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해, 정말이지 나는 여태 사랑을 요약할 줄 몰랐어
- 제우스의 누이이자 아내인 헤라에게
최 종 희
I
사랑해! 이건 정말이지 당신만을 위해서 하는 말이야. 이 세상에서 지나칠 뿐인 사람들조차 괜히 기웃거려서라도 듣고 싶어하는 말인 줄 뻔히 알기에, 그동안 어디서고 당신이 듣고 싶어하는 줄을 내 가슴 속에서 더욱 빛나는 당신 눈빛처럼 빤히 알면서도, 차마 입밖으로 낼 수 없었던, 그리하여 입안에서 내내 말리는 혀 끝과 마르는 침의 조급한 농무가 조청처럼 고일 때까지, 늘 지켜보기만 해야 했던, 바로 그 말이야.
언제부터인지도 모르게 스물두서너 대여섯, 스물일곱 여덟, 아홉, 서른, 그리고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그리고 더 헤아릴 수 없는 납덩어리들의 침묵으로 깊이깊이 새겨두고 담가두고 절여두고, 그러다가 괘씸하게도 가녀린 속마음으로는 잊지도 못한 채, 그러다가도 기어이 챙길 줄 아는, 챙겨야만 하는, 미필적 고의로 녹슬게 놔둬 버린, 그러다가 그러다가 끝내 피멍 든 속울음을 끌어안고 나뒹굴게 될 줄을 뻔히 알면서도 차마 하지 못했던 그 말...... 사랑해!!
진짜야. 정말이고말고. 여름철에도 겉늙어 늘어진 등골을 빳빳하게 세워 올릴 정도로 시리디 시린 그 설악산 장수대의 맑은 물에 대고 어리광처럼 해보았던 진짜 맹세야. 나는 그때 흐르는 물에 가슴을 베었어. 난생 처음.
맹세할 사랑이 가려져 있음을 그때 하늘을 맨손으로 찌르며 한했었지. 하지만, 이제는 아니야. 구름이 가릴 때만 흐릿해지면서 따뜻한 속살을 언뜻 비쳐 보이는 내 별. 지금에야 말이지만 정말이지 나는 그때도 내 사랑을 요약할 줄 몰랐어. 그건 장수대의 그 오만한 너스레 때문이라고 나는 장수대를 지날 때마다 지금도 돌아보며 욕을 하곤 해. 그 물이 너무 차가워서 내가 지레 놀랬노라고, 그리하여 당신 생각만으로도 자주 그 끈이 스르르 풀리곤 하는 제 정신이 그때는 더욱 멀리 도망가 있어서 좇아갈 수 없었을 뿐이라고.
II
사랑이라는 말에 담길 수 있는 무게를 혼자 가늠해보다가, 세상 사람들이 그 말에 끼얹는 무게를 알고 지레 겁먹으면서, 내 그런 뭣 같은 머리 좋은 산술(算術)에, 그 산술에, 또한, 미리 겁먹은 당신이 먼저 한발을 뺄 것만 같아서, 그리고 그런 허툰 내 머리통속까지 미리 헤아릴 것만 같은 당신의 사려 깊음에 진작부터 놀라온 내 버릇에, 나는 정말로 한 번도 큰 소리로 외쳐보지 못했어. 바로 그 말, 단 세 마디를. 그 말을 뱉어보지도 못하고 그냥 머금고 만다는 것이 혀까지 깨무는 바람에 여전히 입속으로만 뒤늦게 웅얼거리고 말았어...... 사랑해!!!
함께 뒹구는 사이 몇 달과 몇 날인지도 모르게 으깨진 시간들의 땟국이 어느 날 돌아본 내 단속곳에 그 어렴풋한 핏자국으로 배어 있었어. 뒤늦게야, 제 각각 혼절하고 나서야 때늦게, 취기 어린 내 눈가에서 함부로 찢어버린 치맛자락 속의 동백꽃잎처럼 장난질로 다가오더니 어느날 불쑥 날 보고 그러더군. 잔뜩 취했을 때를 골라서...... 내가 지 불어터진 진자홍 물빛의 아비라고.
나는 그 말만으로도 정말이지, 동백꽃 같은 유곽 여자라도 좋았어. 한겨울 남쪽 섬들 속에서 히죽거리고 있던 동백꽃잎처럼 미풍에도 나는 너펄거리며 해죽거렸을 거야. 정말이지 나는 흔적 없는 밤바람결에라도 이내 찢겨져 보이는 동백꽃이고 싶었어. 정말이야. 나는 당신에게 그렇게라도 요약되고 싶었는 걸. 그저 내 속으로만 어둔 밤을 골라서 미치게 찢겨지곤 하던 마음으로는 저절로 그럴 뿐이었다구.
III
여전히 당신 앞에서는 때늦게 내가 돌아갈 날을 알게 된다 하더라도, 나는 차마 이대로는 눈을 감지 못할 것 같아. 이제야 화들짝 놀라듯이 그 생각을 곧추세우고라도 나를, 고해 성사를 기다리는 내 앞의 신부(新婦) 앞에서 나를 무릎 꿇리고 그 신부(神父)와 한 몸이 되어서라도 이 말을 못하고는 눈을 감지 못할 것 같아. 사랑해......
나는 죽음에 끌려가는 마지막 순간에라도 당신 앞에서는 살아서 고해하는 신부(信夫)이고 싶어. 사랑한다고. 그리고 그 종부성사의 답을 그때서야 비로소 나와 내 신부인 당신을 꼭꼭 동여매는 마지막 더러운 욕심으로라도 남기고 싶어. 당신이 허락한다면. 이 세상에서 다하지 못한, 다하려고 노력을 덜한 죄값의 대가로 나는 그렇게 나를 결박한 채 끌고 가고 싶어. 가장 마지막으로 미세해지는 내 의식의 마지막 한 가닥조차도 그렇게 당신에게만 겨눈 채 떨고 싶어.
할 수 있으면 오늘 이 시간부터라도 그 힘만은 꼭 내게 남겨달라고 기원하고 싶어. 죽음이 바로 코 앞에 닥쳐와도 당신에 대한 내 사랑을 제대로 요약할 수만 있다면 아무런 여한이 없을 것 같아. 살아생전에 당신이 내 우물거림을 불만족해 했더라도 나는 그래도 우물거리기라도 하고 싶어. 사랑한다고, 사랑했다고.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것의 여전한 전부인 걸.
그렇게 해서라도, 떨리는 눈꺼풀 끝에라도 당신을 매달고 가고 싶어. 그렇게 웅얼거리고 싶어, 오늘 밤의 꿈결에서라도. 그것이 내 마지막 꿈길일지라도...... [06/03/2000]
[덧대기] 이 글은 '사랑에 관하여 3000자 이내로 요약하기 릴레이' 행사가 있었는데,
그 용도로 '제작'된 것으로, 요약할 줄 몰랐던 나의 삶에 대한 내 웅얼거림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