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한마디 My Words 205]
지식과 무지가 백병전을 벌이면 지식이 백전백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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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과 무지가 링에 오르면[백병전을 벌이면] 무지가 백전백승한다.
무지막지한 힘과 고집(오기)만 있으면 되니까.
-溫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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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a hand-to-hand fight is held between knowledge and ignorance,
ignorance wins every fight. In there all needed is an ignorant and
unyielding power.
-Jony Choi [Aug.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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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推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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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논쟁의 뒤에는 누군가의 무지함이 있다(Behind every argument is someone's ignor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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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유태인으로서는 최초로 연방법원 대법관에 오른 루이스 D. 브랜다이스(1856~1941)의 말인데요. 제가 개인적으로 무척 존경하는 분이기도 합니다. (이름만 보면 여성으로 착각할 수도 있는데 남성분이십니다. 하하하). 시대의 선각자였다고나 할까요. 경제적 민주주의를 주장하기도 했지만, 뭣보다도 사생활 권리를 법적으로 보호해야 할 가치로 격상시킨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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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의 생각이 얼마나 선각자적이었는지 사후 30년이 지나서 그분의 편지들을 모은 서한집이 출간되기도 하고, 심지어 2010년에는 <권리로서의 사생활 (The Right to Privacy)>이라는 책자로 묶여 새롭게 조명을 받기도 했죠. 법도 그 근본은 인간 중심이어야 한다고 생각한 멋진 휴머니스트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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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보니, 모든 소송의 이면에는 일방의 무지가 기본적으로 작용한 탓으로 생각하고, 판결을 통해서 그 무지를 바로잡는 데에 애를 썼습니다. 하지만, 무지라는 것이 한 가지 경험이나 어느 순간의 깨달음 하나로 한꺼번에 말끔히 해결되진 않지요. 오죽하면, 소크라테스는 ‘유일한 선은 앎이요, 유일한 악은 무지다 (The only good is knowledge and the only evil is ignorance)’라고 했을까요. 하기야, 그는 그 무지(無知)한 대중에 게 목숨까지 빼앗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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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무지의 실물을 정면으로 대하면, 답답해집니다. 한없는 무력감을 느낍니다. 게다가 무지는 완고한 고집과 한 이불을 덮고 지내고, 한솥밥을 먹습니다. 그래서 보통 때는 그런 무지 앞에서 물러나와 혼자서 중얼거립니다. ‘자기의 무지를 모르는 것이 무지한 사람들의 고질병이다(To be ignorant of one's ignorance is the malady of the ignorant.)’라고요. 저의 잡문 '오만과 그릇된 지식, 그리고 코미디'[May 2012]에서 토로했던 말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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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제가 다 안다고 으스대는 쪽은 결코 아닙니다. 몰라서 궁금해지면 즉시 거기에 매달리려 드는 단순한 호기심파일 뿐입니다. 미국 역사상 두 대통령(애덤즈/먼로)에 걸쳐 12년간이나 최장수 법무장관을 지낸 윌리엄 워트(William Wirt)가 이런 말을 했죠 : ‘궁금증을 풀고 싶다면 어느 주제에 대한 것이든 호기심이 발동하는 그 순간을 잡아라. 그 순간을 흘려보낸다면 그 욕구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수 있고 당신은 무지한 채로 남게 될 것이다(Seize the moment of excited curiosity on any subject to solve your doubts; for if you let it pass, the desire may never return, and you may remain in ignorance.)’. 그는 그러한 태도를 유지한 덕에 나중엔 정치가를 거쳐 저술가로도 활동하게 되지요. 저는 그런 워트와 같은 분을 좋아하고 따르려 하는 쪽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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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 앞에서 엄청 답답해한 사람으로는 미국의 날카로운 저술가 돈 우드(Don Wood. 1945~ )도 있는데요. 