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과 여 : '느낀다'와 '생각한다'
여성학 관련 교재로 우리나라에서도 꽤 인기가 높은 책자 중에 줄리아 우드의 <Gendered Lives>가 있다. 저자는 노스캐롤라이나대학교의 소통학(Communication Studies) 교수. 그 우리말 번역서에는 <젠더에 갇힌 삶>이라는 아주 멋진, 본질을 꿰뚫은, 제목을 달고 있어서 책방 서가에서 그걸 대하자, 그 멋진 번역에 이끌려 나도 모르게 손이 나갔던 책이다.
그 안에 인용된 만화 중의 하나에 이런 부부간의 대화가 있다.
-부인 : 여보. 남자들은 왜 친구들끼리 만나도 맨날 스포츠나 사업 얘기만 해요? 그런 건 처음 보는 사람들하고도 얘기할 수 있는 거잖아요. 내가 어떻게 느끼는지 하는 그런 얘기들은 안 하고.
-남편 : 마님,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요? 남자들도 우리들 느낌에 대해서 얘기해. 우리가 스포츠나 사업에 대해서 어떻게 느끼는지를 얘기한다고.
해설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특히, 이 글을 읽는 남성들을 위해서. 짧게 말하자면, 여성은 똑같은 걸 대해도 그걸 느낌으로, 느낌 우선으로, 처리하거나 바라본다는 뜻이다. 예컨대, 같은 직장으로 같은 시간대에 출퇴근하는 부부들이 똑같은 내용을 일기 삼아 적더라도, 그 시각(視覺)은 아래와 같이 전혀 다를 정도로.
남편의 마지막은, “같은 시각에 집으로 돌아와 아내가 집에서 준비해주는 저녁을 아주 맛있게 먹었다. 아직은 쓸 만한 몸매여서 그날따라 아내가 더 이뻐보였다.”로 끝난다. 아내의 일기는 이렇게 끝난다. “남편과 같은 시각에 집에 도착. 때마침 보모가 그 시각까지 머물러 주어서 고마웠다. 그런 날은 아이들이 일찍 잠자리에 든다. 보모와 신나게 노느라 피곤해서. 내가 아이들에게 집에서 엄마용품으로 덜 쓰이게 되는 날, 덜 부대끼는 날은 샤워 시간이 더 기쁘다. 난 나쁜 엄마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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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급쟁이 시절. 미국 지역에는 여성 지점장들이 유난히 많았다. 대체로 착한(?) 편이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은 이른바 송곳형. 날카롭고 까다로웠다. 그리고 사고도 가장 많았는데, 그것도 대형사고일 때가 잦았다.
그녀와의 이메일 교신에서는 신경을 더 썼다. 업무 메일일수록 ‘어’ 다르고 ‘아’ 다르기 마련인지라.
그러다가 한 가지를 발견했다. 그녀는 I think나 I guess로 써도 될 곳에서 유달리 I feel을 많이 썼다. 하기야, 요즘 I feel은 남녀 불문하고 흔히 쓰는 말이긴 하다. I think나 I guess는 아무래도 말하는 이의 생각을 일방적으로 전하거나 강요하는 것이 될 수도 있는 까닭에 그 대체용으로 많이들 쓴다.
하지만, 여인은 자신이 강조하고 싶은 것이거나 자신의 뜻을 우회적으로 관철시키고자 할 때는 유난히 그 표현을 애용했다.
나도 그 점에 착안했다. 대형사고 중의 하나를 처리하면서 그녀의 그 느낌 표현에 120% 공감한다는 말로 시작했다. 그 결과는 성공이었다. (하기야, 그녀는 맨 처음 나와 한자리에서 식사를 하게 되자, 마돈나와 동갑이면서(58년생) 같은 대학을(미시건대) 나왔고, 마돈나는 겨우 160센티를 간신히 넘긴 키지만 자신은 정확하게 5피트 6인치에다가, 마돈나의 금발은 염색이 의심스럽지만 자신의 그것은 자연산이라는 둥, 묻지도 않은 나이며 용모에 대해서 아주 자랑스럽게 늘어놓았다. 심하게 말하자면 자기도취형이랄 정도로.)
