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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斷想]과거 잊기 연습 : 군 생활, ‘쌩유’!

[내 글] 진담(眞談)

by 지구촌사람 2012. 10. 21.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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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 잊기 연습 : 군 생활, ‘쌩유’!

 

  우리들은 자신의 삶 중에서 가장 짙게 색칠 된 부분들을 도려내서 유심히 바라보게 되면, 흔히들 이런 혼잣말 조로 그 시절을 요약하곤 한다.

 -내 인생도 참 파란만장했지......

  그러다가 그렇게 요약되는 파란만장이 다른 이들에게도 흔하다는 생각에 미치면 한 마디 더 보탠다.

  -내 나름대로는 말이야.

 

  내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타의에 의해 군 입대가 이뤄질 무렵이 절정기였고, 그 그림자는 제법 길었지 싶다.

  내 나름, 그림자 자르기를 한다고 했지만, 나중에 보니 내 마음속의 우격다짐이었을 뿐, 지워지지 않은 흔적이 꽤 오래 갔다. 내가 제법 제대로 철이 들기 시작했다고 자신하기 시작한 40대 초반까지였으니까.

 

  사내들에게 있어서 군대 시절 이야기. 그건 그야말로 누구에게나 소설 한 권 이상씩의 이야기가 되고 남는다. 그 내용물이 천차만별이긴 하지만.

  입대 날부터 ‘국방부 시계는 거꾸로 매달아도 간다’면서 제대 날짜를 꼽아대기 시작한 단순 인내파에서부터, 딱 군대 체질이니 말뚝 박으라는 (장기 복무를 신청하라는 뜻) 소리를 듣는 사람들까지, 구구각색.

 

  내 경우는 출발부터 예상 불허였다. 지금에야 돌아보면 스릴 만점짜리지만, 당시의 내게는 암담한 회색지대였다. 기를 쓰고 흑색을 지우고 승격시킨 게 겨우 회색일 정도로. 알오티시를 마치고 소위를 달고 대학원에 진학하여 석사 학위를 받으면 육사 교관 시험에 응시하여 육사 교관 출신의 예비역 육군 대위 신분으로 대학 강사를 거쳐 교수 생활을 하리라...

  내 나름으로는 제법 야무진 생각이었는데, 70년대 초의 이 나라 사정은 내 그림과는 영 딴판으로 돌아갔다. 이 나라에서 그런 법률도 있었는가 할 정도로 전문가들조차도 기억하지 못하는 위수령과 그 첫 발동. (이 나라 역사상 딱 한 번만 발동되었지 싶다. 이승만 대통령의 부산 피난 시절, 개헌 시도 때도 발동되었던가? 기억이 확실치 않다.) 그 위수령 발동의 숨은 공신으로 떠밀려 올라간 사람 중 하나가 바로 나였다. 골프를 마치고 돌아가던 박통의 탑승 차량에 학생들이 던진 돌이 떨어졌고, 그 데모의 어쩔 수 없는 기획자 중 하나가 나였으니까.

 

  그렇게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졸지에 1학기 시험도 다 끝내지 못한 채로, 입고 있던 알오티시 단복이 벗겨진 채 한여름 땡볕 속 연병장으로 끌려나간 나의 군 생활은 예상대로였다.

  이른바 빨간 줄이 그어진 누런색의 병적 카드를 내 손으로 들고서 최전방 사단본부에서 심사를 받고 연대급을 거쳐 대대로까지 흘러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나 역시 국방부 시계가 빨리 돌아가기를 바라야했다. 하늘이 새로 열리기 전에는 달리 어찌 해볼 수 없었다. 예사롭지 않은 각을 지닌 얼굴의 인사참모부 고참 하나가 당시 내게 던진 말은 이랬다.

 -널 내 밑에 두고도 싶다만, 늬들은 끝까지 바닥으로 내려 보내야만 하는 게 룰이라서 말야.

