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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본 나의 대머리 발전사 = 머리털 소멸사

갓 쓰고 서울 오다

by 지구촌사람 2022. 11. 20.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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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본 나의 대머리 발전사 = 머리털 소멸사

젊은(?) 시절, 내 지붕(머리)을 덮고 있던 녀석들이 거의 돼지털 수준으로 무성하고 뻣뻣해서 출근 전 매일 아침 빗과 헤어드라이어로 강제로 진압(?)해야 얌전해질 정도였다고 하면 믿지 않는 이들이 대부분. 그래서 나는 그 당시 머리털 손질을 '지붕 공사'라 했을 정도였음에도.

하지만, 그렇다는 사실을 증빙해주는 증거물들을 내가 확보했다. 가장 가까이서 찍은 사진들을 찾아냈다. 내가 그런 반명함판형 사진들을 찍은 건 거의 모두 여권용...

헤아려 보지는 않았지만 지금까지 나는 20개도 넘는 여권을 발급받지 않았나 싶다. 80년대까지도 일반인은 1회 해외여행 후 여권을 반납하거나 무효화되는 '단수여권'이었다. 즉 유효 기간 내에는 내내 몇번이고 쓸 수 있는 지금과는 달리(그걸 '복수여권'이라 한다. 당시는 외교관과 특정 고위직 일부에게만 발급) 여행 때마다 매번 여권을 발급받아야 했다. 70년~80년대 초까지는 반드시 여권을 반납해야 했고, 그 뒤로는 VOID(무효)라는 글자를 뻥뻥 뚫은 뒤 돌려주는 제도로 바뀌었다. (여권 회수가 꼭 필요한 것은 여권은 만료됐지만 그 안에 있는 일부 복수비자의 유효기간이 남아 있을 때는 그 구여권이 꼭 필요해서다. 미국의 복수 비자 유효기간이 10년인 것이 대표적. 그럴 때는 구여권과 신여권을 합쳐서-호치키스 등으로 찍어 붙여서- 갖고 다닌다.)

 

사진: (좌) 나의 구여권 뒤 표지와 신여권 첫 표지를 찍어붙인 모습. (우) 이런 붙이기 여권은 여권 커버로 싸면 갖고 다니기에 편하다. 이 여권 커버는 단골 여행사 등에서 서비스로 제공한다.

내가 자주 여권을 재발급받았던 것은 여권 안의 입출국 스탬프가 찍히는 곳과 비자란이 꽉 차곤 해서... 심할 때는 1년 중 150일 이상 밖으로 떠돌기도 했다. 어느 날은 태국 방콕을 당일치기로 다녀온 적도 있고, 크리스마스나 연말연시를 공항 라운지에서 보낸 일도 여러 번.

사진: 1992년 겨울

바로 이 사진. 30여 년 전인 1992년 겨울에 찍은 여권용 사진이다. 겨울철인데도 당시에 나는 남자들이 하나같이 입어대는 감청색이나 까만색이 싫어서 과감히 여름철 옷감 색인 회청색을 택했다. 물론 맞춤복 시절. 이때까지만 해도 지금과는 달리 헛바람이 잔뜩 들어서 넥타이 하나까지도 내가 직접 골랐다.

당시 외국 합작사의 부이사(deputy director)였는데 휘하의 네 과장 중 둘은 연상, 하나는 동갑, 하나는 어깨동갑이었다. 게다가 동안인 편이어서 동갑내기 과장과 외부 모임에 가면 그를 상석으로 인도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런 소릴 하면 웃겠지만, 전 직원 행사 때마다 마이크를 잡아대던 시절인 데다(영어와 한국말을 즉석에서 병행해야 해서) 직원들이 실세 간부로 오인(?)도 하고 인기도 좀 있는 편이어서, 해마다 직원들이 뽑는 베스트 드레서 3인에 들기도 했다. 내가 회장을 맡고 있던 산악회 회원은 600~700명으로 최대 규모였는데, 산행 때마다 관광버스를 15대 가까이 부르곤 했다. 그 바람에 삼성동 사거리의 무역센터 앞에서부터 현대백화점까지 그 버스들이 점거하여 강남서 교통경찰들이 그때마다 특별히 협조하기도. 모든 강남서장들과 친하게 지낸 덕에... ㅎㅎ히.

암튼 저렇게 단정한 모습이 되기 위해서는 최소한 5분 이상 헤어드라이로 머리털을 진압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출근 전 세면장에 머무는 시간이 10여 분 이상이었던 건 그 때문.

