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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감대와 감동의 진실 혹은 진폭의 문제

[내 글] 고시랑 구시렁

by 지구촌사람 2012. 8. 15. 0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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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감대와 감동의 진실 또는 진폭의 문제


                                                     최 종 희


  익히 알다시피 성감대는 우리 몸에서 성적 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쉽게 흥분하는 영역(zone)이다. 얼른 찾아보려면 간지럼을 느끼는 부분을 꼽으면 된다. 표피층이 얇아서 진피층에 쉽게 자극이 전달되는 곳들이므로  발가락 사이나 발바닥도 해당된다.

  사람에 따라서 다르기는 하지만 부위로 말하자면 보통 열댓 군데가 된다. 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특이한 경우라도 스무 군데를 넘지 않는다.


  성감대를 통해서 자극을 전달하려면 그 부분을 정확히 짚어야 한다. 귓바퀴라고 흔히 부르는 외이부 한 군데만 보더라도, 삼분했을 때 구분이 되는 경계선 부근들이 대개 예민하게 반응하는 지점이지만 그것도 사람에 따라서 천차만별이다.


  성감대의 자극 행위는 동작이긴 하지만 그 상하 움직임의 골이 깊지 않기 때문에 정적(靜的)인 행위로 치부될 때가 많다. 느낌을 전달하려고 애쓰고, 느낌으로 음미되어야 하기 때문에, 느낌을 앞세워 그 행위 전체를 미세하게 구분해서 놓치지 않고 바라보기 때문인 듯하다.


  성감대의 자극은 미세한 떨림을 감지하도록 이끄는 게 키포인트다. 손길이 지나가고 나면 그만이고 말 정도로 순간적이거나 짧은 떨림일 때가 대부분이므로, 행위자는 더욱 긴장하고, 눈치 안 채게 상대방의 반응을 살피며 이곳저곳 내밀한 부분들을, 신체의 디테일을 빠뜨리지 않고 건드려 주어야 한다.


  성감대를 영어로는 erotogenic zone이라고 한다. 영어를 굳이 밝히는 것은 웬만한 작은 사전에는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고차원(?)의 언어인데도, 이 성감대라는 말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렇게 널리 퍼져 있다. 은밀해질수록 더욱 개인화되는 언어들이 지니는 흡인력 때문이다. 실제 성생활에서도 이 성감대 자극을 필수요건으로 알고 전희(前戱) 행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게 이 성감대를 자극하는 일이라고들 여기게 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인지, 너도나도 이걸 하지 않으면 전희 자체가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여길 뿐만 아니라, 성감대 자극을 통한 전희 행위 없이 치러진 성행위는 감점 대상이 되기도 한다. 본 게임에서 웬만큼 마무리를 잘했더라도, 성행위 전체를 미진한 것으로 여기는 습성에까지 젖어있다.

 

                                       *

 

  얼마 전 꽤 놀란 일이 있다. 이른바, 잘 팔리는 글들을 여러 편 갖다 놓고 읽어나가다가 갑자기 한 가지 궁금한 게 떠올라서 뭘 좀 조사해보고 났을 때다. 이미 읽고 나서 옆으로 밀쳐두었던 것들까지 도로 갖다 놓고 내가 밑줄이나 옆줄을 쳐놓은 부분들을 데이터화하기 시작했고, 그 데이터들을 가로 세로로 분석해보다가 흥미로운 결과를 대하게 되었다.

  요즘 잘 나가고 있는 우리나라 작가들의 이면을 훔쳐본 셈이라고나 할까. 그것이 오늘 논의할 핵심 내용이기도 하다. (필자 주 : 이 글은 작가 세미나 주제 발표 요약문에 첨부되었던 글이다.)

 

  문체론에서 어느 작가의 특이한 표현 태도를 두고 idiosyncracy라는 말을 한다. 한 작가에게서 나타나는 표현체계의 특질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그 특이성은 대체로 그룹이나 계통을 이루는 언어군의 분석으로 쉽게 파악된다. 그런데, 분석 결과가 의외여서 놀라웠다. 대상이 되었던 작가들에게서 공통적으로 쉽게 드러나는 경향이 있었고, 또 그것이 그다지 상서롭지 않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우선, 통계적으로 유의한 낱말들의 수가 생각 외로 적다는 것이 그 하나였다. 다른 하나는 분석 대상이 되었던 표현 중에서 가장 또렷이 솟아있는 단어들은 작품 전체의 흐름이나 주제와는 늘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그런 것을 감추는데 크게 서툴다는 게 더욱 놀라웠다.)


