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직선과 원, 그리고 암놈과 수놈

[내 글] 진담(眞談)

by 지구촌사람 2012. 8. 3. 05:03

본문

728x90
반응형
SMALL

 

                       직선과 원, 그리고 암놈과 수놈의 만남

                                  

                                                                                             최  종 희

 

  직선은 흔히 올곧음으로 요해된다. 그래서인지 어떤 이를 두고 직선적이라고 할 때, 우리는 거기서 우회할 줄 모르고 똑바로 직진하는 우매함까지 설핏 맛보게 되기도 한다.

  그처럼 직선은 그 안에서 직진성(直進性)이 함유하는 단호한 무오차(無誤差)의 의지가 드러날 때, 의로움의 기치를 들고 홀로 나아가는 외로움과 더불어 여유 없음의 결벽증까지 부산물로 달고 다니게 된다. 직선적이라는 평을 받는 사람들이 자의로든 타의로든 다른 사람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게 되는 소이연이다.


  둥그런 원이 있다. 어떤 사람에게 그 원이 얹히면 그것은 원만함의 상징이 된다. 모나지 않고 둥글둥글한 사람을 뜻하게 된다.

  그래서인가. 우리의 살이에서 직선적인 사람과 원만한 사람은 이내 비교되고 쉽게 대조적인 관계로 설정되곤 한다. 직선과 원이 나란히 나아가고 있을 때 그 둘은 어떻게 해도 서로가 만날 수 없는 대치적인 존재로 아주 손쉽게 자리 매김되는 일이 흔하다.  


  그럴 때 직선적인 사람은 원리 원칙적이어서 빡빡한 쪽으로 밀리고, 또 한 사람은 그와 반대의 유연성을 인정받아 부드러운 편에 놓인다. 그리고 흔히는 후자가 더 높은 점수를 받는다. 그리고, 그것이 지극히 당연한 듯이 여겨진다. 그 진정성과 객관적 타당성에 대한 신뢰도 문제는 후순위로 밀리거나 논외로 잊혀지면서.

                                             *


  서기 2000년을 맞이하던 해, 나는 처남, 조카와 더불어 이른바 <2000년 기념 2000킬로 주파>라는 그럴 듯한 슬로건을 내걸고 이 나라를 한 바퀴 돈 적이 있다. 물론 차를 타고서다.

  닷새쯤 걸렸던가. 서울을 떠나 독립기념관과 유관순 유택, 전봉준 사가(私家)와 선운사를 거쳐 변산반도, 그리고 땅끝에서 보길도로 들어갔다가 해남으로 나와 부산에서 머물고, 다시 경주와 포항을 거쳐 동해안을 타고 올라와 속초와 인제를 거쳐 돌아왔다. 서울로 돌아오니 차량의 거리미터는 2000킬로에서 몇 킬로가 모자라는 숫자를 나타내고 있었다.   


  그 행로중 내게 뜬금없이 떠올라 오랜 동안 머문 생각 하나가 있다. 남해안을 가로지르는 도로에서 경주로 나아가는 길목을 지나치는 바람에 뜻하지 않게 부산에서 하루를 묵게 되었던 날의 일인데, 발단은 처남이 제공했다. 

  조수석에서 도로표지판과 지도를 맞춰내는 임무를 맡고 있던 처남이 갈림길을 놓치고 났을 때, 그가 말했다. 

  "에이, 갈림길은 확 꺾어져 있어야 얼른 표시가 나는데 직선에 가깝게 밋밋하게 되어 있으니 이거 구분이 되어야 말이지......"     


  물론 처남은 어둑어둑해진 밤길이어서 표지판을 얼른 알아보지 못하는 바람에 빠져나가는 길을 놓치게 되었는지라 멋쩍어서 어떻게든 변명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갈림길이라면 길이 확실하게 구부러져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고 도로탓을 하면서. 사실 어떻게 보면 그것도 길을 놓친 이유의 하나가 될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때 내게 떠오른 생각은 조금 달랐다. 뜬금없이 그랜드 캐년을 끼고돌던 때의 생각이 불쑥 끼어들면서, 그랬다. 


  미국의 대표적인 협곡이라면 그건 그랜드 캐년일 게다. 길이만도 엄청나서 서울 부산간 고속도로보다도 더 길다. 500킬로가 넘는다. 그 주변 도로를 달린 적이 있다. 2개 주를 끼고 있는 길인데 내내 직진도로를 달렸다 싶었는데, 지도를 보니 나는 어느 새 좌측으로 한참이나 구부러진 도로로 나와 있었다. 표가 나지 않게 아주 완만하게 뻗은 도로 탓이었다.