그 뒤로는 내가 먼저 I feel을 애용했다. 그녀에게는 특히 신경을 써서. 그 뒤로 여인은 내게 아주 잘 했다. 다른 여성 지점장들이 드러내놓고 질투하거나, 혹은 공개적으로- 매년 열리는 연말 단합대회 겸 결산 모임 같은 데에서- 애인이라고 선포할 정도로. 여인은 유태계의 회장과 출장 여행을 많이 다니는 사이였음에도, 사람들은 재미 삼아 우리 둘을 그렇게 입방아에 올리곤 했다. 연말 모임에 그녀와 나, 회장을 한 테이블에 배치해놓고선 관찰할 정도로 짓궂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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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전, 여성 전용 사이트에서 상담 봉사를 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당찬 여성 하나가 이런 취지로 하소연(?)을 해왔다.
... 결혼을 목적으로 동거하고 있는 30대의 전문직 여성입니다. 1년 정도 함께 지내보고 결혼하려고 작정했는데, 1년이 거의 다 되어 갑니다. 그런데, 요즘 저희는 싸움이 잦습니다. 아주 사소한 것들로 서로 충돌합니다. 어제도 말씨름을 좀 했습니다. 지금은 무엇 때문에 그 말씨름이 시작되었는지 기억도 잘 안 날 정도입니다. 싸운 뒤 보여준 남친의 태도 때문에 너무 화가 많이 나서요. 그동안에도 싸우고 나면 그 뒤로 제 기분을 전혀 챙겨주지 않는 남친의 습관 때문에 저는 갈수록 화가 더 나는데, 어제는 아 글쎄 남친이 컴 앞에 앉아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화가 나서 한 마디 했더니만, 학위 논문 마감은 지켜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하더군요.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논문 얘기가 나올 수 있나요? 저보다도 논문이 더 소중한가요? 그런 남친을 바라보며 이번 동거는 그야말로 시험 동거로 끝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더욱 확실하게 몰려왔습니다. 제 판단이 옳은 거지요?...
부부 싸움 뒤, 문을 닫고 자기 방에서 일하고 있는 남편. 그런 걸 보는 여인들은 대체로 두 가지 생각을 하는 것 같다. 그래, 내 보는 앞에서 문을 닫아걸었다 이거지? 내 꼴이 더 이상 보기 싫다 그 말이지? 그래, 싸우고 나서도 일하는 걸 보니, 나보다도 그깟 일이 더 소중하다 이거지?
하지만, 남성 쪽의 진실을 밝히자면 이렇다. 문을 ‘닫아걸’지는 않았다. 그냥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면서 문이 닫힌 것일 뿐이다. ‘굳이 문을 열어놓는’ 그런 행위를 하지 않은 채, 늘 하던 그대로 방문을 닫았을 뿐인데도 여성의 눈에는(느낌상으로는) 방문을 닫아 건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부분인 일하기. 그것은 그 남성 쪽에서는 화가 나거나 했을 때 그걸 소화시키는 방편의 하나로 일에 몰두하여 화를 식히곤 했던 때문이었다. 즉, 싸움을 더 키우지 않기 위해서, 화를 삭이기 위해서 남성은 일을 했던 것. 일이 아내보다 더 소중하거나 해서 한 게 결코 아니었다.
나는 질문을 해온 전문직 여성에게 위와 같은 취지로 답변을 했다. 그리곤 얼마 후, 결혼식 날짜를 잡았다는 소식을 공개 게시판에서 대할 수 있었다.
*
지난 수요일, 딸랑 하나 있는 ‘딸랑구’의 생일날 일이다. 늘 하듯 새벽에 일어나 내 방으로 건너가다가 거실 탁상 위에 펼쳐져 있는 학교 과제물을 봤다. 대형 스티로폼 한 장을 가득 채운 ‘남(男)과 여(女)의 감정 차이’.
사실 그런 내용은 전문가들이 달려들어도 책 몇 권은 좋이 채워질 그런 대형 과제인데도 제법 야무지게 해낸 듯했다. 물론 제 어미와의 합작품일 게 분명하지만, 너비와 깊이가 제법 알찼다.
그 중 하나. <남녀의 차이점에 관한 유머>라는 란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여자는 과거를 '파헤치며' 산다.
-남자는 미래를 '소망하면서' 산다.
그런데, 이걸 울 덜렁이 딸랑구는 아래와 같이 적어놓고 있었다.
-여자는 과거를 ‘파해치고’ 산다.
