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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가락 물집으로 삶의 지도 그려 보기

[1事1思] 단상(短想)

by 지구촌사람 2012. 8. 11.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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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事一思]         발가락 물집으로 삶의 지도 그려 보기

 

                                                                                        최 종 희

 

  말을 잘하는 사람은 잘 그린다. 해야 할 말들을 미리 선명하게 떠올리고 잘 요약한다. 그래서일까. 명연설가들 중에는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세기적 명연설가로 꼽히는 (내용이야 어떻든) 히틀러나 처칠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그리고 이 나라에서 촌철살인의 명언들을 많이 유포시킨 김종필 씨 같은 경우도 화가 대열에 든다. 수입으로 보자면 이야기꾼이라고 해야 맞는 조영남도 참 말을 잘하는데, 그 역시 몇 번의 전시회를 연 화가다.

 

  화가들은 그림을 그리기 전에 관찰한다. 대상을 유심히, 깊게, 오래 살핀다. 시간의 앞뒤는 물론이고 대상과 화가, 또는 세상 사람들과의 관계, 대상이 주는 느낌이나 의미... 등을 사색한다. 그리고는, 잠시 침잠한다. 의식의 4차원에서 한참 놀고 나서, 대상 주변의 부유물(불필요하거나 요약에 방해되는 것들)을 제거한다. 알갱이만 남긴다.

  그러고는 그걸 그린다. 뜻하고자 하는 바를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 고심한다. 그런 노력을 거쳐서 한눈에 들어오는 화폭에 그 수많은 것들을 요약해낸다.

 

  말을 잘하는 사람들이 잘 그리는 까닭. 그것은 그 수많은 사상(事象)들을 한 장의 그림에 요약해내는 그런 사색의 과정 덕분 아닐까. 아니, 어쩌면 그 반대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그리기 훈련(잘 요약하기)을 기본적으로 거쳤기 때문에 말로도 잘, 멋지게 요약해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

요즘 우리나라에 ‘여행 산문 작가’들이 제법 있다. 대표적인 이로 한비야가 그 문을 열었고, 그 뒤를 이어서 몇몇 사람들이* 좋은 책들을 많이 써내고 있다.

[* 관심 있는 이들을 위해 여행작가군 중에서 몇 작품을 추천하라면, 나로서는 한비야 외에, 김남희의 <소심하고 겁 많고 까탈스러운 여자 혼자 떠나는 걷기 여행 1~4>과 <외로움이 외로움에게>, 전직 아나운서로서 이제는 여 행작가로 자리 잡은 손미나의 <스페인 너는 자유다>와 <누가 미모자를 그 렸나>, 소설가 김훈의 <풍경과 상처>, <제비는 푸른 하늘 다 구경하고 1~2>를 들고 싶다. 그 중 김남희와 김훈의 저서들은 문장 수련용으로도 최적이라 할 정도로 사물 관찰과 표현들이 빛난다. 비록 김남희는 저서 제목에서부터 우리말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그들을 굳이 ‘여행 산문 작가’라고 표기한 것은 여행 작가 중에는 사진작가도 있고, 일부 시인도 있을 수 있어서다. 그리고 기행문은 산문일 때 제 격이다. 몇 줄의 시로 요약해서는, 나그네의 신고간난(辛苦艱難)이나 발품 냄새, 사람들의 냄새가 제대로 안 난다.

 

  빼어난 여행 작가들 역시 잘 그린다. 풍광은 물론이지만 오가는 인정과 풍광 속에 녹아든 인문지리, 역사의 갈피에 숨겨져 있던 세월의 흔적과 한숨, 그것들에 잠시 걸터앉아 쉬어 가는 나그네의 되짚음과 깨달음들을 참으로 맛있고 예쁘게 그려낸다. 글로. 그런 여행기들을 읽으면 마치 예쁜 사색의 알갱이들이 서로 만나서 하나의 멋진 자수 작품을 만들어내는 듯만 하다.

  그리고 그 이유를 가만히 돌아보면, 그것들은 그림 그리기 과정과 닮아 있음을 깨닫는다. 세심해서 놓치지 않는 관찰, 깊은 사색과 따뜻한 침잠, 그리고 알갱이 그러담기.

 

                                                                   *

  그런데, 요즘 가만히 보면 말을 잘하는 사람들과 여행 작가들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둘 다 언어로 그림을 잘 그리는 것과 그 과정들이 비슷하긴 하지만, 여행 작가들은 무엇보다도 걷는다는 실제 행위가 여행 중에도 이어지고, 후에도 남는다. 말은 할 때뿐이고, 쓰는 것도 표현의 한 수단일 뿐이지만, 여행 작가들은 그 자신들이 ‘지도 밖으로 행군’한다.

 

  지도 읽기는 세상 읽기이기도 하다. 실제로 그 길을 걸어볼 때의 일이긴 하지만. 길을 걸으면 걷는 행위 외에, 보고 듣는다. 그것들이 생각의 질료가 되어 정리되고 나면, 그걸 다시 지도 삼아 걷는다. 지도상에 있는 길일 수도 있지만, 없는 길일 때가 더 많다.

  새로운 세상은 그렇게 없는 길을 찾아간 이들에 의해서 열린다. 그 시작은 세상 지도를 읽고 그 자신이 직접 걸어보는 일이다. 잘 요약된 말 이나 아름다운 어구 몇 개 앞에서 찬탄을 받는 것에서 멈추면 그런 길은 열리지도 보이지도 않는다.

 

  지프차를 타고 행군을 독려하는 고급 장교는 행군 맛을 모른다. 행군의 진짜 맛은 실제로 걸어봐야 안다. 발에 물집이 생기는 고통을 치러본 사람이 길도 알고 행군 맛도 알게 되고 세상맛도 제대로 읽어낸다.

  몸수고로 깨닫는 일. 그리고 그걸 삶의 새 지도로 삼는 일. 그것은 잘 그리는 것이나 말을 잘하는 것보다 훨씬 값진 일인 듯하다. 그리고 그런 의미 찾기 역시 제 몸에 생긴 물집을 들여다볼 때 더욱 새삼스럽고 절실한 것으로 다가온다. 내 배 아파하면서 낳은 자식들을 떠올릴 때처럼.

                                                                                [28 July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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