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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낼수록 쉬 늙는다

[1事1思] 단상(短想)

by 지구촌사람 2012. 7. 26.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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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事一思]                               열 낼수록 쉬 늙는다

 

  어제 도서관 앞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어깨에 메고 있던 노트북 가방 끈이 툭 끊어졌다. 그 바람에 가방이 길 위로 털썩. 얼른 집어 들고 길을 건넜다.

  아침부터 이게 웬 횡재람.

 

  내가 횡재라고 표현한 것은 메고 다니는 가방이 갈수록 여간 불편한 게 아니어서다. 엄청 무겁다. 갈수록 녀석을 팽개치고 싶을 정도로.

  처음엔 그저 단순히 노트북만 넣고 다녔지만, 그 안에 배터리 팩 두 개를 위시해서, 책들과 수첩 두어 개, 필기구 한 뭉치에 명함, 심지어 내 군것질거리인 봉지 커피와 캔디까지 넣다 보니 무게가 자그마치 8.5킬로. 손에 들고 다니기에 벅차서 한 쪽 어깨에 멜빵을 걸치고서 낑낑거리며 다녔다.

 

  혹자는 그걸 배낭에 넣어 다니지 왜 그리 고생했느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주된 원인은 사소하면서도 중대한 그런 것들에는 내 머리가 꽝이라서다. 내 가방을 들어보고 놀란 다른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해줘서야 그 생각이 들었을 정도. (그런 나인지라, 집에서 늘 들어온 말 중의 하나는 ‘그런 실력(?)으로 어떻게 지금까지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왔느냐, 참으로 감탄스럽다’는 비아냥거리기 겸용의 감탄어절.)

  그래도, 그 말을 듣고 즉시 그걸 살 생각은 안 했다. 왜냐, 백수란 크든 작든 물주의 눈치를 보게 마련이고, 아직은 멀쩡한데 그걸 두고 다른 걸 산다고 하면 그 또한 한 번 더 (불필요한) 눈치를 봐야 하는 일이므로.

 

  멜빵이 끊어진 걸 절호의 기회로 삼고 엊저녁 이마트로 갔다. ‘날 데리고 가 주세요’ 하면서 진열대 위에서 자태를 뽐내고 있는 수많은 가방들을 훑으며 나는 그것들이 그처럼 싼 가격표를 달고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교보에 나갔을 때 배낭 생각이 나서, 노트북이 들어가서 안전할지를 보려고 몇 개를 만져보다가, 가격표를 보고 놀랐던 일 때문이다. 20~30만 원이 보통이고, 심지어 50만 원이 넘는 것도 있었으니까. 모두 외제 이름이 붙은 것들이었다.

 

  이마트에서 대한 그럴 듯한 것들의 가격. 3만 원대에서부터 8만9천 원이 제일 비쌌다. 마침, 제일 맘에 드는 게 있어서 잡고 보니 최고가격대.

  역시. 나는 보는 눈이 있단 말이야. 히히.

 

  그러나 웃음도 잠시. 가지고 간 플라스틱 끈을 노트북이 들어갈 칸에 대고 재보니 좁다. 다른 것들도 열어서 전부 그 안의 폭을 점검해봤지만 하나같이 그랬다. 내 노트북의 좁은 쪽 너비보다, 1~1.5cm 정도 칸이 좁았다.

  오마나. 이걸 어쩐다. 요즘 노트북의 세로가 좁아지다 보니, 모든 가방들이 그 추세를 따른 것. 노트북을 바꿔야 하나?

 

                                                        *

  하기야, 내 노트북은 8살짜리다. 내 옆자리의 번역가가 그 나이를 듣더니 허걱! 했다. 요즘 세상에 그런 낡은(?) 걸 쓰는 사람이 있느냐며.

 

  8년 전인 2004년. 나는 큰 맘 먹고 집안의 전자통신 기기 현대화를 단행했다. 노트북 하나와 피시 두 대를 교체했다. 내 방에서 쓰는 피시는 전보다 훨씬 업그레이드 된 걸로 했고, 거실에 놓고 쓰는 아내의 피시는 쓰임새가 많지 않을 듯하여 조립품으로 선택했다. 정품과 조립품의 가격 차이가 배나 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실제 사용량은 가격의 역순. 다시 만학도의 길을 걷게 된 아내의 피시는 오전 오후 저녁을 가리지 않고 바쁜 게 예사였고, 내 방의 피시는 늘 그랬던 것처럼 새벽의 두어 시간 동안만 키보드에서 다다다다 소리가 났다. 노트북은 한 달에 절반 이상은 해외출장이었던 내 삶과 궤적을 같이 했다. 한 달에 보름 정도, 새벽과 밤 시간에 두어 시간 정도씩만 열을 냈다.

 

  컴들이 노쇠 현상을 보이는 건 사용량 순이었다. 아내의 피시가 제일 먼저 갔다. 수리기사 신세를 서너 번 졌지만, 작년에 끝내 순직하셨다. 수리 비용이 컴 값보다 더 나오는 견적서 앞에서 장렬하게.