-남자는 미래를 ‘소망하면’ 산다.
과거를 그냥 파는(dig) 게 아니라 '파서는 그걸 뜯어보면서 해(害)쳐?' 남자가 미래를 소망하면 살고, 소망하지 않으면 죽어?? (밑줄과 따옴표 처리는 내가 덧댄 것.)
그 바람에 난 이른 새벽부터 웃음보를 터뜨렸다. <유머>라는 제목에 걸맞게, 일단 웃기는 데는 성공한 셈이었다. 그리고, 나는 잠시 후 정색했다.
과거는 항상 돌아보는 순간 느낌의 그림자를 달고 다닌다. 그 길이가 길거나 짧은 것, 혹은 짙거나 옅은 것은 그걸 떠올리는 자의 몫이다. 과거의 회억(懷憶)은 지난 시간에 현재의 감정을 덧입히는 일. 즐길 일이지, 새삼 생채기로 끌어안을 일은 아니다. 그런데도 실상은 그렇지가 않다. 더 많게는 아문 상처의 딱지를 떼어내어 최소한 생채기로 만들어, 온몸의 신경들을 일순간이라도 기립시키곤 한다. 그림자의 색깔이 짙으면 짙을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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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따금 매스컴의 일상사 뉴스를 때하면서 유독 가슴 쓰려 할 때가 있다. 이혼한 전처의 집 대문을 발길로 차고 들어가, 전처와 그 어머니나 아버지, 혹은 그 집 식구들을 해쳤다는 뉴스들이다. 몇 년 전 충북인가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고, 얼마 전에는 70대 영감님조차도 그런 짓을 했다.
이론만으로 보자면, 이혼한 전처는 남이다. 더구나 이혼까지 했으면 깨끗이 잊어야 한다. 사내란 작자들이 전처 집으로 가서 행패를 부리다 못해, 살인까지 하는 건 참으로 치졸하기 짝이 없는, 사내답지 못한 이른바 ‘더티한’ 짓이다. 못 잊을 정도면 이혼을 하질 말던가. 어찌 보면 그런 짓은 마치 제 먹기는 싫어도 남 주기는 싫다는 심보가 아닌가?
그런데 그런 사달이 나는 이면에는 꼭 술이란 녀석이 있다. 모두들 술을 먹고, 그 술을 마시면서 떠오른 과거에의 아픈 그림들에 목줄이 꿰어 그런 짓들을 한다. 사내들에게 술은 미래를 향한 보양제가 아니라 대체로 과거로의 회귀를 부추기는, 아주 ‘나쁜 넘’이다. 실패의 상흔이 많은 이들일수록 더 그렇다.
한편 여인들에게 술은 가까운 미래에로의 감정 이입을 더 많이 부추긴다. 지금 그녀 앞에서 함께 하고 있는 이와의 한잔 건배는 현재의 달콤한/따뜻한 기분을 조금이라도 더 미래를 향해 연장시키려는 행위일 때가 그래서 더 많다. 여인은 지금의 기분이 좋아서, 그 감정을 조금이라도 더 연장하거나 그런 미래를 확실히 껴안기 위해서 한잔 건배를 힘차게 할 때가 많다.
우리말 속담에, ‘품마다 사랑’이라는 말이 있다. 새로운 사람이 생기면 (또) 새로운 사랑이 아주 쉽게 시작되기 마련이라는 말이다. 대체로 여인들에게 구전되어온 속담인데, 여인들에게 숨겨져 있는 놀라운 자생력 중의 하나가 바로 이것이기도 하다. 여인들은 남자에게서 돌아서면 그날로 그를 잊는 데는 남자들보다 훨씬 우수하다. 돌아선 그 다음날로 새 남자를 찾아나서는 그런 여인도 실제로 봤다.
첫사랑의 기억은 사실 사내들이 평생 달고 산다. 일상사에서는 잊고 지내다가도 어느 날 먼 시간들을 떠올리는 시간이면, 가장 선명한 그림 중의 하나로 첫사랑을 떠올린다. 하지만, 여인들의 경우는 대체로 흐릿하다. 지금 그녀를 확실하게 사랑해주는 사람이 그녀 옆에 있다면 그녀에게 첫사랑이 떠오를 확률은 제로다. 꽝이다. 그녀의 옆구리가 시리기 전에는, 첫사랑의 존재 자체가 부인된다.
