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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정이에게 : 닮지 마라!

[내 글] 진담(眞談)

by 지구촌사람 2013. 5. 3. 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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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                민정이에게 : 닮지 마라!

                             - 감성적인 수필과 이지적인 수필 사이

 

                                                                         최 종 희

 

  민정아. 잘 지냈니? (참, 지철규라는 이름으로 며칠 전 내 글 얘기 올린 게, 민정이 너 맞지?)

 

  이렇게 네게 편지를 띄우게 된 건, 우선 내가 그 간단한 네 부탁을 이행하지 못해서다. 그 왜 네가 편지로 부탁했던 시디 있잖니? 그 damoim인가 뭔가에 네 이름을 추천만 하면 네가 받을 수 있다는 시디 말이다. 네 부탁대로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해봤는데, 클릭만 하면 자꾸만 '개체이동'이라는 말로 거부하더구나. 아마도, 내가 그 망(網)과 접속하지 않기 때문에 프로그램 백업이 안 되어 있는 모양이다.

  미안하구나. 하지만, 무슨 시딘지 모르지만, 추천인이 모자라서 그걸 못 받게 되었다면 나중에 선물 삼아 하나 사주마. 혹시 무슨 노래 같은 거니? 나야 노래는 아직도 테이프가 좋아서 테이프로 더 많고 듣고 지낸다마는.

 

  테이프 소리를 하니까, 참 작년 생각이 난다. 내 생일은 연말 가까이거나 더 늦으면 연초가 될 때도 있는데, 내 생일을 기억하는 몇몇 친구들이 나오라고 해서 밥을 사주더라. 그리고는 선물을 하겠다고 고르라고 해서 나는 대뜸 클론의 2집인가 3집을 얘기했지. 그것도 테이프로. (왜냐 하면 그때 내가 어쩌다 듣고 놀랐던 김태영이가 "돌아와"에 나오고 있었거든. 매스컴들이 그녀를 띄워 올리기 전이었어. 그리고, 나는 클론의 그 역동적인 댄스를 보고 있으면 막힌 게 뚫리는 것처럼 가슴이 다 후련해지거든. 난 클론의 팬이야. )

  그랬더니, 그 사람들이 뭐라는 줄 알아? 나보고 나잇값 좀 하래더라. 애들처럼 그 딴 거나 찾고 있으니 한심하다며 언제 철들겠느냐고 하더라. 그래서, 내킨 김에 철들면 뭐가 좋은데? 했지. 그랬더니, 철이 들면 자기네들처럼 의젓하게 무게를 잡게 된대나 어쩐대나. 그래서, 이번에는 내가 웃었지. 허리를 굽히지 않고는 선 채로 제 발등을 볼 수 없는 그 체구들에 담겨있을 무게의 내용물들이 갑자기 떠오르는 거 아니겠니? 하필 그때 말이다.

 

  그러고 보니, 또 떠오르는 게 있구나. 엊그제 네가 올린 거, “가끔 어떤 때는...” 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던 거 말이다. 그걸 보면서 민정이가 그래도 내 바람대로 크고 있구나 싶었다. 무슨 말이냐고? 조회수에 관련된 보통의 조바심과 친구들 따라하기에 후렴구처럼 드리워지는 어떤 그림자를 놓치지 않고 있는 게 대견한 생각이 들었다.

  그때 언뜻 네게 편지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른 사람에게는 몰라도 네게는 하릴없는 짓이 아닐 것 같았다. 게다가, 또 이런 말도 있어서 용기를 냈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최대의 신뢰는 충고해주는 신뢰다.” 영문학 최초이자 최고의 명문 수필가에 드는 베이컨이 <충고에 관하여>라는 글에서 한 말이야.

 

  단도직입하마. 나이 먹은 어른들이 하는 건 하나도 그대로 배우지 말아라. 지금처럼 그렇게 뒤집어보고 꼬집어보고 비틀어보고 하면서 네 스스로 어른의 세계를 만들어 나갔으면 한다. 절대로, 하나도, 베끼지 마라. 배울 건 하나도 없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배운다는 생각으로 좇다 보면 너만의 독창적인 세계 폭이 줄어든다. 네 스스로 깨쳐나가는 길 이상으로 좋은 게 없고, 그것이 두고두고 네게 가장 든든한 기반이 될 게다.

  그 대신 독서량 하나는 확실히 늘릴 걸 권한다. 책읽기니까 모니터로 읽는 건 당연히 제외된다. 그것만이 확실하게 엉터리 어른들 세계를 베끼지 않을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왜 그런 말을 하냐고? 그냥 아무 거나 떠오르는 대로 얘기해보마.

  나는 우리들 세대 이후는 사실 소모품 세대라는 생각을 한다. 노폐물 종족이지. 시대가 필요로 하는 새 살 돋기와는 까마득한 거리에 있고, 생산보다는 소비에 더 많이 기여하는 세대에 속한다고 생각해. 그래서 나는 2-30대의 젊음들을 무척이나 어렵게만 생각했어. 생산의 주역이자 시대의 든든한 버팀목이라고 말이야. 그런데... 이번 선거를 보고는 생각이 좀 흔들렸고, 게다가 시대의 글발들에서 가장 많이 대하게 되는 어떤 일정한 흐름을 어느 날 우연히 떠올리게 되어서는 고개를 많이 젓게 됐어.

