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한 마디의 상처
최 종 희
내게 속내를 다 터놓고 편하게 지내는 손아래 사람 중에 먼 인척 하나가 있다. 그는 이종사촌의 남편이다. 흔히 하듯, 거기에 촌수 따위를 개입시키자면 거의 남이라고 해도 좋을 사람인데도 내게는 징그러울 정도로 곰살갑게 군다. 형님이랬다, 선배님이랬다, 호칭도 오락가락이다.
그는 재혼이다. 그와의 결혼을 작심하기 전, 그를 처음 내게 인사시킬 겸해서 데려왔을 때, 이종동생은 내게 귓속말로 말했다. “오빠의 심사 결과에 따를게.”
사내들 둘만 있게 되었을 때, 나는 그에게 이혼 사유를 물었다.
“전처가 저와 언쟁하던 중, 자기가 여유 있는 집안 출신이었거나 돈 좀 있었다면, 애당초 저와 결혼하지 않았을 거라고 하더만요. 그 사람이 평소에도 남들 기준을 따라 잡지 못해 항상 얼굴이 편치 못한 사람이어서 어느 정도 속물 성향은 자동적으로 판독되는 편이었지만, 정말이지 저에게 그런 소리까지 할 줄은 몰랐어요. 우리 부부관계가 자주 찌걱거리긴 했지만, 내가 월급쟁이로 그런 대로 먹고 살 만은 했는데도 그런 말을 대놓고 하더군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어떻게든 봉합해서 살아보려고 마음먹고 있던 내가 그처럼 쪼다 같을 수가 없어서요.”
그의 말에 나는 머리만 조금 주억거렸고, 대꾸 대신에 그의 취미나 꿈 등을 물었다. 특히, 정년퇴직을 하게 되면 그 후에 뭘 하려고 하느냐, 준비하고 있는 게 뭐냐... 등등을.
그 뒤, 내가 매긴 점수(?)를 은근히 학수고대하고 있던 여동생에게 말했다. “응. 그 친구 너하고 딱이더라. 결혼해도 되겠어.”
요즘 두 사람은 어디든 함께 다닌다. 이제는 결혼 10년도 훨씬 더 넘겨서 물릴(?) 법도 하건만, 징그럽게 손까지 잡고서. 산과 들판 쏘다니고, 자전거 타고 놀러 다니고, 부부 대항전 배드민턴 대회에도 참가하고... 방학 특강 서예반 출석률이 100%인데, 다음 방학 때에는 포크 기타 강습에도 등록하겠단다.
50대 중반을 넘어선 부부들치고는 참 아름답다.
*
얼마 전 일이다. 전 직장의 조무래기(?) 둘이 찾아왔다. 동료 부장이자 내게 ‘쐬주’를 가르치려 무진 애를 썼던 나의 주사부(酒師傅)가 세상을 뜬 일로, 장례식장에서 18년 만에 전 직장 사람들과 해후했는데, 그때 반갑게 악수를 하면서, ‘꼭 한번 찾아뵙겠습니다’ 했던 녀석들.
나는 그때 그냥 지나가는 말로만 여겼는데, 기어코 내 시간을 내달라면서 쳐들어 온 것이었다.
나이가 각각 40대와 50대의 중반에 들어선 그들을 조무래기로 표현한 건, 예전의 내 시각에서였다. 그 중 연장자인 녀석이 58년생이었는데 당시 주임으로 대리 진급에서 밀리고 있던 터였고, 또 다른 녀석은 20대 후반으로 입사한 지 두어 해나 지났을까 했었으니, 부서장이던 내게는 그 정도로만 보였던 것.
그 중 연장자 격인 친구는 내가 좀 신경을 썼던 편이었다. 내가 졸지에 친노조(親勞組) 간부로 몰리고도 괴상하게 나만 홀로 승진을 하여 외국인 전용 부서로 영전했을 때 나는 자원 퇴사를 선택했고, 그의 뒷배 보아주기를 주사부에게 부탁했다. 그 덕분에 그 친구는 얼마 안 있어 ‘압박과 설움’에서 벗어나 ‘지주회사’로 옮겨 날개를 펴고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던 터라, 그 뒤로도 그는 내게 내내 깍듯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껴묻히다시피 하면서 함께 온 녀석. 늘 싱글싱글 웃음을 매달고 지내던 예전의 그 새파란 청년은 어느 덧 나이 사십 대 중반의 결혼 13년차 사내가 되어 있었고, 그의 얼굴에는 삶의 더껑이가 나이 이상으로 많이 깔려 있었다.
막걸리가 몇 순배 돌아가자, 이젠 고참 부장이 된 연장자 녀석이 함께 온 녀석의 옆구리를 찔러댔다. ‘털어놓고 한번 말씀드려봐. 이 사람아’ 하면서.
그리곤 내게 이랬다.
“이 친구가 지금 가정적으로 아주 곤란한 처지인데, 저로서는 이야기를 들어도 뭐라고 해줄 말이 없어서 데리고 왔습니다. 얘기 좀 듣고, 한 말씀 해주시죠.”
