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에는 그것을 아는 자, 사랑하는 자, 보는 자, 모으는 자가 있다. 한갓 쌓아두는 것이라면 잘 본다고 할 수 없다. 본다고 해도 어린아이가 보듯 한다면 칠해진 것 이외는 분별하지 못하는 것이니 아직 사랑한다고는 할 수 없다. 안다는 것은 그림의 형식과 화법은 물론이고 그 정신까지 알아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림의 묘(妙)란 사랑하는 것, 보는 것, 모으는 것이 아니라 잘 안다는 데 있다. 알게 되면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면 참되게 보게 되고, 볼 줄 알게 되면 모으게 되나니 그때 수장하는 것은 한갓 쌓아두는 것이 아니다. 석농은 그림을 알아보는 것에 묘하여 수집한 그림들 한 폭 한 폭마다 제평해 놓았는데 화격의 높고 낮음, 고아함과 저속함, 기이함과 바름, 죽은 것과 생생함을 논한 것이 마치 흑백을 나누는 듯했다. 그림을 깊이 아는 사람이 아니면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석농과 가까이 지내게 된 것은 그림 때문이 아니라 그림을 사랑하는 그의 태도에 있었다. 『석농화원(石農畵苑)』에 부친 유한준의 발문
이 글은 석농(石農) 김광국(金光國·1727~97)이 평생 수집한 회화를 화첩으로 꾸며놓고 『석농화원(石農畵苑)』이라 이름 짓고는 저암(著庵) 유한준(兪漢儁·1732~1811)에게 부탁하여 받은 발문이다. 유한준은 기계 유씨(杞溪 兪氏) 명문가 출신으로 진사시에 합격한 뒤 김포군수 등을 역임하고 형조참의에 이르렀던 문인이다. 그의 관직은 비록 높지 못했지만 당대부터 문장가로 이름을 날려 연암(燕巖) 박지원(1737~1805)과 쌍벽을 이뤘다는 평까지 받고 있다. 조선 후기의 서양기행문인 『서유견문』을 쓴 유길준(1856~1914)의 5대조이기도 하다.
나는 조선시대 화론(畵論)을 연구하면서 서화에도 일가견을 갖고 있던 유한준의 『저암집』을 읽다가 뜻밖에도 정조시대 최대 수장가였던 석농 김광국 컬렉션에 부친 이 글을 읽고 큰 감명을 받았다. 그것은 석농과 유한준의 관계라는 미술사적 의의도 의의였지만 이 글 자체가 워낙 명문이어서 가슴속 깊이 새기게 되었다.
그리고 10여 년쯤 지났을까. 갑자기 생각에도 없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창비)를 쓰게 됐을 때 책의 서문에 ‘아는 만큼 보인다’는 명제를 내걸면서 “알면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참되게 보게 되고, 볼 줄 알게 되면 모으게 되나니 그때 수장하는 것은 한갓 쌓아두는 것이 아니다”라는 문장을 인용하고 싶었다.
그러나 규장각에서 복사해 온 그 원문을 찾을 수 없었다. 지금 같으면 『한국문집총간』도 있고, 인터넷에서 ‘한국고전종합 데이터베이스’로 들어가면 바로 검색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때는 그런 문명이 없었다. 내 비좁은 연구실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어지러워 한번 못 찾으면 대검 중수부의 유능한 수사관이 와도 못 찾게 되어 있었다.
원고 마감은 다가왔고 이 글을 포기하기는 싫어 그냥 내 기억대로 쓴다는 것이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라고 했다. 이렇게 쓰고 보니 그럴듯했다. 그러나 내 인용이 정확하지 않을 것 같아 ‘조선시대 한 문인의 글’이라고만 했다. 게다가 유한준은 내 이름과 비슷하고 같은 기계 유씨여서 조상을 내세운다고 할까 봐 밝히기도 꺼려졌다.
『석농화원』으로 말할 것 같으면 조선시대 회화사에서 전설적인 화첩이다. 그 전모가 몇 책 몇 점이나 되는지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 간송미술관에 한 권(28점), 선문대박물관에 한 권(32점)이 전하고 있으며, 그 밖에 파첩되어 낱폭으로 흩어진 것이 7점 등 모두 67점이 확인됐을 뿐이다.
