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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은 3폭거사[폭음/폭서(暴書)/폭면(暴眠), 다작 비결은 다독

갓 쓰고 서울 오다

by 지구촌사람 2022. 9. 16. 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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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은 3폭거사[폭음/폭서(暴書)/폭면(暴眠), 다작 비결은 다독

이문열 작가와 나의 관계는 개인적으로(다만 나 홀로) 유별하다.

그는 67년 고졸 검정고시에 합격하여 68년에 대학엘 갔고, 나는 그 2년 뒤인 69년에 합격하여 70년에 대학에 갔다. 그것도 같은 학교, 같은 과로. 다시 말하자면 나에게 그는 검정고시와 대학 모두 2년 직속의 선배다. 다만, 군대만은 동기다. 똑같이 73년에 가서 76년에 제대했다. 그는 장가까지 들고 나서(처: 박필순) 느지막이 마지못해 입대했고, 나는 급박한 제명 위기를 피하기 위해 졸지에 군대를 피난처 삼아간 게 서로 다르지만.

그럼에도 그와 내가 서로 얼굴을 맞대고 숟가락질까지 석 달 이상 함께한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 2011 ~ 2012년간의 일이다. 그의 집이자 집필실, 사숙(私塾)을 겸하는 부악문원(負岳文苑)의 식객으로 내가 머물게 되어서다. [이 부악문원과 그의 집필실인 '서실(書室)' 등의 안팎에 관한 상세한 사진판 해설은 이곳에 실어놨다. 그의 집필실 내부에 관한 자료로는 최초가 아닐까 싶다. : https://blog.naver.com/jonychoi/221557102378]

이문열은 객관적으로도 우리나라 글쟁이 역사에서 독보적일 만치 유별난 사람이다.

어쩌면 써 낸 글에서도 최다작일 듯하고, 작품 판매량에서는 단연 최다다. 삼국지 평역 하나만으로도 2천만 부 이상 팔렸고(추정 인세 약 270억 원), 소설류로도 최소한 1500만 부 이상을 팔았다. 정확한 집계가 안 될 정도다. 단행본 기준으로는 최다인 천만 부 판매 기록을 돌파했던 조정래(1945~) 님도 총합 집계에서는 한참 뒤로 밀린다.

그래서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글쟁이 재벌' 대열에 들었다. 그것도 40대 초에. 한 해 내내 벌어봤자 평균 소득이 214만 원 정도(2016년. 문화체육관광부 조사 자료)인 다른 글쟁이들은 벌어진 입이 닫히지 않을 정도의 거액을 그는 지금도 번다. 스테디셀러들 덕택에.

더구나 그는 경제(수치) 개념이 엄청 확실하고 또렷하다는 점에서도 일반 글쟁이들과는 확연하게 다르다. 그는 부악문원을 건설하면서 사 온 수종들의 구입 가격에서부터 소나무를 심기 위해 동원한 포클레인 사용 비용까지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을 정도다. 20여 년이 지났음에도...

시기 기억도 단순히 해와 달 정도가 아니라 날짜까지도 꿴다. 무슨 이야기 끝엔가 0000년 4월 16일(26일?)이라고까지 짚어내는 바람에 내가 놀랐다. 난 그때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조차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는 2000년 초에 미국에 체류한 적이 있는데 입국 일자와 비행기 푯값까지도 기억하고, 대구 매일신문에 기자로 입사하던 날짜, 입대 일자... 따위는 기본일 정도.

그는 운전기사를 두고 시대의 최고급 회장님 차인 '체어맨'을 타고 다녔는데(2011년 현재), 있는 돈을 쓰자는 뜻도 있지만 호주가(好酒家)인지라 음주운전 전과를 수도 없이 올리게 되는 일을 막기 위함도 있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저택(邸宅. 규모가 아주 큰 집)이란 말로도 모자라서 '대저택'이란 옹색한 말까지 동원해야 할 정도로 큰 자기 집을 두 군데에 두고 있는 작가다. 경기도 이천(장암리)의 부악문원(1998년 신축)은 대지만 해도 최소한 1,000평은 넘길 정도이고, 자신의 선향인 양양의 두들마을(재령 이씨 집성촌)에 지은 광산문학연구소 또한 미음자 형의 한옥들 5채가 도란도란 어깨를 맞대고 있다. [이 두들마을의 한옥은 얼마 전(2022.6.30.) 한밤중의 화재로 그만 전체가 다 타버렸다. 국비와 지방비, 사비를 섞어 거의 20억 가까이 들여 지은 것이었는데... '아까비~~']

