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하는 건 싫어!
최 종 희
시골에 일이 있어서 다녀오는 길이었습니다. 물론 편안한 기차를 이용했습니다. 내 맞은편 자리에는 삼십 대 후반의 여인 하나와 그녀의 딸이 앉아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삼사학년 정도로 보이는 이쁘장한 아이. 차림이 깔끔해 보이는 엄마의 손으로 고른 듯한 예쁜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고향에서 내 거처가 있는 서울까지는 세 시간 남짓 걸립니다. 두어 시간이 지나자 그 아이는 차안이 답답한지 다리를 꼬기도 하고,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기도 하다가, 뒷자리에 앉아 있는 머슴애 하나와 뒷머리 치기 장난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뒷머리를 맞대고 앉은 사람끼리 머리로 슬슬 밀기를 하거나 살짝살짝 부딪치기를 하는 거 말입니다. 그 장난을 하기에는 아직 앉은키가 충분하지 않은 아이들이라 나중에 그 애는 신을 벗고 자리에 올라가서 더 높이 머리를 세우고 용을 쓰면서까지 했습니다.
그러자, 엄마가 한 마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렸습니다. 얌전히 앉아 있어! 그렇지만, 한번 심심해진 아이들에게 그런 말 한 마디가 어디 오래 효험이 있나요? 아니나 다를까, 조금 있으니까 여자아이가 획 돌아서더니 뒷자리의 아이 머리에 한방 먹였습니다. 손가락을 구부려 세우고 한대 때렸습니다. 그 남자아이가 여자아이의 머리카락을 슬그머니 잡아당기며 장난을 걸었던 모양입니다.
그러자, 엄마가 꿀밤 한대로 단호하게 딸을 응징했습니다. 그 전까지는 내 눈치를 살피며 딸에게 얘기했었지만 그때는 그럴 겨를도 없었는지, 아니면 눈치 보는 일을 잊었는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즉각 혼냈습니다. 여자애가 얌전하게 있어야지, 겨우 두세 시간도 못 참고 난리 법석이냐며 집에 가면 아빠에게 이르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아이가 대답했습니다.
애니까 못 참지. 나한테는 두 시간도 길단 말야. 나는 뭐든 오래 하는 건 싫어. 아빠도 오래 운전하는 건 정말 못해 먹을 짓이라고 그랬잖아? 지난번 외갓집에 다녀올 때도. 이이잉.
나는 그 아이의 아빠를 떠올렸습니다. 삼십 대 후반이거나 사십 대 초반일지도 모르는 어떤 남자의 모습을 말입니다. 그와 함께 이번에는 열차에 오릅니다. 부산행 열차. 천안쯤까지는 널찍한 자리와 푹신한 승차감, 깨끗한 차내, 그리고 무엇보다도 훤히 트인 차창 밖으로 흐르는 풍광에 넋을 빼앗긴 그의 옆모습이 단아해 보입니다. 여행은 기차를 이용하는 것이 최고라는 말을 그가 곁들입니다.
대전쯤 지나면 입가심이나 하자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대구를 지나면 부산까지 얼마나 더 가야 하느냐는 말이 나오고, 금방이라는 내 대답을 듣고도 그 말을 그다지 신뢰하는 것 같지는 않아 보입니다. 부산에 도착합니다. 아이구, 이거 부산도 제법 먼 거리네요. 무릎이 시큰해요. 올라갈 때는 비행기 있으면 그거 타죠. 한 시간이면 충분히 가는 거리 아닙니까?
우리네의 거리 개념도 이제는 알게 모르게 많이 바뀌었습니다. 가장 큰 특징은 지도상의 거리가 아니라 시간상의 거리 개념으로 바뀌었다는 것이 될 것입니다. 한 시간이면 그런 대로 일상적으로 오갈 만한 거리이고, 두세 시간이면 한번 운전으로 작심하고 가볼 만한 거리이며, 대여섯 시간 걸리면 어느 정도 인내심을 발휘해야 할 꽤 먼 거리입니다. 그 이상 되면 어쩔 수 없이 가야 하는 곳인 듯합니다. 그래서인지 거처를 정할 때도 시외의 개념보다도 출퇴근 거리가 얼마나 되느냐에 먼저 관심하고, 그 거리라는 게 실질적인 지리적 거리가 아니라 출퇴근에 소요되는 시간상의 거리를 뜻하는 것으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런 계산법에 모두 다 익숙해졌습니다. 늘 걸치는 옷이 되었고, 생활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애용하는 잣대가 된 것이지요. 먼 거리를 이동하기, 곧 여행을 할 때면 그 반응들까지도 그 기준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비행기를 타보면 참 재미있습니다.