 

  이 나라 유권자의 절반을 조금 넘길 정도인 51.4%에 해당한다는 그들의 기권 때문에 사상 최저의 투표율이 나왔지. 나는 이번 선거에서 세대별 투표 참여율을 꼭 알아내고 싶어. 그것이 <떠벌이 지수>일 수도 있으므로. 내가 뜬금없이 선거 얘기를 꺼내는 까닭도 바로 그 때문이야.

  그건 정치적 무관심이니 뭐니 하는 말과는 또 다른 문제야. 선거는 내키지 않으면 기권할 수도 있어. 그런데 말이다. 문제는 투표를 하지도 않은 선거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하는데, 투표소를 우회해서 놀러간 사람들이 훗날 보면 입에 더 게거품을 무는 거야. 뒷전의 주장만 왕성할 뿐 실천에서는 늘 한 발을 빼는 그 비겁들을 이제는 부끄러워할 줄도 몰라. 입과 손발의 불일치. 내가 은근히 기대하는 사람들에게 그걸 더 많이 읽어내게 되면서, 내 도리질 횟수가 늘고 있어.

 

  그뿐만이 아니지. 이 나라에서 가장 지식 수준이 높은 걸 생각해 보면 그건 놀랍게도 고3년생이야. 고교보다 높은 수준일 듯한 대학에 입학한 이후로는 그 지식이라는 게 실용과 합목적적 수단으로 변질되기 시작하면서 그 절대량은 감량의 내리막길로 치닫는 거야.

  취직하는 사람들 말고, 교수들도 마찬가지야. 어느 교수의 고백을 들으니 자기가 이십 년 가까이 읽은 책이 이천 권이 안 된다고 하더군. 그 사람은 그래도 다른 교수들보다도 공부에 조금은 더 부지런한 편인데도 말이야. (그래도 그건 사흘에 한 권 꼴로 읽은 셈이니까 어떻게 보면 적은 양은 아니야.)

 

  믿어지지 않지? 하지만, 사실이야. 우리나라에서 다독이라면 1-2위를 다투는 분으로 김윤식 선생님이 있는데 그 분도 만 권 안팎일 거라고 했어. 한 장(章) 정도 들춰보고 마는 발췌독 따위는 제외하고서 말이지.

  그런 예는 많아. 우리나라 삼십대 기업군에 드는 두 그룹이 사오 년 전에 직원들의 독서량 조사를 했는데, 결과는 놀라울 정도야. 업무관련 서적을 빼고 읽는 책이 한 해에 한 권 정도밖에 나오지 않았어. 믿어지지 않겠지만 그게 사실이야. 그나마 이십대 여성들의 소설책 읽는 양이 그 수치를 그나마도 유지해 준 거야. 대학 진학과 취업 성공의 사례로만 보아서는 이 나라의 상층부 지식군 10%내에 들어가는 사람들의 현주소이기도 해.

 

  그럴 정도이니, 모두들 자신의 것과 더 큰 외부의 세계의 것들과 비교해서 생각해보는 기회들이 적어지는 거야. 게다가 흔히들 사색하는 일로, 더 정확히 말하면 자신의 정서를 부풀리는 것으로 사색한다고 착각하면서, 독서 자체를 아예 도외시하기도 하고. 계속 배우고 깨우쳐 나가는 일과는 담을 쌓고 지내는 거지.

  그러고 보면 내가 이 나라에서 잡문이라도 긁적이는 사람들의 상당수가 저절로 '이상한 하운소월파'(霞雲逍月派)에 물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던 건 전혀 이유가 없는 것도 아니야. 무슨 말이냐고? 그건 이상(李箱) + 한하운(韓何雲) + (김)소월을 합한 뒤 다시 풀어놓은 말이야.

 

  이상식의 돌출과 기행, 한하운 선생의 한풀이 정서와 소월식의 낭만적 음유를 겉으로만 추종하여, 개인사적인 것들을 적당히 갈무리해서 주변의 자연에 자신의 정서를 슬쩍 내던져 보면서 떠오르는 감흥들을 적어보는 일. 그런 거지. 그 분들의 진짜 깊이에 이르는 일을 게을리한 채로 말이야.

  깊이의 문제. 그건 다른 건 몰라도 독서와 한 뿌리를 하고 있는 많은 줄기들의 합체일 거라고 생각해. 독서가 최소한 그 든든한 줄기의 하나를 형성할 거라는 믿음을 나는 가지고 있어. 본래 사색에 빼어나서 전혀 독서의 도움이 없이도 일정한 깊이에 도달할 수 있는 특출한 사람을 빼고는 말이지. 훌륭한 독서가가 모두다 훌륭한 작가가 되는 건 아니지만, 빼어난 작가들은 예외 없이 훌륭한 독서가들이거든.

