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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 선고] 결과를 예단하며 생각해 보는 말들 : 정치적 재판과 ‘정치판 재판’, 합리적 의심과 추단, 그리고 포괄적 뇌물

[내 글] 진담(眞談)

by 지구촌사람 2017. 8. 25.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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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 선고] 결과를 예단하며 생각해 보는 말들 : 정치적 재판과 정치판 재판’, 합리적 의심과 추단, 그리고 포괄적 뇌물

 

정치적 재판과 정치판 재판

 

오늘 오후 내려질 이재용 1심 재판 선고 내용을 두고 백가쟁명이다. 그중 가장 원론적인 주장의 일례를 예시하면 다음과 같은 쪽이다.

 

재판부는 형사소송법상의 증거 법칙과 공판중심주의에 따라 오직 법정에 현출된 증거에 기초하여 유무죄를 판단해야 한다. 법관은 공판정 외에서 얻은 정보에 기하여 심증을 형성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형사재판에서는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beyond reasonable doubt)의 유죄의 증명이 없는 한 무죄인 것이고, 그 입증 책임은 검사에게 있다.

 

우리 사회에는 정치인들이나 대기업 관련 사건의 판결에 대하여 순수하게 법리적으로 접근하지 않고 정치적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풍조는 법률 문화와 법치주의 발전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재용 피고인이 국내 최고 재벌기업의 후계자 겸 경영자라는 이유만으로 선처를 받아서도 안 되지만 불이익한 대우를 받아서도 안 된다. 형사소송법상의 증거 법칙에 의하여 유죄의 증명이 부족하면 과감하게 무죄를 선고해야 할 것이고, 유죄의 증거가 충분하다고 인정되면 엄벌해야 한다. -법률신문

 

원론적으로는 백퍼센트 지당한 말이다. 법치국가에서는 응당 이런 길로 나아가야 한다. 하지만, 이번 재판의 경우는 다르다. ‘정치 재판이기 때문이다. 재판 결과를 정치적으로 활용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정치판에서 벌어진 사건을 다룬다는 뜻에서다.

 

정치판 재판은 일반 재판과는 재판 실무 면에서 크게 다르다. 그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정치판에서 오가는 불법 자금과 관련하여, 뇌물죄의 필수 요건인 대가 관계를 일일이 구체적으로 적시하지 않아도 뇌물죄를 인정하는 포괄적 뇌물이라는 새로운 해석이 실제로 적용되고 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실제로 정치판에서 벌어지고 있는 뇌물죄 수수 관행과 법전 표기상의 괴리를 메운 획기적인 판례다. 일반 재판과는 다른 정치판 재판이기 때문에 나온 실체 중심의 해석론이다.

 

추단(推斷)합리적 의심’, 그리고 박근혜의 증언 거부

 

이재용 재판에서 변호인과 검찰 간의 공방에 사용된 말 중 가장 많이, 그리고 가장 의미 있게 사용된 말은 추단이다. 쉽게 말해서 짐작으로 판단한다는 뜻인데, 검찰이 추정할 수 있으며/짐작할 수 있으며등의 용어를 사용할 때마다 변호인은 추단을 하지 말라고 맞받아치곤 했다.

 

이 추단은 증거주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증거 법칙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으뜸은 현물(현출) 증거주의다. 증거(evidence)라는 말 자체에서도 드러나듯, 명확하고도(evident)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적법한 현물이어야만 증거로 채택할 수 있고, 그런 증거에 의해서만 판결이 이뤄져야 한다는 뜻이다(이러한 증거를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는 증거, ‘proof beyond a reasonable doubt’라고 한다). 뇌물 수수 과정의 방증으로 여겨지는 안종범 수첩이 직접 증거가 아닌 간접증거로만 채택된 것도 이 때문이다.

 

합리적 의심(reasonable suspicion)’이란 말이 있다. 이것은 위의 글에 인용된 증거 관련의 합리적 의심(reasonable doubt)'과는 다른 뜻이다. 이때의 합리적 의심(reasonable suspicion)’이란 특정화된 감이나 불특정한 의심이 아닌 구체적이고 명확한 사실에 기반한 의심(혐의)을 말하며 미국 형사소송법상의 기준이다. 일례를 들면 몸수색이나 교통경찰에 의한 자동차 정지 및 조사는 영장 없이도 합리적 의심이 있으면 가능하다. 불심점(不審点. 아는 것이 자세하지 아니하거나 의심스러운 것) 해소를 우선 공익으로 삼고, 개인적 피해를 후순위로 삼는다.