술 먹고 전처 집을 찾아가 행패를 부리거나 살인까지 저지르는 사내들. 하는 짓만으로 보자면 참으로 저열해서 사내 축에 끼어주고 싶은 맘이 들지 않다가도, 지난 과거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허우적거리는 사내들을 보면 짠해온다. 그런 사내들에게 ‘품마다 사랑’이라는 말을 꺼냈다간, 뺨 몇 대 얻어맞는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자기를 어떻게 보느냐며, 종로에서 맞은 뺨 한강에서 푸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여인들에게 그런 말을 꺼내면 어떨까. 대체로는 눈을 반짝인다. 뒷전에서라도. 그리곤 그 기분을 즐긴다. 잠시라도. 그러니, 뺨을 얻어맞는 일은 절대로 생기지 않는다. 여인에게는 그런 말 자체가 위안이기 때문이다. 여인은 자신의 감정에 동조하거나 위안하는 이 앞에서 적개심을 내려놓는다.
*
글 마무리를 짓자. 미래를 소망하는 것. 미래의 그림을 아주 확실하게 그리는 것. 참으로 좋은 일이다. 그리고 그건 사내들만의 전용물은 아니다. 절대로 그리 되어서도 안 된다. 그리고 여성의 심정적 붓질이 거기에 가세될 때, 제대로 된 그림이 된다. 사내들의 미래란 대체로 단색으로 된 무미건조한 것일 때가 많은데, 여성들은 거기에 색깔을 입히고 물기를 더한다. 미래의 소망이 때깔이 날 뿐만 아니라 촉촉해지면서 생명력을 뽐내게 된다.
그게 우리가 소망하는 현재와 미래다. 아니 소망해야 할 그림이다. 남녀 편 가르기나, 고정된 시선, 심지어는 적대적 대치 관계로까지 부풀리는 건 참으로 어리석어서 부끄러운 짓이다.
기분이 상하더라도, 나보다 일이 더 소중해? 하고 묻지 말자. 물으면서도 내가 왜 이런 바보 같은 걸 묻지 하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페이지가 다른 질문이란 건 당사자도 뻔히 알고 있지 않은가. 기분의 앞뒤로 조금만 생각을 매달자.
남성들도 그런 질문이 해답 없는 물음이란 걸 안다. 그럴 때는 현명한 바보가 되면 된다. 빳빳한 논리보다는 심정을, 감정을, 먼저 깔아보자. 내 평생 파트너와 기분을 함께 해보는 거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바보가 되는 일도 없고 매달고 다니는 덜렁이 물건이 떨어져 나가는 것도 아니다. 바로 이렇게 간단한 말로.
- 아. 그거야 당근, 그대가 더 소중합죠...
*
아이들은 보고 배우며 자라기 마련. 누굴 닮았을지 묻지 않아도 뻔한 울 딸랑구의 덜렁이 유머를 대하고 덜렁덜렁 매달아보는 짧은 생각들.
거기에 짠한 마음과 답답함도 같이 매달린다. 그걸 같이 덜어내고 싶다. 같이 흔들어 털어내고 싶다. 해답이 될지는 모르지만, 삶이란 해답 없는 해답집을 그래도 계속 뒤적이며 애를 써보는 그런 과정이기도 하잖는가. 이 잡문을 긁적이는 소이연이기도 하다. [28 Oct. 2012]
* 아무래도 글 속에 나온 금발 여인에 관해서 뒷말들이(궁금증) 많지 싶다. 남녀 불문하고.
아래에 실물을 보인다. 4년 전의 모습이다. 이쁘게 안 찍으면 죽인다고(?) 내게 협박까지 하면 서 찍으라고 강요해서 찍은 사진인데, 자기도취에 빠질 권리(?)가 있는 독신 미인. 둘이 함께 찍힌 (남들이 찍어준) 사진도 있지만, 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라도 그건 건너뛴다. 하하하.
장소는 해물식당가로 유명한 오우크랜드의 Fish Market. 갑각류를 좋아하는 내 식성을 아는지라 어느 일욜, 피곤해서 뻗어있는데 아침부터 쳐들어와서는 나를 끌고 나와서 델고 간 곳. 실리콘 밸리에서도 저기로 해물 먹으러 나오는 이들, 적지 않게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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