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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한 여자

[내 글] 꽁뜨

by 지구촌사람 2013. 3. 7.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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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은미, 솔직한 여자가 사랑도 잘 한다>

 

 

[꽁뜨]                                 솔직한 여자

 

                                                                                                  최 종 희

 

  내 처음부터 다 얘기하지. 그 여자를 만난 건 말이야, 풍물패에서였어. 정확히 말하자면, 공연까지 해낼 정도로 제법 솜씨들이 있는 고급 풍물 연습장에서였어.

  풍물이 갑자기 웬 말이냐고? 아, 이 사람아. 자네랑 함께 했던 그 사물놀이를 얘기하는 거야. 자네도 알다시피, 나야 그때 그 시절에 손맛을 들인 게 전부가 아닌가. 그 이후로는 언제 따로 손 맞춰볼 일이 있어야지. 그놈의 세상살인지 뭔지가 옥조여대는 바람에 말이야. 그 형편이야 자네도 뻔히 아는 거 아닌가.

 

  가끔 티브이 같은 데서 젊은 애들이 나와서 신명나게 노는 걸 보게 되거나, 하다못해 늙수그레한 동네 풍장꾼들이 나와서 한바탕 노는 것만 봐도 자꾸 근질거려오는 건 자네도 마찬가지였을 걸. 가끔 그 근질거리던 게 같이 어울려 한판 놀아보고 싶다는 바람으로 부풀기도 했지만, 어찌 보면 그건 한편으로 우리의 삶에 진짜로 신명낼 일이 없다는 말도 되는 거 아니겠나. 안쪽 어딘가가 비어서 허전하기도 하고, 그 반대로 쓸 데 없는 것들로 꽉 차서 안이 답답하기만 한데 시원하게 뚫리지 않을 때 맛보는 답답함 같은 것 말이야.

  마침, 고교 동창 중에 그런 풍물패에 오래 관여해온 녀석 하나가 있어서 벼르기만 하다가, 서너 달 전부터 회사가 끝나면 그곳에 나가기 시작했지. 수준들이 상당했어. 겨우 얼마 전서부터야 내가 간신히 엇박자 소리를 내지 않을 정도니까.

 

  일주일에 두 번씩 모여서 꼬박꼬박 연습들을 하는데, 식구 수도 만만치 않았어. 그녀의 모습이 내게 제대로 보이기 시작하는 데 여러 주가 걸려야

할 정도였으니까. 근데, 풍물패에 웬 아줌마들이 그리 많아? 안에 맺힌 걸

몽땅 말 못하는 악기들을 두들기는 데다 풀어대는지, 연습장에는 아줌씨들이 사분의 삼 가량이었어. 하기야, 그러고 보니, 풍물에 쓰이는 것들은 죄다 두들겨 패야하는 타악기(打樂器)이긴 하지.

  그 아짐씨들 입은 또 얼마나 건지, 내가 처음 가서는 한 마디도 뻥긋하지 못했다니까. 아, 글쎄 신입인사를 하는 나를 세워놓고 영계가 왔다며 자기네끼리 서로서로 잘해보라며, 내놓고 나를 물건 취급하는 거야. 여편네들끼리 쌈질 안 나게 순서 조정해서 잘들 해보라는 얘기까지, 생판 초면인 내 앞에서들 그냥 드러내놓고 시시덕거리더라니까. 지들 또래거나 아니면 차이가 난다 하도 겨우 두어서너 살 정도로 위아래일 듯한 나를 보고 말이야. 얼굴이 얼마나 뜨거워지던지, 내참......

 

  그런 와중에 그 애가 (나중에 알고 보니 내 셋째 동생과 동갑이더라고)처음에 내 눈에 띈 건 바로 내 옆자리에서 연습할 때였어. 나처럼 직장 끝나고 오는 사람들은 가끔 시간에 늦기 마련이어서 뒷전에들 앉게 되는데, 어느 날 첫 판 연습을 끝내고 보니 그녀가 내 옆에 앉아있는 거야. 은근히 반갑더군. 그때의 이유야 딱 한 가지였지. 질펀한 말투로만 보아도 아래위로 뚫린 곳마다 슬슬 쉰내를 조금씩 풍기기 시작하는 듯한 아짐씨 천국에서, 기혼인지 미혼인지 아리까리한, 그야말로 묘령의 여인은 거기서 그녀 혼자였거든.

