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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멋진 사람 : "가르칠 열정 식었다" 교수직 던진 퇴계 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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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촌사람 2014. 1. 11. 0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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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칠 열정 식었다" 교수직 던진 퇴계 후손

[중앙일보] 입력 2014.01.10

명퇴 신청한 이원경 영남대 교수, 정년 6년 남기고 학자 양심 지켜
휴대폰·자동차·골프채 '3무 생활', "부끄럽습니다, 관심 접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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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31일 대구 범어동 일식집. 두 대학교수 가족이 마주했다. 이미 가족끼리 아는 사이였건만 침묵이 흘렀다. 이 자리에 있는 이원경(59) 영남대 기계공학부 교수가 정년을 거의 7년 남기고 느닷없이 명예퇴직서를 낸 직후였기 때문이다. “강의할 열정이 사라졌다”는 이유였다.

 함께 있던 같은 학교 김용찬(58·수학교육과) 교수가 이 교수의 부인에게 말을 건넸다.

 “이 사람과 살아온 것 후회하지 않습니까.”

 “후회 않는다”란 답이 돌아왔다. 그러자 김 교수는 이 교수의 아들을 보며 말했다. “네 아버지, 존경한다.”

 동료 교수로부터 “존경한다”는 말을 듣는 이원경 교수. 그는 정년 65세를 6년여 앞두고 지난해 말 명예퇴직 신청을 했다. 그가 대학 측에 밝힌 퇴직 이유는 이랬다. “열정이 사그라들었는데 교육자로서 양심상 어떻게 강단에 남아 있겠느냐. 더 열정 있는 후배들이 들어오게 하는 게 맞다.”

 사실 그에게 ‘열정 없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동료 교수와 제자들은 평했다. “대쪽 같은 성격에 스스로 만족하지 못했을 것”이라고들 했다. 휴강은커녕 강의 시간에 늦는 법조차 없었다. 2012년엔 대학이 주는 ‘강의 우수상’을 받을 정도였다. 제자 안동현(23·첨단기계전공 2년)씨는 이렇게 말했다. “강의는 항상 열정적이었다, 시험문제는 어렵고 학점도 후하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를 풀고 나면 실력이 늘어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대학 강의가 이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노석균(59) 영남대 총장은 이 교수를 직접 만나 나가지 말아 달라고 했다. 필요하다면 안식 휴가를 가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했지만 허사였다. 이 교수는 “결심이 바뀌기 전에 수리해 달라”고만 했다. 아직 명예퇴직 신청이 공식 처리된 것은 아니지만, 이 교수의 뜻이 완강해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영남대 측 설명이다. 이 교수는 ‘고고한 선비의 표상’인 퇴계 이황 선생의 14대 후손이다. 영남대를 졸업하고 KAIST에서 석사, 미국 버클리 소재 캘리포니아대에서 박사를 받았다. 1980년 모교에 교수로 돌아왔다.

 세상을 원칙대로 살았다. 김용찬 교수와 학교 인근 산을 등산하려던 때였다. 학교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산을 넘으려던 참이었기에 김 교수는 태워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또 다른 교수에게 태워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러자 이 교수가 “우리가 등산하는데 왜 연구하는 동료에게 폐를 끼치느냐”며 나무랐다. 김 교수는 “별생각 없이 정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종종 비정상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 게 바로 이 교수”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휴대전화·자동차·골프채가 없는 ‘3무 교수’로도 불렸다. 늘 대중교통을 이용했고, 수시로 울리는 휴대전화와 골프채는 연구에 방해가 된다고 해서 장만하지 않았다.

 이 교수는 가까운 동료들에게도 이 시점에 물러나는 이유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왜 열정이 식었을지 그저 추측할 뿐이다. 동료 교수들의 생각은 이랬다. “몇 년 전 만 해도 3명 박사를 배출하면서 참 잘한다고 좋아했다. 하지만 그 뒤론 대학원생을 받지 못했다. 이공계 기피 때문이었다. 학부생만 데리고서 하기엔 어려운 수학을 이용해야 하는 이 교수의 전공 연구에 한계가 있다. 그러면서 연구열이 식었고, 더불어 강의열도 전만 못해졌을 것이다. 그래도 웬만하면 정년을 누렸을 텐데….”