비행기가 지리적 이동 수단으로서의 탈것이 아니라 시간 이동의 수단으로 바뀐 것은 이미 오래 전 일입니다. 그래서인지, 비행기에 올라서 자리에 앉으면 맨 처음 동행이 하는 말들은 대부분 똑같습니다. 목적지까지 얼마나 걸리느냐고 묻습니다. 가는 곳까지의 거리를 물어보는 이들은 가뭄에 콩 나기입니다. 이륙후 기내 방송에서 빠뜨리지 않고 챙겨주는 것도 앞으로 얼마가 소요될 예정이라는 내용입니다.
중국의 대련은 서울에서 한 시간 거리입니다. 그러면, 동행이 제주도 가는 거리네, 하면서 금방이겠다는 말을 보태는 표정이 밝아 보입니다. 상해는 가까운 거리를 두고도 아래로 빙 돌아서 갈 때는 두어 시간 이상 걸립니다. 그것도 만만하게 생각합니다.
홍콩 정도도 선심 쓰듯 표정을 풉니다. 호치민까지도 그런 대로 선선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다섯 시간을 날아가 뱅콕에 들러서 거기서 비행기를 갈아타고 다시 두어 시간 더 가야한다는 말을 들으면 괜히 따라나섰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합니다.
그리고, 열두세 시간을 논스톱으로 날아간 뒤에도 공항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거기서 세 시간 정도 갇혀 지내다가 두세 시간을 더 가야 한다고 말하면, 올랜도가 아니라 천국의 어디라고 해도 이미 모아진 주름살을 쉽게 펴지 않습니다. 열세 시간이나 내리지도 못하고 비행기 안에서 의자에 갇힌 채, 꼼짝 못하고 갈 일이 끔찍해지는 거지요. 그러면 경유지에서 좀 더 빨리 다른 비행기로 갈아타게 표를 끊을 일이지 왜 세 시간씩이나 죽 치고 있다가 가게 해놓았느냐고, 은근히 트집을 잡기도 합니다. 속으로는, 비행기 여행이라면 전문가로 행세하는 당신이 왜 그런 실수를 했느냐고 짜증을 부리고 있는 게 보입니다.
그런 사람한테는 비행기 갈아타기, 곧 환승(transfer)을 하려면 반드시 다음 비행기와 두 시간 이상의 시간 차가 없으면 표 자체를 끊어주지 않게 되어 있다는 규정을 얘기해 줘도 소용이 없습니다. 이미, 끔찍해진 그의 기분을 더 휘젓는 게 될 뿐이지요.
그런 것 같습니다. 우리네 의식 속에 뿌리박힌 시간상의 거리 개념은 잘 해야 대여섯 시간인 듯 합니다. 그렇게 좁습니다. 바깥에는 넓은 세상이 버티고 있기 때문에 --- 그건 우리가 선택하고 말고의 여지가 없는, 불변의 현실입니다--- 거기에 비하면 아주 좁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문득, 우루무치의 열차 안에서 만난 젊은 사람들이 생각납니다. 우루무치는 중국의 서쪽 끝, 서방에서 볼 때는 실크로드가 펼쳐질 때 가장 먼저 중국 땅으로 접속되는 신강성의 성도(省都)입니다. 도시 이름이 중국식이 아닌 것처럼, 그곳의 주민들은 위구르족이라고 불리는 유목민족이 아주 많은데 그들의 외모도 동양인이 아닙니다. 여자들은 간다라 미술에 나오는 여인들처럼 동그란 얼굴에 콧날은 오똑하고, 남자들의 안색이나 용모도 서양 사람들을 더 많이 닮았습니다.
