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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뜨]그 사람의 빈자리

[내 글] 꽁뜨

by 지구촌사람 2012. 11. 2. 0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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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위를 날아가는 경비행기의 고도에서 바라본 후버댐의 위용.

  급물살로 내달리는 콜로라도 강물을 끌어안고 도닥인다.

  댐에 갇혀 만들어진 미드 호는 그 길이만도 서울-대전 간

 거리쯤 된다.>

 

 

 

[꽁뜨]                              그 사람의 빈자리

  

                                                                           최  종  희

                                    

  후버 댐에 걸려 잠시 주춤거리는 콜로라도 강. 그 강물을 쓰다듬듯 한 바퀴 돈 비행기는 기수를 동쪽으로 향한다. 하지만, 오늘은 그랜드 캐년 쪽이 아니다. 댐에 갇혀 더욱 깊어진 강은 여전히 짙푸르고, 짙어진 물빛은 그 속이 더 의뭉스럽다. 깊이 모를 속내를 간직한 사람처럼. 속내는 그것이 무엇이든, 그 속내와 설렁줄로 이어진 이를 사념에 붙들어 매달고 간다. 비행기에 실려 댐주변에 건성으로 눈길만 건넨 용수가 지금 그렇듯이.   

  제트기보다 훨씬 낮게 날기 마련이어서 지상의 풍광들이 한 눈에 들어오는 덕분에 관광용으로는 아주 그만인 프로펠러 쌍발 비행기. 여전히 캐시가 그걸 몰고 있다.


  경비행기 조종사 캐시 존즈. 그녀는 캐시 밀러를 무척이나 닮은 데다 캐서린을 줄인 애칭까지도 똑 같다. 출장길에 짬을 내어 그랜드 캐년에 들러  기념사진 한 장이라도 증명사진처럼 꼭 찍어두고 싶어 하는 회사 직원이나 동료들에게 등 떠밀려 용수가 그랜드 캐년에 갈 때마다 라스베가스에서  타고 가는 십인승 비행기 중의 하나를 그녀가 조종한다.

  용수가 처음 그녀의 명함을 받았을 때 가슴속에서는 쿵 소리가 났다. 이십여 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그랜드 캐년을 다시 찾게 된 감회. 그 단순한 되풀이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이름에 뒤엉킨 빛바랜 추억 속의 주인공이 있었고, 그녀의 이름이 캐시였다. 캐시 밀러.

  

   Excuse me. Is this seat taken? (저 이 자리 비었나요?)

   No. You may take it. (예. 앉으셔도 됩니다.)

   캐시 밀러와의 말 트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학사장교로 근무하던 시절, 용수가 미국땅 하고도 유타 주의 남서쪽 귀퉁이에 있는 작은 도시인 비버에 6주간의 위탁 교육을 받으러 왔을 때였다. 그녀가 사는 리치필드의 야외 음악당 공연을 보러왔다가  부대로 돌아가려고 용수가 버스를 탔을 때, 시더시티에 사는 친구와 함께 유타 주 남쪽에 줄줄이 들어서 있는 국립공원과 그랜드 캐년을 돌아보러 가는 길이라던 그녀와의 첫 대면. 그녀 역시 그 공연을 보고나서 가려던 참이어서 떠나는 버스에 마지막 승객으로 허겁지겁 오르고 있었다.

 

  그 다음 주말 딱히 할 일도 없는 용수는 캐시가 향한 길을 뒤따라 나섰다. 한국에서 온 그에게 멀리서 왔다는 이유 이상으로 친절을 베풀어 주고 있던 교육대의 퀀즈 대위의 마음 씀씀이 덕분에 용수는 그의 지프차를 빌릴 수 있었다.

  하기야  마음속 한 구석에는 이곳저곳을 들러서 간다던 캐시를 혹시나 종착지인 그랜드 캐년에서 만나게 되지 않을까 싶은 마음도 전혀 없지는 않았다.  

  

  북쪽의 아이다호 주에서부터 유타 주를 지나 라스베가스로 이어지는 긴긴 15번 도로를 벗어나서 89번 도로 쪽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용수는 최초로 그랜드 캐년의 대탐사를 마쳤다는 파월 소령의 이름을 따서 지은 파월 호수 쪽으로 향했다.

  그때 용수는 길가에서 다급하게 손을 흔드는 여인과 조우하게 되었고,  그 덕분에 다시 만나게 된 게 캐시였다. 술이 덜 깬 캐시의 친구가 고집을 부려 새벽길을 달리다가 그만 가로수를 들이받는 바람에 캐시는 얼굴과 다리에 상처를 입고 가로수에 기대 앉아 있었다.