  그 뒤 차례는 내 노트북. 그 전까지는 한 달에 절반만, 그것도 서너 시간 정도만 열을 내면 되었는데 (컴을 작동하면 그 안에서 작은 환풍기가 돌면서 내부에서 생기는 열을 발산시킨다), 작년부터는 하루 열 시간도 넘게 혹사당한 것이다. 어떤 때는 하루 8시간도 못 쉬고 내리 3달을 열 낼 때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요즘은 갈수록 노트북이 노인네 티를 낸다. 화면 전환 속도가 늦어지는 것은 다반사이고, 여러 화면 중 하나를 골라서 끄는 일조차도 마우스와 여러 번 씨름한다. 오류 메시지는 잦은 불청객이 되었고, 어제는 오전 두 시간 이상을 녀석과 씨름해야 했다. 재부팅을 해도 커저의 먹통이 계속 되어서다.

  그래도 가장 멀쩡한 게 내 방의 피시. 녀석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새벽에 두어 시간, 잘해야 서너 시간 정도만, 열을 내면 되었다.

 

                                                        *

  배낭들의 순례가 끝난 뒤, 아내에게 슬쩍 말을 건넸다. 어제도 오전 작업 대부분을 노트북과 씨름하느라 날렸노라면서, 이참에 노트북도 바꿔야 할까보다고. 낡은 노트북이 들어갈 배낭이 하나도 안 보인다면서.

  가장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눈치를 살살 살폈다. (모름지기 백수는 힘 있는 사람 앞에서 가장 불쌍한 모습이어야 얻어먹을 거 제대로 얻어먹고, 군소리는 덜 얻어먹는다.)

 

  그러자, 이게 웬일?

  -일하는데 제일 중요한 게 노트북인데, 바꿀 때 됐으면 바꿔야지요...

  이렇게 황감할 데가... 아내의 말마디들은 금세 황금 갑옷 차림의 천군만마로 변신했다.

 

  왔노라, 가방의 문제점을 보았노라, 그 바람에 노트북까지 땡 잡았노라!

  나는 노트북 코너로 쏜살같이 내달렸다. 그리곤 맘에도 들고 값도 적당한 녀석을 찾아들었다. 그런데, 아뿔싸 내 신용카드를 집에 두고 온 것 아닌가.

 

  그때다. 그날따라 하해처럼 드넓어 보이시는 마나님께서, 내 옷깃을 끌었다. 판매원의 눈길을 벗어나자, 하시는 말씀.

- 잘 됐네 뭐. 요새 하이마트에서 전 품목 세일한다고 문자도 왔는데, 집에 들러 카드 갖고

   하이마트로 가요~~

 

  그리하여, 나는 어제 땡 잡았다. 배낭을 사러 갔다가 노트북까지 챙겼당.

  듀얼코어에서 콰드코어로 4배속 쾌속 승진은 물론, SSD까지 장착되어 각종 검색이나 웹 서핑에서 눈이 둥그레질 정도로 시원시원하게 화면을 띄워주는데다, 별도 저장도 가능한, 최신형 노트북을 오늘 저녁이면 내 손안에 넣게 된다. 그것도 8년 전에 샀던 값의 절반 조금 넘는 가격으로.

 

                                                           *

  돌아오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금속으로 된 멜빵 끈 고리가 마모되어 끊어질 정도가 될 동안, 내 노트북 가방의 고리는 그 얼마나 만만찮은 무게에 시달렸을 것인가.

  겉으로는 안 보이지만 안으로 삭아드는 피로. 그게 금속피로인데, 내 가방의 멜빵 고리가 바로 금속피로 앞에서 널브러진 셈이었다.

 

  또, 우리 집의 두 피시와 내 노트북. 아내의 피시는 과제물 처리와 악보 모으기, 특기 교사 수업용 자료 챙기기 등으로 하루 여러 시간을 몇 년 동안 시달리면서 열을 내느라 요절하셨다.

  내 노트북 또한 주인을 잘못 만나 지난 두 해 동안, 예전보다 서너 배가량 갑자기 늘어난 작업시간을 소화하느라 고생했다. 바짝 열을 냈다. 그 때문일까. 급격한 노쇠 현상이 나타나 요즘 보통 헉헉대는 게 아니다.

 

  이제 내 노트북은 요절하신 마나님 피시 대신, 거실로 간다. 이젠 컴으로 바쁠 일이 왕창 줄어든 아내 곁에서 메일 심부름이나 하고, 웹 서핑 정도로 느리게, 여유 있게 팬(송풍기)을 돌려도 된다.

  남은 수명이 얼마일지는 몰라도, 그처럼 여유 있게 열을 내다보면 나한테 부대낄 때에 비하면 한유(閒遊) 천국이랄 수 할 듯싶다.

 

  인생도 그런 것 같다. 열을 내면 낼수록, 많은 열을 자주 발산하면 할수록 자신도 뜨거워지고 주변은 델 수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자신이 쉬 늙는다. 늙으면 갈 곳은 한 곳뿐이다.               [25 July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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