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사에 연수 주제, 일정 등 일임, 보고서까지 대필시키는 경우도
4성급 호텔-최상급 버스-고가 식사, 연수 일정 고급패키지 여행 연상케
“준비 없이 왜 이렇게 자주 오나” , 현지 정부기관조차 혀 내둘러
네덜란드에서 활동 중인 여행 가이드 A씨는 지난해 헬데를란트주의 한 대학 방문 당시를 생각하면 지금도 헛웃음이 나온다. 당시 ‘미래 전략’을 주제로 연수를 진행하기 위해 네덜란드를 찾은 한 광역시 공무원 10여명은 이 대학에서 시범 운영 중인 자율주행차를 보기로 돼 있었다. A씨는 이들을 이끌고 일정대로 예정 시간에 학교를 찾았지만, 무슨 영문인지 자율주행차는 이미 수개월 전 시범 운영을 중단한 상태였다. 관찰할 자율주행차, 이를 설명할 게시물 등 어떤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원래라면 여행사나 공무원 쪽에서 대학 측과 전화와 이메일로 방문 내용을 수 차 례 점검해 확답을 받고, 학교 측에서 이들을 맞이하는 게 상식이다. 황당한 상황에 공무원들은 불만을 표시했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고 결국 이날의 유일한 일정을 포기한 채 근교의 화훼축제로 향했다. “섭외를 담당한 여행사도, 연수를 온 공무원 측도 사전에 확인을 제대로 하지 않았던 거죠. 자율주행차 원리 등을 설명하려고 혼자 공부해왔지만 헛수고만 한 셈입니다.”
모범공무원 격려, 선진국 비교시찰ㆍ벤치마킹, 장기근속 연수 등 각종 명분으로 진행되는 공무원 해외 연수(국외여행)가 설계부터 실행, 사후보고까지 엉망으로 진행되고 있다. 여행사에 모든 것을 위임하는 이른바 ‘턴키’(Turn keyㆍ일괄 수주 계약)방식의 무성의한 준비와 사전 학습 없는 형식적 기관 방문에 이들을 맞이하는 현지 정부 기관조차 혀를 내두르는 현실이다. 본보가 만난 독일ㆍ영국ㆍ스웨덴ㆍ네덜란드 등에서 활동 중인 현지 통역ㆍ여행 가이드 5명은 이들 공무원 방문단으로부터 수입을 얻고 있으면서도 “국제 망신 없는 제대로 된 연수가 필요하다”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은 신원이 공개될 경우 일감이 크게 줄어들 것을 우려해 부득이 익명 취재를 진행했다.
여행사가 설정해주는 주제가 곧 정책 연수의 주제로 둔갑하고, 결과 보고서마저 대행해주는 무책임한 관행에 공무원들의 역량을 끌어올리고 국제 감각을 넓혀 주자는 각종 해외 연수와 방문의 취지가 무색해지고 있다. 지방재정365에 따르면 공무원 연수에 투입되는 세금(국제화여비)은 2016년 기준 연간 869억9,500만원에 달한다. 해마다 국민참여예산(약 800억원)에 해당하는 막대한 돈이 투입되고 있음에도 공무원 연수 시스템이 부실하기 짝이없어 시급한 정비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맡기면 끝, 최상급 대우 요구도
공무원 해외 방문 및 연수는 애초 준비 과정부터 목적 달성이 어려움을 짐작할 수 있다. 22일 최근 1년간 조달청 나라장터(국가종합 전자조달 시스템)에 올라온 지자체ㆍ교육청 등의 ‘국외연수’ 입찰 공고 내 과업지시서를 무작위로 분석한 결과, 여행사들이 교통ㆍ숙박은 물론 방문 기관 선정과 관광(문화탐방)을 포함한 구체적인 일정을 총괄하는 경우가 상당수였다. 능동적으로 해당 공무원이 배우고 싶은 분야나 방문기관을 정하기 보다 비전문가들이 짜주는 일정대로 다녀오는 게 일반적인 관행인 것으로 드러났다.