  퀀즈 대위가 출발전에 챙겨주었던 구급함 속의 머큐롬과 거즈, 반창고, 그리고 압박붕대가 요긴하게 쓰였고, 용수는 그 길로 캐시를 싣고 리치필드의 그녀 집으로 돌아왔다.

  이상하게도 용수의 빈 옆자리에 캐시가 앉는 일이 일주일 사이에 두 번씩이나 벌어지고 있었다. 한번은 우연히, 두 번째는 절반쯤 소망이 섞여 들어간 의도적 조우이긴 했지만.

  

  자신의 일정을 취소하고 열 시간 가까운 거리를 화급히 되돌아온 용수의 정성은 그 뒤 열흘쯤 지나 주 중에 부대로 걸려온 주말 저녁 초대 전화에서처럼 캐시의 온 가족에게까지도 잊혀지지 않고 있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그 후 부대로 찾아온 캐시는 용수가 맛있게 먹었던 애플파이를 만들어와 건네주었고, 두 번째 방문에서는 그녀에게 빈손인 용수가 조금은 부끄러워질 정도로 캐시의 정성은 감동스러웠다.

  하지만... 용수는 그런 캐시에게 끌리면서도 온전히 달려갈 수가 없는 것이, 학창 시절 캠퍼스 커플로 명성이 자자했던 해숙이가 서울에 머물고 있었다. 그녀에게 드리워진 인연의 끈을 용수는 그때까지도 확실하게 끊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여름철에도 가죽 스커트를 걸칠 정도이고 전공과목인 가정학에서 C를 맞고도 너스레를 떨며 건배를 자청하던 해숙이. 그녀가 조금은 덜 과감(?)했으면 하는 용수의 기대를 결정적으로 벗어나고 있던 때는 용수의 부대로 그녀가 처음 면회를 올 무렵이었다.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극단의 입단 동기생이라는 희멀끔한 녀석 하나를 달고 왔다. 그날 밤 술에 잔뜩 취한 해숙이와 녀석을 여관방에 하나씩 밀어넣고 나서 돌아서다가 용수가 방문밖에 있던 해숙이의 부츠를 방안에 넣어주었던 것은 겨울철에 지독히도 추운 전방의 날씨에 부츠가 얼어서 터질까 싶어서만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것이 해숙이와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용수의 머리를 언뜻 스치고 지나갔을 때, 그도 모르게 그의 손이 한 일이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자고 용수가 마음 먹은 짓이라는 게 더 정확했다. 

  

  그 뒤 용수는 전방 근무를 마치기도 전에 전출이 되었고, 어설픈 준비를 거쳐 한미연합사에서 미군들과 합동 근무를 몇 달 했는가 싶었을 때, 미국으로의 교육 특명이 떨어졌다. 해숙이와의 일이 말끔하게 매듭지어 지지 않은 채로 용수의 주변이 휘모리처럼 빠르게 돌아간 일이어서 용수는 내심 여간 찜찜하지 않았다. 

  게다가 캐시는 그 동안 용수가 대했거나 짐작으로 알고 있던 가벼운 미국 여인들과는 전혀 달랐다. 말수도 적었고, 옅은 미소가 깔리는 얼굴의 태는 그녀가 전혀 이국 여인이라는 느낌도 들게 하지 않았다. 다른 백인들하고는 어딘가 달랐고 그래서인지 피부 색깔도 조금 덜 희었다. 외할머니가 인디언이었다는 것은 그 피부색깔 얘기가 나왔을 때 캐시가 말해준 것이었고, 용수에게서는 미뤄두었던 끄덕임이 절로 나왔다. 

  

  용수가 캐시의 집을 찾아간 것은 캐시의 세 번째 방문 후였다. 부대로 몇 번 걸려온 캐시의 전화  메시지를 무시한 것이  미안하기도 했지만, 기회가 되면 자신이 왜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지를 설명하고 싶었다. 내내 빈손이었던 그가 캐시에게 작은 선물이라도 주고 싶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다음 주 월요일 수료식을 마치면 용수는 그 다음날로 귀국 비행기에 올라야 할 처지였다.