  묘령의 여인. 그 말이야말로 우리에게는 회춘의 묘약 같은 말 아닌가. 마치, 곧장 청춘 시절로 되돌아갈 수 있는 직행열차 표와도 같은 거 말이야. 간혹 얼굴이 노숙하게 보이는 바람에 중년 소리만 듣게 되어도 펄쩍 뛰면서 그 말을 장년으로 바꿔달라고 우기고 싶은 우리들에겐 그렇지 않은가.

그 놈의 청춘이란 것과 겨우 십여 년 남짓한 간격 밖에 없는데도, 이제 우리는 그 세월의 벽 저 건너편으로 확실하게 내팽개쳐진 기분이 들곤 하지 않던가. 자네가 그 피시 통신인지 뭔지에 빠져 지내는 것도 내 짐작엔 아마 그런 쉰 세대로 강제 편입될 때마다 느끼게 되는 허전함과 억울함 때문이지 싶어.

 

  그래선지, 나는 그때 그 묘령의 여인이란 낱말 하나가 겨우 떠오른 참인데도, 은근히 그걸 만지작거리거나 쓰다듬어보고 싶고, 긁어보거나 뒤집어보고도 싶어지더군. 그런 판국이었어. 그 다음다음 주쯤의 연습 때인가 일거야.

  그녀가 또 내 옆자리에 앉아있는 거야. 게다가, 그녀 옆에는 문고판 책 한 권이 놓여 있었는데, 보니까 헤르만 헤세의 <황야의 늑대>야. 허허 그거 참. 인연도 묘하지.

 

  기억나지, 자네? 우리 대학 시절 말이야. 우리 같은 이류 대학의 학보사도 신문사 축에 낀답시고 그곳의 기자를 무슨 대단한 벼슬인 것처럼 여기며 은근히 기고만장해서 지내던 시절에, 내 짝꿍 삼았던 애경이 말이야. 그 새침데기를 좀 어떻게 해보려고 집적거렸을 때, 그 애가 맨 처음 애를 먹인 게 바로 그 책을 읽어봤느냐는 질문이었어. 독문과 아니랄까봐.

  못 읽어봤다는 소리는 죽어도 안 나오더만. 그래서 얼렁뚱땅 얼버무리고

돌아와서는 잽싸게 한 권을 사서 후딱 읽어보고서는 기회가 왔을 때 내가

오히려 그걸 써먹었지. 세상은 마치 그 <황야의 늑대> 같은 구조가 아니겠느냐고 은근히 거들먹거리면서 말이야. 하숙집 남자가 맨 처음 이야기의 문을 열면 그 속에서 주인공에 대한 소개가 나오고, 그 주인공 하리가 그의 수기(手記)를 통해서 다시 그의 세계를 열어 보이는데 거기서 또 다시 환상의 세계가 나오는 식으로, 세상은 여러 겹으로 된 다층구조라고, 썰을 풀었지.

  그래서 우리 앞에 펼쳐질 세상 또한 그렇게 수없이 많은 문 열기를 해야할 대상이므로, 둘이서 그렇게 세상 열어보기를 해보지 않겠느냐고, 속이 뻔히 보이는 소리를 써먹었지. 애경이와 내가 본격적으로 서로의 문을 빼꼼 열고 서로를 들여다보기를 하는 작업은 그렇게 해서 시작된 셈이었어.

  하지만, 애경이는 내게 그녀의 문을 절반도 안 열어줬어. 그 애가 그 후기 대학의 학사증을 받는 걸 끝까지 달갑지 않아 했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을 정도니까. 내 군대 있을 때 고무신 거꾸로 신고서 품에 안긴 놈도 그 잘난 일류대 출신이었거든. 여자들이란 한번 서운한 건 어떻게든 앞뒤 재지 않고, 잊지도 않고 앙갚음을 한다는 말이 맞긴 맞어. 그 놈의 일류 대학이 뭔지, 참......

