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커트는 반갑고, 원피스는 그립다
어제 일이다. 오늘은 크게 한탕 자신이 쏘겠노라며 신이 난 아내와 함께 소래 포구엘 갔다. 게와 대하를 사다가 삶아먹고 구워먹자고 했던 것이다. 좋을시고.
최근 내게 좋은 일이 생겼는데, 그 세부사항이 바로 어제 아침에야 확정되어 내게 통보되었다. 월급쟁이의 소원이란 게 크나 작으나 사장 자리 한번 앉아보는 것인데, 마침내 그걸 해보게 된 것이고, 그 소식을 전해들은 아내가 신바람을 낸 것이다.
소래포구는 서너 주일 전에도 갔던 곳이다. 게장을 담그려면 신선한 게 필요한 법이라 바위게를 사러 갔다가, 게 말고도 이것저것 해서 한 보따리를 사다가 여러 집이 잔치 비슷한 것을 했다.
그날 소래포구 쪽의 주차장에서 흙먼지로 고생했던 생각이 나서 이번에는 월곶 포구 쪽에 차를 세우고, 수인선 협궤의 흔적이 남아 있는 다리를 이용해 소래 쪽으로 건너갔다. 삼십 분 주차비가 얼마인지 물어보는 꼼꼼함으로 미리 무장까지 한 것은 그곳에 가면 볼거리만으로도 한두 시간쯤 보내게 되는 게 금방이기 때문이었다.
시원한 바닷바람을 콧노래 삼아 녹슨 철로가 끝나고 얽음철판으로 상판을 깐 다리를 지날 때다.
맞은편에서 팔짱을 낀 채 걸어오고 있는 부부를 향해 무심코 시선을 던지는 순간 여인의 입에서 외마디 소리가 나왔다.
-어맛!
때마침 다리 위로 불어오던 바람결이 거세지자 랩스커트처럼 갈라진 앞자락을 느슨하게 겹쳐 걸친 여인의 긴치마 한쪽이 말려 올라가면서 허연 허벅지가 드러났다.
여인은 허둥대며 치마꼬리를 챙겼고 그런 아내의 모습을 재미있게 바라보던 사내의 착해 보이는 시선과 맞닥뜨린 나는 그를 따라서 허허 웃었다.
*
나는 아내를 돌아보며 치마 덕분에 좋은 구경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자 아내는 15도쯤 비틀린 코맹맹이 소리로 대꾸해 왔다.
-당신 말대로 되어 좋겠수.........
그날 월곶 쪽으로 오기 위해 천왕동 길로 우회할 때다. 지나는 여인 하나를 보고 내가 치마 얘기를 꺼냈다. 그녀는 요즘 보기 드문 물방울무늬의 암청색 원피스를 걸치고 있었다. 시쳇말로 '땡땡이 가라'의 '곤색' 원피스라고 축약되던 왕년의 원피스.
그녀의 모습은 인적이 드문 길가를 배경으로 멀리서도 또렷하게 보일 정도로 산뜻했고, 그래선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아무렇게나 그려진 흑백의 밑그림 속에서 갑자기 솟아오른 천연색의 미인도처럼.
그녀가 사이드 미러에서도 사라지고 나자, 외간여인에 대한 나의 지나친 흥분이 옆자리에 앉은 아내에게는 쓸데없는 자극도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비로소 요긴하게 떠올랐다. 아내를 조금은 위무해야 한다는 의무감과 함께.
-이 나라에는 마릴린 몬로 같은 미인들도 제법 있을 텐데 말야. 요즘엔 토옹 보이질 않는단 말이야. 당최 치마들을 입고 다녀야 그 흔한 전철 바람통 위에서 허연 허벅지가 드러나는 그 기막힌 모습들을 볼 수 있든가 말든가 할 텐데 말이야. 쩝.
아내는 그 소래 다리 위에서 바람에 말려 올라간 치마와 여인을 보자, 앞서 내가 했던 그 말이 생각났던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면 내 말은 아내에게 위무가 되기는커녕 내 엉큼한 관음증을 향해 그녀가 마음의 갈고리를 날카롭게 세우도록 꼬드긴 셈만 되었다. 내가 섣불리 하는 짓치고 아내의 속마음까지 뛰어넘어 쏙 들게 한 적이 있기는 있었던가. 힝.
하기야 내가 마릴린 몬로니 뭐니 하는 소리로 둘러대고 있을 때, 한편으로 나는 여학생들 뒤로 살금살금 다가가 치마를 들추고는 아이스케키! 소리도 다 못 지르고 내빼기에 급급했던 어린 시절의 놀이를 아내 몰래 떠올리고 있긴 했다.
용기 있는(?) 친구들이 그렇게 하는 걸 보면서 속으로는 들입다 부러워하는 게 고작이었지만.
