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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뜨] 옵빠와 여보 사이

[내 글] 꽁뜨

by 지구촌사람 2012. 11. 20.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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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뜨]                                옵빠와 여보 사이

 

                                                                                             최 종 희


  시인이자 작사가인 H. 그녀는 희한한 여인이었고 복잡한 여자였다. 10여 년 전의 기억과 며칠 전의 이메일 속 이야기를 맞붙여놓기만 해도.


  십여 년 전의 일이다. 내가 그녀의 속사정과 바깥 사정 모두를 대충 들은 것은. 채 깨지도 않은 술기운에서 또다시 몇 잔술을 했음에도,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서늘해지는 새벽 기운에 가끔 팔을 쓰다듬곤 했으니, 아마 갓 가을에 접어든, 요즘 같은 철이 아니었나 싶다.

  그날따라 글쟁이들 모임의 뒤풀이가 아주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대개 뒤풀이가 꼬리를 보이기 마련인 새벽 1시도 훌쩍 넘긴 시각, 두 번째로 노래방을 순례 중인 팀들이 아직도 노래방에서 마이크를 잡고 있을 때, 우리는 바로 길 건너편의 마로니에 공원 벤치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것저것 혼합주를 마신 탓에 머리도 무거운데다 지하실의 탁탁한 공기를 잘 견디지 못하는 내가 노래방 밖으로 나와 있을 때, 그녀 역시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여인은 참 통이 크고 오지랖이 넓었다. 갓 40대에 접어든 듯했는데도 몇 년째 그 모임의 회장을 연임하고 있었다. 100여 명 규모의 회원에다 30대를 주축으로 하고 50대에까지 분포된, 그 나름 쟁쟁한 실력파들이 모여 있는 그런 모임에서, 대장 노릇을, 그것도 아주 잘 해내고 있었다. 더구나, 그 날은 모임 두 개를 한 두름에 엮어서 이른바 “연합모임”이라는 걸 치르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그녀는 그곳 모임에도 관여하고 있었다. 거기서는 회장이 아닌 총무라는 직책으로.

  그런 H. 그녀는 미스터리 단지였다. 도무지 그 속을 잘 알 수도 없거니와, 괴물만 같은 통통한 항아리. 술자리에서 노는 걸로 봐서는, 어디 놀자판에서 뒹굴어도 한참 뒹군 듯한데, 나는 그때까지 그녀가 술에 취한 모습을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 뿐이랴. 그녀는 얼굴도 동글동글한데다, 반 바가지쯤의 미소를 얇게 펴서 그걸로 미리 팩을 하고 온 사람처럼, 모임에 모습을 나타나는 사람들을 생글생글 웃으며 맞았다. 언제나. 손아래 사람이나 또래들에게는 남녀 불문하고, “자기 오랜만이야!”했고, 손윗사람들에게는 “오빠 더 싱싱해졌네”, “언니 못 보는 사이에 엄청 이뻐졌다아~~!” 소리를, 맑고 높게 띄웠다. 그런 모습을 조금 눈여겨 바라보고 있으면, 귀엽고 이쁘다가 끝내 섹시해지는 여자. 그런 여자였다. 누구에게나.

  게다가 그녀는 화통했고, 화끈했다. 심지어는 연하인 30대 남자들이 농담으로, 누이 우리 오늘 밤 찐하게 뽀뽀 한 번 할까? 내 소원이 그건데...어쩌고 하면, 그 즉시 그녀의 답이 돌아오곤 했다.

  - 그려. 까이꺼. 죽을 넘 소원이라면 못 들어줄 게 뭐 있어. 대신, 기백만 원 한다는 그 특급호텔 스위트 룸 아니면 안 돼. 알았지? 덕분에 오늘 그런 데에 한 번 가보지 뭐.

 

 

  그런데도, 그런 여인들을 감싸고 떠돌긴 마련인 온갖 풍문이 모임에서 잠잠했다. 항용 뒤늦게 들려오거나 속삭임으로 전파되곤 하기 마련인 뒷얘기, 즉 누가누가 누구의 앤이라더라, 누구는 누구하고 목하 욜심히 작업 중이래... 어쩌고 소리가 전혀 들려오지 않았다. 내가 그녀를 지켜본 몇 년 동안, 단 한 번도...

  마음속으로든 실물로든, 사내들이 몇 번을 안아보고 싶은 욕심을 내고도 남을 여자였음에도... 정말 괴물이었다.