이 『석농화첩』에 들어 있는 그림들은 한결같이 명화라 할 만한 수준 높은 작품이다. 그는 동시대 화가뿐 아니라 조선 전기의 무낙관 그림도 고증하여 화가를 밝혀 놓았기 때문에 조선시대 회화 감정에 절대적인 기준이 되고 있다.
그런데 뜻밖에도 지난 연말(12월 21일) 서울 인사동 화봉갤러리에서 열린 고서 경매에 『석농화원』 목록집이 출품됐다(본지 2013년 12월 10일자 2면). 미발간 육필본인 이 목록집을 보니 『석농화원』은 무려 10권에 수록 작품 수가 280점에 이른다. 본첩(本帖)이 4권, 보유(補遺)가 2권, 속(續)·습유(拾遺)·별집(別集)·부록(附錄) 등이 각 1권이다.
자세히 살펴보니 선문대 소장본은 본첩 제4권의 목록과 일치하고, 간송 소장본은 습유에 해당하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유명한 화첩으로 조선 초부터 후기까지 78점의 그림이 수록된 『화원별집(畵苑別集)』은 다름 아닌 『석농화원』의 별집을 기본으로 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석농화원』에는 중국 그림은 물론이고 일본의 우키요에(浮世繪), 네덜란드의 동판화도 실려 있어 그의 견문이 얼마나 넓었는지 보여준다.
『석농화원』 서문에는 박지원과 홍석주의 글이 들어 있고 작품마다 석농이 지은 화평을 자필, 또는 강세황·이광사·황기천·유한지·박제가 등 당대 문사의 글씨를 받아 붙인 것이라고 정확히 기록돼 있다. 두 아들이 대필(代筆)한 것도 있다. 참으로 대단한 기록이다.
석농은 7대에 걸쳐 의관(醫官)을 지낸 부유한 중인 집안 출신으로 그 역시 수의(首醫)를 지냈다. 그는 1776년에 연행사신을 따라 중국에도 다녀왔는데 우황을 비롯한 중국 의약품의 사무역(私貿易)으로 부를 축적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재력을 바탕으로 많은 작품을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
유한준이 이 발문을 쓴 것은 1795년, 석농 나이 69세였고 그로부터 2년 뒤인 1797년 석농은 71세로 세상을 떠났으니 그는 생애 마지막 순간에 이 기념비적 화집을 세상에 남겨놓았던 것이다.
사람이 돈을 버는 것은 능력이면서도 운세이다. 그러나 그렇게 모은 돈을 어떻게 쓰느냐는 자신의 선택이다. 『석농화원』이 없었다면 석농의 인생은 무엇이었을까. 세상을 풍요롭게 하는 데 이바지한 석농의 삶은 한국문화사의 위인으로 기려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글=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
◆ 유홍준=1949년 서울생. 서울대 미학과, 홍익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성균관대 대학원 동양철학과 졸업. 1981년 신춘문예 미술평론으로 등단한 뒤 미술평론가로 활동하며 민족미술협의회 공동대표, 제1회 광주비엔날레 커미셔너 등을 지냈다. 영남대 교수 및 박물관장, 문화재청장 등을 거쳐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로 정년퇴임하고 석좌교수로 일한다. 저서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화인열전』 『완당평전』 『명작순례』 등이 있다.
* 오늘 대한 글, 내 마음에 와 닿은 글이다.
유 교수에게는 마음 빚이 있다.
오래 전 그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읽고, 그의 유명한 명제
'아는 만큼 보인다'를 멋대로 가져다가
'세상은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본다'를 읊조리며 살았다.
그러다가 거기에 아래의 말을 덧대고 있다.
"사람은 그가 읽어낸 것, 읽고 있는 것들대로 만들어진다
(You are what you have read, and are reading)".
내게도 내 맘속에 자리 잡고 있는 명문장들이 몇 개 있다.
여기서 죄다 드러내기엔 때도 장소도 걸맞지 않다.
하여, 독후감을 겸하여 롱펠로우의 시구 하나로
오늘 마무리나 대충 하련다.
“그대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라. 그러고 나서 써라.”
- 溫草 [2014. 1.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