*
요즘 가만히 보면 치마 구경을 하기가 참 힘들다. 아주 드물다. 거리에서 마주치는 여인들 중 열의 아홉 반쯤은 바지를 입는다. 그리고 치마를 입었다고 해도 무릎 근처에서 마감되는 단정한 차림, 곧 투피스 정장과 같은 스커트 차림을 대하는 일은 나이 지긋한 여인들에게서나 가능하다. 그리고, 삼십대 초반이나 중반의 여인들 중에서 그런 차림을 대할 수 있는 곳은 강남의 오피스 빌딩 업무촌과 같이 특수한 곳에서일 뿐.
하지만, 그녀들은 군더더기 없이 날렵하게 차려 입는 옷맵시만큼이나 분위기도 날카로워서 매서울 때가 더 많다. 그런 여인들과 우연히 엘리베이터를 함께 타고 오르내릴 때마다 그녀들의 말 한 마디나 시선 한 조각에도 내 몸의 어디가 베일 것만 같아서 은근히 긴장된다.
그렇긴 해도, 투피스 차림새들은 어쩌다 눈에 띈다. 요즘 눈 씻고 찾아보기 어려운 건 원피스 차림이다.
원피스. 그것은 여성 의상 중에서 벗어놓았을 때나 입었을 때 여인의 실루엣이 가장 확실하게 떠오르게 하는 녀석이다. 여인의 분위기를 선명하게 기억시켜서 바라보는 이를 가장 오래도록 감질나게 만드는 차림.
남편을 잠자리로 끌어들일 때 아내들은 약속이나 한 듯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닮은 슬립 차림을 많이 하듯, 원피스는 여성이 그 차림만으로도 남성을 너끈히 유혹할 수 있는 복식상의 선물이다. 그 만치 가장 여성스러운 차림.
그런데 요즘은 그 원피스 차림을 보기가 힘들다. 여성성의 포기와는 정반대로 극성스런 추세가 더욱 힘을 얻는 기세인 것 같은데.........
이따금 동네 한 바퀴를 하기 위해 아내와 함께 거리를 돌다보면 몸에 착 달라붙어 사타구니 근처와 가슴을 포함한 전면의 풍경이 위태롭기조차 한 삼십대 여성들을 많이 대한다. 돌출 정도와 곡선을 그대로 드러나는 진 바지와 스펀 티가 약속이나 한 듯이 엉치뼈 근처에서 만나고 있다.
아마도 그래서, 요즘 바지는 걸치고 티는 입는다고 하나보다.
어느 때는, 누구나 계란 프라이 수준임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착실하게 드러나는 빈약한 젖무덤도 이미 남편에게는 죄다 까발겨진 것이니 부끄러워할 게 뭐 있느냐는 듯이, 당당하게 무심한 포즈들도 적지 않다.
거기에, 머리 염색까지 곁들여져야 그 위태롭게 조마조마한 차림에 마침표가 찍힌다. 브리지 수준이 아닌 통째로들 하는 염색이다. 금발과 노란색에까지도 과감해질 정도로 도발적인 색상 선택에 작용했을 어떤 지속적인 불만족을 떠올리면 왠지 모르게 안쓰러워지기도 한다.
*
반시간 만에 우리가 원하는 것들을 사들고 갔던 길을 되짚어 돌아올 때다. 천왕동을 지났다. 원피스 여인을 만났던 그곳에서 마침 신호대기를 하게 되었다.
나는 불쑥 아내에게 한 마디 건넸다.
-이번 사장 봉급 받으면 그 첫 월급으로 내 한번 쏘지. 원피스 한 벌 사줄게.
그 까닭을 온전히 짐작하지 못하는 아내는 새 옷 한 벌 생긴다는 말에 그저 감읍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순간 그 원피스 아래에 놓여질 아내의 스타킹이 뜬금없이 떠올랐다. 벗어놓은 뒤에도 하루의 피곤을 고스란히 기억한 채로 널브러져 있게 마련인 아내들의 스타킹은 묘하게도 벽걸이에 걸린 옷, 그 중에서도 원피스 아래에서 더욱 그 곤고함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원피스는 안팎에서 풍기는 여인의 체취가 올실과 날실이 되어 짜내는 피륙으로 만들어지는 듯하다. 여인의 스타킹은 육신의 곤고함으로 응결될 하루의 일상을 예고하며 미리 써보는 일기장이 되듯이.
그러고 보면 아내에게 원피스를 사주기로 한 것은 거듭 잘한 일인 듯하다. 오래간만에 제대로 하는 짓 같다. 그리고 스타킹은 사다주지 말아야지. 내가 해주지 않아도 아내가 제일 많이 받는 선물은 스타킹이니까. [7/6/2001]
* 오늘 아침, 예전에 긁적인 잡문들 중의 일부를 한 권으로 묶기 위해 따로 추리다가
이 글이 눈에 띄었다. 10여 년 전의 것인데, 문득 요즘도 치마가 드물고
원피스를 대하는 건 그야말로 하늘의 별 보기만큼이나 드문 일이 되어 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 참.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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