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가벼운 만남과 무거운 만남

[내 글] 진담(眞談)

by 지구촌사람 2013. 4. 8. 04:21

본문

728x90
반응형
SMALL

 

 

 

 

                             가벼운 만남과 무거운 만남


                                                                                     최 종 희

 

  남녀의 만남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가볍게 만나 어렵지 않게 악수하고 쉽게 헤어지는 경우가 있다. 그 사이 고비라는 이름으로 몇 개의 고개를 오르내리기도 한다. 가벼운 만남의 특징은 헤어질 때의 모습에 있다. 대체로 뒷모습들이 아름답지 않다. 자신의 불운과 재수 없음을 한탄하고 상대방을 헐뜯다 못해 저주하는 일까지도 드물지 않다.

 

  무겁게 만나는 이들이 있다. 처음 만남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더디고 무겁다. 쉽지 않다. 경망과는 거리가 멀어 괜찮은 듯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렇지만도 않다. 많은 망설임 사이에 저울질하기와 돌아보기가 징검다리로 놓인다. 잔뜩 뜸을 들이는 사이에 세상 사람들의 손길에 닳고 닳은 길이 두 사람 사이에 놓인다.

  두 사람만의 길에 세상 잣대로 만들어진 이정표가 끼어든다. 그 때문일까. 무거운 만남도 쉽게 헤어지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새삼스럽게 확인된 돌아보기와 뒤늦게 떠오른 저울질 수치에 등줄이 꿰이기 시작할수록 도리질은 의외로 빨리 온다.

 

                                                           *

  홀몸으로 아이 하나 키우며 통번역 프리랜서로 지내던 여인 하나는 어느 지방대학의 교수라는 사내의 직함에 이끌려 얼른 만났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느 크리스마스이브에 명동 거리에서 꺼이꺼이 혼자 울었다. 술잔을 앞에 놓고 사내 욕을 바가지로 퍼부어댔다. 하지만, 그녀 역시 얼른 쉽게 내딛은 행보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잠시 그녀 앞에 머물렀던 사내의 생각은 달랐다. 쉽게 내딛은 그녀의 첫 행보가 긴 밤으로 이어졌을 때 그것은 그에게 달뜬 기쁨이었지만, 그 뒤로 이어지는 가벼운 언행의 잇댐에 그는 이내 질렸다.

  흑회색으로 가압류된 미래의 모습에서 그는 여인의 모습을 얼른 지워버리는 지름길을 택했다. 가벼운 여인을 쉽게 얼른 지우는 일로 자신의 짐무게를 가볍게 덜었다. 서로 질질 끌고 끌리는 발걸음들은 모양새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귀찮고 게다가 시간깨나 잡아먹는 일인데다, 마뜩찮은 마지막 페이지의 기억이 길게 끌리기 마련이므로.

 

  모 여대 식품영양학과 조교수인 여인 하나는 여러 달을 벼르면서 달구고 여미고 조인 끝에 사내 하나를 만났다. 하지만 두 번의 얼굴 보기를 한 뒤로는 사내가 먼저 연락해오는 일이 없었다. 여인은 마른 눈물을 거푸 닦아냈다. 사내의 모든 말들을 여러 번 되감아 되돌려봤지만, 무슨 까닭에 자신이 그처럼 내던져졌는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나중에는 억울하고 분해서, 그 이유나 알자고 여러 달 후에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70킬로를 넘기는 그녀의 체중이 틀림없는 으뜸 걸림돌이었을 거라고 짐작하며.

 

  사내로부터 돌아온 대답은 이랬다. 의외였다.

  -첫 만남에 대한 그대의 느낌이나 생각을 두 번째 만남에서조차도 내가 듣지 못했기 때문이라오. 나는 느낌의 공유까지는 어렵더라도 대화의 합집합만큼은 거둘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오. 그것조차 그처럼 어려워서야.......

 

  사내의 힐난 아닌 힐난이 면도날처럼 그어댈 때마다 여인의 가슴팍엔 피멍이 그물처럼 번졌다. 그 그물 무늬들은 적잖게 오래 머물다 사라지곤 했다. 여인은 온 세상 사내들을 향해 씰룩였다. 악다물어 좁혀졌던 입술을 크게 벌리고서, 비로소.