  “형. 오늘 나랑 한잔 더 할래요? 우리 그 동안 제대로 술잔 오래 맞댔던 적이 거의 없는 거 같아서요.”

  벤치에 걸터앉은 지 1분이나 지났을까. 인공의 조명들이 앗아간 천연의 별빛 생각이 나서, 하늘을 두리번거리고 있던 내게 그녀가 말했다. 손윗사람들에게는 늘 오빠 아니면 언니로 불러대는 그녀가 내게는 형이라 했다. 그녀와 내가 대충 10여년 정도 나이 차가 난다는 걸 서로 짐작으로만 알고 지낼 뿐인 우리였을 뿐인데... 암튼, 그녀가 언제부터인지 나만은 형이라 불렀다. 특히, 술 한 잔을 권할 때면.


  잠시 후 그녀는 소주 3병을 들고 나타났다. 새우깡과 라면땅 봉지를 잡은 다른 한 손을 뱅뱅 돌리면서...

  “이거 너무 많은 거 같은데? 나 아까 이것저것 섞어 먹은 게 아직도 비몽사몽이여. 게다가, 본래 소주에는 좀 약한 편이구... 머리두 좀”

  내 말은 그녀의 말막음으로 중도에 잘렸다.

“저도 앱니다유. 형이 아까 노래방에서 자꾸 관자놀이에 손을 대곤 하던 거, 저두 봤걸랑요. ㅎㅎ. 이건 내가 할 거에요. 사람들 눈치 볼 일 없이. 세 병 다 할 건 아니지만, 먹다가 떨어지면 또 다녀와야 하잖아요. 중간에... 그러면 김새잖아요. 형은 그저 빈 잔으로라도 대작만 해주시면 돼요.”


  “그럼, 지금껏 모임 자리에서는 늘 사람들 눈을 의식하면서 술 마셨다는 얘기? 권하는 술 안 물리치고 마시는 걸 보면 꽤 하는 것 같던데, 그래도 멀쩡한 것 같던데?...”

  “당근이죠. 제가 그래두 회장이잖아요? 히힛. 취한 꼴 보여서야 되겠어요? 형도 알다시피 그 동안 제 치마자락에서 놀면서 중앙 문단으로 당당히 등단한 시인, 소설가, 수필가들이 어디 하나 둘이어요?... 사실 술은 좀 하는 편이에요. 하지만, 한 번도 주변 사람들 생각 안 하고 마음 놓고 마신 적은 없어서, 취한 적은 거의 없지요. 제가 술 하나는 타고났나 봐요. 호호호”

  “아고야. 것두 부럽구나야. 부러워. 나는 늬 근처에도 못 가거덩. 사실 오늘 술도 이거 내겐 벅차. 머리는 몇 근쯤 되는 듯하고, 지금도 눈앞에 뭐가 살짝 낀 듯 싶거덩. 그래서 밖으로 나와 있었던 거지만. ㅎ흐.”


  사실 그 무렵, 시간이라도 대충 알고 싶어 시계를 힐끔거렸지만, 내 시계판이 자꾸만 흐릿해지며 엉키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 사람 안 오냐? 지난 번 차 갖고서 너 모시러 왔던 애아빠 말이야.”

  “아마 지금쯤이면 흔들어 깨워도 모르고 자고 있을 거예요. 사실 지난 번엔 일부러 일거리를 만들어 이곳으로 나와서 데리구 간 거지, 그 사람은 거의 매일 술을 껴안고 자요. 아니, 술에 떠밀려 잔다고 해야 할까. 주변에만 가도 술냄새가 나서, 아예 따로 잔 지 오래에요.”


  나는 그녀의 말을 귓가에 거머잡은 채, 덩치가 큼지막하던 사내를 떠올렸다. 풍채에 어울릴 그럴 듯한 태도에서부터, 온 김에 잠시라도 함께 어울려 놀다가 가라는 예의 조 권유를 기다렸다는 듯이 받아들인 뒤, 신나게 걸쭉하게 한 판 놀다가 간 사내. 아내를 그처럼 높은 자리에 올려줘서, 참으로 고마운지라 인사라도 하고 싶었다면서, 그 자리의 모든 사람들에게 악수를 청하던 사내.

