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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사일사)놓친 고기가 크다?

[1事1思] 단상(短想)

by 지구촌사람 2012. 10. 16. 0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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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놓친 고기가 크다?

 

  10여 년 정도 낚시를 해본 적이 있다. 바다낚시. 낚시꾼들 중에는 붕어 손맛이 단연 최고라고 하는 이들이 많지만 나는 그런 경지에까지는 이르지 못 하는지라, 민물낚시는 아예 건너뛴다. 민물고기 요리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도 있지만, 뭣보다도 강태공의 망세월(望歲月)이 재미없어서다. 낚시란 수고한 만치 뭐든 좀 잡혀야 신이 나는 법. 시간 투자를 했으면 그 대가는 건져야 하지 않겠는가.

  바다낚시를 하다 보면 릴이 파손될 정도로 고기와의 심한 몸싸움을 하게도 되고, 어느 때는 고기가 낚싯대를 통째로 끌고 달아날 때도 있다. 물론 멍청하고 게으른 나 같은 낚시꾼들에게나 일어나는 일이지만. 그럴 때면 대놓고 하는 말. “아, 그놈이 얼마나 크던지... 그놈 머리통이 내 머리통만 하더라니까...” 그러다가 어느 때는 사람보다도 더 큰 녀석으로 발전할 때도 있다. 이름 하여, 낚시꾼들의 공통 지병인 ‘놓친 고기는 죄다 크다’ 증상.

 

                                                       *

  젊은 시절 바깥 살이를 할 때다. 그곳에서 다시 이 나라 저 나라로 소방수 노릇을 하느라 파견을 다닌 적도 있는데, 중동의 어느 나라에 잠시 머물고 있을 때였다.

  그곳의 우리 직원들은 주말이면 바다낚시를 했다. 스노클과 물안경만 끼고 작살을 써서 고기를 잡기도 했지만, 그것도 재미없다면서 시작한 게 상어잡이. 나도 꼈다.

 

  사실 상어잡이는 낚시라고 할 수도 없었다. 낚시에 미끼를 끼어 던지고 나서, 실컷 놀다가 낚싯줄을 걸어 매 둔 쇠 막대기가 쓰러지면서 거기에 매단 방울 소리가 요란해지면 그때서야 슬슬 낚싯줄을 잡아당기면 되는 일이었으므로.

  낚시질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건, 아이 주먹만 한 갈고리 모양의 낚시 바늘에다 닭 반 마리 정도를 잘 꿰어서 매단 뒤, 그걸 힘차게 빙빙 돌리다가 한껏 멀리 던지는 과정, 그때뿐이었다. 낚시 바늘을 연결한 최초의 연결 부위가 2~3미터 정도는 아주 단단한 쇠줄이라는 것만, 일반 낚시와 달랐다. 물론 바라쿠다와 같은, 이가 날카로운 대형 어류를 잡을 때도 그런 걸 쓰긴 하지만.

 

  상어. 녀석은 우리가 흔히 상상하듯 아주 무섭고 힘세고 한 것들만은 아니다. 그곳 연안에서 서식하는 녀석들의 대부분은 ‘순디기(順德-)’라고 해야 할 정도로, 아주 순하디 순했다. 뭍으로 끌려나오는 과정에서 힘 한번 쓰는 일조차 제대로 없을 정도로.

  일단 낚시 갈고리에 꿰이기만 하면, 그냥 나왔다. 낚싯줄을 당기기만 하면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고 순순히 끌려나오곤 해서, 나는 속으로 무슨 상어가 이리 매가리가 없이 힘 하나도 못 쓰는가 싶었다. 하기야, 상어는 알고 보면 불쌍하긴 하다. 녀석에겐 부레가 없다. 하여, 잠을 잘 때도 늘 지느러미를 움직여 줘야 한다. 가라앉지 않기 위해서. 떠 있기 위해서.

 

  처음엔 1.5미터 남짓한 크기에 놀랐다. 하지만, 그런 녀석이 그처럼 순순히 끌려나오는 걸 보고는 그 다음부터는 놀라지도 않았다. 그걸 어떻게 하나 싶었더니, 그곳 직원들은 잡은 상어를 손도 안 댄 채 곧장 픽업트럭에 실었다. 주방장에게 갖다 준다면서.