  이처럼 먼 길을 달리면서 방향을 바꿔야 할 때 공간의 여유가 있으면 그 도로는 아주 완만하게 구부러진다. 어느 때는 방향을 선회한 것을 운전자가  느끼지 못할 정도가 될 때도 있다.


  그러한 상황을 더욱 크게 확대해보면 어떨까. 즉, 운동장의 트랙 같은 것을 400미터가 아닌 4000미터, 아니 몇 백 킬로미터의 크기로 확대해보는 것이다. 그럴 때도 사람들은 그 길을 달리게 되면 그것이 구부러진 길이라고 느끼게 될까.

  그 해답을 구하기 위해 모두들 수학에 매달릴 필요는 없다. 그 뒤에 집으로 돌아와 어느 책을 대하니, 통상적인 사람들의 지각으로는 원둘레가 2000킬로미터 이상에서 2500킬로미터 정도가 되면 원주(圓周)상에서 움직이는 자신은 그것을 원으로 인식하는 게 아니라 직선으로 여기게 된다고 나와 있었다.


  이 나라의 섬들을 연결하여 한 바퀴 돌면 남쪽 땅만으로도 너끈히 2500킬로미터가 되고 남는다. 즉, 누구든지 이 남한땅의 외곽 거리 정도가 되는 원주(圓周) 위를 자신이 직접 움직여 돌아보게 되면 그 동선을 원으로 여기지 않고 거의 직선으로 인식하게 된다는 말이 된다.

  이걸 달리 이야기해보면 어떻게 될까. 이 나라 땅 전체를 둥글게 만들어놓고 그 외곽선만 따라 가면 우리는 그 순간 원운동이 아니라 직선운동, 곧 직진을 하는 것으로 여기게 된다는 말도 된다. 도형으로 축소하면 원이지만, 이처럼 아주 커다란 원일 때는 실물의 어느 지점간 이동은 실제로도 직선이 되니까.

 

                                                          *


  생물학에서 흔히 쓰이는 암수 표기가 있다. 바로 ♀과 ♂다. 내가 이상한 쪽으로만 조숙한 편이었는지, 어렸을 때 나는 그걸 보고 픽 웃었다. 어떻게 보아도 그건 남녀의 성 상징을 요리조리 잘도 우회해서 만들어 낸 작품이었다.

  지금도 그 생각에 변화는 없다. 하지만 거기서 맛보는 또 다른 느낌은 있다. 암컷의 표지에서 드러나는 둥근 원과 수컷에서 보이는 화살표가 주는 느낌이 그것이다. 암컷에는 둥근 원이 있어서인지 부드러워 보이고, 수컷에서는 그 날카로운 직선이 주는 관통성에서 공격성까지도 풍긴다. 요컨대, 표지로 보자면 내게 있어서 암컷은 원이고 수컷은 직선으로 읽혀진다.


  꼭 그래서는 아니겠지만, 대체로 암컷은 부드럽다. 포용력이 있어 보인다. 그리고 수컷들은 공격적이거나 최소한 쟁취적이다. 오래 전부터 생존의 대열에서 창이나 활을 들고 앞장서왔던 과거의 전사들처럼.

  그리고 우리의 실생활에서도 이러한 일반화는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어 보일 때가 많다. 그런데, 문제가 될 때도 많다. 그러한 성향의 고착을 바라거나 당연시할 때다. 예컨대, 여성들은 늘 포용과 관용으로 인내해야만 하고, 남성들의 목소리 높음은 사회적으로 부여되거나 인용(認容)된 권위의 당연한 관례로 무차별 용인되어 그 수용까지 한 두름으로 강요될 때, 그러한 시선은 설득력을 읽고 문제시된다.

  그러한 관계를 측면도를 통하여 관찰하면 그건 조화될 수 없는 원과 직선의 끝없는 평행선이 된다. 원이든 직선이든, 시선의 고착은 본질을 훼손하게 되기도 하고.