  

  가는 길에 서점에 들러 용수는 프로스트의 시집을 샀다. 그걸 받아 든 캐시는 어린애처럼 좋아했다. 그해 대학을 갓 졸업하고 고향 마을의 학교에 교사로 취직한 선생님답지 않게 깡총거렸다. 방울소리가 날 듯한 발걸음으로 그녀는 저녁 식사를 마친 그를 집 뒤로 이끌었다. 삼목들이 빼곡히 심어져 있었고, 그 나무들 사이에 달빛을 소복하게 담은 해먹 하나가 매달려 있었다.

  그날 밤 용수가 세상에서 가장 길고 맛난 키스를 했던 것은  순전히 달빛 때문이었고, 해먹 탓이었다. 그건 용수가 훗날 그렇게 생각하기로 다짐 삼아 정리했던 것이긴 했지만.

 

  해먹 안에 누워 달빛을 바라보면, 어째서 사랑하는 사람들이 해보다 달을 더 좋아하게 되는지 알게 된다면서 먼저 해먹에 오른 캐시의 뒤를 따라 용수가 그곳에 올라간 뒤로 벌어진 일이었다. 좁힐 줄만 알고 벌어질 줄 모르는 해먹 안에서 둘이서 자리를 잡으려고 뒤척이다가 둘 사이의 입술 사이가 저절로 좁혀졌다. 그리고... 나무 사이에 걸쳐져  있던 팽팽한 긴장에 의지하여 매달려 있던 해먹은 그 뒤로는 비교적 조용히 흔들렸다. 그 동안 두 사람 사이에 제어되고 막혀있던 새된 긴장이 폭발할 듯이 분출하던 시간 동안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용수가 그랜드  캐년이라는 이름 앞에서 다시금 긴장하게 된 것은 바로 캐시 때문이었다. 직접적으로는 파일럿 캐시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녀로 인하여 캐시 밀러의 이름이 다시 떠오른 탓이기도 했다. 6피트에서 4-5인치쯤 빠지는 키에다 쇼커트의 외모까지도 파일럿 캐시는 캐시 밀러를 닮아 있어서, 그녀를 볼 때마다 용수는 캐시 밀러가 기억의 퇴적층 바닥에서 여전히 생명을 유지하고 있음을 확인하곤 했다. 그리고, 그처럼 되우쳐진 낡은 기억은 홀로 있을 때 더 빛을 발하기 마련이었다.

  어느 날 오랜만에 혼자서 엘에이 출장길에 오른 용수는 밤이 되어 이런 저런 생각들 사이에서 자맥질하게 되었을 때 문득 캐시의 생각이 났고, 어떻게 살고 있을지 궁금한 마음은 끝내 전화 교환원의 도움을 받아 캐시의 집으로 향했다.

  전화기 바닥에 깔리던 캐시 어머니의 목소리. 그녀는 그가 이름을 대기도 전에 용수 리가 아니냐며 겨우 두 번 만난 용수의 이름자를 하나도 틀리지 않게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한번 들를 수 없겠느냐고 묻는 말끝에, 아니 꼭 좀 들러달라는 부탁을 하면서, 거기에 길게 끌리던 한숨 소리를 읽어낸 용수는 파일럿 캐시의 도움을 받아 리치필드로 향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루뿐인 짧은 짬에 그곳을 다녀올 수 있는 것은 그 방법밖에 없었다. 일반 여객기는 그곳에서 차로 반나절 가까이 걸리는 한참 위의 도시 솔트레이크시티로 향하는 것밖에 없었으므로.  400킬로가 넘는 긴 협곡을 단숨에 난 캐시의 비행기는 이십여 년의 세월도 이내 건너뛰어 용수를 리치필드에 내려주었다.     

 

  리치필드의 동쪽 교외. 아치즈 국립공원 방향으로 뻗어가는 70번 도로 가에 있던 캐시의 집은 여전했다. 여전히 곧게 뻗은 삼목들을 배경으로. 하지만, 거기 머물고 있는 사람들은 여전하지 않았다. 용수를 맞은 것은 캐시의 어머니와 그녀의 어린 남동생이었던 존. 그리고 용수가 처음 보는 그의 아내 매리뿐이었다.

  캐시와 그녀의 아버지는 없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가족들 뒤에 서 있는 청년 하나가 두 손을 모은 채 용수를 맞았다.  그 청년이 용수에게 하이 하면서 인사를 할 때 어딘지 낯이 조금 익은 듯도 싶었지만, 그건 그 청년이 아무래도 동양식으로 허리를 조금 구부린 것 같아서였던가 보았다. 용수는 그리 생각했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 이제는 그의 옆자리가 비어 있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떠올리자 용수는 캐시에게 감사하고 싶어졌다. 파일럿 캐시와 또 다른 캐시 모두에게.

