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아이들이 크면 왜 어른들과 안 놀까?

[내 글] 고시랑 구시렁

by 지구촌사람 2011. 10. 19. 10:03

본문

728x90
반응형
SMALL

                             아이들이 크면 왜 어른들과 안 놀까?

 

  아이들 머리통이 커지니, 어른들과 함께 하려 들지 않는다는 얘기를 자주 듣는다. 특히 야외 행사 같은 데에서. 왜 그럴까? 어린 시절에는 엄마 치마꼬리를 잡고 뱅뱅 돌던 아이들이... 그리곤 아이들이 변했다고들 한다. 머리통들이 커지니 부모 말 안 듣는 게 예사라면서.

  하지만, 그건 대단히 잘못된 예단(豫斷)이다. 오진(誤診)도 그런 오진이 없다. 아이들이 변한 것이 아니라, 부모들이 변해서다. 심지어는 자신들이 변했다는 사실 자체도 모르거나, 그 변화를 유심히 관찰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특히, 아이들과의 관계에서. 요즘 아이들이 가정에서 가장 문제라고 여기는 것은 소통부재 내지는 소통 방식이다. 어떤 조사에서도 그 결과는 비슷하다.

 

  유아기나 아동기 시절의 부모들은 젊다. 20대에서 30대 사이. 그리고 아이들이 하자는 대로, 아이들이 바라는 것들을 대체로 모두 해준다. 같이 놀아주고, 같이 뒹굴고...

  피부접촉은 기본이다. 안아주고, 뽀뽀하고, 손잡고 다니고, 업어주고...

 

  그런데, 아이들이 초등 고학년생이나 중학생 정도가 되면 부모들은 30대에서 40대로 올라선다. 이때부터가 문제다. 아이들이 컸다 싶으면, 같이 (제대로) 놀아주지도 않고, 아이들과 함께 하려는 마음들의 내용물이 확 바뀐다.

  아이들을 위해 짬을 냈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어른들 맘대로다. 예컨대 야유회를 가도, 어른들은 그늘 사냥 아니면 먹어대기가 주다. 그도 아니면 마셔대기나 고스톱 판.

 

  물가엘 가도 물속 구경 제대로 하려드는 어른 드물고, 고기잡이에 걷어붙이고 나서는 사내들조차도 그걸 아이들을 위한 주무대로 삼는 이는 드물다. 그저 아이들은 곁다리일 뿐이다.

  게다가, 아이들이 뛰놀고 싶거나 하고 싶은 일들에는 어른들의 몸뚱이가 게으르기 짝이 없다. 점잔 나부랭이까지 거기에 얹혀지면 그저 뒷짐 지고 거닐거나, 앉아서 배나 두들기는 일이 거의 전부.

 

  야외에 나가서 가족들이 함께 할 고정 놀이 프로그램 하나조차 없는 가정들 부지기수다. 원반던지기(flying disc), 자치기, 잔디 구르기, 연 날리기에다 배드민턴, 비석치기, 공기, 닭싸움, 민물새우잡기, 호드기 만들어 불기... 등 잠깐만 생각해도 놀이 종목은 끝이 없는데도. 그런데도, 아예 생각하려고 들질 않는다.

  하기야, 노는 일도 제대로 잘 놀아본 사람이 어디 가서도 잘 놀긴 한다.

 

  하지만, 회사 야유회 등의 오락프로그램을 똑 부러지게 준비했던 이조차도 가족 야유회 프로그램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게 문제다. 그런 의식구조가 뿌리 박혀 있다.

  집 나서면서 먹을 건 바리바리 챙기는데 정작 중요한 놀이 항목들은 대체로 꽝이다. 먹기 위해서 길 나서는 집들이 대부분이라 할 정도로, 어른들은 먹고 마시기로 시간 땜질한다. 그럴 때면 아이들은 어른들과 저절로 격리되어 반강제 자유 독립이 예사다. 저기 넓은 데로 나가들 놀아라!! 한 마디로.

 

  그러므로, 인근 지역 산나물 탐사, 계절 푸성귀 들여다보기, 유적 탐사, 수생식물 관찰, 탐조여행, 박물관 순례, 관심 테마 집중 탐사... 따위는 어쩌다 깨인 부모들의 특별선물에 속한다.