  

박근혜는 이재용 재판에서 증언을 거부했다. 그 사유야 여러 가지겠지만, 주된 이유는 어린애라도 짐작할 수 있다. 독대 내용이 공개될 경우 자신에게 불리할 것이 뻔하므로,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일 경우에는 거부할 수 있다는 조항을 십분 활용했다. 하지만, 이것은 이재용 재판에서 핵심적 내용(뇌물 수수의 실행 과정)에 대한 합리적 의심의 단초도 될 수 있다. 박근혜의 전반적 행적에 배인 게 온 국민의 이 합리적 의심부분이다. 검찰의 소명이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지만... 오늘 선고에서 이 부분도 다뤄질지, 아니면 일언반구도 없이 그냥 넘어갈지 나는 그게 더 궁금하다.

 

이 합리적 의심에 해당하는 사례는 또 있다. 이번 재판에서 삼성 전략기획실 전 고위 임원들이 주장하는 논리 중에는 이재용이 단순히 삼성전자의 부회장일 뿐 삼성그룹의 부회장은 아니어서, 뇌물 공여자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면서 검찰 등에서의 진술을 뒤엎거나 법정에서의 상세 증언을 거부했다.

 

그런데 이재용은 국회 증언에서 천천히 뜸을 들이면서 이렇게 말했다. “전략기획실을... 해체하겠습니다.” 삼성전자의 부회장이 그룹 전략기획실을 해체한다? 그건 누가 들어도 앞뒤 안 맞는, 명백히 합리적 의심을 넘어서는, 자가당착적 증거 발언이다.

 

게다가 기업의 기본 생리가 대가(이득) 없는 공돈은 절대 안 쓴다이고, 윗사람의 재가 없이 돈을 쓸 수 있는 규모는 상상 외로 적다. 엄청 짜다. 삼성 수준에서도 10만 원 정도만 되면 거금이어서 최소한 팀장급 이상만이 전결 처리가 가능하다. 그런데 수십 억 ~ 수백억 원대의 회사 자금을 그룹 총수의 재가 없이 전결 처리한다? 누가 들어도 믿지 않을 내용이다.

 

경제공동체

 

검찰은 이번에 이재용에게 제3자뇌물공여죄가 아닌 뇌물공여죄를 적용했다. 민간인 최순실에게 준 뇌물은 곧바로 공무원 박근혜에게 준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그런 논리를 위해 나온 것이 경제 공동체라는 신조어다.

 

최순실과 박근혜가 경제 공동체관계였다는 내용은 수도 없이 많다. 박정희 대통령의 비자금설 관리는 미확인 상태지만, 삼성동 사저 매입 자금 따위에서부터 의상실 유지비, 옷값, 삼성동 사저 식음료비/관리비 부담... 등등 예를 들자면 한이 없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재판부에서 증거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래도 장시호의 증언은 배척할 수가 없다. 어렸을 때부터 박근혜를 온 가족이 큰엄마로 불렀고, 삼성동 2층에 금고가 있고 거기에 돈이 있으니 그걸로 정유라와 손주의 뒷바라지를 부탁한다고 했다는 최순실의 검찰 청사 내 발언만큼은 증거력이 있다. 금고만 확인해도 될 일이었으니까.

 

경제 공동체라는 신조어가 선고문에 어떤 의미로 쓰일지 나는 그것이 엄청 궁금하다. 이를 인정할 경우, 실체적 진실을 갖춘 새로운 법적 용어 하나가 탄생하는 일도 된다. 위대한 판결에는 새로운 법적 용어가 탄생된다. ‘포괄적 뇌물처럼.

 

포괄적 뇌물

 

이것은 위에 간단히 언급한 것처럼, 법전에 명문화된 법적 용어는 아니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등과 같이 일반적인 공무원들에 비하여 광범위한 직무 권한과 영향력을 가진 정치인인 공무원들의 경우에 있어 뇌물과 구체적인 직무행위 사이의 대가관계를 일일이 구체적으로 인정하기 어렵다는 실무상의 난점을 피하여 처벌이 가능하도록 하고자 한 것으로, 불법 정치 자금 수수라는 행위 자체를 엄벌하려는 공공의 법익을 앞세운 개념이다.