                                                 *


  남녀의 만남은 대체로 이질적인 요소의 결합일 때가 많다. 연인과 부부들처럼 같은 방향을 향해 나란히 서  있는 경우라 할지라도, 그 시각과 광각은 두 사람 사이의 거리와 높이 차이만큼 처음부터 그 차이가 전제되어 있다. 그만큼 남녀간의 만남 자체는 차이를 내재적 본질로 한다. 결합력, 곧 응집력과 그 지속성의 합은 별도로 치더라도.

  그러므로 남녀간의 만남에서 비집고 나오거나 관찰되는 서로의 차이나 대조성은 생래적이다. 본질적이다. 문제는 그 차이를 어떻게 인식하고 어떻게 바라볼 것이냐에 있다. 그 시각을 구성하는 내용물에 따라 그것이 알력이나 다툼으로 이어질 때도 있고, 두 사람의 화학적 결합을 위한 합체과정의 촉매제로 작용할 수도 있다.


  그럴 때 원과 직선을 한번 떠올려보면 어떨까. 아니, 어떻게 해도 이질적일 것만 같은 원과 직선이 현실 속에서 동일체로 인식될 수도 있음을 잠깐만이라도 상기해보는 건 어떨까.

  그리하여 우리의 삶이란 건 때때로 우리와는 이질적인 다른 사람들이 겪었거나 엮어내는 어떤 삶의 단편들을 통해서 끊임없이 그리고 부지불식간에 서로가 서로에게 서로 다른 모습으로 비쳐지는 의지처가 되어줄 수도 있음을 기억해 내려는 연습을 해보는 건 어떨까. 한 번쯤 일부러 짬을 내어서라도.


  그리하여 그런 일들이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 바로 나와 더불어 같은 삶의 띠를 함께 두르고 지내는 내 암컷이나 내 수컷에서 발견해내려는 노력으로 수렴되어, 어느 날 두 눈을 크게 뜨고 그녀나 그를 향해 두리번거려보는 연습으로 이어지는 것도 좋지 않을까.

  바랄 수만 있다면, 그런 일들이 제 딴엔 제법 나이가 들었거나 철이 들었다고 스스로 주장하고 있는 수컷들에서 더 많이 생겨났으면 좋겠다. 마치 자신의 이런저런 오랜 버릇을 아집인 줄 모르고 올곧은 직선운동으로만 여겨온 수컷이 어느 날 우연히 자신의 가고 있는 그 길이, 내내 걸어오고 있었던 그 길이, 바로 자신의 아내가 크게 둘러쳐 놓은 원주 위였음을, 아내의 원둘레가 직진선(直進線)이었음을, 뒤늦게 통탄하듯 깨닫게 되기 전이라면, 오죽 좋으랴.

 [April 2002]  

     

 

<2000년 기념 2000킬로 여행>

 

 

변산반도. 부산하게 해넘이 채화대니 뭐니 하고 준비해 놓은 곳에 넘 늦게 갔던가.

아니다. 해가 지고는 있었는데, 구름이 제법 많이 끼어 있었지 싶다.

요란한 곳에서 돌아서면 더 크게 빈 손인 것은 그곳도 마찬가지였던 거 같다.



호미(虎尾)곶 등대 있는 곳. (토끼꼬리라고 해도 좋은데 꼭 호랑이로 부풀린단 말씀이야....)

 

그곳엔 21세기를 밝히는 불들이라는 이름으로,

지구상에서 가장 먼저 해가 뜬다는 피지섬에서 채화해온 불에다,

이 나라 두 군데 것까지 해서 불씨 세 개를 밝히고 있었지 싶다. 

 

얼마나 오래 타고 있으려나? 아니, 그 의미가 얼마나 오래 보존될 것인가.

노파심에 의구심이 얹혔다.

울 나라 사람덜은 호들갑 떨기 무섭게, 두어 해도 지나지 않아

까먹는 데는 선수들이니까..... ㅎㅎㅎ.

 

 

 

 

저 위에 이야기가 나온 김에, 그랜드 캐년 관망대 근처.

20여 년도 더 된 까마득한 예전 얘기.

 

 

 

 

뜬금없이 웬 강아지 사진이냐고?

 

그해(2000년) 시작은 참 좋았는데,

요 방울이 넘하고 한탄강가에서

바람을 쐰 게 녀석과의 마지막 장면이 되얐다.

 

이별연습의 시작이라고나 할까.

(그 해 형님이 교통사고로 비명에 가셨다) 

졸문 <이별연습>은 그렇게 해서 씌여졌다.