 

사진: 경기 이천의 부악문원 전면의 좌측과 우측 건물. 하나의 건물이지만 하도 커서 좌우로 나누어 찍지 않으면 전체를 제대로 담아낼 수가 없다. 2층으로 올라가야 잔디밭, 살림집, 서실 등이 보인다. 대지가 천 평 이상인, 일종의 성채.

 

사진: 경북 영양 두들마을의 광산문학연구소. 미음자 집으로 정성+거금을 들여 아름답게 지었는데, 올 화재로 전소되었다.

또 하나. 그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현대판 분서갱유를 당한 작가다. 2001년 보수 꼴통 짓에 뿔이 난 일부 사람들이 부악문원 앞에서 그의 책들을 쌓아놓고 불을 질렀다. 그 시절 그가 얻은 별명이 글쟁이 홍위병이었다.

그는 또 6.25때 자진 월북한 선친(이원철)의 상세한 근황(주소. 재혼 여부. 이복동생들의 이름과 직장... 등)을 북측 국가기관의 적극적인 협조로 입수한 유일한 현역 작가이기도 하다. 무단 방북 범죄자로 몰려 미국에 머물고 있던 황석영의 도움으로 주유엔 북한대표부의 즉각적인 협력을 받게 되어서였다.

또 그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글쓰기에서 컴퓨터를 사용한 작가다. 원고지 칸 메우기의 수공업에 소요되는 불필요한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였고, 교정 시에 처음부터 다시 써야 하거나 원고지가 지저분해지는 걸 피하기 위함이었다. 그가 글쓰기에서 컴을 사용한다는 이야기가 돌자, 대우전자에서 글쓰기 전용의 길다란 컴을 생산하기도 했다(그걸 가방에 담으면 지금 노트북 가방의 1.5배 길이를 세로로 세운 모습). 나도 그걸 구입해서 94년까지 썼던가. 기대만큼은 아니었지만, 교정 시 자동적으로 칸이 밀리고 정리되는 기능은 맘에 들었던 기억이 있다. ROM이 32kb, RAM이 128kb 정도였으니, 그야말로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제품.

그의 잔챙이(?) 기록들은 아주 많다. 작년에 그는 30여 년 넘게 고정 거래를 해오던 민음사와 관계를 끊고(민음사의 사내 송년회는 이문열이 모습을 드러내야만 시작될 정도였다) 알에이치코리아와 새 관계를 맺었다. 일반적으로 글쟁이들이 한번 정을 주면 끝까지 고수하는 고집과는 다른 면모다. 또 재작년부터는 경증 치매 증세도 보인다. https://blog.naver.com/jonychoi/222128742890

 

그 치매 증세는 나이 탓도 있고 술 탓도 있지만, 내 보기엔 운동 기피증이 그 주된 원인이 아닐까 싶다. 올빼미족으로 밤에 글을 쓰고, 새벽에 잠들었다가 낮술을 하거나 출타하는데, 그가 운동이란 걸 하는 걸 나는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더구나 그는 폭음족이어서 간이 나빠져 한때 단주까지 해야 했고, 신장암 치료를 받기도 했다.

그런데 시방 내가 뭔 소리를 하고 있는고. ㅎㅎㅎ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아래 기사 제목에 들어 있다. 이문열의 놀라운 다작 비결은 다독에 있다고... 살림집과 멀찍이(한 50미터쯤 떨어져 있다) 독채로 지어진 그의 집필실에 들어서면 정면에 보이는 접객실은 그의 독서실이기도 하다. 늘 그 테이블에는 대여섯 권의 책들이 놓여 있고, 그의 서가에는 오르내림용 사다리까지 있다.

사진: 이문열의 부악문원 집필실 입구의 접객실. 뒤의 서가에 오르내리기용 이동식 사다리까지 있다.

