를 토하는 열정으로 써내려간 뜨거움이 그대로 나를 겨누고 꽂히는 듯한, 말 그대로 세상을 뒤바꾸는 혁세격문(革世檄文).
[최] 그대 말 그대로야. 나도 처음에 그걸 대하면서 얼마나 울컥 해오던지...가슴 안에 화롯불을 쏟아놓은 듯만 하더군. 자, 그러니 우리가 이제 제대로 ‘감정’을 쏟아내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감이 확실히 잡히지?
[김] 예 그렇네요. 이제부터는 엎드려 지내지 말고, 참지만 말고 사건 좀 치자. 그것도 제대로... 군요. 등골이 슬슬 차렷 자세로 기립하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서늘해지는 떨림이랄까. 그리고 그 떨림에 덧붙여서 습관적인 겁이랄까 뭐 그런 것도 나고요.
그런데요. 이 습관적인 겁 내기와 ‘쫄기’가 저만의 일은 아닌 듯합니다. 왜냐, 서민들은 실제로 지금까지 있으나 마나 한 존재로 살아왔고, 지배자들에게도 그렇게 손쉽게 치부되어 왔으니까요. 서민들 자신이 낱개의 힘이 지닌 한계 때문에 그 이상의 존재가 되기를 포기한 경우가 더 많긴 하지만요. 거기에 핑계를 대자면 많지요. 이 나라의 굴곡이 심한 내부 압박과 그에 따른 눈치 보기, 그리고 생존과의 비겁하지만 절실한 타협... 등등. 그런 것들이 일상적인 횡압으로 작용해온 탓도 있잖습니까. 달리 말해서, 그동안 서민들이 죽어지내 올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살아온 서민들의 탓이라고만 할 수는 없잖습니까.
[최] 내가 서민들 탓이라는 소리를 하려는 건 아니야. 그것보다는 서민들의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 서민들의 삶에서 배태되어온 서민들의 느낌이나 생각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우리 서민들부터 제대로 알고 공유하자는 거지. 달리 말하자면, 지배자의 역사에서 서민의 역사로 그 방점을 옮기자는 얘기야. 이 나라의 현대 역사도 서민적인 관점을 함께 아울러서 돌아보고, 앞으로의 나아갈 길도 그런 시각에서 찾아보자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