 

사진을 보니 굳은 눈물샘이 새삼스레 물컹거린다.

 

 

정훈희.김태화/우리는 하나

 

                       직선과 원, 그리고 암놈과 수놈의 만남

                                  

                                                                                             최  종 희

 

  직선은 흔히 올곧음으로 요해된다. 그래서인지 어떤 이를 두고 직선적이라고 할 때, 우리는 거기서 우회할 줄 모르고 똑바로 직진하는 우매함까지 설핏 맛보게 되기도 한다.

  그처럼 직선은 그 안에서 직진성(直進性)이 함유하는 단호한 무오차(無誤差)의 의지가 드러날 때, 의로움의 기치를 들고 홀로 나아가는 외로움과 더불어 여유 없음의 결벽증까지 부산물로 달고 다니게 된다. 직선적이라는 평을 받는 사람들이 자의로든 타의로든 다른 사람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게 되는 소이연이다.


  둥그런 원이 있다. 어떤 사람에게 그 원이 얹히면 그것은 원만함의 상징이 된다. 모나지 않고 둥글둥글한 사람을 뜻하게 된다.

  그래서인가. 우리의 살이에서 직선적인 사람과 원만한 사람은 이내 비교되고 쉽게 대조적인 관계로 설정되곤 한다. 직선과 원이 나란히 나아가고 있을 때 그 둘은 어떻게 해도 서로가 만날 수 없는 대치적인 존재로 아주 손쉽게 자리 매김되는 일이 흔하다.  


  그럴 때 직선적인 사람은 원리 원칙적이어서 빡빡한 쪽으로 밀리고, 또 한 사람은 그와 반대의 유연성을 인정받아 부드러운 편에 놓인다. 그리고 흔히는 후자가 더 높은 점수를 받는다. 그리고, 그것이 지극히 당연한 듯이 여겨진다. 그 진정성과 객관적 타당성에 대한 신뢰도 문제는 후순위로 밀리거나 논외로 잊혀지면서.

                                             *


  서기 2000년을 맞이하던 해, 나는 처남, 조카와 더불어 이른바 <2000년 기념 2000킬로 주파>라는 그럴 듯한 슬로건을 내걸고 이 나라를 한 바퀴 돈 적이 있다. 물론 차를 타고서다.

  닷새쯤 걸렸던가. 서울을 떠나 독립기념관과 유관순 유택, 전봉준 사가(私家)와 선운사를 거쳐 변산반도, 그리고 땅끝에서 보길도로 들어갔다가 해남으로 나와 부산에서 머물고, 다시 경주와 포항을 거쳐 동해안을 타고 올라와 속초와 인제를 거쳐 돌아왔다. 서울로 돌아오니 차량의 거리미터는 2000킬로에서 몇 킬로가 모자라는 숫자를 나타내고 있었다.   


  그 행로중 내게 뜬금없이 떠올라 오랜 동안 머문 생각 하나가 있다. 남해안을 가로지르는 도로에서 경주로 나아가는 길목을 지나치는 바람에 뜻하지 않게 부산에서 하루를 묵게 되었던 날의 일인데, 발단은 처남이 제공했다. 

  조수석에서 도로표지판과 지도를 맞춰내는 임무를 맡고 있던 처남이 갈림길을 놓치고 났을 때, 그가 말했다. 

  "에이, 갈림길은 확 꺾어져 있어야 얼른 표시가 나는데 직선에 가깝게 밋밋하게 되어 있으니 이거 구분이 되어야 말이지......"     


  물론 처남은 어둑어둑해진 밤길이어서 표지판을 얼른 알아보지 못하는 바람에 빠져나가는 길을 놓치게 되었는지라 멋쩍어서 어떻게든 변명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갈림길이라면 길이 확실하게 구부러져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고 도로탓을 하면서. 사실 어떻게 보면 그것도 길을 놓친 이유의 하나가 될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때 내게 떠오른 생각은 조금 달랐다. 뜬금없이 그랜드 캐년을 끼고돌던 때의 생각이 불쑥 끼어들면서, 그랬다. 


  미국의 대표적인 협곡이라면 그건 그랜드 캐년일 게다. 길이만도 엄청나서 서울 부산간 고속도로보다도 더 길다. 500킬로가 넘는다. 그 주변 도로를 달린 적이 있다. 2개 주를 끼고 있는 길인데 내내 직진도로를 달렸다 싶었는데, 지도를 보니 나는 어느 새 좌측으로 한참이나 구부러진 도로로 나와 있었다. 표가 나지 않게 아주 완만하게 뻗은 도로 탓이었다.