실제 지난 7월 경상북도교육청이 여행사를 입찰하기 위해 나라장터에 올린 ‘2018 공무원 노사 역량강화 국외 연수’의 과업지시서를 살펴보면 싱가포르 방문 세부일정표(3박5일)에는 ‘일정 중 현지 교육기관 2교 방문’이라고 적혀 있다. 세부 설명으로 현지 초ㆍ중등 교육기관으로 발주자와 협의할 수 있다고만 나와 있다. 사실상 불분명한 연수목적 아래 그럴듯한 기관 섭외를 여행사 측에 떠넘기는 수동적인 방식이다. 반면, 이 과업지시서 상 일정에는 국립식물관 보타닉 가든, 중식 후 차이나타운, 말레이빌리지, 아랍스트릿 방문 등 교육과 무관한 구체적인 장소와 지명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다. 짧은 일정 중 하루는 통째로 관광일정이며 ▦중심가의 4성급 호텔 ▦최상급 전용버스 ▦한번 식사에 20달러(2만원) 이상 등고급 패키지여행을 연상케 하는 항목들이 명시됐다. 이같은 호텔, 버스 등의 조건은 다른 기관의 과업지시서에서도 복사한 듯 거의 동일하게 적혀 있다.
아예 연수 자체에 관심 없다는 듯 연수 주제마저 여행사에 위임하는 경우도 있다. 공무원 연수를 전문으로 담당하는 한 여행사 대표는 “가고 싶은 국가만 달랑 던져준 뒤 알아서 정책 주제를 짜 달라는 요구를 받기도 한다”라며 “연수 주제는 없고 어딜 가긴 가야 하는데 어떻게 하냐고 문의가 오면 일정부터 시작해서 미국 어느 곳을 방문하면 좋을 것 같다든지 먼저 제안을 하는 사례도 많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공무성격이 강한 곳도 있지만 인센티브 성격으로 주어진 연수는 아예 관광일정을 더 넣어달라는 등 요구도 가지각색”이라고 덧붙였다.
공무원 해외연수를 전문으로 하는 여행사 운영 블로그 등을 보면 아예 정책 연수의 주제와 방문 기관을 상세하게 소개하기도 한다. 모 여행사 블로그는 공무정책연수 카테고리 중 ‘행정혁신’ 분야를 소개하며 ‘기관과 부서에 상관없이 거의 모든 공무원에게 사례 적용이 가능하다’라며 방문 가능한 기관명을 상세히 나열하고 있다. 세종시의 한 여행사는 ‘공무원 출장’ 카테고리에 태국을 소개하며 ‘동남아 코스 중 관광과 연수 두 가지를 체험할 수 있다’라며 특정 비닐하우스 농장, 청각 장애인 협회 섭외가 가능하다고 적어놨다.
이 같은 관행은 일본과 비교해도 대조적인 모습이다. 일본 중앙부처의 한 공무원은 “(개별 예약이 아니라) 여행사를 이용하는 것은 오직 비용 절감이 목적”이라며 “항공권 등 교통과 숙박에서 여행사가 더 저렴하게 공급할 수 있을 때만 맡길 수 있으며 그 외 업무는 전혀 관여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북유럽 전문 가이드 B씨는 “이웃 국가와 대륙으로 연결된 스웨덴은 쓸데없는 국외연수 개념이 아예 없을뿐더러 의원들도 업무 일정을 짤 만큼 공직 사회에서 능동적으로 연수 및 출장 관련 일정을 직접 관리하는 게 일반적”이라고 말했다.
부실 섭외ㆍ무심한 준비로 국제 망신
문제는 위임 받은 여행사 중 일부가 섭외를 부실하게 해 몇 안 되는 공식 방문 일정마저 차질을 빚게 된다는 점이다. 영국 런던의 통역원 C씨는 “영국의 복지 관련 기관이 연수 일정에 있어 찾아갔지만 알고 보니 여행사 측과 해당 기관의 조율미비로 섭외가 안 됐다”라며 “당일 갑자기 견학을 시켜달라고 사정해봤지만 거절당했고 부랴부랴 유사 기관을 찾아봤지만 결국 실패했다”라고 말했다. 매번 비슷한 주제로 하루가 멀다고 찾다 보니 현지 기관들의 불만도 터져 나온다. 10년 경력의 독일 가이드 D씨는 “일주일이 멀다 하고 같은 주제로 서로 다른 지자체와 기관이 동일한 곳을 방문하는 일도 다반사“라며 “독일 정부기관의 한 홍보팀장은 개발도상국도 아닌데 왜 한국은 이렇게 연수를 자주 오느냐라며 물었고 또 다른 기관에선 한국은 연수 내용을 공유하지 않는 것 같다고 해 민망한 적이 있다”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늘 무료로 브리핑을 해주던 한 독일의 유명 연구기관이 수년 전부터 한국 방문객들을 대상으로 수수료 수십만원을 받기 시작했다”라며 “대놓고 이유를 묻진 못했지만 인력 낭비라는 생각이 들어 방침을 바꿨다는 소문이 돌았다”라고 설명했다. 전북지역의 한 여행사 대표는 “교육청에서 덴마크를 간다고 하면 일반적으로 지정된 창의성으로 유명한 학교에 가게 된다”라며 “연수 중엔 현지 국가를 거꾸로 또는 뒤집어 보는 등 새로운 시각을 갖는 게 필요한데 일정을 능동적으로 설계하지 않고 매번 벤치마킹한다며 오니까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내놓는 보고서가 똑같을 수밖에 없다”고 꼬집었다.