  맨 처음 잡았을 땐 상어 회맛이 궁금해서 조금 먹어보기도 했지만, 아무 맛도 없더란다. 그래서, 상어지느러미 요리용으로나 쓰려고 잡는다나.

 

  나도 끼어들었던 상어잡이 현장은 아주 심심했다. 그리고 그렇게 그날 잡힌 상어는 내게 더욱 심심한 기억을 남겼다. 그 다음날 쓰레기장으로 옮겨졌기 때문이다.

  잡은 상어를 차에 싣고 간 직원들은 그걸 주방으로 갖고 갔는데, 그날따라 일이 바쁜 주방 직원들이 그걸 그냥 주방 입구 바깥에 내려놓고 가라고 했다던가. 낮 기온이 50도 근방에 육박하는 곳이었다. 하룻밤을 밖에서 지낸 상어는 그 다음날 입 근처에서부터 썩은 냄새를 풍겼고, 주방장은 즉시 쓰레기장으로 옮기라고 지시했다.

 

  내가 처음 본 ‘큰 고기(Big Fish)’는 내게 아무런 뚜렷한 흔적을 남기지 않고, 그렇게 기억 속에 묻혔다.

 

                                                         *

  지난 일요일. 정확히 한 달 만에 제대로 된 휴식 시간을 가졌다. 막걸리 한 병을 사다가 울 집 의 처녀 아줌마 싱글이와 대작을 했다. 안주의 일부만 그녀에게 건네면서, 나는 케이블 티브이 영화를 봤다. 영화 제목은 Big Fish.

 

  시작한 지 조금 지났는지, 처음에 내겐 그 영화가 에드워드 블룸이라는 청년이 샌드라 템플튼이라는 젊은 아가씨에게 기를 쓰고 매달리는 그런 것으로만 보였다. 이미 약혼자가 있는 여인에게 도전해서 끝내 그녀를 쟁취하는, 그런 열정파 청년의 이야기로.

  그런데 계속 해서 지켜보고 있자, 영화는 엉뚱한 쪽으로 흘러갔다. 젊은 에드워드로 출연한 배우의 얼굴이 앨버트 피니로 바뀌면서다. 말할 때마다 턱살의 움직임이 또 다른 이야기를 전하곤 하는 앨버트의 연기와 구변 좋은 허풍쟁이 아빠의 배역은 아주 딱이었다.

 

  허풍쟁이로만 여겨졌던 아빠의 진실이 사실로 밝혀지는 장면. 아마 그게 그 영화의 절정이 아니었나 싶다. 또 마지막 장면으로 처리된, 집안 수영장 바닥을 유유히 유영하는 대형 물고기의 영상은 그 영화에 어른용 세미 판타지 영화라는 꼬리표를 달아도 될 정도로, 관객들에게 또렷이 기억될 마침표로 아주 적절했고 유효했다.

 

                                                             *

  영화를 다 보고 났을 때다. 뜬금없이 내게 떠오른 생각은 낚시꾼들의 기본적인 뻥이라고 할 수 있는 그 ‘놓친 고기’였다. ‘놓친 고기는 크다’라는 그 말.

  잡고 싶었지만 잡지 못한 아쉬움, 실패에 대한 면구스러움, 그 과정에서 숨기거나 덜어내고만 싶은 일말의 자책감, 그리고 그런 모든 것들을 말끔히 떨어내지 못 하는 미련...... 그런 것들이 그 말에 아쉬움과 후회의 두겁을 번갈아 계속 씌워오지 않았을까.

 

  이제는 내게서 멀어진 바다낚시의 추억. 그와 함께, ‘놓친 고기는 크다’라는 그 말도 이제는 내게 해당되지 않는다. 한때는 나 역시 그런 말을 나도 모르게 버릇처럼 떠벌이곤 했지만, 이젠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할 기회도 없지만, 할 필요도 없다.

  이젠 명토 박아 말할 수 있다. 상어잡이 낚시에서처럼, 내가 잡은 고기가 젤 컸다고. 지금 잡고 있는 고기가 내게는 제일 확실하게 크다고. 놓친 고기 중에 큰 고기는 하나도 없었다고.

 

  엊그제, Big Fish라는 제목의 영화를 보면서 떠오른 생각이다. 새삼 살갑고 반갑게.

                                                                                                  [Oct.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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