  후자의 경우는 달리 말해서, 가장 기억되는 떨림으로 읽는 이를 자극한 것들은 빼어난 표현이었지, 작품 전체의 뼈대와는 조금씩 들떠 있는 이중구조를 형성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사소한 디테일을 적확히 표현한 게 더 많아서, 소설 전체로 볼 때는 이야기 내용에 담겨 있는 울림보다는 이야기를 이끌고 가는 과정에서 보이는 꾸미개들이 더 빛을 발하는 기현상을 보이고 있었다.

   

  예를 들자면 주인공 앞에 나타나는 골목길의 표현이 영롱하게 빛나고 있을 때, 그 이야기를 다른 동네로 옮겨 놓기만 해도 작품의 가치가 단번에 반감되거나 어쩌면 그 생명력까지도 보장할 수 없게 될 것 같은 그런 작품들이 대종을 이루고 있었다. 그럴 때 작품속의 모든 디테일은 해당 작품의 특정 장소에 대해서만 유효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그래야만 일회적 특정화가 더 힘을 얻는 것 아니냐고 고집한다면 그건 또 다른 이야기가 되지만...

  <늬네 동네 이야기>라고까지 몰리는 성장소설이나, 이야기를 위한 이야기라고 폄하되기도 하는 우리의 액자소설들 안에서 내비치는 한계가 거기서도 드러나고 있었다. 개인적인 느낌 포착의 성공도 기껏해야 인간적인 감동의 문 근처에서 서성거리는 정도일 뿐, 인류적인 공감대로 부풀어 오르지 못하는 근본적인 결함이 거기서도 고개를 비죽 내밀고 있었다. 

 

  즉, 문체론적 접근을 통해서 드러난 일부 작가들의 실상은, 그리고 그들이 거둔 성과라고 할 수 있는 적지 않은 작품들은, 모두 언어의 성감대를 집요하고 은밀하게 추구하는 방식을 이용하여, 문학을 언어로 교직한 감동의 피륙이라고 정의하는 행렬에 이미 손쉽게 끼어들어 있었고, 눈에 띠는 깃발까지 매단 채 크게크게 흔들며 나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행렬의 끝이 보지지 않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그 뒤를 따르고 있는 게 오늘날의 현상이기도 하다.

 

 

  그들의 공, 즉 산문에 시적인 윤채미(潤彩美)를 도입한 공을 전혀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의미가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경향이 산문으로 받침되는 서사구조의 연질화를 초래하고 그것이 종국에는 등뼈까지도 물렁뼈로 교체하는 파국으로 이끌게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그리고, 그러한 경향은 이미 위험수위에 근접하고 있어서 그 조짐의 일부가 이미 물막이를 넘어서고 있다.


  시도를 넘어선 몇몇 감각파의 대두가 그것이다. 한 편의 작품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것은 심사(心思)의 형용사들이 추상명사로 옷을 갈아입고 온갖 사물에 빠뜨려지지 않고 붙여지는 것뿐이다. 나열이 길어질수록 세밀한 순간 포착력이 상찬 받는다. 감각파가 무료 배포한 안경을 쓰고 있는 사람들에게서다. 


  서사구조의 연질화에 대해서도 그들은 말한다. 요즘 같이 서사(敍事)의 영역이 막강한 시청각적 자극으로 무장한 영화에게 잠식당한 처지에서 할 수 있는 건 그뿐이 아니냐고. 그러나, 광막한 우주와 심해(深海)가 장면 전환 없이 접점을 마련할 수 있는 것은 소설이지 영화일 수 없다. 그런 말을 하면서, 오히려 영화적인 수법을 소설 속에 더 많이 수용하는  것이 그들이기도 하다. 영화의 위력 앞에서 소설 형식을 빌어 아부한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그리고... 또 다른 한 떼의 사람들은 그것을 바라보며  우려할 만한 현상이라고 여기는 듯하면서도, 반응에는 대체로 말을 아끼는 것으로 미필적 고의에 방조범을 겸하고 있다.

                                     *

 

  그런 사실들이 나열되자, 내가 요즘 글들을 대하면서 어째서 늘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되는지 확연하게 짐작되었다. 김화영 교수의 글을 읽을 때마다 머릿속으로는 감탄사를 머금으면서도 소리 내어 말하지 못하는 까닭을 알게 되었다.

