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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 친숙한 것에 대한 익숙한 반감

[내 글] 진담(眞談)

by 지구촌사람 2011. 6. 6. 0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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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덜 친숙한 것에 대한 익숙한 반감


                                                                                        최  종  희

             

우리는 생의 여정에서 맞닥뜨리는 사물에 대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즉물적으로 호불호를 가리는 버릇들이 많은 듯합니다. 그리고, 그 바탕을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친소관계를 따져서 구별하려는 태도가 깔려 있을 때가 많습니다. 마음속으로 그것들과 맺고 있는 친숙함이나 익숙함의 정도를 짐작해보고, 그 결과에 따라서 사물이나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이 변하는 것입니다. 사물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거기에 얹혀지는 온기의 정도가 달라지는 것은 그러므로 흔히 겪는 일입니다.


익숙한 것이나 평소에 친숙하게 여기던 것들에 대해서는 인내심을 발휘하거나 포용하려고 하지만, 덜 친숙한 것이나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는 은연중에 내치려 드는 것이지요.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은밀하게 똬리를 틀고 있는 거부감이 어느 사이에 슬며시 반감이나 비난으로 변화할 즈음이면, 심사가 더욱 급박하게 꼬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한번 뒤틀린 감정은 제 스스로 부풀어 오르는 법이지요. 그러다 보면 밖으로 표출되는 반응에는 성급한 신경질까지 스며들어서 다 가려지지 않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성질이 급하다고 하는 말에는 이처럼 사물에 대한 반응이 자신만의 시선에 의존하여 조급하게 정적(情的)으로 표출하는  방식에도 원인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판단의 기준이 놀라울 정도로 정적이어서 즉흥적인 반응에 지배되는 경우가, 그렇지 않은 경우 못지않게 흔하기 때문이지요.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로 들어설수록 우리 주변에서 이러한 것들은 더욱 흔하게 보고, 자신들도 이따금 그 와중에 쉽게 빠져드는 일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얼마 전 외국인 등록증을 가진 딸 아이의 초등학교 입학 예비소집에 다녀온 학부모가 그 학교에서 근무하고 있는 선생님들이 그 아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서 우왕좌왕하면서 여러 선생님을 거쳐서야 겨우 마무리가 되는 것을 보고 마음이 울울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미국에서 태어나 그곳의 시민권을 취득한 아이를 데리고 귀국한 어느 어머니였습니다. 준비되지 않은 선생님들에 대해 은연중 불만과 비난이 담겨진 그 말속에는 어느 나라든 초등학교는 의무교육이니까 당연히 아무 문제 없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입학이 되어야 하는 게 아니냐는 논리가 깔려 있었습니다. 그 말이 맞긴 맞지요.


그러나, 그 아이는 한국말을 잘 하고 있는데다가 그  어머니가 한국인이라는 것과는 별개로 엄연히 외국인이었습니다. 외국인의 우리나라 초등학교 입학 사례를 많이 접해보지 않은 선생님들로서는 이곳저곳에 물어보거나 절차상의 문제를 두고 우왕좌왕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혹 어떤 선생님은 국적상 엄연히 외국인인 아이의 학교 입학을 위해서는 학부모가 오히려 그 절차나 자격사항을 더 자세히 알아보고 왔어야 할 것이 아니냐는 태도를 드러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러다 보니, 문제가 된 아이는 필경 또래 아이들이 서 있는 줄 밖으로 밀려나 한참을 기다려야 했을 것입니다. 어떻게 어떻게 해서 겨우 아이가 입학절차를 마무리하고 제 줄로 들어가서 서 있는 모습을 본 어머니는 그때서야 안도하면서도 내심으로는 선생님들의 무지나 덜 체계적인 대처방식에 기분이 상했을 것이고요.


집으로 돌아온 어머니는 아이의 입학과 관련하여 그 학교의 선생님들에 대해서  비난하려는 태도를 감추지 않았을지도 모르지요. 잠시나마 줄 밖으로 밀려나 있었던 딸아이에 대한 안타까움을 떠올리면 그것이 짜증으로 부풀어 올랐을 테니까요. 그쯤 되면 친숙한 내 아이의 입장이 덜 친숙한 선생님들과의 관계에 비해서 또렷이 우위에 놓이게 되지요. 어쩌면 그것이 우리네 엄마들의 당연한 자화상일 것입니다.