  여인은 내가 몇 마디 묻자, 대답에 살을 붙여왔다. 간간히 술잔을 이야기 안주 삼아... 그가 능력 이상으로 주변을 챙기려드는데다, 하던 사업까지 들어먹었다는 이야기. 그 바람에 빚 독촉에서 벗어나려고 서류상으로 이혼까지 했고, 지금 살고 있는 광주의 집도 그녀가 가까스로 마련한 건데 집값의 절반이 빚이라는 이야기였다. 사내가 지금 직장이라고 나가기는 하지만, 부동산 거래 중개 알선업의 보조이다 보니 수입은 불규칙하다는 얘기도 나왔다. 한 달 내내 빈 주머니일 때도 드물지 않다며.


  먹고사는 이야기에 집 사느라 떠안은 빚 얘기가 나오자, 여인은 그 동안 내가 알지 못하고 있던 그녀의 새로운 부업 하나를 꺼내들었다. 그녀의 공식 직함은 시인 겸 작사가였지만, 그건 먹고 사는 일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아 일주일에 두어 번의 논술그룹 과외교사를 하고 있었다. 내가 아는 건 거기까지였다.

  그녀가 질문을 해오는 것으로, 문이 열렸다.

  “형. 혹시 미사리 카페촌 와봤어요?”

  “지나치기는 했지만, 들어가 보진 않았어. 늙다리와 아줌마들을 주축으로 해서 먹고 사는 데 아닌가? 아는 사람 하나도 그걸 하고 있긴 하지만, 난 도무지 대낮에 그런 데에 가는 게 취미에 안 맞아. 저녁 시간은 어떤지 모르지만, 굳이 그 먼 데까지 나설 일도 아니고...”

  “나 거기 얼굴마담도 해요. 아는 사람 몇이 투자해서 차린 곳인데...”

  “그럼 혹시 거 뭐시냐. 원로 작곡가 000와 가수 겸 작곡가 000, 여류 수필쪽의 000, 000가 같이 차렸다는 거, 그거 아냐? 지난번에도 인사동 모임 뒤끝에, 들를 데가 있다면서 네가 나를 끌고 가서 다시 만나게 했던 이들이 한다던 그것. 그 퇴물들 집합소만 같던. ”

  “맞아요. 형도 두어 번 대한 사람들. 맞아요. 하지만 퇴물들이라니, 형 심했어요. 거개가 형 또래인 50대이고, 작곡가 0샘만 70을 바라보고 있을 뿐인데...”


  미사리 카페의 이야기 문이 열리자, 그 안으로 꼬리가 길게 매달리기 시작했다. 카페의 공동 출자자들의 지분 구성 내역과 그녀가 그들과 어울리게 된 사연들. 그네들은 출자자이면서도, 그녀에게는 단골손님들이라는 것 등등...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설 때면 꼭 계산들을 하고 나간다고 했다.

  하지만, 그 모든 이야기들을 고개만 끄덕이며 들어줄 수 없었다. 빈 잔으로 시작한 대작이 어느 새 내 잔에도 술이 채워지고 있었고, 내 시선은 점점 확실하게 몽롱해지고 있었다. 무거워져 조금 꺾여져 있던 내 머리를 힘을 주어 끌어올리며 물었다. 그 동안 내내 궁금했던 걸, 더 취하기 전에 짚고 가야 할 것 같았다.

  “근데... 너 같이 통통해서 이쁘고, 미소가 기본 화장으로 깔리는 여류 시인한테 어째 뒷소식이 그리도 깔끔하냐. 너와 관련된 작업 얘기를 하는 사람을 아직 한 사람도 못 봤어. 앤 관리도 회장 자리 관리처럼 끝내주게 하는 건 아니겠지?”


  여인은 대답 대신 술 한 잔을 털어 넣었다. 세 병째 뚜껑을 따서, 천천히 제 손으로 부어서.

  “형. 00 알지?”

  “대충만. 잘은 몰라. 표정이 밝지 않아서, 말 걸기도 그렇고, 난 그런 친구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서. 언젠가 우연히 내 앞자리에 앉게 되어 술 한잔 한 적이 있는데, 술 들어가니까 말이 많아지더만. 봇물 터지듯 하는데, 밝은 얘기들이 거의 없고, 죄다 파내고, 비틀어 짜고 하는 쪽이라서... 여자들에 대해 무슨 원한을 한 보따리쯤 끌어안고 있는 듯도 하고. 차이기를 되풀이로 당한 사람처럼... 게다가 무슨 사내의 아이디가 꼭 계집애 같기두 하고. 원.”


