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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국립묘지(북망산)에 묻힌 고구려, 백제의 왕과 귀족들: 의자왕, 보장왕, 흑치상지, 연남생과 그의 자손들, 부여융...

갓 쓰고 서울 오다

by 지구촌사람 2022. 9. 16. 0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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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국립묘지(북망산)에 묻힌 고구려, 백제의 왕과 귀족들: 의자왕, 보장왕, 흑치상지, 연남생과 그의 자손들, 부여융...

 

 

고구려 연개소문의 장남인 연남생과 그의 자손들, 고구려 마지막 임금 보장왕과 그의 자손들, 백제 마지막 임금 의자왕과 그의 자손들, 백제 부흥운동에 3년 정도 참여했다고 알려진 당나라 명장 흑치상지와 그의 자손들이 모두 당나라에서 최고 귀족의 대우를 받아 중국 국립묘지인 북망산에 묻혔다고 합니다. 나라는 망해도 가문은 망하지 않는다는 말인 것 같기도 하고...

 

서기 660년 8월 29일 의자왕은 신라-당 연합국에 항복하고 낙양으로 끌려가서 당의 고종황제와 측천무후 앞에서 무릎 꿇고 착실한 당의 신민이 되겠노라고 맹세한 지 얼마 후에 그 해를 넘기지 못하고 병사하게 됩니다. 당나라는 금자광록대부라는 종1품 품계를 추증하고 당나라 귀족들 국립묘지인 북망산에 산소를 마련해 주는데, 삼국지 손권의 손자로 400년 전에 죽은 오(吳)나라의 마지막 왕 손호(孫皓)와 50여 년 전에 죽은 위진 남북조 마지막 임금 진숙보(陳叔寶) 등이 묻힌 바로 그 옆 자리에 묻어 줍니다. 

 

진숙보는 수(隋)나라에 망하는 순간까지도 여자들과 놀다가 우물 속으로 몸을 숨겼다는 임금인데. 해동증자라고까지 추앙 받았던 의자왕이 일제 강점기의 한 소설가에 의하여 삼천궁녀를 거느린 임금으로 묘사된 것이 옛날 산소 자리를 플레이보이 진숙보의 옆으로 잡아 준 것이 인연이 된 것 같기도 하고... 쩝쩝

 

그리고 서기 679년 요동대도독으로 있던 연남생이 요동에서 죽었을 때 당시 정치를 주관하던 측천무후가 시신을 당나라 서울로 옮겨 와서 장례를 성대하게 치르면서 아울러 특별 조서를 내려 당나라의 5품 이상 전 신료들에게 소리를 내어 울어라고 지시했습니다. 이때에 연남생도 국립묘지 북망산에 안장됩니다. 몇 개월 후 돌궐 족이 침범하자 연남생의 아들 연헌성 장군을 상중인데도 불러내어 출정시키기도 했지요. 그 정도로 측천무후는 연남생 가족을 많이 활용했습니다.


682년 고구려 마지막 임금이었던 보장왕이 유배지에서 죽자 측천무후는 후히 장례를 치러 주고 역시 북망산에다 묘를 쓰게 합니다. 묘는 돌궐족 추장이었던 “힐리(詰利)”의 묘 왼쪽에 나란히 쓰게 했다는군요.

 

보장왕이 죽던 같은 해인 682년에 옛날 백제의 마지막 태자 부여융도 옛 백제 지방을 관리하는 “웅진도독 겸 대방군왕”이란 위치에서 죽게 되는데, 이 역시 옛 백제의 왕족답게 북망산의 한 자락을 차지하게 됩니다. 부여융은 677년에 웅진도독(충남 공주성에서 옛 백제 땅 관리자)의 발령은 받았으나 신라 문무왕이 옛 백제 지방의 상당 부분을 이미 점령한 뒤여서 신라 문무왕과 계속 싸우기가 귀찮아서인지 두려워서인지 부임도 아니하고 그냥 당나라에 5년 간이나 머물러 있다가 682년에 죽은 것입니다.

또 측천무후는 685년 보장왕의 손자 “보원”을 요동 지방에 “조선왕”으로 임명하고 699년에는 그의 아버지인 "덕무"를 "안동도독"(조선왕을 관리하는 임무)으로 임명하여 고구려 출신 유민들을 계속 통치할 수 있도록 하였고, 그 자손들 역시 옛 고구려의 왕족답게 당나라의 당당한 귀족의 하나로 행세하며 대대로 북망산을 가족묘지로 사용하게 합니다.