 

  그때, 내게 뜬금없이 날아와 꽂힌 생각 하나. 내가 머물다 떠나온 곳을 잊자! 기억에서 완전히 지우자!였다. 그가 내게 심어준 것도 아닌데, 그때부터 내게 그런 생각은 내 가슴속과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그러고 나니, 희한했다. 가는 곳마다 여기저기서 툭툭 장난치듯 내 가슴팍을 주먹이나 말로, 쑤시거나 건드리고 가는 사람들의 짓거리들은 이내 용서되거나 잊혀졌다. 그날로 혹은 그 자리에서.

 

  그런 세월이 6개월쯤 지난 뒤, 더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내겐 새 세상이랄 수 있는, 상상하기 어려운 새 하늘이 열렸다. 당시 월남전에서 철수한 한국군을 (1973.3) 좀 더 효율적으로 미국의 직접 관할에 넣고 싶어하는 미국과, 월남전의 그 수많은 잉여 중고장비를 가장 가까운 나라에 버리듯 주고 갔으면 하고 바라던 한국의 배가 맞았던 것.

  그 바람에 한미연합사라는 게 생기고, 한국군과 미군이 실질적으로 합동 근무까지 하게 된 한미1군단이 창설되면서, 우리 1군과 3군은 실질적으로 일일이 미군의 작전 지휘를 받게 된 것이었다.

 

  그러자, 제 나라를 지키는 작전 주권을 통째로 미국에 넘겨 준 것임에도, 이 나라 군인들은 웃었고 정치인들은 안도했다. 힘 센 형님이 상주하면서 자기를 지켜준다고 무조건 든든해했다.

  심지어, 같은 육군 대장인데도 한국군은 부사령관 자리에 머물고 사령관 자리는 미군에게 내주는 희한한, 참으로 부끄러운 조직이었음에도, 누구 하나 입도 뻥긋 못 했다.

 

  아무려나. 나 역시 뻥긋 하지 않았다. 빨간 줄이 그어진 누런 병적 카드 대신, 한참이나 낯선 까만 구멍이 꼭대기에 한참 널린 (나중에 보니 그게 바로 OMR 카드라는 거였다) 하얀 카드가 병적 카드를 대신하는 바람에, 양놈들은 내가 끌어안고 다니던 빨간 줄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사실만 기뻤다. (하기야, 그들이 한글에 관심할 턱이 있기나 했으랴. 하하하.)

  도축장에 끌려온 소처럼 무력한 모습으로 까닭도 모른 채 그들의 처분만 기다리던 나에게, 그들은 내가 맘 놓고 떠들어대는 영어 하나만 보고서, 내 성분과 무관하게, 쓸모 있는 연장으로만 나를 필요로 한다는 그 단순한 사실, 그 단순한 선택 기준이 참으로 가뿐했다.

 

  가장 단순한 선택이 선택자와 선택 받은 사람 모두를 참으로 홀가분하게 한다는 걸 그때 체득했다. 더 나아가 그런 단순한 선택이 잘하면 서로가 행복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그때도 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그때는 군대 자체가 썩 좋지 않았고, 미군들의 실질적인 안방 차지는 어떻게 봐도 박수칠 일이 아니어서, 그런 생각까지는 못 했다.

  아! 참으로 멋지고 멋진 공짜 스승 하나를 내 손으로 놓쳤도다!!

 

  여하튼, 그 뒤로 몇 달 간의 이런저런 교육이 끝난 뒤 시작된 나의 삶은 천양지차였다. 내 관할의 모 군단 지역을 그저 슬슬 돌아다니기만 하면 되었다. 동기생 알오티시들이 소위를 거쳐 중위로 제대할 때까지.

  그들은 계급장도 안 달린 내 알로기 제복과 멋진 지프차를 손으로 만져보면서, 내 앞에서는 소속조차도 잘 묻지 못 했다. 연중 최대 행사이자 한국군 지휘관들의 작전 수행 능력 평가를 겸하는 ATT니 뭐니 하는 훈련 때에, 사단 급 작전처에서 즉석 작전 지시를 내리는 나를 봤다는 다른 친구들의 수군거림 탓도 있었다. (그 작전이란 건 한미1군단에서 미리 짜놓은 수많은 예행연습 중의 하나로서, 나는 영어로 하달되는 작전을 내 차의 통신 장비로 받아서 한국말로 전달하고, 수행과정을 기록하는 것일 뿐이었는데도, 그들 눈에는 엄청 끗발 있는 사람으로 보인 모양이었다.)