  오랜 타향살이 끝에 돌아온 박상륭 님의 글이나, 오에 겐자부로가 종횡무진으로 펼친 작품세계를 내가 왜 새삼스레 흠모하게 되었는지를 명확히 알게 되었다. <로마인 이야기>와 <문명의 충돌>이 어째서 내게 한 편의 걸작 대하소설로 느껴지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 안에는 디테일만이 아닌, 내용물이 충만한 세계가, 우주가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박경리 님이나 <혼불>의 작가가 가꿔낸 유장한 세계를 대해도 크기에서는 비슷한 감흥이 생기기는 하지만, 최인호 방식의 치열한 역사 읽기를 대중 속에 놓아버려서인지 도도히 펼쳐지는 서사시를 대하는 느낌이 더 크게 남는다. 그런 까닭도 함께 이해되었다. 오에 겐자부로의 세계가 노벨상이라는 이름으로 <토지>이상의 값으로 매겨지는 이유가 조금 납득이 되면서.

   

  문학이 언어를 통한 감동의 창조라는 결코 와해될 수 없는 기능을 언제까지나 할 수만 있다면, 인류 역사가 지속되는 한 출렁거림 없이 수행하여야 한다는 데는 이의가 없다. 나 또한 그것은 당분간 도전의 대상도 되어서는 안 될 성역으로 간주하고 싶다.


  그러나, 요즘 문학계의 현상으로 여겨지는 페미니즘의 석권이 낳은 지나친 표현주의 지향은 경계되어야 할 것 같다. 특히, 우려되는 것은 추종자들의 일방적 경도(傾倒)다. 그 결과물들을 접하면 마치 겨눔에 익숙해진 자동카메라로 찍은 서로 다른 풍경 사진들을 보는 것 같다. 심지어 선자(選者)의 눈에 든 어떤 작품은 이미 간행된 시인의 시구가 따옴표 없이 사용된 적도 있었다. 아예 남의 사진을 가져다가 합성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페미니즘의 문학적 석권은 다른 영역에서와 같이 환영할 만한 경사다. 그러나, 베껴 찍기 위해서 자동 카메라를 들고 가서 그러한 성공에 너나 할 것 없이 매달리는 것은 부박해  보인다. 사진은, 감동적인 사진 작품은, 자신의  힘으로 발견한 장면을 수동으로 찍어야  한다. 구도가 엉성하고 질박해 보여서 덜 매끄럽고 완성도가 좀 떨어지더라도.

 

  페미니즘 문학의 승리에 편승하여 모사(模寫)에 덩달아 휩쓸리는 것을 보면 안타까울 때가 많다. 스커트가 올라간 것도 모르고 열광하는 이를 보는 듯해서, 그런 이를 대하면 그 광란의 열기를 조금은 이해하려고 해보다가도 허옇게 드러난 맨살에서 그 사람의 뿌리까지도 힐끗 보아버린 듯만 하다. 안타깝다. 그토록 일방적인 내닫기와 휩쓸리기가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는 것도 그 자리에서 쉽게 꿰어진다.   

  삶은, 인생은, 그 얼마나 깊고 너른가. 그것을 제대로 바라보려면 심안(深眼)과 더불어 유장한 호흡을 필요로 하는 일이 아닌가. 그리고, 문학 행위는 그 삶을 짚어나가기 위한 수많은 길 중의 겨우 하나에 불과하다.


                                      *

  성감대. 인체의 부위 중에서 많아야 겨우 스무 군데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이야기했다. 그런데, 언어를 통해서 감동적으로 자극을 전달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의 언어를 보면 사용 빈도수가 높은 단어들은 백여 개 안팎이다. 그리고 그 언어를 조탁하는 자세가 고착되어 있다. 서로들 닮았다. 세밀히 들여다보고  잘게 쪼개는 데는 선수들이다. 그 안에서 감동을 생산해 보려고 애쓰며 맴돈다. 좁은 세계에 스스로를 가둔다.

  그러나, 성감대의 자극이 그렇듯이 그렇게 애써서 얻은 것들로 행간에 뿌려놓은 자극은 지속적이지 않다. 문맥을 벗어나서, 패러그래프만 달라져도 깊이 있는 떨림으로 남지 않는다. 세계가 뒤흔들리도록 맛보는 것이 진정한 떨림이다.


  성감대를 자극하는 것은 본격적인 교접에 앞선 전희 행위라는 말도 이미 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성감대를 자극하지 않으면 비교적 흡족한 시간을 가졌더라도 사랑의 행위 전체를 덜 탐탁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횡행하는 풍조에 올라타서 같이 흔들려야만, 무엇이든 남들과 함께 휩쓸려야만 안심하는 사람들일수록 더욱 그렇다.