  여인이 언급한 사내. 그는 당시 여인보다 서너 살 위로 40대 중반이었다. 시와 수필 쪽에서 제법 열심히 써대고 있었고, 허우대도 그럴 듯한 친구. 하지만, 그의 어둔 표정과 칙칙한 작품 색깔이 딱 한판이다 싶을 정도로, 정말이지 그 좋은 덩치가 아깝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 그런 사내였다.

  “맞아. 그 사람. 여자들한테 원한이 좀 있지용. 아니, 원한을 가마니 채로 안고 다닌다고 해야 하려나. 엄마가 둘인데, 둘째부인이 친엄마지. 나처럼... 첩이라고 불리면서 짓밟히고 얕보이던 둘째부인 말이야요.”


  여인은 두 병째 소주에 입을 대면서부터, 내게 반말과 존댓말을 뒤섞어 건넸다. 그녀가 튕겨낸 마지막 단어가 내 귓속으로 튀어들자, 그녀의 취기가 되레 고마웠다. 그래 뭔가가 있긴 있었구나. 짐작대로.

  하지만, 나는 무연(憮然)을 가장했다.

  “그럴 수도 있지 뭐. 엄마가 둘인 건 우리네 아버지들 세대에 가끔 있었던 일 아닌가. 아니, 흔했다고 해도 되려나. 심지어는 내놓고 한 지붕밑에 두 시앗 거느린 사람들도 있었잖아. 너, 임종임 알지? 처음에 와일드캐츠라는 이름으로 ”마음 약해서“라는 노래를 히트시킨 그룹 멤버. 인순이도 그 멤버 중의 하나였지. 그 임종임이가 지금도 두 어머니 모시고 봉양 중이지. 얼마 전에 티비에서 떳떳하게 그런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던 걸... 그나저나, 그 친구가 그랬구나아. 그래서...”

  “형. 나 그 사람보고 오빠라고 부른다? 가끔 같이 하는 잠자리에서...”


  여인은 화통한 여자답게 내 말을 화끈하게 잘랐다. 나는 얼결에 술병으로 손을 뻗어 잔을 채웠고, 마셨다. 지끈거려오던 머리가 말끔해지는 것 같았다. 단숨에 넘긴 술 덕분인지, 아니면 그녀의 말 몇 마디가 홍두깨처럼 뒷머리를 쳐와서인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그리고 말이야, 형. 카페의 실제 주인격인 그 김사장은 내가 여보라고 부르고 있어... 요새 '오빠'와는 뜸해졌지만, 김사장과는 일주일에 한 번 꼴로. 나 웃기지 형?”


  김사장이라는 친구는 본래 가수를 하면서 판을 몇 개 내고 난 뒤, 히트작이 없자 그 뒤로는 작곡가로 전환한 이었다. 그의 아내가 아주 큰 식당을 해서 돈을 벌었고, 거기서 얼마를 떼어내 카페를 차리면서, 알음알음으로 지내던 이들을 공동출자자라는 이름으로 엮은 뒤, 그들을 말벗 겸 단골손님으로 붙들어둔 사내. 여인의 이런저런 이야기 속에서 드러난 사내의 그림이 그랬다.

  나는 H에게 대꾸할 말이 없었다. 아니, 직전까지 좀 말끔해지는가 싶었던 머리가 다시 부연 벽지로 도배질되고 있었다. 천천히 한 잔을 따르는 내 손을 여인의 손길이 막았다.


  “그리 놀랄 거 없어. 형. 살다보니 그리 되더라고. 오빠라 부르는 00은 사실 그의 이야기를 듣던 날, 내가 그를 위해 권한 술을 내가 마시다보니 그리 되었어. 그를 위한 위로주를 날 위로하기 위해 마신 셈이 된 거지. 깨어보니 둘이서 꼭 껴안고 있더만요, 모텔방에서. 물론 벌거벗은 채로. 그런 내 꼴을 보자 홀가분해지면서도, 우리는 남자 여자로 만난 게 아니라, 그냥 괜히 오래 고달파 온 사람 둘이 함께 하고 있구나... 싶은 웃기는 생각이 들었어. 그때 문득 옷이란 게 세상 밖에서 남녀를 구분 짓기 위해서 입는 것일 뿐이라는 웃기는 생각이 잠시 스쳐가기도 했고... 재작년 내 시 속에 얼핏 담아냈던 벗은 옷 얘기가 바로 그때의 생각을 정리해본 것인데, 사람들은 그 시의 껍데기만 보고 난리법석이었지만, 시의 속살은 사실 그런 거였어요.”