  하기야, 당시는 머리 기른 보안사 사병 녀석들이 위관급 이상 장교들만을 상대하던 시절이었는데(하사관들은 영관급 이상을 상대했고) 내 지프차가 보안사 지구대 앞을 지날 때면 위병소 녀석들이 경례를 하곤 했다. (멋도 모르고, 뭔지도 모르고, 그저 외관이 사단장/군단장 차보다도 더 멋있는 그럴 듯한 군용 외제 지프차인 까닭에... )

 

  그런 군대 생활 덕분에 나는 후반기에는 어느 한 곳에 틀어 박혀 책만 봤다. 꼭 필요한 때만 움직였고, 의무 순찰은 운전병이 제 혼자서 했다. 으스대기 좋아하는 그는 웬 떡이냐 하면서 신바람을 냈다. 그리곤 군 생활 기억 자체를 이내 지웠다.

  전역 후 초기에 예비군 실무자의 실수로 잘못 편성되는 바람에 참석했던 예비군 훈련 두 번인가를 끝으로 예비군 훈련조차도 조기 졸업했다. 5년에 한 번씩 실시하는 소집 교육도 1회 참가로 끝. 하기야, 그 뒤로는 내가 국내에 머물고 있지도 않았으니 추가 소집에는 응할 수도 없었다.

 

                                                           *

  완전히 지워졌는가 싶어졌던 군 생활의 기억. 아니 그렇게 여기면서 그 시절을 전후한 기억 전체를 잊었다고 여겨온 그 시절의 기억이 희나리의 연기처럼 꾸물꾸물 되살아 난 적이 몇 번 있다.

  그 중 하나가 여권 발급을 위한 신원조회였다. 여권 하나를 받기 위해서도 중앙정보부의 신원조회라는 걸 받아야 하기 때문에 그 과정에만 보름 이상 소요되던 70년대. 그때 해외로의 잦은 나들이나 장기 체류는 요시찰 대상에 가까웠다.

 

  나와 같은 학내서클에서 얼굴을 맞댔던 이들 중에 지금은 유명인사가 된 K지사, 모 중앙일간지의 논설실장인 H, 이 나라 최대 최고 기업의 명실상부한 2인자인 C부회장... 그들은 여권 신청조차 할 엄두를 못 냈다.

  그 바람에 H는 해외여행 자체를 염오할 정도가 되어 나이 50을 넘기고서야 최초로 바깥나들이를 한 번 했던가 했을 정도이고, 얼마 전에야 알게 된 일이지만 나와 비슷한 시기에 타의로 입대한 문재인도 해외여행 꿈을 접고 지내야 했던 게 꽤 오래였지 싶다. K지사도 국회의원이 되고 나서야 첫 해외 나들이를 했다. 하기야 노무현 대통령은 대통령이 되고 나서의 미국 방문이 그의 평생 중 첫 해외 나들이기도 했지만.

 

  그런데도, 그런 으스스한 신원조회 관문을 비교적 무난하게 통과한 것은 당시 중정의 2인자였던 J차장이 (그는 이후락 부장보다도 먼저 이북에 들어가서 이 부장의 북한행 길을 닦았던 이로, 이 나라 남북교류사에 이름이 또렷한 분)이 내 친구의 형인 덕도 있었지만, 그 분이 자신 있게 내 뒷배를 봐 줄 수 있었던 것은 내 군대 기록이 육군본부를 벗어나 다른 곳으로 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기록엔 빨간 줄 기록 사항이 전혀 보이지 않기도 했지만(그걸 적는 칸 자체가 없었거나 미군들은 자신들이 본 것만 기록한 덕분에), 맘에만 들면 맨입으로 칭찬하기 좋아하는 미군들이 부풀려 적어놓은 내 행적을 보고 통과! 소리를 안 할 사람이 없었다.