                               

                                         *

며칠 전 시내버스에서 어느 여대생과 나이 지긋한 교수가 볼썽사나운 일을 벌인 것이 신문지상을 장식한 적이 있었습니다. 감이 약했던 핸드폰 음질 때문에 그 여대생은 버스 안에서 3-4분 동안 큰소리로 통화를 한 모양이고, 그것을 지켜보던 교수가 폭언으로 그 여학생을 훈계한 것이 문제의 발단이라고 했습니다.


태권도 선수 출신인 그 여대생은 오십대의 교수에게 폭행으로 응수를 했고 차내의 승객들도 여대생을 나무라는 사람들과 교수의 폭언을 문제 삼는 사람들로 나뉘는 바람에 그 소란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버스 기사는 그대로 차를 몰고 경찰서로 직행하여 사태를 해결하려고 한 것 같았고요... 그 후 신문의 독자란에는 이 사건을 바라보는 분분한 의견들이 실리게 되었습니다. 독자들이나 우리들에게는 입방아 찧기에 적당하면서도 왠지 씁쓸한 뒷맛이 가시지 않는 그런 가십거리로 남았던 사건이었습니다.


그것을 바라보면서 나는 사건이 벌어지기 전에 교수는 그 여대생이 자신의 딸아이 또래라는 생각을 조금이라도 해보았을까 궁금했습니다. 오히려 딸 같아서 더욱 더 심한 말을 하게 되었는지, 아니면 가르치고 있는 학생들에 대한 평소의 불만이 그 여학생을 계기로 폭발적으로 터져 나온 것인지 의아했습니다. 이도저도 아니라면 요즘 젊은 아이들이 보이고 있는 행태에 대한 총체적인 불만이 그 여학생의  행동이 기폭제가 되어 교수를 자극하게  되었던 것인지도 모르지요.


궁금하기는 하지만, 어느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 사건으로 인해서 망신살이 뻗쳤다고 생각했을 교수의 행동에는 여학생에 대한 배려보다는 자신의 시각으로만 젊은이를 보려는 태도가 더욱 지배적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은 가능합니다. 즉, 여학생의 행위에 대해서 과격하달 정도로 심하게 비난하게 되었던 의식의 바닥에는 친숙한 자신의 행위에 비해서 훨씬 덜 친숙한 그녀의 행태가 공격의 대상으로 손쉽게 떠올랐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도 전혀 다듬어지지 않은 조악한 심사 그대로, 성급하게 말입니다.


또 한 가지 사건이 생각납니다. 오륙 년도 더 되는 기간에 걸쳐 사귀던 두 젊은이가 결혼을 하고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떠났습니다. 헌데, 두 사람은 신혼여행에서 돌아오는 길로 이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큰 사건들의 발단이 늘 그렇듯, 그 일도 역시 사소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했습니다.


삼박 사일의 신혼여행 중 신부가 시댁 어른들에게 문안전화를 겨우 한 번만 한 것이 바로 화근이었지요. 여행의 마지막 밤에 신랑이 그 일을 문제 삼았고 그것을 계기로 두 사람의 언쟁은 험악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끝내는 그 동안의 모든 시시콜콜한 것들까지 입도마에 올려놓고 서로를 비난했고 짓뭉개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차라리 일찍 갈라 서자였습니다.  


오랜 시간을 공들여 결혼에 이른 두 사람의 결말치고는 황당할 정도로 급박하게 순간적으로 내려진 결론이었고, 그것은 우리가 보기에 비극적일 수밖에 없는 사건, 곧 결혼 후 일주일도 되지 않아 맞게 되는 초특급 신혼 이혼으로 이어졌습니다.


그 후 제법 시간이 흐른 뒤 우연히 거리에서 그 신부였던 여성을 만나게 되어 차 한 잔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시댁 어른들에게의 안부 전화  하나 때문에 결혼이라는 중대사안까지도 팽개치게 된 것이 좀 지나치지 않았느냐는 나의 물음에, 그녀가 들려준 답변은 전화 하나만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말로 이어졌습니다.