  잘 사느냐고? 십여 년 살고 깨졌다는 소리 들었어. 그 애가 보기와 달리 얼마나 밝히는 게 많았는데... 세상에 대한 욕심을 안주 삼아 마시던 술도 나보다 한 수 위였고, 그렇게 취한 날은 하숙집으로 데려다 줄 수도 없어서 돈 내고 하룻밤 묵는 곳으로 가곤 했지. 그럴 때면 밤새 내가 시달렸어. 아이구. 그 애는 술만 들어가면 끝없이 밝혔거든. 학을 뗄 정도로. 소리는 또 얼마나 질러대는지. 근데, 술만 깨면 그런 걸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거야......

  그 애가 고무신 거꾸로 신었을 때, 눈앞에 보이면 작살나게 패주고도 싶었지만, 이것저것 생각해보다가 내 것이 아니다 싶어서 성질 접어두게 된 것도 그런 저런 그녀의 이면 덕을 좀 본 셈이지...... 그래도 첫사랑이 뭔지 이따금 생각은 나더군. 내가 다 모르는 그 애의 속에는 또 뭐가 들어있었을까 싶기도 하고.

 

  그러던 참에 풍물 패거리에서 그 여인을 본 거야. 아니, <황야의 늑대> 를 오래간만에 또 다시 대하게 된 거지. 그날 저녁, 둘이서 간단하게 뒤풀이를 하게 된 건, 그러므로 순전히 그 책 덕분이었어. 그걸 보고 내가 아는 체 좀 했거든. 애경이에 대한 뿌리깊은 내 반감이 조금 작용하기도 했고.    

  사연이 있는 책들은 세월이 흘러도 먼지만 털어내면 이내 기억이 생생해지잖아. 그 다층구조 얘기를 슬며시 꺼내봤지. 그 반응이 궁금하기도 해서.

 

  그랬더니, 술자리 내내 입에 살짝 대기만 한 뒤로 손을 대지 않던 잔을 들어 한 모금 하는 거야. 여자들이나 남자들이나 술 한잔 놓고 얘기하다가, 상대방의 말을 듣고 뭔가 등골을 타고 내려가는 게 있으면 술잔에 손부터 가게 마련 아니던가. 절반쯤 잔을 비우고 나서는 이렇게 말하더군.

- 결국 그렇게 그렇게 한 겹, 한 겹 상대방을 벗겨내는 게 세상살이라는 얘기 아닌가요? 처음 보는 자리에서 그런 말을 들으니 좀 의외이긴 하지만, 솔직해서 좋네요. 나는 그동안 남자들을 보면 의도적으로 포장한 절제를 풀어놓을 수 있음을 슬쩍슬쩍 내비치면서, 슬금슬금 여자들을 향해서 다가오는 사람들뿐인 것 같아서, 그런 사람들에게 정말이지 진력을 내고 있었거든요. 나는 솔직한 사람들이 좋고, 나 역시 솔직한 편이라고 할 수 있지요. 아니, 꼭 솔직하고 싶어서, 솔직해지지요. 간접화법이나 우회전략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다고나 할까......

 

  역시 내 짐작, 아니 소망대로였어. 그녀의 말을 듣고 나자, 그 앞에서 눈치 보느라고 조금은 답답해진 내 마음이 단번에 시원하게 뚫리는 기분이 들더군. 그리고 나서 어찌 되었느냐고? 궁금한가? 미안하네만, 그 날은 그렇게 술 한잔만 가볍게 하고 끝났다네. 소득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야.

  그 후로 우리 둘만의 뒤풀이뿐만 아니라 앞풀이로도 이어졌거든. 연습이없는 날, 서로 시간이 맞으면 저녁도 하고 했지. 자네가 기억할지 모르지만 내가 이따금 자네에게 여자들에 대한 최신판 취향과 근황들에 대해서 피시 통신에 떠도는 것들을 몇 번 물어볼 때 있었지? 바로 그때였어.