  그런 것들이 청소년기 아이의 장래를 좌우하는 일로 이어지기도 하고, 최소한 과외 활동의 학습효과로는 으뜸에 드는데도. 그렇다는 걸 뻔히 알고 있음직한 부모들조차도 실제 생활에서는 ‘전혀’에 가까울 정도로 무관심하다. 학업과 관련하여 불간섭주의를 미덕으로 삼는다. 그게 유력한 통설로 통용될 정도다. 하지만 그것은 의도적 방치라고 해야 한다. 어느 날 마뜩찮은 성적표들이 쌓이면 폭발하곤 하니까.

 

                                                                   *

  아이들이 어른들과 함께 하려 들지 않는 이유. 한 마디로 재미가 없어서다.‘재미있는’ 것에는 나이가 어떻든 죄다 홀딱 빠지는 법인데, 부모들과 어딜 가면 그 재미라는 게 도무지 없다.

 

  인간은 호모 루덴스(homo ludens)다. 유희(遊戱)하는 동물. 네델란드의 하위징아*가 오래 전에 정의한 말이다. (*주 : 예전엔 호이징어라고 했는데 외래어 표기법이 바뀌어, 표기도 변했다)

  인간은 그 유희의 즐거움을 어미와의 피부접촉 (간질임 따위)을 통해 어린 시절부터 배워온, 작의적(作意的) 유희-놀이-의 최고수(最高手)들이다. 동물들 중 인간만큼 제 좋자고 놀이를 많이 개발해낸 것도 없다. 웃을 줄 아는 유일한 동물이 인간인 것과도 상통한다. 그리고 그 놀이의 알갱이는 재미다. 저절로 웃음이 곁들여지는.

 

  30대 후반만 넘어도 이 나라 ‘아지매’들은 엉덩이가 무거워진다. 40대에 들어선 사내들은 겉늙는 데에 선수들. 어딜 가면 뒷짐 지고 한 발 빼는 데에 버릇 들어 있다.

  그런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으로는 목구멍이 보이도록 웃어대는 일이 아주 적거나 드물다는 것도 들어 있다.

 

  놀이시설이든 뭐든, 아이들과 함께 하는 일에서 뒷짐 지고 있거나, 한 발 빼는 부모들이 아이들을 부모로부터 멀리 떼어놓는다. 아이들은 어떤 경우든 부모 가까이 하고 싶은데 ‘잼바리 없는’ 부모들이 아이들을 다가오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걸 부모들은 거꾸로 생각한다. 아이들이 머리통 커지니, 지 친구들하고나 놀려하지 부모들과는 멀리 한다고...

 

  부분적으로는 맞는 얘기다. 커가는 아이들은 친구들과 어울려 또래문화를 형성하면서 커간다. 나는 그걸 <또래 지향의 사회화> (pro-coterie socialization)과정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것은 부모와 함께 하지 않는 시간대의 선택이지 부모와 함께 할 때는 최근친(最近親) 관계망(the nearest available relation network)에 저절로 소속되게 된다.

  즉, 아이들은 친구들하고 함께 하고도 싶지만, 언제 어디서고, 나이가 얼마든, 자식은 부모하고 노는 것을 제일 좋아한다. 본능적이다.

 

  내 말에 고개가 갸웃거려지거든, 머리통 다 컸다고 생각하는 그대들 자신의 경우를 생각해 보라. 바로 지금, 그대들은 부모와 함께 지내는 시간이 재미 없는가 하고? 효도니 뭐니 하는 의례적 형식적 중압감을 잊고, 부모와 즐거운 시간들만 가지게 된다면 만사 젖혀두고 부모와 함께 하게 되지 않는가?

  이제 여기서 이론은 접어두자... 사진들로 이야기하는 게 빠르지 싶다.

 

1. 힌트 하나 : 가족놀이 몇 개쯤은 고정적으로 확보해두라!

 

  그리고, 그 다음 제일 중요한 것. 가족놀이를 할 때는 나이고 뭐고 다 잊고 그저 재미에만 몰두해야 한다. 어른 먼저 즐거워할 줄 알아야 한다. 즐거워하는 일은 본능회귀일 뿐, 암 것두 아니다.

  아무 데서나 나잇값 어쩌고 하지 말라. 진정으로 나잇값 따져야 할 곳은 이런 일에서가 아니다. 이 사회가 양(陽)의 방향으로 발전하는 데에 기여하는 일에서 그 나잇값을 잊지 말아야 한다. 탐욕 버리기 같은 데에서 꼭 해야 할 게 바로 그 나잇값이다. (정작 잊지 않고 나잇값을 꼭 챙겨야 할 때에 일부러 까먹는 얼치기 내지는 더러운 사람들이 안 따질 때 따진다.)