 이 교수는 왜 물러나려는지 구체적으로 물어보려는 인터뷰에 응하지 않았다. 대신 e메일로 짧게 생각을 밝혀 왔다.


 “학자가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발견을 해서가 아니라 퇴직과 관련해 주목을 받는다는 게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부디 저에 대한 관심을 접어 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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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적인 단편 드라마 한 편을 보는 듯하다.

특히 관심을 접어 달라면서, 그 앞에 덧붙인 사유가

가슴 깊이 와 닿는다.

 

오늘날 교수라고 하기에는 참으로 부끄러울 정도로

자신의 연구 성과가 빈약하거나

연구는 말할 것도 없이 그저 적당한 베끼기와 재정리를 통한

입 장사로 때우고 있는 수많은 교수들에게

깨달음과 매질을 겸하는 죽비가 되었으면 좋겠다.

과연 퇴계의 후손답다.

 

그리고, 그의 삼무(휴대폰, 자동차, 골프 채) 이야기에 나도 고개를 끄덕이며

조금은 부끄러워진다.

 

21세기를 앞두고 있을 즈음, 두어 해 휴대폰 없이 살아내기를 고집하다가,

그 뒤로 직장 생활을 다시 시작하고

회사에서 지급한 휴대폰이라는 핑계를 대고 사용하다 보니

어느새 그게 몸에 배었다.

물론 스마트 폰 최저요금제를 쓰지만, 주어진 통화시간과 문자량이 항상 남는다.

 

자동차에 대한 것도 시도를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95년부터 5년간 아예 차를 없애고 산 적도 있다.

걸어다니기 위해. 오직 그걸 몸에 배게 하기 위해.

 

그러다 보니, 내 부서의 전 직원이 차 없이 다니게 된 기록을 세워보기도 했지만

원거리 출근과 지방 거주를 핑계로 차를 다시 끌게 되었다.

요즘에야 나의 대중교통 이용률이 99.9%인지라

마나님 전용이 되다시피 했지만...

 

골프 채...

내 집에 아직도 반 세트 정도 남아 있다.

30여 년 전 파릇파릇하던 시절, 바깥에서 독신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저녁이면 한국의 가족들 생각에 쉽게 잠 들지 못했다.

 

하여, 밤이면 뜀박질도 하고 야간 수영도 하고 테니스를 하다가

9홀짜리 간이 골프장이 만들어지고, 그 출입이 매니저급으로만 제한되는 덕분에

야간 골프라는 걸 시작했다. 실컷 열심히 했다.

몰두해야만 다른 생각이 안 나는 터라 아주 열심히.

그 덕분에 거의 싱글 수준에까지 이른 적도 있다.

 

국내 근무를 하게 되면서부터, 골프가 스포츠(운동)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올림픽 종목에 끼지 못하는 이유도 알았고...

게다가, 시간과 돈 낭비가 심했고, 컴플렉스 해소용 내지는 과시용 경향이

더 심한 놀이라는 걸 알게 되면서부터 일절 접근을 안 했다.

필드에 나갈 일들이 많았지만, 핑계를 대고 죽어라 피했다.

 

내가 안 쓰고 처박아 둔 골프 채를 사람들이 하나씩 하나씩 빌려간 다음에

돌려주지 않는 일도 생겼지만, 한 번도 돌려달라고 채근하지 않았다.

할 필요가 없었으므로.

그 뒤 골프와 완전히 결별하고 택한 게 등산.

지금도 참 잘한 짓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내 딴엔... ㅎㅎㅎ

 

*

퇴계의 후손 이야기가 나온 김에 조금만 보태기로 하자.

내 주변에 아는 이들로 퇴계의 후손이 몇 있다.

널리 알려진 작가 이문열 선배도 그중 하나인데, 본명은 이 열이다.

그처럼 퇴계의 후손 중에는 이황처럼 외자 이름을 쓰는 이들이 적지 않다.