 

사진: 1994년과 그 직후 시절

그곳에서 친노조 간부로 몰리는 바람에(실은 그저 모든 직원을 감싸는 '친직원파'였을 뿐인데) 모 재벌 기업의 해외사업 담당 임원으로 옮겨 일하게 되면서 지붕 공사(머리 다듬기)를 좀 더 단정히 했다. 동안이어서 사람들 앞에서 조금이라도 더 무게를 잡아야 일이 되는 터라.

그래도 저런 단정한 모습은 여권용이었고, 실제로는 덜 단정했다. 그 증거 중 하나가 해외 출장 중 찍은 아래 사진.

사진: 1994년 그랜드 캐년. 맨 왼쪽이 나. 맨 오른쪽이 동갑내기 대학 동창. 이 사진 중 누가 최연장자일지 (동갑이면 생일이 앞서는) 맞혀보라고 하면 아무도 정답자가 없었다. ㅎㅎㅎㅎ

사진: 2000년

그러다가 머리숱이 확 줄어든 건, 1998년 전업작가로 전업하면서부터... IMF가 터지고 해외사업 총괄 임원이던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면서도 겉으로는 책임을 지는 용단을 내린 비장한 사람의 모습으로, 그룹 회장의 만류도 과단성(?) 있게 뿌리치고 내 집에 둥지를 틀었다. 그러고서 거의 하루 20시간을 글쓰기에 매달렸다. 원고지 500매를 넘기는 경장편을 한 달 만에 써내기도 했고, 장편 서너 편까지 긁적였다. 한마디로 원고 공장이었고, 남들이 10년 이상 걸려야 해낼 분량을 생산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베갯머리에 머리털이 제법 떨어진 것들이 보였는데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정수리 부근의 머리털들이 벌목한 듯이 빠져 나가는 원형탈모증이 생긴 걸 그땐 몰랐다. 하기야, 우리 집안 대대로 대머리는 없었고, 정수리 부근은 보이지도 않으니까.

훗날에야 비로소 머리를 쥐어짜면서 글쓰는 일에 매일 장시간을 장기간 투자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실감+절감했다. 그걸 주흥사의 '백수천자문(白首 千字文)을 빌려 요약한 게 다음의 글이다. 하룻밤 사이에 천자문을 완성하자 머리가 하얗게 세서 그 앞에 붙은 게 '백수(白首)'다: https://blog.naver.com/jonychoi/221661715951

사진: 2003년.

하루 20시간 글쓰기를 접고 조직 생활자로 돌아간 뒤로, 머리숱 줄기가 멈췄다. 하지만, 늘지는 않았다.

사진: 2021년

작년에 여권이 만료되었기에 새로 발급받기 위해서 시청엘 갔는데, 사진이 큼지막한 반명함판인지라 그걸 잘라서 쓰면 될 듯했는데, 담당 직원이 여권용 사진으로 맞춤 사진을 찍어오라 해서 근처의 사진관에 들러 대충 찍은 것.

머리숱도 줄고 힘도 빠져서 이른바 '머리털 널기'를 해야 대머리가 조금 감춰진다. 방송 등에 나갈 때면 그래도 신경을 써야 하는 터라 가발을 마련한지도 10여 년을 넘긴다. 그때 맞춤 가발 가격이 백만 원을 훌쩍 넘긴다는 걸 알았다. 한 올 한 올 인모를 심는 작업이라서 그렇단다.

사진: 가발 착용 후의 모습

이제는 내 또래 친구들을 보면 자연 탈모가 진행된 이들이 2/3를 넘긴다. 그걸 보면서 이제야 비로소 내 머리털과 내 늙어감이 엇박자를 내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자연 탈모와 노화는 이웃 친구다. 가발을 사용하지 않은 지도 3~4년을 넘긴다.

탈모와 관련하여 요즘 유행하고 있는 게 미녹시딜 제재다. 그걸 쓰면 나와 같은 긴장성(비체질성) 원형탈모를 방지할 수 있고, 새 머리털을 나게 할 수도 있다고 선전한다. 내 주변에서 그 성공 사례들을 자꾸만 과시하는 바람에 나도 이달부터 그걸 자기 전에 바르고는 있지만, 크게 기대하지는 않는다. 지금도 완전한 민대머리가 아닌 것만으로도 기꺼운 일이므로... 숱 줄기나 모발 섬세화/연질화 역시 자연스러운 늙기의 일부가 아니겠는가.

-온초 최종희(19 Nov.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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