 

  그럴 때면 묻혀 졌던 (혹은 매몰시키고만 싶은) 군 생활과 그 무렵의 앞뒤 삶의 갈피들이 잠시 들춰지고, 내 의식에 여유가 생기면 제 풀에 몇 페이지 정도 팔랑거리다가 사라지곤 했다.

  입대 초기, 마음 보따리가 엄청 무거운 졸병에게, 진짜로 괴로운 것은 생각 없이 떼거리로 묻혀 재미로 해대는, 나와 전혀 무관한 이들의 도리질 내지는 무시, 멸시, 손가락질이었다. 무지한 집단의 순진한 따라 하기 손가락질은 개인 하나를 질식시키고도 남았다.

 

  그 바람에 취사장에 가서도 눈칫밥은 예사였고, 나는 늘 배가 고팠다. 남들의 눈을 피해 피엑스로 가서 빵을 샀고, 그걸 들고 화장실로 숨어들어 먹었다. 어설픈 판자때기 사이로 구멍을 뚫어 놓았을 뿐이어서 배설물의 내용물까지 훤히 읽히는 야전 변소. 칸막이 뿐인 용변실에서 그 냄새들까지도 목구멍으로 밀어 넣으면서, 나는 빵을 씹었다. 배고픔을 참을 수 없어서.

  그러다가 고약한 고참에게 들켰다. 그리고 그곳에 머물던 한 달 내내 나는 놀림감이 되었다. 그런데도 난 그곳을 드나들며 빵을 먹었다. 그 뒤로 나는 그들의 손가락질 따위에 내 눈과 머리를 닫아 걸 수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합류하지 않겠다는 오기를 그런 웃기는 먹거리 챙기기로 다졌다. 지금 생각하면 한낱 얄팍한 치기(稚氣)일 뿐이지만.

 

                                                     *

 

  그런 춥고 배고프던 시절이 6달 정도로만 단축되었던 건 그야말로 내겐 하늘이 베푼 은혜다. 그리고 더 큰 은혜는 바로 위에 간단히 적었던 그것이다. 앞으로의 내 인생에서 <내가 머물다 떠나온 곳을 잊자! 완전하게 지우자!>라고 새기게 되었던 것.

  그리고 나중에 생각해 보니, 더 큰 소득은 따로 있었다. 내가 잊자고 다짐했던 것의 실상은 타인들 앞에서의 내 모습이었다. 타인들이 떠올리는 내 모습을 내가 내 멋대로 값을 매기거나 쓰다듬고 있었던 그것. 내가 잊어야 할 것은 그런 내 모습이었다. 타인들이 어떻게든 값을 매긴 내 모습의 꼬리 자르기가 아니었다.

 

  내가 지워야 할 것은 타인들과 연관 지어 내 멋대로 꾸미거나 무책임하게 부풀린 내 모습이었다. 나의 진실과는 거리가 멀게 왜곡되거나 과장된 모습도 있고, 멋진 것만 추려 뽑은 전시용 요약판일 수도 있었다. 어떻게 발명해도 진실과는 거리를 둔 꾸미개일 뿐일 수도 있다는 걸 솔직하게 인정해야 했다. 그걸 인정할 때의 기분은 비록 잠시 더럽게 참담해질지라도.

  게다가, 그런 모습들을 떠올리고 잡는 건, 부질없는 짓이었다. 밑져도 한참 밑지는 장사. 내게서도 지나간 일들일 뿐만 아니라, 그토록 내 자신이 놓지 못하고 부여잡고 있던 남들의 생각이나 기준. 그들에겐 이미 오래 전에 다 지워졌을 그림자였다. 그것들은 내게도 이젠 별거 아니지만, 그들에게는 정말이지 확실하게 암 것도 아닌 그런 것일 뿐이었다. 내가 괜히, 웃기게도, 멍청하게도 붙들고 있는, 알맹이 없는 그림자 그림.