사내의 입이 열리고 말문이 터지기 시작했다. 세상에... 그런 괴이한 부부 관계도 다시없었다. 엉망진창이었다. 주범은 그의 부인. 몇 달 전 드러난 내용인 즉, 결혼 후 첫 3년을 빼고는 10여 년 동안 단 한 해도 외간사내와 말썽을 일으키지 않은 적이 없었다.
사단은 사내의 빚보증으로 인해 10여 년 전에 벌어진 금융사고 때문이었지만(신용불량자), 사달은 그의 아내가 쳐댔다. 다른 이들에게 옮기기에도 아주 거북할 정도의 내용으로. 10여 년 동안 여인을 거쳐 간 외간남자가 서너 명이나 되었다.
그러자 아내 쪽에서 도리어 이혼하자고 하더란다. 그런데도 사내는 두 아이를 생각해서, 그리고 자신이 그런 빌미를 제공한 듯만 싶어서, 어떻게든 아내의 마음을 돌려 가정을 지켜내고 싶었고, 그래서 싫다는 아내를 돌려세워 이야기도 여러 번 했다고 했다.
그런데, 최근 여인이 뱉은 한 마디 말을 듣고부터는 그는 뿌리째 흔들리고 있었다.
그의 아내가 했다는 말마디는 이랬다.
“나, 실은 결혼 전부터도 당신을 100% 신뢰하지는 않았어. 그저 재주가 좀 있어 보이고 똑똑한 듯해서, 멍청한 사내 데리고 평생 살아내는 게 얼마나 지겨울까 싶어서, 당신과 결혼한 거거든.”
나는 그에게 그녀가 원하는 이혼 절차에 응하라고 했다. 숙려 기간에 그녀가 맘을 돌렸네 어쩌네 하는 식으로 어떤 말이 들려와도 그냥 밀고 나가라고 했다. 처음부터 남편을 신뢰하지 않은 여인을 어머니로 두고 살아가야 하는 아이들의 훗날까지도 생각해서 그렇게 하라고 했다.
내가 그렇게 단호하게 말한 것은 그녀의 기가 막힌 행적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도 훨씬 더 엄청난 사건을 저질러 댄 또 다른 여인의 사연을 세 해 전에 접한 적이 있었지만, 그 얘기는 그에게 하지 않았다.) 뿌리 깊은 그녀의 타인 불신 버릇 때문이었다.
이런 종류의 여인에게서 보이는 타인 불신은 그녀의 안에서 동거하는 오만과 콤플렉스의 근친혼에서 싹튼다. 그리고 그렇게 기형으로 탄생한 인간 불신은 대체로 평생 고쳐지지 않는 불치병으로 똬리를 튼다. 생각의 딴 주머니를 차는 사람들의 평생 버릇. 돌아서고 나면 즉시 뒷전에서 별별 사건을 다 쳐댄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자기합리화로 모든 걸 타인 탓으로 돌린다. 자신을 드높이며 착각한다. 진정한 반성이란 걸 모른다. 그러니 평생 교정이 되지 않는다.
내가 그 전말을 자세히 들어 알고 있는 어떤 여인은 10년 동안에 한 남자도 아니고 11남자를 차례로, 혹은 겹치기로, 집적거리며 관계를 맺고 살아왔다. (입이 벌어져 닫히지 않을 정도의 사건들이 많은데, 그 중에는 아비뻘로도 차고 넘치는 70대 아동문학가 영감탱이와 붙어다니며 중국 관광을 시작으로, 1주에 2회 제발로 아파트까지 찾아가 벌인 달첩질까지 들어있다.)
그것 역시 위의 여인의 경우와 똑같이 습관적인 불신 탓이 크다. 물론 속물근성과 같은 겉치레 버릇에다 싸구려 과시욕, 근거 없는 오만, 주변인 콤플렉스에다 학벌 콤플렉스까지, 다른 이유들도 많긴 하지만 근본적인 것은 한 남자를 믿지 못 하게 되거나 미덥지 않게 되는 버릇 때문에, 뒷전에서 또 다른 남자를 연달아 집적거리곤 했던 것이다. 어떤 때는 서너 남자를 동시에 상대하기도 했다.
자신이 잘났다는 웃기는 착각도 거기서 크게 한몫했던 건 물론이다. (사내들은 그런 여인일수록 그저 1회용 내지 수회용 소모품 정도일 뿐이라는 걸 거의 본능적으로 알아채고 대하는데, ‘잘난’ 여인만 그걸 모른다.) 그런 여인들은 남은 평생에도 계속해서 그렇게 떠돌이로 산다.
그리고... 자신이 잘못 길들인 콤플렉스에서 비롯된 타인에 대한 습관적인 불신과 거기서 쏘아진 불화살은 불안정과 방황, 그리고 자기 파멸을 겨누고 정확히 돌아온다. 반드시.
주변에 떨어진 불똥들의 폐해 역시 말로 할 수 없을 정도. 그런 여인에게서는 얼른 빨리 멀리 떨어지는 게 그나마 피해를 줄이는 길이다.
사내에게 내가 말했다.
그래도, 자네 부인이 선물 하나는 남겼군그래. 자네에게 그런 말 못질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대 성격에 그녀의 뒷감당을 해대느라 평생 헉헉거렸을 텐데 말이야... 허허허. [July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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