그곳에서 기차를 탄 적이 두어 번 있습니다. 내륙 지방 도시로 운행하는 작은 비행기들을 타보니 불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은데다 밤이었기 때문입니다. 중국에서 기차를 타본 것은 동북 삼성 지역에서 대여섯 시간 정도만 가는 걸 타 본 게 전부라서 은근히 호기심도 동했습니다.
침대열차였습니다. 한 칸에 삼 층으로 된 침대가 좌우로 놓여 있으니까 여섯 명이 한방에서 지내는 것이지요. 남녀 가리지 않고 타는 것은 중국의 기본입니다.
들어가 보니 하필 (아니, 속으로는 은근히 다행히도) 맞은편 침대에는 순박하게 보이는 젊은 아가씨가 자그마치 셋이나 있어서 속으로는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순박하게 보일 정도로 수더분한 사람들은 여간해서 까탈 부릴 동행이 아니어서 차 한 잔 얻어먹게 되는 건 기본이거든요. 내 아래 칸으로는 군복 비슷한 유니폼을 입은 것으로 보아 국영기업에서 종사하는 당원(黨員)이 분명한 씩씩한 삼십대 여인과 장사를 하는 사십 대 여인이어서 그 칸은 온통 여자들 차지였습니다.
그러니, 잠자리에 드는 여인들이 잠옷을 갈아입는 깔끔을 떠는 일이라도 있으면 나는 못 본 체하고 봐줘야 하는 일까지도 생길 판이었습니다. (드물지만, 침대열차에서 잠옷으로 갈아입는 중국 여인들도 있습니다. 물론 남자가 있건 없건 당당하게 할 일을 합니다. 지레 얼굴부터 붉히고 드는 것은 외지인의 괜한 내숭이지요.)
하룻밤과 반나절을 그 안에서 지내고 나는 열차를 벗어났습니다. 그때 세 아가씨들이 사흘 밤을 더 자야 자신들이 떠나온 상해에 도착한다는 말을 했던 게 생각났습니다. 그들은 열차 안에서 너댓새를 지내는 일쯤이야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이, 아주아주 밝은 목소리로 상해에 들르거든 연락하라는 말을 했습니다. 내가 마련했던 먹을거리 신세를 갚겠다면서요. 그들은 같은 직장 동료들로서 휴가를 틈타서 중국의 내지 여행을 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보름 예정으로요.
우리네 사람들이 중국인들에게 만만디라며 손가락질하는 걸 흔히 봅니다. 본래 의미와는 달리, 느려서 굼질거려 보이는 것을 꼬집는 의미로 많이 씁니다. 이 만만디에 쓰이는 '만'자의 한자 표기는 우리가 낭만이라고 말할 때의 그 '만(慢)'자와도 뜻이 통합니다. 일종의 여유지요. 그런데도, 뭐든지 급하고 얼른 빨리 해치워야 직성이 풀리는 우리가 볼 때는 그들의 여유조차도 한없이 느려터지게만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걸핏하면 동양 최대, 최고, 최초를 갖다 붙이기에 급급합니다. 짧거나 작고 대단찮은 것들에까지도 말입니다. (산 위에 인공 호수를 만들어 해양공원을 만든 나라도 있는데, 우리는 등촌동 입구에 아주 조그만 인공폭포 하나를 만들어 놓고서 동양 최초라고 떠억 붙였고, 그걸 온 매스컴이 그대로 베껴서 떠든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중국에 가보면 우리가 내세우는 것들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걸 가지고 그토록 호들갑을 떨었는지 부끄러워지곤 합니다. 그들은 그런 말을 잘 하지 않습니다. 가만히 있습니다. 안에 있는 여유가 어디로 가겠느냐는 표정입니다.
동서횡단을 하려면 특급열차를 타고도 나흘 이상을 가야 하고,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자신들 스스로 하는 얘기를 들어보면 집집마다 평균 월급여의 2년분 정도는 저축해 놓고 있을 거라든가, 82년까지 공식 국가(國歌)가 없어도 그런 데에 그다지 조바심하지 않았습니다.