그의 부악문원에는 한 달에 최소한 두 개 이상의 라면박스 분량의 책이 온다. 하나는 정기 구독 책자들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가 주문한 책들이다.

글쟁이에게 있어 글을 잘 쓰기 위한 구양수(歐陽脩)의 삼다(三多)론, 곧 다독(多讀), 다작(多作), 다상량(多商量. 많이 생각하기)은 늘 옳다. 아니 법이다!

-溫草 최종희(14 Sep. 2022)

[사족] 아래 기사 속에 잠깐 나오는 박석근 사무국장도 소설가인데 부악문원에서 상주한다. 내 짐작에 이문열의 처남인 듯도 하다. 저 위에 이문열 부인의 이름을 살짝 병기한 이유이기도 하다. 자수와 생활 공예 쪽에 심취하기도 했던 소탈하고 아담한 여인이다.

사진: 이문열의 부인 박필순. 2009년의 모습. 같은 영양 출신으로 남편보다 한 살 아래(49년생). 표정이 늘 맑다.

소생으로는 재웅(在雄). 재유(在由), 기혜(沂慧) 등의 2남1녀가 있는데, 내가 보고 들었던 건 딸 얘기뿐 아들들 얘기는 듣지 못했다. 이분에 관한 짧은 기사는 이곳에서 볼 수 있다: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010823/7730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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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 선생은 3폭거사"…다작 비결은 다독

[한경] 2022.05.15

편집기자 시절 도서관 등서 5000권 독파

한창 땐 하루 원고지 500장 쓴 적도

부악문원 서재에 있는 이문열 선생의 독서대. 나이 듦에 대한 논어 구절을 올려 놓았다. 김범준 기자

이문열 선생은 ‘다작(多作)의 작가’로 통한다. 1979년 등단 이후 ‘사람의 아들’ ‘황제를 위하여’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등 약 90권의 소설을 발표했다. 줄줄이 화제작이었다. 동인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중앙문화대상 등 국내 주요 문학상을 휩쓸었다.

다작의 비결은 다독(多讀)이다. 그는 “젊어서 매일신문 편집기자 등으로 일하면서 읽은 책만 5000~6000권 될 것”이라며 “매일신문에 작은 도서관이 있어서 틈날 때마다 거기 처박혀 책을 읽었다”고 했다. “10년 뒤에 찾아갔더니 매일신문 기자 한 명이 그럽디다. ‘아니, 어떻게 무슨 책이든 빌리려고 보면 (대출기록표) 제일 끝에 선생님 이름이 있습니까?’”(웃음)

작품이 한 번 떠오르면 글을 써내는 속도도 무섭다.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보름 만에 탈고했다. 얼마나 집중적으로 글을 쏟아냈는지 약 40년 전의 일인데 아직 날짜까지 생생하게 기억했다. 그는 “1987년 4·13 호헌조치를 보고 쓰기 시작했는데, 《세계문학》에 원고를 넘긴 게 아마 그해 4월 26일일 것”이라고 했다.

기자가 집필 속도에 놀라자 “그 정도 집필량은 많은 축도 아니다”는 반응이 돌아왔다. “아주 급할 때는 하루에 원고지 400~500장을 쓸 때도 있었습니다. 《삼국지》 《수호지》 같은 번역물을 연재할 때가 그랬죠. 하루에 300장 이상 쓰면 진이 빠져서 밤에 잠도 못 자요.”

그의 집필 습관을 곁에서 오래도록 지켜봐온 제자들이 그에게 붙여준 별명은 ‘삼폭거사’. 박석근 부악문원 사무국장(소설가)은 “선생님이 워낙 포악할 정도로 글을 많이 쓰고 술 많이 잡숫고 잠을 많이 주무셔서 생긴 별명”이라며 웃었다.

이 선생이 1998년 사재를 털어 세운 부악문원은 현대적 개념의 서원이다. 후배 작가들이 창작에 몰두할 수 있도록 숙식을 제공하고 함께 인문학을 논한다. 경기 이천 부아악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부악문원에는 작가 레지던시, 이 선생 사택, 집필실이 마련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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