그날 남자의 입에서 나온 얘기들의 상당 부분이 시댁과 관련된 것들이었고 혼수 얘기까지도 나왔다는 것이었습니다. 시댁의 친척들에게 보낸  혼수가 창피할 정도였다고까지 내뱉는 신랑의 모습은 그때까지 몇 년 동안 자기가 사귀고 지냈던 남자의 얼굴이 아니라, 처음 보는 낯선 사내 같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정떨어지는 모습에 자신의 평생을 의지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자신도 그 동안 쌓였던 불만들을 토로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뜻밖에도 그 남자의 입에서 끝내자는 얘기가 어렵잖게 술술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너무나 쉽게... 그녀가 충격을 받은 것은 바로 거기서였습니다. 그토록 쉽게 이혼을 얘기하는 남자의 입모양을 앞으로 두고 두고 떠올리거나 자주 대하는 일은, 정말 견뎌내기 힘든 일인 것 같아서 따로 비행기를 타고 올라왔고 그 길로 서둘러 이혼을 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돌아오면서, 어쩌면 남편의 모습이 어느 날 갑자기 낯선 사내의 얼굴로 보이는 아내들이 적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 신혼부부처럼 이혼으로 결말을 내게 된다면 온전하게 결혼생활을 지탱할 수 있는 부부들이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과 함께요. 


나와 상대방을 금 그어 놓고 구분하려고 하지 않는 일, 그것이 부부간에 친숙해질 수 있는 첫걸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평소의 작은 불만들을 쌓아두지 않게 하는 일과 더불어 자신보다도 상대방에 더 자주 가까이 다가가려는 노력, 그것이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모습이 상대방에게 생판 딴 사람처럼 보이지 않게 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자신을 중심으로 상대방 행태의 호불호를 판단하는 일. 게다가 그 판단이 우리에게 익숙한 조급증까지 가세하여 이뤄지는 경우에는, 어떤 경우든 자신과 상대방 모두가 불편해지는 일입니다. 작게는 자신과 상대방의 마음이 오래도록 편치 않고, 교수와 여학생처럼 망신스러운 경우도 있으며, 신혼부부의 이혼처럼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게 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자신에게 낯선 것들, 덜 익숙한 것들을 보면 잠시라도 우선은 시간을 벌고 볼일입니다. 한 걸음만 떨어져서 호흡을 고른 뒤 다시 바라보는 사이에 성급한 반발은 조금 숨이 죽을지도 모르고, 무엇보다도 자신과 상대방이 서 있는 곳들이 모두 눈에 들어오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숨고르기와 낯익히기는 여유를 향한 몸짓들이니까요.


즉각적인 반응은 본능적인 것이어서 원색에 가깝습니다. 원색적인 언행은 당혹으로 상대방을 즉각 제압하기는 하지만, 잠시 후면 자신도 그에 못지않게 창피해지는 일입니다. 숨고르기, 곧 한 걸음 물러서서 호흡을 고르고 난 뒤의 반응은 한 번 더 바라본 것만큼 낯익어집니다. 최소한 그 만큼은 자신에게 친숙해지는 것이지요. 그리고 친숙해진 것들에의 반응에는 온기가 얹혀지게 마련이고요. 그것이 정 많은 우리네의 본래 모습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낯설게 보이지 않기와 덜 익숙한 것들까지도 껴안으려는 몸짓은 우리네가 살아가면서 늘 보여주어도 좋은 모습이 아닐까요. 그러한  것들이야말로 남의 도움이 없이도 자신 안에서 키워나갈 수 있는 또 하나의 살가운 여유일 듯합니다. (1999. 2. 10.) 



[후기(後記) : 버스 안에서의 여대생 사건은 오보에 가까운 과장 보도였음이 나중에 밝혀졌다. 사건의 전말도 실제와는 많이 달랐고, 태권도 선수 출신 정도가 아니라 현역 대표선수였다. 때마침 핸드폰 소음 문제가 사회적 관심사가 되고 있을 때라서 사건이 부풀려지고 왜곡되었던 것.


티브이에 소개된 덕분에 낯이 익은 그 여학생을 어느 날 그녀가 다니고 있던 학교 근처의 전철역에서 우연히 알아보게 되었는데, 내가 말을 걸자 그녀의 얼굴은 이내 홍당무로 변했다. 막상 만나고 보니 그녀는 여드름 자국을 다 지워내지 못하고 있는 숫된 여학생이었다. 언론의 무책임한 폭력에 희생된 그녀의 달아오른 표정을 눈앞에서 대하게 되자, 나는 이젠 핸드폰을 써도 되지 않겠느냐고 토닥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그 사건 이후로 핸드폰만 보면 겁이 나서 아예 가지고 다니지 않게 되었다는 얘기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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