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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혜영 : 내 삶은 내 운명

[펌글] 함께 읽고 싶은 글

by 지구촌사람 2011. 4. 7.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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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4월 7일] 내 삶은 내 운명


                                                                                            성혜영 박물관 연구자

 

 

'박물관 연구자'로 글을 쓰고 활동을 하고 있지만, 그 '직함'이 실은 좀 불편하다. 간혹 매체에 따라서 '작가'로 소개되는 경우도 그렇다. 말이 좋아 '독립'이니 '자유'지, 낯 뜨겁기는 매한가지다. 소속이 있다면 고민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실제의 나와 상관이 있든 없든, 어디의 누구 하면 그 사람의 성취를 평가하는 사회적 합의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가수다' 논란 때문에 뒷북치는 느낌이지만, 오래 전부터 자서전이나 참회록 같은 걸 쓰게 된다면 제목으로 생각해 왔던 것이 바로 '나는 ΟΟ다'였다. ΟΟ가 무엇이냐는 좀 고민이었지만. 아마 그때까지만 해도 뭔가 그럴 듯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란 기대 비슷한 착각을 버리기 전이었을 것이다.

<나는 사진이다>, <나는 춤이다> 등에서 보듯이, '나는 ΟΟ이다'는 자기 영역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만이 쓸 수 있는 제목일 터, '나는 박물관이다' '나는 작가다'로 한다면 박물관과 글 쓰는 일이 내 존재를 대변해 주는가가 관건이다. 아니 그럴 자격이 있느냐의 문제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고 영화 <아이 엠 러브>에서처럼 사랑은커녕, 모든 것을 다 걸 만한 파격적인 다른 뭔가가 있지도, 또 앞으로 있을 법하지도 않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의 누구'라는 관계 속에서 더 잘 드러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내 시인 김광규 식으로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딸이고 어머니고 동생이고 아내고 제자고 선생이고…. 친구고 적이고 손님이고 주인이지 오직 하나뿐인 나는 아니지 않은가. 과연 아무도 모르고 있는 나는 무엇인가. 그리고 지금 여기 있는 나는 누구인가. 밥 딜런의 전기 영화 <아이 엠 낫 데어>는 또 다른 혼란이었다. 그토록 뜨거웠던 그의 삶에 그는 거기에 없다니.

그런데 <처칠을 읽는 40가지 방법>을 읽다가 굳이 내가 단 한 가지로 불려야만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웅적이나 인색하고, 고귀하나 이기적이며, 호언장담하는 동시에 꾸밈없이 말하고, 용감하면서 비뚤어지며, 관대하고 포악한 사람, 처칠"을 읽는 방법은 "우리가 타인에 대해 얼마나 아는 것이 없는지, 또 그런 만큼 타인의 삶을 요약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보여 준다. 그건 내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요즘 인기 있는 각종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면서, 세간의 논란과는 별개로 나는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늘 안전선 밖에서 데면데면 살아온 내 삶에 대한 연민 때문일까, 내게는 그 치열한 '투쟁' 자체가 경이였다. 내 옆의,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던 가수가, 모델이, 디자이너가, 아나운서가 물었다. 너는 박물관이냐고, 작가냐고. 재주 있는 놈 위에 재수 있는 놈 있다고, 재주보다 더 큰 재수로 이나마 살아 온 게 아닌가 하는 부끄러움도 돌아보게 했다.

또 한편 이런 생각도 들었다. 꼭 그렇게 한 가지 꿈에 매달려 무엇이 되어야만 성공한 인생일까, 그들이 옆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한 가지 목표에 매진하는 동안 버리고 놓치고 후회한 일들은 없었을까. 또 앞으로 얼마나 많은 시간을 분노하고 좌절하면서 스스로를 괴롭혀야 할까.

모든 선택에는 더 깊은 이유가 있는 법이라니, "사람이 원한 것이 곧 그의 운명이고, 운명은 곧 그 사람이 원한 것"이라는 노인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곰스크로 가는 기차'(프리츠 오르트만)는 여전히 우리 가슴을 울리겠지만 타느냐 마느냐는 각자의 몫이겠다. 어느 쪽이건 좋은 삶, 나쁜 삶이 아니라 다른 삶이 있을 뿐이다.

 


[2011. 4. 7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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