 

  아내 아닌 여자와의 가까운 접촉이란 게 술 냄새 풍기는 여자들과 두어 번 수표 쪽지와 맞교환으로 몸 풀이를 해 본 게 전부인 내가, 아, 그런 진품에게 자신이 있어야지...... 자네한테 얻는 최신판 정보가 도움이 될까 해서 그랬던 거야. 푸후후. 지금사 말이지만, 아주 조금은 도움이 되긴 되었다네.

  요즘 사람들의 화제거리가 뭔지 감이 잡히면서, 그녀의 이야기에서는 세상의 쉰내가 거의 풍기지 않는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

 

  그녀는 꽤 괜찮은 합작회사의 홍보 담당이었어. 회사의 입과 얼굴이라고도 할 수 있는 전문직 말이야. 하지만, 그녀는 말수가 적은 편이어서, 주로 내가 화제를 이끌어야 했지. 그렇긴 해도 아주 무거운 편은 아니어서 간간이 보내오는 응수는 재치도 있었어. 특히, 그녀의 입에서 <솔직히 말해서>

소리만 나오면 내 귀가 솔깃해지더라고.

  예를 들면 그녀의 몸매 얘기를 할 때도 그랬어. 솔직히 말해서 좀 신경이 쓰이는 부분이라고 하더만. 하지만 그 말엔 내가 펄쩍 뛰었지. 그녀는 내가 좋아하는 타입이었거든. 거 있잖아. 삐쩍 마르지 않고, 나올 데 다 나온 여자 말이야. 들어갈 데야 한 군데만 빼놓고는 내게야 문제될 게 없지만 거기까지야 들여다보지 않고는 모르는 일 아니겠나?

 

  그래서 내가 말했지.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 끝내주는 몸매라고. 그리고, 한 마디 더 보태서 그녀를 안심시켰지. 삐쩍 마른 사람들은 대개 타인뿐만 아니라 자신에게조차 너그럽지 못해서 마르는 거라고.

  그러자, 그녀가 해죽 웃더군. 하여간 내가 볼 때, 그녀는 이러저러한 조건을 거의 다 갖추고 있는 편이었으니, 날이 갈수록 내가 뿅 가지 않을 수 있었겠어, 하하하.

 

  그리고, 허투루 아는 체하지 않는 것도 그랬어. 은근히 오래 사귀어도 될 만한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게 했지. 이 세상에는 몰라도 아는 체 하는 연놈들이 좀 많아? 그래봤자, 신문 나부랭이나 티브이의 연예계 소식, 월간지 한두 권에서 주워들은 게 전부일 테지만 말이야.

  게다가, 엄숙한 척 하는 걸 또 싫어하는 척 해야 하는 게 패션이고. 하지만, 그 결과가 뭐야. 너나 할 것 없이 무겁지 않은 척 하려들다 보니, 이젠 거꾸로 몽땅 가벼워진 거 아니겠어? 안에 든 게 없으니 본래 무거울 턱도 없어서, 잘 됐다 싶어서 날뛰는 거지. 본래의 경박함을 이제는 가릴 필요가 없어진 거야.

 

  그런데, 말수가 적은 그녀를 통해서 확인한 것은 그녀 역시 비슷한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있다는 거였어. 솔직히 말하자면, 자기도 똑같은 생각이라면서 맞장구를 쳐오더군. 뭔가 다른 걸 분명 안에 가지고 있는 여자였어.

아무래도 그 전문직이라는 걸 가지고 있어서였을 거야. 전문직종의 여자...

  이게 또 여간 아니지 않은가. 뭔가 속살이 차있다는 얘기지. 다시 말해서, 연필을 까보면 드러나는 심 같은 것이 그녀를 받쳐주고 있어서 빈 속, 빈 주머니가 아니라는 말이기도 하지.

 

  여자들이란 그렇잖아. 본래 빈 주머니로 시작해서 빈 주머니로 끝나는 거 말이야. 어려서 학교를 마칠 때까지 부모가 돈으로 그 빈 주머니를 채워주고, 시집가면 남편이 그 빈 주머니들을 채워주잖아. 호주머니서부터 뱃속 안 깊숙한 곳까지 죄다 말이야. 흐흐흐.