  이처럼 먼 길을 달리면서 방향을 바꿔야 할 때 공간의 여유가 있으면 그 도로는 아주 완만하게 구부러진다. 어느 때는 방향을 선회한 것을 운전자가  느끼지 못할 정도가 될 때도 있다.


  그러한 상황을 더욱 크게 확대해보면 어떨까. 즉, 운동장의 트랙 같은 것을 400미터가 아닌 4000미터, 아니 몇 백 킬로미터의 크기로 확대해보는 것이다. 그럴 때도 사람들은 그 길을 달리게 되면 그것이 구부러진 길이라고 느끼게 될까.

  그 해답을 구하기 위해 모두들 수학에 매달릴 필요는 없다. 그 뒤에 집으로 돌아와 어느 책을 대하니, 통상적인 사람들의 지각으로는 원둘레가 2000킬로미터 이상에서 2500킬로미터 정도가 되면 원주(圓周)상에서 움직이는 자신은 그것을 원으로 인식하는 게 아니라 직선으로 여기게 된다고 나와 있었다.


  이 나라의 섬들을 연결하여 한 바퀴 돌면 남쪽 땅만으로도 너끈히 2500킬로미터가 되고 남는다. 즉, 누구든지 이 남한땅의 외곽 거리 정도가 되는 원주(圓周) 위를 자신이 직접 움직여 돌아보게 되면 그 동선을 원으로 여기지 않고 거의 직선으로 인식하게 된다는 말이 된다.

  이걸 달리 이야기해보면 어떻게 될까. 이 나라 땅 전체를 둥글게 만들어놓고 그 외곽선만 따라 가면 우리는 그 순간 원운동이 아니라 직선운동, 곧 직진을 하는 것으로 여기게 된다는 말도 된다. 도형으로 축소하면 원이지만, 이처럼 아주 커다란 원일 때는 실물의 어느 지점간 이동은 실제로도 직선이 되니까.

 

                                                          *


  생물학에서 흔히 쓰이는 암수 표기가 있다. 바로 ♀과 ♂다. 내가 이상한 쪽으로만 조숙한 편이었는지, 어렸을 때 나는 그걸 보고 픽 웃었다. 어떻게 보아도 그건 남녀의 성 상징을 요리조리 잘도 우회해서 만들어 낸 작품이었다.

  지금도 그 생각에 변화는 없다. 하지만 거기서 맛보는 또 다른 느낌은 있다. 암컷의 표지에서 드러나는 둥근 원과 수컷에서 보이는 화살표가 주는 느낌이 그것이다. 암컷에는 둥근 원이 있어서인지 부드러워 보이고, 수컷에서는 그 날카로운 직선이 주는 관통성에서 공격성까지도 풍긴다. 요컨대, 표지로 보자면 내게 있어서 암컷은 원이고 수컷은 직선으로 읽혀진다.


  꼭 그래서는 아니겠지만, 대체로 암컷은 부드럽다. 포용력이 있어 보인다. 그리고 수컷들은 공격적이거나 최소한 쟁취적이다. 오래 전부터 생존의 대열에서 창이나 활을 들고 앞장서왔던 과거의 전사들처럼.

  그리고 우리의 실생활에서도 이러한 일반화는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어 보일 때가 많다. 그런데, 문제가 될 때도 많다. 그러한 성향의 고착을 바라거나 당연시할 때다. 예컨대, 여성들은 늘 포용과 관용으로 인내해야만 하고, 남성들의 목소리 높음은 사회적으로 부여되거나 인용(認容)된 권위의 당연한 관례로 무차별 용인되어 그 수용까지 한 두름으로 강요될 때, 그러한 시선은 설득력을 읽고 문제시된다.

  그러한 관계를 측면도를 통하여 관찰하면 그건 조화될 수 없는 원과 직선의 끝없는 평행선이 된다. 원이든 직선이든, 시선의 고착은 본질을 훼손하게 되기도 하고.

                                                 *


  남녀의 만남은 대체로 이질적인 요소의 결합일 때가 많다. 연인과 부부들처럼 같은 방향을 향해 나란히 서  있는 경우라 할지라도, 그 시각과 광각은 두 사람 사이의 거리와 높이 차이만큼 처음부터 그 차이가 전제되어 있다. 그만큼 남녀간의 만남 자체는 차이를 내재적 본질로 한다. 결합력, 곧 응집력과 그 지속성의 합은 별도로 치더라도.

