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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3유형 : 좋은 놈, 나쁜 놈, 적당히 나쁜 놈(MBG)

[내 글]슬픔이 답이다

by 지구촌사람 2017. 4. 7. 0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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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3유형 : 좋은 놈, 나쁜 놈, 적당히 나쁜 놈(MBG)

 

명품 서부 영화 중의 하나로, 세르지오 레오네가 감독한 <석양의 무법자>(1966)가 있다. 그 원제는 좋은 놈, 나쁜 놈, 추악한 놈(The Good, The Bad And The Ugly)’. 40여 년을 지나 우리나라에서도 그 패러디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 김지운 감독)이 나올 정도로 이 나라에 지워지지 않는 서부영화 향수(鄕愁)를 짙게 남겼다. (나는 김 감독의 그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던 듯하다. ‘도대체 뭔 소리여? 눈요깃거리도 시원찮고...’ 영화 성패의 책임 중 51% 이상은 시나리오 작가에게 있다. 최소한으로. 시나리오 작가가 지금도 궁금하다.)



<석양의 무법자>의 3주인공.

영문 포스터에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혼자만 나와서...

 

 

나는 인간 유형을 세 가지로 나눈다 : 좋은 놈(good guy), 나쁜 놈(bad guy), 적당히 나쁜 놈(MBG. moderately bad guy). ‘적당히 좋은 놈이 없는 이유는 적당히만 좋으려면 아주 조금이라도 적당히 나쁜 짓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적당히 나쁘지 않으면 그는 완전하게 좋은 놈 그룹에 편성된다. 우리나라에서 <총알 탄 사나이>라는 영화의 원제가 ‘The good bad guy'였던 것도 그 때문이다. 착하긴 한데 늘 사고를 쳐대니 나쁜 놈일 수밖에 없는 것. 그러니 궁극적으로는 'bad guy'에 편성될 수밖에 없다.

 

적당히 나쁜 놈(이하 ‘MBG’로 호칭)은 이런 사람이다.

 

이른 새벽, 왕복 4차선 도로에 차들이 아주 한산하다. 횡단보도는 무척 멀리 있고, 쉬는 급하다. 주위를 잘 살핀 뒤 잽싸게 건넌다. 무사하게. 집 근처에 왔다. 쉬가 더 급해진다. 집에까지 가서 처리하기는 어렵다. 건물 벽 쪽으로 다가가 해결한다. 지퍼를 올리며 벽의 옆쪽을 올려다보니, ‘이곳에 쉬하는 사람은 개!’라고 쓰인 게 뒤늦게 보인다. 이런... 남의 특별한(?) 사정은 살피지 않고 무조건 동물시하는 그 무지막지한 어투에 은근히 뿔이 돋는다. 주변을 보니, 먹고 버린 맥주깡통들이 보인다. 이런 나쁜 놈들. 지들이 처먹은 걸 처리도 안 하고 가? 힘차게 발길질을 해서 날린다. 깡통들은 단지 안 도로로 굴러간다. 그는 그걸 자신이 주워서 처리할 의무는 없다고 생각하고 집으로 향한다. 어차피 나쁜 놈들이 버리고 간 깡통들일 뿐이므로.

 

이런 이들의 대낮 행동은 판이하다. 무단 횡단은 결코 하지 않으며, 아무리 급하더라도 남의 집 벽에 쉬를 하진 않는다. 움켜쥐고 뛰어서라도 화장실을 찾아 해결한다. 빈 깡통을 차지도 않거니와 먹고 난 맥주캔을 길에 버리지도 않는다. 주변에 쓰레기통이 있으면 거기에 넣는다. 젊은이나 어린애들이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면 최소한 혀를 차거나, 잔소리를 할 수 있는 환경이면 하고, 더 맘이 내키면 그 쓰레기를 주워 자신이 처리한다.

 

이런 모든 행동들은 누가 시켜서이거나 주변을 의식해서 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표준 행동 양식이다. ? 그냥 그렇게 해야 하는 게 옳고, 그런 짓을 하는 건 옳지 않은 것이라는 지극히 단순한 생각들이 시켜서 그리한다.

 

이와 같이 상황에 따라서 적당히 그 행동이 달라지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MBG. 도덕적으로나 사회규범, 윤리규범 등 그 어느 것으로 훑어도 중범죄자라고는 할 수 없는 이들. 흔히 인간이 완벽할 수는 없다는 말이 쉽게 통용되는 곳일수록, 이런 유형의 사람들이 득세하거나 목소리가 커진다. 그리고 이런 유형이 점차 늘어가는 추세이고, 심할 경우에는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식의 잣대로 타인들의 행위를 평가하려 들기도 한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그런 이들이 자신은 좋은 놈이라고 착각하거나, 그런 의식에 사로잡혀 있을 때다. 그 결과 조금 잘못된 것이 있으면 그 출발은 선의였다고 정당화한다. 그 선의가 큰일과 연결되면 그걸 정의와 결부시킨다. 사회 정의를 위해서라면 소수의 불편은 희생되거나 감내되어야 한다는 수준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그 정도와 빈도가 높아질수록, 그건 적당히 좋은 놈은커녕 확실하게 나쁜 놈이 된다.

 

그런 정황을 영국의 작가 루이스(C.S. Lewis, 1962~)는 이렇게 비유했다.

적당히 나쁜 사람은 자신이 아주 착하지는 않다는 걸 안다. 반면 아주 나쁜 사람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진짜 일반적인 생각들이다. 마치, 깊이 잠들지 못해서 잘 자고 있지 않은 상태, 곧 실제로는 깨어있는 상태인데도 마치 자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 것처럼.” -<그저 그렇고 그런 기독교(Mere Christianity).

 

이런 글을 쓰는 나? 위의 사례에 숨은 등장인물이 나다. , 맥주깡통을 발로 찬 건 빼고. 20여 년 전 발길질 잘못하다가 엄지발가락에 멍이 든 이후로는 무엇이고 차는 일은 일절 안 한다. 그리고 이른 새벽에 일찍 귀가하는 일도 이제는 없다. 그리고 선의를 부풀리는 일은 정말 없다. 아무 때나 사회 정의를 운운하지 않으며, 그런 소리로 먹고 살아야 하는 직업엔 전혀 관심이 없다.

 

요즘에는 적당히 좋은 놈의 유형을 만들어서라도, 조금씩이라도 나쁜 짓들을 줄여보려 하는 중이다. 누가 알겠는가. 그러다 보면 어느 날 좋은 놈그룹에 끼어 있게 될는지도. 시도는 하고 볼 일이니까. -溫草

[Apr.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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