 

그리고 백제 왕족 출신인 흑치상지 장군도 699년 북망산에 산소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흑치상지는 백제 왕족의 성씨인 부여씨에서 갈라진 백제귀족 흑치씨의 아들로 태어나 32세 때 백제가 멸망할 때 3년 정도 백제부흥군에 가담했다가 당나라에서 온 태자 부여융을 따라 당나라로 가서 죽을 때까지 당나라 장군으로 활동하면서,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는 명장 중의 명장이라고 중국 역사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히 야간 기습전의 명수로서 당나라가 토번(티베트)족을 정벌하는 데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고 하네요.

 

흑치상지는 측천무후의 신임을 받아 한때 당나라 전체의 국방을 담당하기도 하였으나, 흑치상지의 힘이 너무 커지자 689년에 측천무후의 시기를 받아 역모에 연루되어 잠시 하옥되어 있는 중, 어떤 버릇없는 간수가 “흑치씨, 성이 흑치이니 이빨도 까맣겠지?”라고 놀려대는 모욕을 견디지 못하여 이 자존심 강한 노장은 그만 노끈으로 자살해 버리고 말았답니다. 그러나 그 아들 흑치준이 10년 간 구명운동을 하여 699년에야 측천무후는 흑치상지의 모든 명예를 복권시켜 주고 산소도 북망산을 쓸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물론 나중에 그 아들 흑치준도 거기에 같이 묻히게 되어 대대로 중국의 귀족으로 잘 먹고 잘 살았다고 하네요...

 

큰나라 국(國), 작은 나라 가(家).. 이 두 글자를 합하여 “국가(國家)”라는 단어를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고구려나 백제 같은 큰 나라 즉 國은 없어져도 연개소문, 흑치상지 등을 이룬 작은 나라 즉 家는 금방 없어지지 않는다는 말이 실감이 나는군요 아, 중국처럼 엄청 큰 나라는 무어라고 불렀냐구요? 엄청 큰 나라는 “천하(天下)라고 하지요.. 하하

 

근데요. 제가 최근에 중국에서 중국역사지리부도란 책을 하나 샀는데요. 재미삼아 한나라 당나라 시절의 지도를 봤더니... 아니 그게... 고구려는 말기에 중국과 싸우는 짧은 시기를 제외하고는 줄곧 중국 본토와 같은 색깔로 표시되어 있더라구요.. 그러니 동북공정에서 중국이 고구려 역사를 마구 주물러도 멀리 있는 대한민국은 아무 소리 못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위-촉-오로 나뉘어진 삼국지 시대의 지도를 보면 조조의 위나라가 평양, 원산까지 낙랑군을 두어 지배하고 있는데, 고구려는 국내성 근처에만 웅크리고 있고 한강 이남에는 마한 진한 변한만 있을 뿐 신라 백제는 아직 생기지도 않았더라고요. 우리나라의 역사 부도와 너무 달라 중국과 뭔가 협의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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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황재순. 문학박사. 인천에서 장학사와 중고등학교 교장을 지냈음

 

* 북망산[  ]  :   중국의 뤄양[]에 있는 산.

 

정확히는 중국 허난성[] 뤄양시() 북쪽에 있는 작은 산 이름이다. 뤄양은 B.C. 11세기에 주()나라 성왕()이 이곳에 왕성을 쌓은 이래 후한()을 비롯한 서진(西)·북위()·후당() 등 여러 나라의 도읍지로서 역사적으로 번창하였던 곳이다. 그만큼 뤄양에는 많은 귀인·명사들이 살았으며, 이들이 죽은 뒤 대개 북망산에 묻히고 있어 이곳에는 한나라 이후의 역대 제왕과 귀인·명사들의 무덤이 많다.

 

이와 같은 연유로 어느 때부터 인가 북망산이라고 하면 무덤이 많은 곳, 사람이 죽어서 가는 곳의 대명사처럼 쓰이게 되었고, 지금도 ‘북망산천()’하면 무덤이 많은 곳, 사람이 죽어서 가는 곳, ‘북망산 가는 길’하면 사람의 죽음을 뜻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 현재는 주변 논밭이 생기고 목장도 들어서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북망산 [北邙山]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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