  “......”

  “김사장. 그 사람은 어느 날 카페에서 살아온 이야기들을 조금씩 하게 되었는데, 그 갈비집으로 성공한 그의 아내 얘기가 나왔어요. 그때 같이 있던 사람들이 늦었다면서 자리를 뜨더만요. 둘이서 자알 해봐! 하면서... 농담처럼 하고 간 그 말이 그날 그대로 된 셈이라고나 할까. 김사장한테서, 그의 아내 주변을 맴도는 사내에게 시간을 내주기 위해 카페를 시작한 거라는 얘기를 듣게 되면서였어. 형.”

  “......”

  “형. 뭘 그리 심각하게 듣수? 살아온 얘기로야, 소설들을 보면 형도 만만치 않은 내공을 쌓은 듯하더만. 헤헤헤... 그게 모두 몇 년 전의 얘기들인데, 그 다음 얘기는 내가 진도 빨리 나갈게. 형이 요새 쓰고 있다는 소설에 내 얘기 한 자락 깔아두 돼. 내가 봐줄게.”

  내 어깨를 툭툭 치면서, 여인은 잔을 비웠다. 이어지는 여인의 목소리에 소주 냄새가 확실히 배어나고 있었다. 입가심 삼아 입술에 침을 묻히는 혀끝에도 술방울이 매달려 있는 듯했다. 술을 마시면서도 목말라 하는 여인.


  “하하하, 형. 근데 나 어제 말이유. 큰 실수를 했다요. 아, 김사장과 미사리 공사장 뒤쪽에서 대낮에 카 카 카섹스를 하는데, 공간도 좁고 마음도 급하고 해서 다리를 다 못 벌리고 하다보니, 어우... 새로운 부위의 자극이 어찌나 달아오르게 하던지... 그러다 보니, 아유 글쎄... 내가 김사장한테 늘 쓰는 '아 여보' 소리 사이에, '오 오빠' 소리가 뜬금없이 섞여나오는 것 아니겠우? 내가 00하고 할 때 쓰는 그 말이 말이우. 내애 참. 물론 끝까지 오빠 발음을 한 건 아니구, 옵빠가 옵하 정도로 나오긴 했지만, 온몸에 힘이 들어간 상황에서 저절로 나오다 보니, 옵 소리가 너무 또렷해서... 그 순간 김사장의 표정이 0.5초 정도 약간 이상해지긴 했지만, 내색은 안 하고 하던 동작을 계속하더만요.”

  “아니, 그럼 00이랑은 섹스 할 때 늘 '오 오빠! 오빠!' 하는 말로 하고, 김사장한테는 '아 여보! 여보!'하면서 둘을 구분했단 말이야?”

  “그래야만 할 것 같아서 그랬지 뭐. 형. 나 증말 되게 웃기지? 나 그렇게 살아왔다요. 사람들한테 늘 잘나고 반듯하다는 소리만 들어온 이 000이가. 내가 작심하고 두 남자를 거느릴래서 그리 된 건 아닌데... 울 아버지도 처음부터 그랬을까요?”


  나는 잔을 비웠다. 남은 소주가 몇 잔쯤일까 짚어보기라도 한다는 듯, 나는 병을 들고 시간을 흘렸다. 기껏 해야 1분도 안 될 시간쯤을. 부옇게 바래지고 있던 새벽 하늘은 소주병 속으로 스며들어 되레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래 둘다 앞으로도 계속 함께 할 거야? 그 ‘오빠’와 ‘여보’ 말이야.”

  “아뇨. 실은 오빠와 정리하려고 여러 번 시도했고, 통첩까지 했는데도 질기네요. 고래 심줄만 같아요.”

  “그 친구가 안 떨어져? 내가 그 질긴 심줄 싹둑 잘라낼, 아주 날이 잘 선 칼 하나 줄까?”

  “아뇨, 반반이에요. 오빠가 처음에는 정리할 듯하더니만, 집과 직장 모두 문제가 자꾸 생기니까, 그 핑계로 자꾸만 저를 찾고, 저는 그런 그 사람이 안 돼 보여 단칼질을 못하고... 그렇죠 뭐. 제 칼날이 무딘 건지, 아님 오빠의 기웃거리기가 질긴 건지”


  “그럴 수도 있겠지만, 혹시 그 친구와의 섹스 기억에서 못 벗어나는 건 아니구?”