 

  멀리 갈 것도 없어. 내 것은 잡문이라고 한 발 물러서고 싶은 수필 이야기만 해도 그래. (‘잡문’이라 이름 지은 것은, 나는 그걸 쓰면서 이 나라에서 유력하게 통용되는 감성 지향의 수필에 끼어들고 싶은 만큼 정성 들여 ‘아름답게’ 쓰려 하지 않기 때문이야.)

  수필(에세이)이라는 최초의 이름을 장르 명칭으로 달게 한 건 알다시피 몽테뉴의 수상록이야. 1580년에 간행된 책이지. 그 책의 서문을 보면 이런 말이 있어.

 

  "이 글이 세상 사람들의 호의를 사려는 의도에서 씌어졌다면, 나는 좀 더 나 자신을 장식하고 조심스럽게 검토하여 세상에 내보냈을 것이다. 여러분은 여기서 생긴 그대로의 나를, 자연스럽고 평범하고 꾸밈이 없는 아무 것도 아닌 나 자신을 보아주기 바란다."

 

  그러나, 그의 글을 읽어보면 왜 그의 책이 최초의 수필집이라는 독보적 분야를 확립하게 되었는지 이해가 갈 정도로 훌륭한 글들임을 알 수 있어. 큰 그릇과 인간미, 그 두 가지가 내가 그에게서 배운 점이야. 그리고 이 구절은 내가 수필이라는 걸 본격적으로 긁적이기 시작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글과 대비되어 마음이 흔들릴 때 아주 크게 도움을 받은 말이기도 해.

  그뿐이 아니야. 1940년대에 발간되어 그 뒤로 이 나라의 모든 문장작법 교과서 저자들이 참고하지 않은 이가 하나도 없다는 명저로 꼽히는 이태준의 <문장강화>를 보면 수필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도 있어.

 

  "누구에게 있어서나 수필은 자기의 심적 나체다. 그러니까 수필을 쓰려면 먼저 '자기의 풍부'가 있어야 하고 '자기의 미'가 있어야 할 것이다. 세사(世事) 만반에 통효(通曉)해서 어떤 사물에 부딪치든 정당한 견해에 빨라야 할 것이요 정당한 견해에서 한 걸음 나아가 관찰에서나, 표현에서나 독특한 자기 스타일을 가져야 할 것이다."

 

  여기서, 모든 것을 거친 후에 자기 스타일을 가져야 할 터인데도, 그것부터 고착시키는 바람에 읽기를 게을리 하는 어른들이 숱하게 많다는 걸 꼭 얘기하고 싶구나.

  그리고, 젊은 시절에 꼭 한번씩은 거치기 마련인 쇼펜하우어도 그렇다. 말로만 (아니면 다이제스트식 겉핥기로) 그를 지나온 사람들은 무조건 염세주의자로만 떠올리지만, 그의 실생활은 전혀 그와는 거리가 멀었어. 맛있는 식사를 유난히 밝혔고, 세상 사람들의 자신에 대한 평판에 얼마나 신경을 썼던지 그걸 조사해서 보고하는 통신원까지 뒀을 정도로, 그는 세상살이에 탐착(貪着)하고 지낸 사람이야. 그런 사실들도 그와 동시대가 아닌 우리들로서는 독서로서만 알아낼 수 있는 일들이다.

 

  기왕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수필 쓰기에 관심이 있거든 지금까지 이야기한 사람들과 에머슨의 수필집, 이양하, 피천득, 그리고 이어령, 일본 것으로는 오에 겐자부로님의 것이라도 한번 꼭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구나.

  자아. 아제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너끈히 짐작이 되었으리라 믿는다. 결코 어른들의 외양을 섣불리 본뜨지도 말고 그 얇은 안도 본뜨지 마라. 배움이 막히거든 책을 보거라.

 

  내가 보기에 많은 경우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얇아지기라고 해야겠더라. 고교시절 이후로 곶감 빼먹듯 빼먹고 껍데기만 남은 지식처럼 말이다. 그나마도 돌보지 않아서 먼지투성이인 게 태반이긴 하지만.

  그리고, 아무리 나이를 먹더라도 쓸데없이 무게를 늘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명예욕, 재물욕과 소유욕으로 덕지덕지 땟국을 뒤집어쓰고 배 안에는 오물로 변한 집착들을 가득 담은 채, 사시로 세상을 흘금거리며 자신의 불행만을 키워올리는 그런 헛된 짓에 매달릴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삐 살았으면 좋겠구나.

 

  늘 재미있게 살아라. 집착을 덜어내면 세상은 즐거운 일들 천지다. 작은 즐거움에 만족하는 사이에 자신의 행복을 확신하게 되고, 자신이 행복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행복도 보이기 때문에 저절로 챙겨주게 된다. 그렇게 해서 늘 싱글거리며 살아라. 정 할 일이 없으면 책이라도 읽으면서 말이다.

  정색하지 않고 나오는 대로 썼으니 너도 마음 편하게 그냥 읽어주었으면 좋겠구나. 황사 조심하거라. [15/03/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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