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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온병과 인생살이

[내 글] 진담(眞談)

by 지구촌사람 2011. 5. 29.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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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온병과 인생살이

 


  어제 점심을 아주 맛있게 먹고 나서, 돌아오는 길에 시침을 뚝 떼고 병원엘 갔다. 내가 여기서 시침을 뚝 뗐다고 굳이 적은 이유는 환자가 아닌 일반 사람들이 들어도 침이 넘어갈 정도로 맛있고 푸짐한 식사를 나만 먹고 나서, 문병차 병원에 들렀기 때문이다.

  내가 먹은 메뉴는 해물찜. 꽃게 한 마리와 주꾸미 서너 마리, 커다란 아귀 반 마리 정도에다 통통한 중하(中蝦) 서너 마리, 그리고 대형 소라 두 개가 커다란 쟁반에 가득 들어 있었는데, 그게 소(小)자란다. 다른 집에서는 특대라고 이름 붙여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푸짐한 양이다.

  그뿐이랴, 물김치 입에 쩍쩍 달라붙을 지경이고 서비스 삼아 나오는 소면과 눌은밥은 모두들 배가 터지든 말든 우선 넣고 보게 만든다. 그런 점심밥을 나는 아내와 딸내미와 먹어댄 뒤에, 어느 병원에 들른 참이었다. 그것도 주로 장기 입원환자들이 머물고 있는 병원에. 그러니 끄윽 소리 나게 잘 먹은 우리는 시침을 떼야 할 수밖에.

     

                                *

  오늘 점심시간의 일이다. 중견간부 직원 하나가 느닷없이 사는 얘기를 꺼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평소와는 달리 한참 투덜대다가 “내가 지금 사는 건 사는 게 아니다. 만날 회사에 나와서 죽어라 일만 해대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일만 하기 위해서 살고 있지 않은가. 인간답게 사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인생머슴일 뿐이다.”라고 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어제의 병원 얘기를 꺼냈다.


  내가 병원에 문병차 들른 후배는 장기 입원 환자다. 근무 중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고, 벌써 몇 달째 병원에 머물고 있지만 퇴원은 아직도 까마득하다. 언제 퇴원할지 의사조차도 명확한 얘기가 없다. 휠체어 신세를 진 지도 오래지만, 그걸 밀어주는 아내의 손길이 있어야 제대로 병원 현관 밖 출입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하반신 마비의 중환자다. 그런 그가 딱해서 내가 한 마디 했다.

  “이 사람아. 얼른 나아서 출근해야지.”

  점심으로 맛있게 먹은 해물탕이 자꾸만 더 마음에 걸려왔고, 내 말은 거의 빈말치레가 되고 있었다. 옆에 있던 그의 아내가 말을 받았다.

  “정말 소원이에요. 이이가 언젠가 털고 일어나서 일하러 나갈 수만 있다면 정말 다른 소망은 없어요.”

  “......”


  가만히 듣고 있던 환자, 후배가 한 마디 거들었다.

  “출근은 둘째고 우선 이 병원 생활이나 얼른 끝났으면 좋겠어요. 아, 나 같은 이런 병신을 부러워하는 사람들 속에서 지내려니까 참, 나까지 이상해지는 거 같아요.”  

  “무슨 소리야, 그게?”

  “요 한층 위에 암 병동이 있거든요. 그곳 사람들과 마주치면은요. 그 사람들이 우릴 제일 부러워해요. 정형외과 병동에서 다리 부러지고 머리 꿰매고 휠체어 타고 다니는 사람들만 같아도 새 인생 살 거라나 뭐라나 하면서요. 이렇게 현관 밖에 나와서 담배라도 피우는 우릴 보면 속으로 얼마나들 부러워하는지 모르겠어요. 참내.”


  내가 병원 이야기를 마치자, 사는 게 사는 것 아니라던 간부가 밥숟갈을 크게 떠서 힘차게 넣는 게 보였다. 하기야, 그는 어제 부처님 오신 날에도 근무를 했던 직원이긴 하다. 수출 물건 납기를 맞추기 위해서 휴일 근무조에 편성된 직원들을 다독이면서.


                                                         *

  듀어병(Dewar vessel)이라는 게 있다. 경질유리벽 사이를 진공으로 만들어 전도와 대류를 막고 안쪽의 유리에 은도금을 해서 복사열을 차단하는 것인데, 듀어라는 사람이 개량해서 그의 이름이 붙었다. 실험실에서 반응열의 정밀 측정 따위에 쓴다. 대형 고온용으로는 금속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흔히 쓰는 보온병은 그 원리를 이용해서 만든 생활용구다. 요즘에는 대부분 스테인리스를 사용해서 만든다. 

  듀어병이든 보온병이든 한 가지 특징이 있다. 그것은 이중벽 사이에 이뤄진 진공상태가 깨지면 본래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게 된다는 점이다. 유리가 깨지든, 이중 금속용기에 금이 가든, 이상이 생기면 그때부터는 그대로 외기에 노출된다. 단열/차단의 보호막이 단번에 사라져버린다. 내용물이 더 이상 보온되지 못하는 건 말할 나위없다.   

                                

  추운 겨울날 산행길에 보온병을 기울여 한잔 마시는 따끈한 커피의 맛. 그건 참으로 꿀맛이다. 언 손을 녹여주기도 하고, 빠진 기운을 돋궈주기도 한다. 커피 한 잔을 두고 동행과 번갈아 조금씩 나눠 마시는 그 맛. 그것은 나눔과 함께 하기의 동시 패션이기도 하다. 인생살이에서 맛보는 더부살이를 멀리 갈 것도 없이 바로 커피 한 잔의 돌려 마시기를 통해 절감하고 체감한다. 감동의 실물은 그 따끈한 커피 한 잔에 담겨있다.

  하지만, 그처럼 추운 산행길 같은 데서 소중하기만 한 보온병도 잘 깨진다. 자칫 실수로 그걸 깨뜨리거나 상하게 하는 일은 쉽고 잦다. 그리고. 보온병이 깨지고 나서야 혹한 속에서 마시는 한 잔의 따끈한 커피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뒤늦게 깨닫게 된다.


  우리네 인생살이도 마찬가지다. 건강한 근로에 대한 소중함은 비로소 그걸 상실했을 때 알게 된다. 건강에 금이 가서 날마다 일터로 나서던 그 발걸음을 애타게 그리워할 즈음에서야,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일상들이, 때로는 벗어나고 싶었던 굴레 같았던 그 삶의 하중이, 실은 우리를 안온하게 해주고 있던 것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것도 절실하고 간절하게.

  우리의 일상. 그 달갑지 않은 퇴적물이자 반복적 회귀 같기만 한 나날의 인생살이를 버텨주는 온갖 것들. 그것은 어쩌면 보온병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를, 우리의 인생살이를 따뜻하게 감싸고 지켜주는 말없는 파수병들의 군집체. 방호(防護) 클러스터의 셀 조각들. 그것들을 보온병처럼 조심을 더하여 조금은 소중하게 대해야 하지 않을까. 비록 그 파수병이 피곤해하기도 하고 힘겨워할 때도 드물지 않기는 하지만......

 

  우리들 인생은, 깨지기 전 소중하게 지켜내야 할 보온병이다. 내가 나에게, 그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May 2004]

                                                                      - 溫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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