  기왕지사 섹스가 이야기 좌판으로 끌려나와 있는 참이었다. 게다가 그녀와 나는 언제 어디서나 이야기의 형식과 내용에 얽매이지 않았다. 짧게 하는 술자리 같은 데서 우리는 요긴한 말 몇 마디로 긴 대화를 압축하고 갈무리하는 사이. 단도직입형으로 통해온 사이였다.

 

 

  “ㅎㅎㅎ. 형은 역시 족집게 도사여요. 히히히. 사실, 오빠와 여보, 모두 섹스 쪽에서는 한가락씩 해요. 둘다 좀 밝히는 편인데, 하나는 부드럽고, 하나는 은근히 강하고... 섹스뿐 아니라 전부, 두 사람이 무척 다르면서 겹치는 부분도 많고 그래요. 먹는 것 한 가지에서부터 취향까지도. 심지어, 오빠는 긴 머리쪽을, 여보는 중간 머리 쪽이고요. 오빠는 엉디 부분을 통째로 껴안길 좋아하는데, 여보는 내 다리만 만지고 있어도 행복하다구 하곤 해요... 더구나 두 사람 다 유난히 원피스 차림의 여자를 좋아하고요. 호호호”


  여인은 술기운이 얌전하게 깔린 얼굴을 손으로 한번 쓸어내렸다. 취기를 덜어내려는 것처럼. 하지만, 여인의 손길을 벗어난 얼굴은 새삼스레 붉어왔고, 그 순간 여인은 다리를 모았다. 뽀얀 종아리가 눈에 들어왔다. 새벽녘의 희뿌연 공기를 너끈히 제압하고도 남는 뽀얀 종아리.

  그때 그녀가 한 번도 바지차림을 한 것을 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났다. 항상 스커트 아니면 원피스를 입었다. 그녀의 글이 떠올랐다. 위아래 다른 걸 입으면 거기에 맞게 이것저것 코디를 해야 하는데, 그럴 시간이 없어서 코디가 필요 없는 걸 고르다 보니 원피스를 입게 된다고. 어떤 글속에서 그렇게 적었던 기억이 났다. 이곳저곳으로 바삐 뛰어다니면서, 자신의 소용에 맞게 옷을 갈아입어야 할 처지이다 보면, 훌렁 벗고 훌렁 뒤집어쓰면 그만인 원피스가 가장 입기 편하고 좋은 옷일 수밖에 없긴 했다. 더구나, 사랑하는 남자들 모두가 그 차림을 좋아한다는 데야...


  나는 여인의 말 중에 그 덩치 있는 사내가 부드러웠다는 말과, 좀 홀쭉하게 말라보이던 김사장이 강하고... 어쩌고 하는 소리에 의아해지고 싶었다. 아니, 그렇게 의아해 하는 것으로라도 그녀의 말에 시비를 걸고 싶었지만, 머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내 머리 역시 술에 젖어가고 있었다. 물 먹은 솜처럼 풀어진 몸이 머릿속의 명령과 따로 놀고 있었다.

  아마 그 즈음부터였지 싶다. 내게서 잠시 필름이 끊어지기 시작한 것은. 마치, 우스개 노래 가사 바꾸기 중에 나오던 “중간 생략~ 중간 생략 ” 하다가 “안녕 아아녕!” 하던 노래처럼, 그 다음 장면은 내 집 동네였다. 택시기사가 동네 입구에 들어서면서 어느 쪽이냐고 나를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눈을 떴다. 우리 집 현관 열쇠를 꽂으며 눈에 들어온 동녘 하늘은 어느 새 한지 창문처럼 부옇게 변해 있었다.


  그리고는 세월이 흘렀다. 세월과 함께 그녀에 관한 기억은 떠내려갔다. 치마꼬리에 매달리는 아이처럼, 사람의 기억에 매달려야 눈에 띄기 마련인 그녀의 이야기도 망각 속으로 매몰되다시피 했다. 며칠 전, 그 동안 자주 사용하지 않던 이메일 계정 하나를 점검하다가 그녀의 편지를 대할 때까지는.