 

  문제는 그런 이들과 사랑을 하는 사람들도 이미 그 정도를 미리 알고 수준과 방식 앞에서 같이 망설일 때가 많다는 점이다. 그럴 때는 기분에 따라서, 그리고 상대방의 반응을 관찰하면서, 본 게임에 임하는 성실도와 수고의 양을 정하는 약삭빠름도 한몫하게 된다.


  진정한 성행위의 만족감을 맛볼 수 있는 것은, 그리하여 행위 후 상대방을 더욱 진한 애정으로 감싸안게 되는 것은, 본 게임에서 보인 파트너의 진지하면서도 성실한 태도다. 그럴 때 감동이, 사랑의 느낌이, 오래 지속된다.

  그리고, 가장 진한 감동은 최후에 와서 오래 머문다. 사랑을 담은 진지한 몸짓 하나, 말 한 마디, 그윽한 눈길, 그리고  행위 후에도 파트너의 몸에서 이내 떠나지 않은 채 오래 머물며 쓰다듬어 주는 따뜻한 손길...... 그런 것들이 모여 감동의 절정을 이루고 그에 대한 느낌의 충적층 위에 한 켜를 더하게 된다.


  언어의 성감대를 자극하는 일은 글쓰기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행위이기는 하다. 전희가 빠져서는 싱거운 행위가 되듯이. 그러나, 그것은 첫걸음을 떼어놓기 위한 길 열기이기도 하고, 기나긴 도정에서 이따금 독자를 지치지 않게 하거나 심심하지 않게 하기 위한 자극제 역할 이상으로 매달릴 일은 아니라고 본다.

  그런 연질의 언어로는 문장 하나로도 아득해지는 인생의 문을 열어 보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전체를 그러한 민감한 성감대 언어로 도배질했을 때 그것이 좋은 작품인지 어떤지는 모르겠다. 여하튼, 그런 작품은 처음부터 언어 하나하나까지도 완벽하게 설계되어 인위적으로 배치한 단편소설이거나, 시가 아니라면 그렇게 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쓰는 이들이 그런  작의적인 긴장력을 내내 유지할 수도 없거니와, 유행하는 단어 한 무더기를 넘어서서 새 말을 나열하고 싶더라도, 막상 자신이 찾아낸 언어 사전의 항목들을 들여다보면 빈약하기 짝이 없기 때문이다. 아주 짧게 잘라내어 서둘러 완성도를 높이려는 것처럼 보이는 소품들이 유행하는 것도 그 때문인 듯하다.


  그럼에도 그런 소품들에 독자들이 길들여져 가고 있다. 글을 쓰는 이들의 태도가 독자들의 읽기 태도에 쉽사리 반영되는 것도, 그리고 쓰는 이들이 읽는 이들의 눈치를 부쩍 살피게 된 것도 요즘 눈에 띠는 정황이다.

  쓰는 이들이 짬을 내어 한번쯤 그 책임에 대해서 진지하게 궁리해보고 지나가야 할 일이 아닌가 싶다.  

      

                                          *

  성감대에 관심하기. 그리고 자극하기...... 빼놓을 수 없는 과정이기는 하지만,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성행위에서 파트너의 성감대를 귀신 같이 읽어내고 능숙하게 운용하면서 성감대를 능갈치게 활용하는 것은 플레이보이다.

  그리고, 플레이보이들은 성공적인 성감대 자극을 자신만의 빼어난 성교 기법으로 뻐기는 경향이 있다. 그런 남자들에게 길들여진 짝꿍들도 성행위에 대한 기억의 대부분은 그런 것으로  채워진다. 훌륭한 파트너의 결정 기준으로 그 잣대부터 들이댄다.


  그러나, 성감대는 이미 얘기했다시피 표피층이 얇은 곳이다. 유방과 같이 몰캉거리거나 조금만 추워도 파랗게 변색되는 입술처럼 진피층을 보호하는 표피가 힘을 못 쓰거나 부실한 곳들이다. 불감증을 치료하기 위해서 한방에서 채택하는 경혈들도 대부분 그런 곳으로서 발뒤꿈치 같은 곳은 어린애 손으로 눌러도 금방 고통을 호소할 정도로 진피층이 연약하다.

  그런 약한 곳들을 쓰다듬는 데만 골몰하는 사이에 어느덧 합성 실크 같은 보드라운 감촉에만 길들여진 손길들이 삼베같이 거친 삶의 표피에 몰아치는 폭풍우와 파도 앞에서 의연하게 버텨낼 것 같지가 않다. 그러니 엉뚱한 얘기들을 하는 경우조차 생긴다.