그는 그런 무지에게 희망을 주기도 했습니다. 그가 논쟁 중 그것이 단순한 소모전일 뿐임을 알게 되자, 그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둔함은 영원하지만 (그래도) 무지는 고칠 수 있는데...(Stupid is forever, ignorance can be fixed).’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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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는 무지의 핵심을 꿰뚫으면서도 관대한 편이었습니다. 무지와 지식을 이렇게 구분했죠. ‘모르면 모른다고 하는 것, 그게 곧 진정한 지식이다(不知爲不知 是知也).’라고요. 군더더기 없이 멋진 말이죠? 이런 말에 감동을 받는 건, 동서양에 구분이 있을 수 없지요. 그래서 이 말은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 바뀌어 서양 여러 나라의 대학 이곳저곳에 걸려 있습니다. 학생들에게 배움의 목표와 방법을 은근히 겁주는(?) 말이기도 한데요, 어떤 데는 라틴어 표기로 바뀌어 적혀 있기도 합니다 : ‘진정한 앎은 자신이 얼마나 모르는지를 아는 것이니라(Real knowledge is to know the extent of one's ignor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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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도서관엘 갔더니 수많은 명언을 남긴 윌 듀런트의 말, ‘교육은 우리 자신의 무지를 점차 발견해 가는 과정이다(Education is a progressive discovery of our own ignorance.)’를 오름 계단의 라이저(계단의 수직면)에 적어 놓았더군요. 듀런트는 (William James Durant. 1885–1981) 교사인데도 11권짜리의 ‘문명 이야기(The Story of Civilization)’를 40년간에 걸쳐 부부교사인 아내와 함께 펴낸 전설적인(?) 인물이죠. 게다가 그는 1세기에서 딱 4년만 모자라게 장수한 이이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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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는 결코 진정한 힘이 될 수 없습니다. 되어서도 안 되고요. 동서양을 관통하는 유명한 법언(法諺)에 ‘법을 몰랐다고 해서 무죄가 되지 않는다[통하지 않는다]’가 있을 정도니까요. ‘Ignorance does not guarantee innocence’라거나 ‘Ignorance of the law excuses no one’라고도 하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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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진정으로 무지한 상태로 남아 있고 싶어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냅둬. 난 이대로 살다 죽을 테니까’ 소리를 흔히 외쳐대는 사람들조차도 실은 그것이 자신의 똥고집이 시킨 말이라는 걸, 속으로는 인정하죠. 자신의 고집을 합리화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또 다른 고집 세우기일 뿐, 지식 앞에서 자신이 옳다고 내세울 수 없다는 건 그 자신이 더 먼저 압니다. 다만, 그 지식이란 게 진정한 자연의 법칙과 합치되는 것이어야겠지요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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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논쟁에서 위와 같은 고집을 부리는 사람들일수록 실은 내적인 전투를 더 많이 벌이는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오프라 윈프리는 그걸 아주 고상하게 ‘이성이 옳다고 인식하는 것과 감성이 요구하는 것 사이의 전투(A battle between what the brain knows is right and what the heart knows it wants)’라 표현했지만, 실은 (올바른) 지식과 심정적 고집 사이의 전투라 해야 할 것들일 때가 대부분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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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엊그제 제가 그 전투의 현장에 있었습니다. 침대에 누우면 자신과 나란히 누워 있는 나부(懦夫)와 그녀의 무성한 음모가 유난히 눈에 띄는 그림을 벽에 걸어놓고 지내는 화가 하나와의 웃기는 소모전이었죠. 여름휴가를 맞은 그의 두 조카가(그중 하나는 군 복무 중 휴가를 아빠의 휴가 스케줄에 맞춰 내려왔을 정도의 효자) 그 침대에 누워 있었고요. 그중 더 착하고 내향적인 큰조카와 얘기를 하면서 미국의 고교 졸업생 무도회(the senior prom) 얘기를 예를 들기도 했는데, 나중에 그걸 계속 트집 잡으며 별소리를 다하더군요. 심지어 제 정면에 대고서요. ㅎㅎㅎ. 그것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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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야 고교 졸업 후 가장으로서 바삐 살아온 그가 prom party의 앞뒤 얘기(현실)를 알 턱이 없지요. 그날을 위해 몇몇 남학생들은 기를 쓰고 두세 달의 용돈을 떼어 모아 리무진 한 대를 빌린 뒤 기사를 놀러 보내고 나서 그 차 안을 커플 두세 팀이 차례를 정해 공유해 온 역사가 이미 50년도 넘기고 있다는 걸요. 그럼에도 그 학생들 중 문제아가 된 사람은 아주 드뭅니다. 스티브 잡스처럼 그 시절에 낳은 아이를 20여 년씩이나 친생자로 인정하지 않은 못된 아비 족속 극소수를 빼고는요. 