 

  어른들이라면서도 자신 있게 동요 몇 곡도 못 부르는 이는 어른도 아니다. 왜냐,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생각해 보라. 동요라는 건 자신도 지나온 어린 시절에 지금의 아이들보다도 훨씬 앞서서, 신나고 즐겁게 부른 것들 아닌가?? 그런데, 왜 이제 와서는 그 동요를 부르지 못한다는 말인가.

  어른들이 동요를 부르지 못하는 것은 그런 자신의 어린 시절 모습에다 나잇값이니 뭐니 하는 따위의 쓸데없는 장식품을 매달아서다.

 

 

<‘쎄쎄쎄’ 하기 : 경기도 시흥 관곡지. 연꽃 구경 마치고, 임시 야외식당에서>

 

<발로 ‘쎄쎄쎄’ 하기 : 어느 복날 식당에 갔다가, 주문한 음식 기다리면서>

 

  우리가 어디 가서 짬이 나거나, 생각나면 자주 하는 게 이 <쎄쎄쎄>다. 흥겹게 노래하고, 손바닥 딱딱 마주친다. 그게 바로 피부접촉이다. 그것도 따끈따끈한 온기가 전해지는... 일석삼조다.

  가족놀이가 주는 으뜸 선물은 내 보기에 피부접촉 혹은 거리 좁히기이다. 무엇을 어떻게 하든, 가족들 간에 거리가 좁혀지고, 피부 접촉의 횟수가 늘어난다. 그리고, 그 결과로 주변 공기들이, 마음 온도가 따뜻해진다.

 

  ‘쎄쎄쎄’를 자주 하다보니, 바로 위 사진에서처럼 발로도 가능해진다. 그리고, 우리가 발명(?)한 것이지만, 셋이서도 가능하다. 둘씩만 하니까 한 사람이 남아서, 처음 시도해봤는데, 대성공!! 셋이서 해도 딱딱 맞는다. 아래 사진에서처럼.

  다만 기본 실력에 더하여, 연습을 좀 해야 한다.

 

                                       <쎄쎄쎄는 이렇게 셋이서도 할 수 있다>

 

  이걸 어느 가족 모임 때 (서너 해 전 추석모임이었나 보다.) 장인장모님에게 가르쳐 드렸다. (하기야, 나 역시 이 ‘쎄쎄쎄’를 기를 쓰고 배웠다. 나이 40을 넘기고 나서.) 그런데, 두 분이 얼마나 좋아하시던지......

  그 날 모인 전 가족이 ‘쎄쎄쎄’를 했다. 처음 해보는 사람들이 절반은 되었다.

  <쎄쎄쎄를 처음 배우고 아주 신나하시는 장인장모님>

 

2. 힌트 둘 : 어른들이 먼저 하라. 어설프게 하는 척만 하지 말고, 제대로 정성들여

        하라. 몰두하고 즐겨라. 그러면 아이들은 더욱 좋아하고, 그대로 따라 한다.

 

 

 

<파주 3릉 매표소 앞 널뛰기판>        <부천 생태박물관 안의 굴렁쇠 놀이>

 

  널뛰기와 굴렁쇠다. 그 중 널뛰기는 요즘 어딜 가도 쉽게 대할 수 있다. 웬만한 유적지에만 가도 기본 배치품으로 들어가 있다. 투호와 함께. 아이들 학교에도 해둔 곳들이 제법 된다.

  굴렁쇠도 이따금 이런저런 곳에서 대할 수 있다.

 

  보거든 달려들어 하면 된다. 어린 시절 해보던 것들을 오랜만에 대했으니 우선 반가워해야 하고, 그립거든 달려들어 껴안으면 된다. 망설이면서 눈치보고 나잇값 따지고 어쩌고 할 필요 없다. 사랑하는 데에 그런 짓들 하지 않지 않는가? 놀이에 껴드는 건, 사랑을 몸으로 껴안는 짓일 뿐이다.

 

  문제는 이런 것들을 할 때, 하는 시늉만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는 점이다. 몇 번 해보다가 만다. 놀이를 제대로 즐기려면 제대로 해야 한다. 안 되면 될 때까지 연습을 해서라도. 널뛰기도 연습하면 하늘 높이(?) 날아오를 수 있다.

  예컨대, 골프를 치는 중년사내들이라면 널뛰기 앞에서라도 골프 연습하듯이 열심히 해서 제대로 해야 한다. 하는 척만 하지 말라... 삶에는 건들기로 제대로 껴안을 수 있는 건 하나도 없다.