  달포 전쯤에 보내온 그녀의 이메일은 제법 길었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최근 소식을 요약판으로 보고한다면서, 그녀는 이렇게 적어왔다.

 

  - 그 뒤로 얼마 안 되어, ‘오빠’는 형이 주겠다고 했던, 날이 잘 선 칼이 필요 없게 되었지요. 어느 날 혼자서 등산을 간 모양인데, 미끄러져 떨어지면서 그만... 실족사인지 뭔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지만, 내가 정리하는 쪽으로 완전히 마음을 굳힌 걸 그가 알고 있었던 때라, 그게 꽤나 오래 저를 옭아맸습니다.


  ‘여보’ 또한 병원에 입원한 지, 석 달 만에 세상과 하직했지요. 형과 그 밤샘 얘기를 한, 그 다음 해 가을에요. 노상 건강 하나는 자신한다던 사람이었는데, 세상에... 위암이었어요. 하루에 커피를 열댓 잔씩 먹어대서 좀 걱정은 되었지만, 위장이나 소화 따위에서 전혀 문제도 없었고, 아프거나 한 일도 없었는데, 어느 날 그냥 한 번 건강검진이라는 걸 한번 해볼까 하면서, 마치 산책나가는 사람처럼 병원에 갔다가 그 길로 검사차 입원, 치료차 입원... 그렇게 됐어요. 순식간에, 겨우 석 달만에 그리 되었죠.


  하루도 거르지 않고 소주병을 끼고 지낸 애들 아빠가 위궤양으로 고생하게 되어, 나는 위암이라면 그런 사람이 걸리는 줄 알았는데, 위암 발병은 위궤양보다는 만성위염 같은 게 더 친한 거라더만요. 그런 일들을 겪으면서 배우게 된 수많은 것 중의 하나랍니다.


  참, ‘여보’가 죽으면서, 내게 선물 하나는 주고 갔어요. 그 카페가 지금은 제 것이에요. 알바 얼굴마담이 지금은 사장이랍니다. 헤헤. 애덜 아빠와는 서류상 이혼이 실제 상황으로 되었어요. 곰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만, 부동산 답사를 다니면서 눈 맞은 년 하나와 꼭 살아야겠다기에, 긴 말 안 하고 얼른 자리 내주고 나왔지요.


  그리고, 이렇게 메일 올리는 것은, 혹시 아시고 계실지 모르지만, 제가 이번에 세 번째 시집을 냈는데, 하나 보내드리려고요. 그 동안 냈던 두 권의 시집은, 형이 더 잘 알다시피 그야말로 철들기 전의 어설픈 제 모습들을 서둘러 크로키로 훑어내기 바쁜 것들이었지요. 이번 시집은 이제야 제가, 여자로서, 세상에 제대로 물든 웃기는 여자로서의 모습을 가림 없이, 그리고 생각을 조금은 차분하게 담근 뒤 걸러서 드러낸 것 같아서요. 제가 보기에는요. ㅎㅎ.

  시집 제목은 “옵하와 여보 사이에서”로 했어요. 철이 덜 든 젊은이들의 빠르고 예각(銳角)적인 사랑과, 철이 쪼매 든 느리고 둔각(鈍角)적인 아줌마의 사랑을 연작시로 만든 게 절반 정도를 차지하는 시집이어요. 형에게 이 시집을 꼭 보내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이유. 짐작하시겠지요? 주소 좀 알려주세요.


  나는 H에게 답을 썼다. 시집을 보내지 말라고. 글쟁이들이 시집을 안 사주면 누가 사주겠느냐는 의례적인, 내 굳어진 고집을 첫머리에 적었다. 그리고 몇 마디를 보탰다. 어떻게 그 세월들을 지냈는지, 남은 세월들의 모습이 어떨 것인지, 그것이 궁금해서라도 빨리 사서 보겠노라고. 그리고 그 독후감이 괜찮은 것이면 메일로 보내겠다고 했다.

 

  아무래도 나는 그녀에게 근간 메일을 쓰게 될 듯하다. 연작시 부분 중, 절반 정도를 읽고 난 지금 생각만으로도. H는 제 어머니는 물론 세상과 세상 남자들 모두에게, 가림 없이 ‘제대로’ 화통하게 다가가고 있었다. 50대의 나이에 걸맞아보이는 숙성(熟成)이 그녀의 신산하기만했던 삶속에서 배어나오고 있었다. 적어도 시집 속에서는. [Sep.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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