현재의 구로구청장 이성도 그런 경우에 든다.

 

하지만 후손이라고 해서 죄다 외자만을 쓰는 건 아니다.

네 해 전인가, 직계 후손으로 퇴계의 연구로(‘조선시대 『聖學十圖』이해에 대한 연구)

노년에 박사 학위를 받은 15대손 이동건(65) 님도 그러한 예에 들고

이름에 두 글자를 사용한 이들은 조선 시대에도 제법 된다.

 

*

퇴계 선생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하나만 더 보태자.

(내가 이리 무슨 얘기만 나오면 주절주절해 대는 게 탈이긴 하다. ㅎㅎㅎ)

 

뒤늦게 관리가 된 퇴계 선생이 40대 후반에 단양군수를 짧게 한 적이 있는데

그때 관기로 만난 두향이라는 기생이 있었다. 당시 여인의 나이 18세.

퇴계 선생이 1501년생이고 두향이 1531년생이니 딱 30년의 차이.

한창 인생의 오묘함과 헷갈림/망설임 사이에서 잔 주름이 깊어가던 48세의 퇴계.

그는 일과가 끝나면 18세의 방향(芳香)과 단양의 강선대(降仙臺)라는 너럭바위 위에서

꿈만 같은 신선 놀음을 했다.

술과 시와 한담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그렇게 함께한 시간이 10달도 채 되지 못했을 때

퇴계 선생은 풍기군수로 전임...

아래의 시조가 그때 두향이 이별을 두고 읊은 작품이다.

 

이별히 하도 서러워 잔 들고 슬피 울 제

어느덧 술 다하고 임마저 가는구나

꽃 지고 새우는 봄날을 어이할까.

 

그녀를 향한 퇴계 선생의 플라토닉 러브도 여전했다.

오죽하면, 가족들에게 유언으로 남긴 말이

'분매(盆梅)에 물을 잘 주거라'였을까.

[이 분매는 두향이 퇴계 선생에게 준, 분에 심은 매화로,

선생은 서울로 불려 올려가 일할 때도 이 분매를 들고 갔고

평생 그의 옆에 두었다고 전해진다.

현대의 매화 사랑 모임에서 빠지지 않고 이 분매 얘기가 나올 정도로.]

 

퇴계도 임종 며칠 전

두향에 대한 마음을 담아 아래 시조를 남겼다.

 

임이 돌아간 뒤에 天香을 피우리라

원컨대 임이시여 마주앉아 생각할 때

맑고 진실한 玉雪 함께 고이 간직하소서.

 

두향은 퇴계 선생의 사망 소식을 듣고

그의 집이 보이는 안동의 뒷산에 올라 사흘을 울다가

단양으로 돌아가 강선대에서 투신하여 생을 마감했다.

 

이런 슬픈 사랑 이야기를 후대에 널리 알린 이가 있다.

1974년 조선일보에 <명기 열전>을 게재하기 시작한 정비석 작가가 그다.

두향의 묘를 뒤지고 찾아낸 뒤, 그 앞에 묘석을 세웠다.

 

(사실, 두 사람의 관계를 잘 알고 있던 퇴계의 제자 이산해(영의정까지 역임)와

그의 후손들이 두향의 묘를 계속 관리하고 제사까지 올려준 덕분에

정비석 작가가 그것을 찾아낼 수 있었다고 한다.

 

1985년 충주댐 건설로 묘가 수몰될 위기에 처하자 퇴계의 후손들이 나서서

현재의 장소로 이전했다니, 그 후손들도 알게 모르게 두향을 신경 써 온 셈이다.

 

하기야, 이곳 파주에는 이에 못지 않게 절절한 관비와의 사랑 주인공인

최경창과 홍랑의 묘가 있다. 기생의 묘를 가족 묘지에 당당하게 모신

첫 번째 경우라 할 정도로, 홍랑의 위법 서울행과 간호, 그리고 시묘살이는 유명하다. )

 

그나저나 내가 삼천포로 빠져서

시방 어디로 가 있는 겨... ㅎㅎㅎㅎ [2014.1.10]

                                                                           -溫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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