연수를 바람 쐬는 정도로 인식해 사전 준비가 안 돼 민망한 상황을 연출하기도 한다. 10년 경력의 영국 가이드 E씨는 “대부분 견학 시간에는 진지한 편이지만 일부는 기관 방문 질의응답 시간에 연봉을 얼마나 받는지, 직원복지는 어떤지 등 주제와 관련 없는 황당한 질문을 던져 당황스러울 때가 있다”라며 “직원 수, 하는 일 등 웹사이트만 찾아봐도 쉽게 알 수 있는 기초 정보를 짧은 질문시간에 던질 때는 일부러 통역하지 않을 때도 있다”라고 말했다. 이어 “영국 기관들은 정성스럽게 파워포인트까지 준비해서 발표하는데 기초적인 리서치 조차 안돼 있을 때면 굳이 왜 비행기를 타고 왔는지 의문이 든다”고 말했다. 독일 가이드 D씨는 “발표자 앞에서 졸거나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사람들을 보면 내가 더 미안해진다”라며 “주수입원이긴 하지만 일부 악명 높은 공무원 연수 의뢰가 들어올 때면 핑계를 대 거절하기도 한다”라고 전했다.
보고서도 대필, 무엇을 위한 연수인가
이렇게 연수를 다녀와 결과보고서마저 여행사에 대필시키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연수의 유일한 결과물이자 정책과 밀접한 자료가 사실상 여행사측 비전문가들 손에서 생산되고 있는 셈이다. 북유럽의 통역ㆍ가이드 B씨는 “특히 4차 산업혁명 같은 손에 잡히지 않는 주제의 연수는 교육, 일자리 등 자신들도 어디에 적용할지 막막해 보고서 작성 의뢰를 받는 경우가 많다”라며 “한번은 계약 과정에서 결과보고서 예산을 명시할 순 없으니 보고서 작성 대가로 1,000만원 이상 더 받은 적도 있다”라고 털어놨다. 이어 그는 “100페이지가 훨씬 넘는 보고서고 나도 전문가가 아니라 논문, 기사 등을 뒤지고 각종 리서치를 더해 3주 넘게 고생했다”라며 “해당 보고서가 칭찬받았다는 말을 전해 듣고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라고 전했다.
지자체 공무원들이 포진한 산하 공공기관들도 종종 연수 운영에 있어 이해 못 할 ‘하청’을 준다. 서울시가 출연한 서울산업진흥원이 지난 8월 ‘강소기업 임직원 선진사례 벤치마킹’을 위해 올린 과업지시서를 보면 결과보고서 항목에 ‘연수 종료 후 2주일 이내 진행 내용, 시사점, 결과에 따른 정책제언을 포함한 80쪽 내외 결과보고서 제출’을 명시하고 있다. 스스로 고민해야 할 연구 결과마저 위임한 셈이다. 이외 정부기관과 의회, 지자체들이 연수 전 과정에서 나온 기관 소개와 질의응답, 사진 등을 결과보고서로 여행사로부터 제출 받는 경우는 흔하다.
퇴직을 앞둔 장기근속 공무원이나 모범 공무원을 대상으로 한 각종 격려 차원의 연수는 아예 정책 학습 효과를 기대하기 힘들다. 실제 이들이 결과로 내놓은 보고서는 무성의하기 짝이 없다. 지난해 9월 부산광역시의 퇴직 예정 공무원 8명이 노르웨이ㆍ스웨덴ㆍ핀란드 등을 다녀온 7박 9일 일정의 보고서를 보면 아예 공식 기관 방문 없이 국립미술관, 대성당, 피오르 등 관광지 방문이 전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격려 차원의 연수를 서로 가겠다는 눈치작전이 펼쳐지기도 한다. 광주광역시의 한 공무원은 “수년 전 복지 관련 공무원들의 자살이 잇따르자 중앙부처에서 격려 차원의 유럽 연수를 공고했는데 5급 이상 공무원들이 서로 가겠다는 의사를 밝혀 분위기가 어색해진 적이 있다”라며 “결국 보다 못한 상부의 지시로 하급 공무원을 보냈다”라고 말했다.
정준호 기자 junhoj@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