 

게다가, 뇌물 수수는 은밀한 행위이고 거기에 관여된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 그 흔적을 남기지 않고자 직접적인 언급 자체를 피한다. 부정/부당 청탁을 하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은 잘 부탁합니다거나 (이쁘게) 봐 주십시오정도다. 그 청탁 내용을 언급하는 일은 뇌물 수수 행위자들에게는 금기에 속한다. SK 최태원 회장의 특별사면을 박근혜와의 독대(2015724)에서 부탁하고, 그 뒤처리를 맡아 수고한 안종범에게 2015813일 다음과 같은 감사 메시지를 잊지 않고 보낸 김창근 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은 그러므로 뇌물죄 공범치고는 초짜에 속한다 : “하늘같은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최태원 회장과 SK 식구들을 대신해 감사말씀 드립니다. 최태원 회장 사면해 복권시켜준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이 메시지를 보낸 다음날 최 회장은 사면되어 출소했고(출소 당시 김 의장은 최 회장에게 숙제가 많다는 말로, 뒤처리 비용을 언급했다), 그 뒤 SK는 착실하게 최순실의 두 재단에 돈을 보낸다. 이른바 숙제를 돈(뇌물)으로 한 것인데, 박근혜를 대신하여 최순실이 뇌물을 받은 것이라는 건 어린애도 알 만한 일이다. 여기에 청탁 내용을 현출 증거로 제시하고, 대가 관계를 증거법칙에 입각하여 확보.제출하라고 한다면 그 처벌 자체가 가능하기나 한 일인가.

 

이 재판의 중요성

 

누구나 알 듯, 이 재판은 박근혜의 재판과 직결되어 있다. 박근혜에게서 특가법상의 뇌물죄 항목이 빠지면 나머지는 핫바지 수준이 되기 때문이다. 나머지가 모두 유죄로 인정돼도 최장 10년 안쪽이 된다.

 

이 재판은 정치판 재판이다. 정치판의 특수한 정황들이 충분히 반영되어야 한다. 포괄적 뇌물죄가 적용된 것은 바로 이 정치판 재판에서의 증거주의 채택에 따르는 실무적 난점들을 줄이거나 제거하여 실체적 처벌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다. 뇌물성 자금이 오간 것은 분명한데, 법규상의 규정 미비로 인한 무죄 판결을 없애기 위해서 적용하게 되었다.

 

나는 오늘 선고가 이 정치판 재판의 특수성이 십분 고려된 내용이기를 바란다. 명백히 뇌물이 오갔음에도 현행 법규상의 미비나 증거 법칙에 따른 배제 우선주의에 따라 무죄로 의제되어서는 안 된다. 나무만 열심히 챙겨 보다가는 숲을 보지 못한다. 숲을 챙기는 게 우선이다. 국민들은 정치판이라는 숲에 잠시 보임된 삼림감시원의 시야가 온 숲을 챙기는 쪽이기를 바라고 있다. 법조계 역시 그 국민 숲의 일부분일 뿐, 숲 전체는 아니다.

 

오늘 선고를 맡은, 그 무거운 짐을 진, 김진동 부장판사는 불행히도 내 고향 후배다. (불행하다는 건 두 번씩이나 재판부 배정이 바뀔 정도로, 그 누구도 맡길 싫어하는 이 재판을 맡았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불행해서 하는 말이다.) 그는 내가 고교생 시절일 때 태어나 고대 법대를 나온, 법관 20년 차의 50살 중년이다.

 

그가 1심을 맡아 처리한 진경준 전 검사장 사건은 고법에서 되레 중형이 선고된 적이 있다. 또 이번 재판의 생중계와 관련해서도 피고인의 사익 보호를 공익에 앞세웠다. 그 깐깐한 해석이 좀 찜찜하긴 하지만, 선고에서만은 숲을 바라보는 정신을 후배인 배석 판사들에게만이라도 제대로 보여주었으면 한다. 옆자리에서 지켜보는 그들 역시 머지않아 단독 판사로 나설 이들이고, 그들의 시선에 깊이와 폭을 더하는 것은 바로 재판장이자 선배인 부장판사이므로. 국민들은 그 다음이고, 우선 그 배석 판사들에게만이라도 귀감이 되는, 잊지 못할 멋진 판사로 기억되었으면 한다. 예전의 그 음습한 공안 시절, 정액제 판결에 참여한 이들 역시 자신들은 법리대로 양심에 따라 판단했다는 말을 해왔다. 하지만 그런 판결 거의 모두가 훗날 재심에서 무죄 판결로 바뀌었다.              -溫草

[Aug.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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