  그러므로 남녀간의 만남에서 비집고 나오거나 관찰되는 서로의 차이나 대조성은 생래적이다. 본질적이다. 문제는 그 차이를 어떻게 인식하고 어떻게 바라볼 것이냐에 있다. 그 시각을 구성하는 내용물에 따라 그것이 알력이나 다툼으로 이어질 때도 있고, 두 사람의 화학적 결합을 위한 합체과정의 촉매제로 작용할 수도 있다.


  그럴 때 원과 직선을 한번 떠올려보면 어떨까. 아니, 어떻게 해도 이질적일 것만 같은 원과 직선이 현실 속에서 동일체로 인식될 수도 있음을 잠깐만이라도 상기해보는 건 어떨까.

  그리하여 우리의 삶이란 건 때때로 우리와는 이질적인 다른 사람들이 겪었거나 엮어내는 어떤 삶의 단편들을 통해서 끊임없이 그리고 부지불식간에 서로가 서로에게 서로 다른 모습으로 비쳐지는 의지처가 되어줄 수도 있음을 기억해 내려는 연습을 해보는 건 어떨까. 한 번쯤 일부러 짬을 내어서라도.


  그리하여 그런 일들이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 바로 나와 더불어 같은 삶의 띠를 함께 두르고 지내는 내 암컷이나 내 수컷에서 발견해내려는 노력으로 수렴되어, 어느 날 두 눈을 크게 뜨고 그녀나 그를 향해 두리번거려보는 연습으로 이어지는 것도 좋지 않을까.

  바랄 수만 있다면, 그런 일들이 제 딴엔 제법 나이가 들었거나 철이 들었다고 스스로 주장하고 있는 수컷들에서 더 많이 생겨났으면 좋겠다. 마치 자신의 이런저런 오랜 버릇을 아집인 줄 모르고 올곧은 직선운동으로만 여겨온 수컷이 어느 날 우연히 자신의 가고 있는 그 길이, 내내 걸어오고 있었던 그 길이, 바로 자신의 아내가 크게 둘러쳐 놓은 원주 위였음을, 아내의 원둘레가 직진선(直進線)이었음을, 뒤늦게 통탄하듯 깨닫게 되기 전이라면, 오죽 좋으랴.

 [April 2002]  

     

 

<2000년 기념 2000킬로 여행>

 

 

 변산반도. 부산하게 해넘이 채화대니 뭐니 하고 준비해 놓은 곳에 넘 늦게 갔던가.

아니다. 해가 지고는 있었는데, 구름이 제법 많이 끼어 있었지 싶다.

요란한 곳에서 돌아서면 더 크게 빈 손인 것은 그곳도 마찬가지였던 거 같다.


 


 

호미(虎尾)곶 등대 있는 곳. (토끼꼬리라고 해도 좋은데 꼭 호랑이로 부풀린단 말씀이야....)

 

그곳엔 21세기를 밝히는 불들이라는 이름으로,

지구상에서 가장 먼저 해가 뜬다는 피지섬에서 채화해온 불에다,

이 나라 두 군데 것까지 해서 불씨 세 개를 밝히고 있었지 싶다. 

 

얼마나 오래 타고 있으려나? 아니, 그 의미가 얼마나 오래 보존될 것인가.

노파심에 의구심이 얹혔다.

울 나라 사람덜은 호들갑 떨기 무섭게, 두어 해도 지나지 않아

까먹는 데는 선수들이니까..... ㅎㅎㅎ.

 

 

 

 

 

 

저 위에 이야기가 나온 김에, 그랜드 캐년 관망대 근처.

20여 년도 더 된 까마득한 예전 얘기.

 

 

 

 

뜬금없이 웬 강아지 사진이냐고?

 

그해(2000년) 시작은 참 좋았는데,

요 방울이 넘하고 한탄강가에서

바람을 쐰 게 녀석과의 마지막 장면이 되얐다.

 

이별연습의 시작이라고나 할까.

(그 해 형님이 교통사고로 비명에 가셨다) 

졸문 <이별연습>은 그렇게 해서 쓰여졌다.

 

사진을 보니 굳은 눈물샘이 새삼스레 물컹거린다.

 

 

 

반응형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