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라를 지탱하는 건 명절 근무자들... 그리고 ‘빙고!’
추석인 오늘 새벽, 평소처럼 4시쯤 눈을 뜬 나는 버릇대로 담배 한 대를 물고 1층 쉼터로 내려갔습니다. 도로 쪽을 보니 낯익은 고급 택시가 엔진을 켠 채로 손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늙수그레한 기사가 기다리는 그 손님이 누군지 나는 압니다. 같은 라인에 살고 있는 모 항공사의 50대 기장입니다. 아하. 추석날인 오늘도 그에게는 국외 운항 스케줄이 있습니다.
그이처럼, 명절에도 편히 쉬지 못하는 이들이 이 나라에는 최소한 160만 명 이상이고, 연휴 기간 중 교대제를 감안하면 500만 명가량 됩니다. 우리 이웃들 중 100명 중 3명 이상에서 10명 정도가 명절에도 우리와 함께하지 못합니다. 놀랍게 많죠?
그처럼 쉬지 못하는 이들은 운송업(육해공)/에너지(전기와 상하수도)/소방/의료/숙박업/일부 요식업/유통업/일부 제조업(휴무 후 재가동이 더 힘든)/통신.보안.정보(전산) 분야에 근무하는 이들을 대종으로, 재소자와 함께 머물러야 하는 교정직 근무자와 사회복지시설 근무자들인데요. 군인과 경찰 등은 말할 것도 없고 당직이라는 이름으로 호출되는 일부 공무원들도 법원/국회/선관위 등을 포함하면 최소한 만 명 정도 됩니다. 이들 모두 명절에 가족들과 함께할 수 없습니다.
또 그 숫자는 적지만, 속칭 등대지기로 불리는 항로표지관리원 163명과 49개의 측후소/기상대 근무자들(200명 이상), 해외 근로자(3.5만 명), 외항선원(9,303명), KOICA 단원... 등도 빠뜨릴 수 없습니다. 14,000개의 각급 학교 경비직이나 연휴에 더 붐비는 극장가를 지키는 이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이들이 생각날 때마다 그 숫자를 정확히 알고 싶어서 온갖 통계를 뒤지느라 거의 2년쯤 걸렸는데요. 그 상세판 중 일부는 이곳에 있습니다. https://blog.naver.com/jonychoi/221110907179
이처럼 명절을 우리와 함께하지 못하는 이들 중에는 어둠 속에 머무는 슬픈 이들도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수감자 4.5만 명과 아동복지시설의 1.4만 명. 그리고 20만 명을 넘기는 입원 환자들을 필두로, 정확히 집계가 되지 않는 독거노인들도 수만 명이 되고, 비공식적으로 100만을 넘긴다는 싱글족 중에서 약 1할인 10만 명 정도는 명절날에도 정말 갈 곳이 없습니다. 고향/부모형제/친척... 중 그 어딘가에 자신은 간절히 소속되고 싶어도 허공에 손짓하기로 끝나서 더욱 허망해지는 그런 사람들이 적지 않죠.
이런 그늘 속의 분들을 제외하고도, 최소한 150만 명을 넘기는 분들의 말없는 수고 덕분에 이 나라가 명절 연휴에도 여전히 잘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 나라를 지탱하고, 제대로 돌아가도록 하는 이들. 그건 입으로만 떠들어대면서 눈치나 살피는 고급 ‘룸펜’ 정치꾼들이 아니라, 바로 휴일에도 열심히 자신이 맡은 일들을 해내는 이들 덕분입니다. 명절 때에도 그 좁디좁은 요금 징수 칸막이 속에서 날씨와 먼지와 싸우면서도 미소로 오가는 이들을 맞이하는 이 나라의 듬직하고 멋진 ‘아줌마’들 3천여 명이 그 대표적인 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참, 우스갯소리 하나 할까요? 우리나라 직종 중에서 외간남자 손을 가장 많이 만지는 여인들은 누구일까요? 짐작들 하셨겠지만 고속도로 요금소에서 근무하는 분들입니다. 그러면 다시 심층 퀴즈 하나 더. 전국에 산재한 요금소 중에서 가장 많이 외간남자 손을 만지는 곳은 어디일까요? 저도 처음에는 요금소를 지나칠 때마다 몇 해 동안 그분들에게 하루에 몇 사람 정도의 손을 만지게 되느냐고 묻고 다녔는데요. 그 답은 요금소 이용객 숫자에 있더군요. 그 순위를 보이면 다음과 같은데, 모두 수도권입니다. 명칭 뒤에 ‘-요금소’를 붙이면 근무처 이름이 되지요 : 구리 186,411명 →김포 172,741명 →청계 168,012명 →시흥 144,008명 →인천 143,837명 →성남 143,368명.
그런 분들 중 한 분의 기억이 납니다. 여러 해 전 안산의 공단 길을 찾아가면서 긴가민가해서 요금소 여성분에게 ‘안산으로 가려면 여기서 빠져나가면 되나요?’ 하고 물었더니, 그분의 답이 ‘빙고!’. 여러 해가 지나도록 그분의 그 해맑은 표정과 목소리가 잊히지 않습니다. 다른 요금소들을 지나칠 때도 그 기억이 새로워질 정도로요. 제가 모든 요금소를 지나칠 때마다, ‘고맙습니다. 수고하셔요!’ 소리를 버릇처럼 하게 된 것도 그분의 그 간단한(?) 가르침 덕분입니다.
올해는 연휴 기간에 고속도로 요금이 공짜라죠? 저는 그 공짜라는 사실보다도 이번 연휴에는 그 멋진 아줌마들께서 그 좁은 곳에서 드시는 먼지 대신에 집에서 송편들을 드실 수 있는 것 같아서 그게 한참 더 반갑고 기쁩니다. ‘빙고!’ 소리의 주인공 덕분이기도 한데요. 근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분 얼굴 형체조차 떠오르지 않네요. 목소리로만 기억되는 일들처럼요. 하기야, 우리 기억에서 갈수록 선명해지는 것들은 그림보다는 소리라 하더만요.
이 글을 대하시는 분들 중, 지금 홀로 머무시는 분들이 없으셨으면 정말 정말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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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溫草[추석날 아침,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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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追記] 만에 하나, 혹시라도 이 글을 보시는 분 중에 2004년 봄 신갈-안산 고속도로 요금소에서 근무하시면서 (2군데 중 하나, 반월공단 쪽이 아니라 안산공단 쪽) 제게 그 멋진 '빙고!'로,지금도 기억이 선명한 그 멋진 순발력으로 답하셨던 분이 계시면, 다시 한 번 더 감사드립니다. 그때 제가 했던 '고맙습니다'란 짧은 답이 아직도 모자란 듯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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