 

  내 나름대로는 가장 시린 바람에 내쳐졌다고 생각하기도 했던 군 입대 초기 시절. 그때 거머잡은 생각 한 줄기. 내 머문 곳과 내가 자아낸 실밥 자국까지도 잊자고 어설프게 다짐했던 일. 그건 참으로 남는 장사였다. 밑천이 좀 들긴 했지만, 그건 그 시대 초보지성인들이 치러야 할 공통적인 의무 투자 분담금이었다.

  그리고, 뒤늦게 떠올릴수록 그 새김질은 더욱 깊어지고 단단해져 간 것. 그것이 내가 그 투자에서 거둔 알짜배기 알속이었다.

 

  나는 그 덕으로 지금까지 홀가분하게 살아내고 있다. 요즘은 어제의 일조차도 마음이 쓰이는 일들은 죄다 까마득히 잊는다. 나는 그걸 페이지를 넘긴다고 하는데, 마음이 크게 쓰이든 적게 쓰이든 구분하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껄끄러운 것들은 페이지를 넘겨 버린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과거를 돌아보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갖게 되면, 무조건 고마워한다. 나와 함께 해오느라 고생깨나 해온 나의 과거 시간들에게 감사한다. 내 군 시절을 떠올리면서, ‘쌩유’를 매단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렇게 해보니, 과거 잊기는 매몰찬 과거의 매장(埋葬)만이 아니라, 따뜻한 다독거리기도 되었다. 데워서 조금이라도 따뜻해진 과거, 온기가 밴 과거는 흘려보내기가 쉽다. 과거에 덜 미안해진다.

  또한, 과거를 따뜻하게 다독이는 데는 소급입법 금지의 원칙도 적용되지 않는다. 암 때나 그리 해도 된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그리고 지금은 좀 더 저질로 발전(!)했다. 지난 시간은 내게 존재하지 않는다.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내놓고 과거를 박대한다. (그래도 내 착한 과거는 군말이 없다. 내 꼬드김으로 온순해져서다. 하하하)

  그저 내게는 오늘 지금, 바로 지금만 있다. 그게 내가 온몸의 안테나를 곧추세우고, 모든 힘을 그러모아 맞이해야 할 멋진, 소중한 손님들이다. 거기에 더하여 최고의 선물이 있다. 그건 아직 내가 개봉하지 않은 미래, 그것도 이미 내 앞으로 와서 기다리고 있는 아주 가까운 미래다.

 

  나는 내일 맞이할 시간들의 내용물을 들춰보고 싶어 안달이 날 때도 있다. 가슴이 뛰다 못해, 맨발로 나가서 손잡고 끌어들이고 싶을 때도 있다. 손끝 발끝은 물론, 말하기 무엇하지만 미주알까지도 제 먼저 옴지락거린다. 그런 얘기는 집사람한테도 못 한다. 나잇값도 못 한다고 손가락질 받을까봐 ...

  그럴 때면 내가 늘 뇌까리는 소리도 제 풀에 풀려나온다.

  -난 참 대책 없는 비아그라 생산 공장이어! 히히히. [Oct. 2012]

 

* 상담 치료를 받고 있거나 받아야 하는 많은 사람들 중에

  과거와의 깔끔한 단절이 문제가 되는 경우가 참 많다.

  그걸 자력으로 제대로 해내지 못하거나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서,

  고생하는 이들 많다.

 

  개중에는 아주 심각해져서 정상적인 사회 생활 자체가

  불가능한 이들도 적지 않다.

  대인 기피증에다, 우울증 정도는 약과라 할 정도로.

 

  그런 이들에게 권장되는 것 중의 하나에 현실요법이라는 게 있다.

  내용은 두껍지만, 요약하자면 현재 중심과 행동이다.

  과거 지우고 현재에만 집중하고, 머릿속 생각들은 잊고 행동을 선택하라는.

 

  갑자기 이 현실 요법 생각이 나서, 잡문을 긁적였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이가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기쁠 것 같다.  

                                                                              [2012. 10.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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