그 리무진 속 사랑 얘기는 지금 아프리카 아이들을 위해 한 해에 십만 불 이상의 기부금을 보내고 있는 소규모의 천만 장자가 들려준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지금도 저의 페북 친구로 남아 있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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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을 같이 방문한 제 친구가 맨 처음 만남의 자리에서 우리 나이들을 밝혔음에도 8년이나 연하인 그는 우리들의 존대어 사용을 즐기는 듯했습니다. 그 형과 10년 차이인 동생의 소개로 우리는 그 화가를 대면한 것이었는데, 그 동생도 실은 내 맏아들과 겨우 10년 차이밖에 나지 않죠... 그렇다고 ‘민증’을 까서 내밀며 어쩌자는 게 아니라, 그도 우리와 똑같은 멍청도 사람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습니다. 멍청도에서는 동성 간에 몇 살 차이만 나도 개인적인 자리에서는 존대어 대접을 거북스럽게 생각하고 ‘말 (내려) 놓으십쇼’ 소리를 해대기 마련인데, 그는 끝까지 단 한 번도 우리에게 그런 소리를 하지 않더만요. 뒤늦게 그런 생각까지 떠올라, 기억에 새겨진 것이긴 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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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간 그와의 부딪침 탓에 친구와도 부딪쳤습니다. 그동안 의견 차이가 나면 그는 ‘냅둬. 난 이대로 살다 죽을 테니까’ 라며 고함을 치곤 했습니다. 그럴 때면 항상 괴상한 꼬부랑 토막말이 나오곤 했죠. “You yourself. My. My Way!”라고요... 그 말 뒤론 침묵이 이어지면서 화면은 F.O.를 거쳐 F.I.로 이어지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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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 날 친구와의 헤어짐에서는 아주 밝은 색조의 F.I.가 펼쳐졌지만, 그의 안 역시 우리들의 그림대로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어제와 그제 이틀 동안 제게 참으로 많은 생각이 들었고, 그 느낌은 아주 오래도록 굵고 짙게 남아 있을 듯합니다. 무지에 관한 생각이 떠오르면 늘 그 기억이 함께 떠오를 것만 같습니다. 그런 기억들은 참 가슴 아픈 것으로 남게 마련이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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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다시 한 번 더 확실하게 다지게 된 생각. 날 음식과 같은 날 무지 앞에서는 입도 벙긋하지 않는 게 최선책이라는 거죠. 하기야, 글쟁이는 글로만 말을 하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기도 합니다. 저술가가 직업의 명칭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어느 땐 잊기도 하는데, 그게 복인지 아닌지 헷갈릴 때 더욱 그러네요. 직업윤리와 취업 규칙 사이에서도 헤매고요. 제가 달리 멍청도 출신답게 멍청이이겠습니까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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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간 제가 가진 지식 역시 쥐꼬리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한 가지 분명하게 말할 수는 있습니다. 원자력의 아버지 페르미가 이랬죠. ‘(어쨌거나) 무지는 결코 지식보다 낫다고 할 수가 없다(Ignorance is never better than knowledge).’ 저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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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지에 관하여 도처에서 고민하고 무지와 싸워온 선각자들이 인류 문화사를 이끌어 왔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닌데요. 저는 아이작 아시모프와 빌 게이츠, 그리고 마하트마 간디와 아인슈타인의 촌철살인을 마지막으로 인용하고 싶군요. 아시모프는 러시아 출신의 SF 작가인데, 제 아는 한 최근세 작가로는 최대량의 저술을 남겼습니다. 500종 이상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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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식이 문제를 일으킨다 해도, 우리가 무지로써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니다 : 아이작 아시모프
○ (인류 역사에는 언제나 무지가 있어 왔다. 그리고) 무지는 앞으로도 늘 있다. 그 무지가 (사람들을) 두려움으로 이끈다. (그게 문제다) (There will always be ignorance, and ignorance leads to fear.) : 빌 게이츠.
○ 무지를 숨기는 건 그것을 늘리는 일이다. 무지함에 대해 정직하게 고백하면 머지않아 그 무지가 확실하게 줄어드는 희망적인 싹수가 된다 : 마하트마 간디
○ 절대로 네 자신의 무지를 줄여서 과소평가하지 마라 : 알버트 아인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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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溫草 [Aug. 2018]
[한마디 207] 체급이 다른 사람과는 링에 오르지 말라 (0) | 2018.08.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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