자치구까지 가지고 있는 조선족 출신에게 장군의 제일 높은 자리에까지 오르도록 허용하는 나라도 없을 것입니다. (그처럼 수많은 소수민족에 대해서 광폭의 포용정책을 베푸는 나라도 중국 외에는 보기 드뭅니다.) 넓은 땅에서 지내온 사람들의 몸에 밴 기질, 곧 대륙적 도량으로도 불려지는 미덕으로도 여겨집니다. (모든 것이 다 꼭 그렇다는 얘기는 아닙니다만.)
중국 얘기는 몇 날 며칠을 해도 다 못하므로, 이야기를 서둘러 마쳐야겠습니다. 우리가 시간 거리 개념의 그릇 크기를 대여섯 시간 정도로 한정하는 일이 몸에 배게 된 것은 국토가, 우리의 활동 영역이, 그 정도로 한정되어 있는 데도 연유할 것입니다. 물리적 경계에 밀려서 저절로 설정된 정신적 한계지요. 그리고 그 한계를 벗어나기가 그다지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포기할 일은 아닌 듯싶습니다. 시간에 대한 내성(耐性)은 눈에 보이는 편의를 조금만 접어두고 자신의 안에서 여유를 발견해내면 길러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다른 것을 바라봄으로써 여유를 찾게 되고 그 여유를 즐길 수 있게 된다면 까짓 몇 시간 정도는 문제가 아닐 듯싶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여인과 얘기를 하면서 가거나 재미있는 읽을거리에 빠지거나, 그도 아니면 풍광에 어떤 지속적인 사념을 매달고 이어가기를 하거나 하다보면, 대여섯 시간이 아니라 그 이상이 되어도 그다지 부담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쳇바퀴 돌리듯 놀던 그 시간대역을 벗어나서 더 길고 유장하게, 여유를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고 싶어지는 적도 있어야 하는 것이, 제자리 맴돌기를 벗어나 늘 발전을 향해서 나아가는 인간 본래의 성향이 아니겠습니까.
좁은 국토, 익숙한 생활권에서 생각 없이 받아 입은 옷이 자신도 모르게 정신병원의 환자용 구속복(拘束服)으로 느껴지던 일은 없었는지요. 불행히도 ---그건 분명 불행한 일입니다 --- 아직까지 그런 일이 없었다면, 어느 날 먼 거리 여행을 하게 되어 짬이 나거나 심심해지면, 그 생각을 한번쯤은 해보시는 게 어떨는지요.
나는 뭐든지 오래 하는 건 싫어! 하면서, 두 시간 이상을 견뎌내지 못하는 우리 아이들의 얘기가 꼭 아이들에게만 해당되고 그 영향이 그 아이들에게만 미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 아이들이 이내 자라나서 우리들을 대신해서 이 나라를, 이 세계를 떠메고 나갈 거 아니겠습니까. 그때 우리가 맞이할 삶의 너비와 깊이가 그들이 설정하는 경계선 내로 머물지 말라는 법이 없거든요. 아이들의 시간 내성을 우리보다 크게 늘려주는 일. 그것이 바로 우리가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진정한 자산의 하나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Nov. 1999]
뭐든 대충, 얼른 후딱이다. 글을 읽는 일도 거기서 예외가 아니다.
쓰기는 고사하고 읽는 일에서조차도, 대충 얼른이다.
긴 글은 아예 건너뛰고 만다. 뭐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고
있을까... 세상이 빨리 돌아가서? 그럴수록 여유 있는 걸음이
세상을 제대로 따라잡는다.
짧은 글조차도 제 손으로 써내지 못하고, 복사해다 얹어놓고는
히히 호호들을 더 많이 해대고 있다. 그런 반거충이들도 없다.
그런 이들에게 공통적인 것 한 가지 있다. 사랑만은
오래오래, 될 수 있는 대로 아주 오래 받고 싶어한다.
가는 대로 오고, 심는 대로 거둔다.
그리고, 모든 행동의 뿌리는 생각에 있다.
[July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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