  해숙이가 누구의 자식인지 밝히기를 한사코 거부하는 아이 하나를 달고 그에게 돌아왔을 때 용수는 그녀를 받아주었다. 하지만, 그 아이가 죽고 나자 밖에서 나돌기 시작한 해숙이는 더 이상 그의 아내가 아니었다. 그리고 나서는 줄곧 비워 있던 가족의 자리.

  

  홀몸 가족의 오랜 빈자리를 채워줄 사람이 리치필드에 있었다. 아니, 나타난 것이었다. 용수가 떠나고 난 뒤 오랜 병치레 끝에 삼목 동산에 묻히게 된 캐시 밀러가 이 세상에 남기고 간 핏줄, 그것은 용수의 핏줄이기도 했다.

  제 어미가 떠난 자리를 지키며 언젠가 허리를 굽히며 맞을 제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던 청년. 그가 용수의 가슴속에서 오래도록 비워져 있던 빈자리를 메우며 솟아오르는 것을 용수는 뛰는 가슴으로 바라보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용수는 이제 더 이상 홀몸이 아니었고, 캐시는 잊혀진 여인도 아니었다. 파일럿 캐시도 아들 하나만 데리고 혼잣몸이라는 생각이 들자, 불현듯 그녀와 함께 그 시절의 얘기들을 길게길게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아주 짙게 피어올랐다.

  돌아오는 비행기가 다시 후버 댐 위를 날고 있었다. 용수는 문득 그 후버 댐이 없었더라면, 아니 그 댐이 시속 130킬로가 넘는 속도로 내달려가던 콜로라도 강물을 끌어안지 않았더라면, 물 한 방울 나지 않는 라스베가스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말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라스베가스뿐이랴. 캘리포니아 주 전체가, 아리조나 주 상당 부분도 지금의 모습은커녕 며칠조차 연명하기 어려웠을 터. 물없이 하룬들 지탱할 수 있으랴.

 

  콜로라도 강이, 그걸 끌어안은 댐이, 그 안에 담긴 물이 곱빼기로 소중해왔다. 용수는 문득 그 물을 찾아 떠난 길에서, 물길에서, 캐시를 찾아냈던 생각이 났다. 오금이 저려왔다. 그리고 이제는 캐시라는 이름에 매달리고 싶다는 생각이 더욱 짙어져왔다. 들입다 급물살로 내닫기만 하던 콜로라도  강이 후버 댐에 안겼듯, 용수도 캐시에게 안기고 싶어졌다. 핏줄을 끌어안은 채로, 이제는 푹 쉬어도 좋을 것 같았다. 이십 몇 년 동안 내내 조여 있던 마음 줄을 이제는 느슨하게 풀어도 좋을 것 같았다. 아니, 이미 풀리고 있었다.

  용수는 두 다리를 쭈욱 뻗으며 기지개를 크게 켰다. 그런 용수의 모습을 바라보며, 조종간에서 한 손을 뗀  캐시는 손을 흔들어 왔다. 그녀의 미소가 손가락 끝에 장난스럽게 매달려 웃고 있었다.   [08/10/2000]

 

*오래 전, 고료를 목적으로 썼던 글. 실화 일부가 포함되어 있다. 예컨대

  경비행기 조종사 캐시는 50대 후반의 나이에 지금도 씩씩하게 조종간을

  잡고 있으며 성씨만 바꿔 표기했다. 얼마 전 서울을 두 번째로 다녀갔다.

*후버댐은 갖가지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한 마디로 저게 무너지거나 사고가

  나면 미국이 망할 정도. 라스베가스나 엘에이가 생존할 수 없는 건 물론이고

  최소한 2개 주 이상이 타격을 받는다. 하여, 후버 댐 관광은 사전 신청 후,

  단체로만 가능하다. (7대 국가 안보 시설 중 하나)

  위 사진 상으로는 단순해 보이지만,  댐 아래(기저부) 너비만 200미터 정도.

  저기에 들어간 콘크리트 양이면 뉴욕- 샌프란시스코 간에 2차선 도로를 포장한다.

  참, 얼마 전 상영된 트랜스포머 종반 장면이 저 댐 위의 도로. 사진을 유심히 보면,

  그 도로 위를 달리는 자동차들이 보이는데, 그걸로 댐의 위용을 대충 짐작해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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