  늘 낮고 좁은 승용차 안에 갇혀서 오가는 길에 올려다 본 하늘에서 몇 번 눈길과 마주친 구름장을 마치 비행기를 타고 위아래로 거느리고 다녔던 구름으로 그리면서, 하늘에 오르면 그 구름과 창공과 더 높은 곳으로의 비상을 꿈꾸게 된다는 허황한 얘기를 하는 일도 그래서 생긴다.

  실상은, 진실은, 전혀 다르다.  하늘을 향해 목 빼고 바라는 일은 지상에 머무는 사람들이나 하는 일이고, 하늘에 오른 사람들은 우선 땅부터 찾는다. 아래를 내려다보게 된다.


  하늘에 오르면 땅부터 생각나고 모든 사고의 소실점은 지상의 삶으로 향한다. 두고 온 사람, 돌아갈 집은 지상에 있기 때문이다. 마치, 이십 년 동안을 바다에서 보낸 사람에게 가장 보고 싶었던 게 뭐냐고 물으니 계곡이나 냇가에 흐르는 맑은 물이었다고 해서, 물에 갇혀 지냈던 사람이 또 다른 물을 그리워한다는 게 선뜻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정면으로 삶을 대하는 사람들의 시선이 머무는 곳은, 곁에서 깐죽거려보는 짐작과는 딴판이다. 바다사람이 그리는 세계가 계곡의 물가에서 펼쳐지듯이.

 

 

  물론 그들의 피부는 충분히 거칠다. 얇은 피부의 자극쯤은 가소롭게 여기기 때문에 계곡 얘기를 듣고 갸우뚱거리는 사람들을 외려 재미있다는 듯이 빤히 바라보고 그리고 지나간다. 사방에서 으르렁거리는 파도에 갇혀 지내보지 못한 사람들의 세계를 그는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아름다운 성행위는 사랑의 확인과 그 지속을 위한 노력의 묶음이지 결코 표피를 집중적으로 자극하는 전희만이 아니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자극적인 것은 눈에 띠지만, 그 감동이 지속되지 않는다. 삶에 대한 시선이 가늘게 떨릴  정도로 오래도록 감동적이기 위해서는 그 전체적인 내용물이 실속이 있어야 한다. 의미 있는 것이거나 새로운 것으로 채워져 있어야 한다. 그리고 어느 것이든 깊이 있는 것들과 그 끈이 닿아 있어야 한다.


  사진 용어에 심도라는 말이 있다. 작품에서 드러나는 깊이를 뜻한다. 평면으로만 표현되는 피사체지만 그 주변의 정황을 이용하여 원근감을 살려서 그 질감이나 중량감을 나타내보려는 노력을 뜻하는 말이다. 같은 배경을 두고 찍은 인물 사진도 심도에 따라서 그 느낌이 무척 다르다.

  깊이 있는 사진을 얻기 위해서는 관찰자의 광각(光角)도 중요하지만, 심도를 살려내려는 기술도 무시할 수가 없어서 조리개와 노출시간을 임의로 조작할  수가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런 조작이 불가능한 자동카메라로는 어림없는 일이다. 자동카메라를 선택한 사람은 처음부터 심도 자체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


  사진에서 심도 효과를 거두려면 대개 조리개를 좁게 열고 노출시간을 늘리는 방법을 사용하는 것 같다. 사람으로 말하면 가늘게 눈을 뜨고 오래 쳐다보는 것이라고나 할까. 사물의 표면뿐만 아니라 깊은 내력까지도 읽어내려는 눈빛에 가깝다. 삶의 표피가 아니라 그 깊이를 들여다보려는 시선과 비슷하다.

 

  동네 골목과 책상머리를 벗어나 넓은 바깥세상의 어딘가에 그런 시선들을 향하게 하려는 것이야말로, 삶을 새롭고 깊이 있게 그리고 넓게 관찰하여 성찰을 감동으로 버무려 내려는 태도의 출발 지점일 듯하다. 글을 쓰려는 이들은 각자 그 자신만의 출발점이 있어야 한다.


  성감대를 자극하는 것만이 사랑하기의 전부가 아니듯이, 그리고 거기에만 열중하면 진정한 사랑과는 멀어지게 되듯이, 쓰기 작업에서도 이제는 미학의 추구가 언어의 성감대로만 지나치게 몰리는 태도에 변화가 와야 할 것 같다.

  진정한 감동은 깊이와 넓이를 갖춘 인간적인 세계의 성찰에서 우러나온다. 현상은 언제나 일과성일 수 있다는 자위를 미리 곁들여, 노파심에서 거듭 못 박고 싶은 말이다.  [19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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