  -사내자식들 속이 그리 좁아서야. 역시 몸무게가 나만큼도 안 되는 것들은 아예 상대하질 말아야 하는데... 하. 내 신중함을 상찬해주지는 못할망정 깔아뭉개다니, 에라 이 뭣 같은 놈덜아.


                                                           *

  두 여인의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나는 뜬금없이 흰 눈을 떠올린다. 그 정적(靜寂)과 순결. 세상의 모든 소음을 잠재우고 마는 눈 오는 날의 고요. 온 세상의 오염을 끌어안은 듯한 그 순결. 그게 눈송이가 되어 나풀나풀 하늘하늘 선물처럼 내리면, 나를 포함한 철없는 강아지들은 턱없이 반긴다. 눈밭에 나뒹굴고 싶을 정도로 그 하얀 설경에 얼른 우릴 내던진다. 그러고 싶어진다.

 

  하지만... 그 눈이 녹기 시작하면 사정은 다르다. 그처럼 추레한 모습도 없다. 순결을 잃은 눈은 흙빛에 가깝고, 치워지지 않은 눈덩이들은 눈속에 갇혀 몇 달을 지내야만 하는 강원도의 깊은 산골 마을 사람들 말마따나 “하얀 똥덩어리”나 다름없다. 보기만 해도 머리가 휘둘리고 손사래가 앞서는 애물단지. 그게 바로 덜 녹았거나, 아직 치워지지 않은 눈들이다. 무거워서 버겁기만 한, 잔뜩 더러워진 눈덩이들...

  헤어짐 뒤로 상대방에게 삿대질로 보여주었던 그 뒷모습들과도 흡사하다. 그게 사랑이었던지 뭔지도 모를 더러운 기억이었노라고, 서둘러 그것들을 지워내려는 이들의 가슴에 달려있는 이름표들과도 흡사하다. 아직도 다 못 치운 애물단지. <하얀 똥덩어리>.

  눈은 본래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다. 항상 그대로다. 뭉쳐지면 합해진 것이니 무겁고 낱개의 눈송이로 머물면 가벼운 것일 뿐. 그런데도 눈을 두고 그처럼 경중의 차가 심하게 드러나는 것은 시종여일한 관찰의 결여 탓이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더 자주 직설적으로 눈(雪)을 탓하거나 재수 없는 눈(眼)을 심심풀이 삼아 탓하곤 한다.

  만남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만남의 시작이, 그 형식의 경중이 어떠한가가 중요한 게 아니라 과정과 끝맺기가 훨씬 더 중요한 게 아닐까. 시작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과정으로서의 엮어내기가 더욱 중요하다는 건, 이 세상에 태어나 그 첫 출발이 내내 그게 그것인 우리들이 살아내기의 과정에서 천태만상으로 갈리는 것이나 똑같은 게 아닐까. 끝내기 과정과 떠나가는 뒷모습이 무엇보다 아름다워야 하는 일까지도 똑같아야 하는 거 아닐까.


  무조건 소중한 것으로 떠받들리는 우리의 탄생. 그건 사실 어미의 몸 밖으로 그저 내던져지는 것이나 다름없다. 만남 역시 마찬가지다. 수많은 사람들 중의 어느 하나와 어쩌다 맺어지는 인연에 뿌리와 싹을 돋게 하려는 마음가짐이 보태진 것뿐이다. 숱한 인연 중의 하나일 뿐인 만남 그 자체에 지나치게 의미를 매달 필요는 없다.

  문제는 그 이후다. 생명의 탄생 이후가 더 중요하듯, 만남 이후로 펼쳐지는 과정에 온 힘을 다해야 하는 거 아닐까. 그리고 어쩌다 보이게 될지도 모르는 뒷모습에까지도 말이다.

 

  시작의 겉모습에 신경을 쓰는 일처럼 무의미한 건 없지 싶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날 때, 멋모르고, 암 것도 모른 채 쑥 던져졌듯이, 모든 만남의 시작도 그럴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리 해보면 안 될까. 쓸데없는 형식이나 겉모습 따위에 알짜배기들을 빼앗기지 말고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불쑥 던져져 보는 것 말이다. 되레 그게 더 나은 짓 아닐까. 나 같은 또라이들이나 해내는 생각이려나...... [July 2004]

 


반응형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