 

 

 <당진 시절 우리 집 텃밭 한 귀퉁이에서>

 

  작년 여름, 뒷집 권사님께서 우리가 콩을 좋아하는 줄 아시고, 콩대 째로 가져오셨다. 마침 텃밭 빈자리가 있기에 거기서 콩을 구워먹었다. 어린 시절 콩서리의 기억까지 얹어서...그 콩 맛을 본 아이 어른들이 하는 말.

 “와, 무쟈게 맛있넹...”

 콩서리 기억이 없는 이들이라도, 손과 얼굴에 검댕 묻히며 먹은 기억은 오래 가기 마련이다.

 

 

<--제주도 돈내코 유원지 안의 놀이시설>

   작년 제주도에 갔을 때, 대형 놀이공원이 통째로 버려지고 있는 곳엘 갔다. 돈내코 유원지. 그 드넓은 곳에 설치된 여러 놀이시설을 우리 세 식구가 독점하고 놀았다. 동아줄로 짠 그물을 오르는 놀이인데, 밑에서 망설이던 공주가 아빠가 오르는 것을 가만히 관찰하더니 흔들리는 줄을 잡고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만, 다 올라와서는 줄이 손에 익었다 싶자, 들입다 흔들기 시작했다. 되레 내가 떨어질까봐, 줄 잡은 손에 힘을 잔뜩 주어야 했다. 벌벌 떨 정도로... 공주의 깔깔거림이 오래 갔다. 돈내코를 빠져 나온 뒤로도 저녁때까지. 아빠가 줄 잡고 떨었다면서.

 

<--투호. 당진 ‘세계 쌀 축제’에서>

 

  아이들이 어른들하고 다니면 재미없는 이유. 그건 단순하다. 재미있을 듯한데 거기에 끼어주질 않기 때문이다. 어른들이 재미없다면서 (어른들 기준으로) 그냥 지나치거나, 어른들이 앞장서서 아이들을 끼어 주려 하지 않는다.

  어른들이 먼저 하고, 그리고 아이들을 껴주면 아이들은 그 다음서부터 더 신나게 논다.

 

  우리 공주는 이제 어딜 가도, 투호(投壺) 앞에서 제 먼저 달려든다. 거의 선수급. 어른들도 성공하기 쉽지 않은데, 어디서고 하나 정도는 성공한다. (안 되면 맨 마지막에 손으로 들고 가서 넣어서라도 성공시킨다! 하하하.)

 

  가족 모임에서 항상 빠지지 않는 전 가족 합창과 가족별 합창. 이제는 제 차례가 오면 뭐든 불러야 한다는 게 몸에 배어 있다. 누구든. 아이들뿐만이 아니라, 가족별로도 애창곡 몇 개쯤은 꼭 가지고 있어야 한다.

  가족문화란 건 별 거 아니다. 몸에 밴 가족 놀이들도 그 안에 든다. 실한 알맹이 중의 하나로...

 

<-- 어느 해의 추석 모임. 전 가족 노래는 모임에서 늘 빠지지 않기 때문에 어느 핸지도 불명일 정도. 공주 차례에 할머니가 듀엣으로 참여 중. 옆에서는 다가올 차례에 대비해서, 한참 선곡 중이닷. ㅎㅎ>

 

  어른들이 먼저 해야 한다! 어른들이 손발의 수고를 아끼면, 아이들은 재미가 없다. 재미가 없으면 아이들은 어른들하고 안 논다!!

 

  사진 속의 중년 사내는 현직 장학사다. 직책만으로 근엄해야 할 사람이지만 어디 가면 그런 망나니(?)도 없다. 좌측사진은 수세미 두 개를 귀에 대고 즉석 이어폰 흉내를 내고 있는 중이다. 어느 소규모 관광농원에서의 모습인데, 아이들은 어딜 가서 수세미를 대하면 이렇게 놀았던 기억을 떠올린다. 수세미 이름을 굳이 기억시키지 않아도 잘만 안다.

 

  사진 설명이 필요 없다. 저 중년 사내는 아이들의 밥이다. 올라타고 젖히고 별 짓을 다 해도 되는 아주 편리한 놀이시설이다. 게다가, 살아서 말귀도 잘 통하는.

  아이들이 어디서고 그의 말이라면 뭐든 잘 듣는 이유가 따로 없다. 말 안 들으면 재미없는 이웃집 아저씨로 변하니까. 그렇게 해서, 진중한 말이든 뭐든 그의 말은 오래 기억된다. 아이들이 말을 '아주 잘 들었으니까’. (계속)             [Feb. 2009]

 

반응형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