  그러다 보니, 이혼 소리를 노랫말 삼아 지내는 여자들 중에도 홀로 살아낼 재주 하나, 실력 하나 제대로 없어서, 맨날 속으로만 지지고 볶으며 지내다가 중도에 기진하여 긴장이 풀리면, 막판에는 에구 모르겠다 싶어서 질펀하게 퍼질러 앉아 지내게 되는 사람들이 좀 많아?

 

  아이를 낳아 키우는 일도 빈 주머니가 되는 연습이라고들 하대. 그렇게 키워서 시집 장가보내면 암 것도 남는 게 없어서, 관심을 얻어보려고 그 렇게 시집살이니 뭐니 하는 걸 시키는 노망도 부리고 그런대잖아. 하지만, 그녀는 든든하게 차 있는 안만큼 생각도 차 있는 게 분명한 것이, 두어 번에 한 번 꼴로 자신이 앞장서서 계산대로 향하는 것도 잊지 않았어.

  그럴 때마다 그녀는, 남자들한테 얻어먹기만 하면 솔직하게 얘기해서 쥐뿔도 잘난 것 없고 호주머니 사정이 특별히 나을 것도 없는 사람들에게 얻어먹는 것 같아서 속이 편치 않다는 말도 하더군. 나을 것도 없다는 호주머니 얘기를 할 때는 나도 은근히 찔리더군. 자네나 나나 형편이야 한 집 건너 두 집이니, 내가 더 말 안 해도 알겠지?

 

  마지막으로, 그녀가 맘에 드는 게 또 있었어. 내가 애경이한테 질린 것 중의 하나, 즉, 그 술만 먹으면 쉽게 흐트러지던 모습을 전혀 볼 수 없었다는 거야. 그도 그럴 수밖에. 술 자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더라고. 난 또 땡잡은 거지. 솔직히 말해서 지금까지 술을 먹고 끝까지, 몇 해가 되든 그 만남의 끝자락까지 내내 뒤끝이 깨끗한 사람은 한 사람도 보지 못했다며, 그녀는 고작 한두 잔 하는 게 전부였어.

  여자들 술. 그 또한 무난한 사이가 되고 보면 그것처럼 문제인 것도 없지 않은가. 술이 약한 여자는 한잔 술에 게걸거리기도 하고, 약속 시간을 제법 넘기고 가보면 홧김에 혼자서 마신 술잔 수도 헤아리지 못하는 고주망태형도 있지. 보통보다 조금 빠지는 편인 자네나 나보다도 주량이 센 여자들도 좀 많아. 외모나 평소의 하는 짓거리로 보아서는 보리밭 근처에만 가도 비틀거릴 듯싶은데도 소주 두어 병을 해치우고도 끄떡없는 여자들 말이야.

 

  여자들 술 먹고 작심하고 엉기는 것처럼 기분 더러운 것도 없지. 완존 인사불성 아닌가. 약하면 약한 대로, 세면 센 대로. 거나하게 취기가 올랐다 하면, 대뜸 지르는 첫 마디가 “야!” 아니던가. 쏟아내지 못하고 내내 끌어안고 지내는 바람에 안에서 굳어버린 조청처럼 단단하게 엉긴 그 한 마디. 그 비명 같은 호명에 이어, 여인의 손이 허공을 두어 번 힘없이 긋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앞이 아득해지는 거지.

  어떻게든 한번 눕혀보려고 벼르기만 하던 눈에야 굴러 들어오는 먹이라서 웬 떡이냐 싶기도 하겠지만, 그렇게 제 풀에 힘없이 가는 여자들은 쉰 떡일 때가 많잖아? 술 냄새 하나만으로도 말이야.

 

  하여간 그렇게 두어 달을 지내다가 드디어 날이 왔어. 그녀의 생리일까지 알게 되고 나서였지. 그런 것까지 또 어떻게 알았느냐고? 그녀가 얼마나 솔직한데...... 어느 날 이틀이나 회사에 나오지 않았기에 뒤에 물어 봤더니 망설임 없이 대답하더라고. 그때가 되면 이틀은 완전히 뻗어 지낼 정도로 심하게 아파서 ML과 PL 두 개를 다 써야한다고 말이야.

  ML과 PL이란 말, 자네 모른다고? 월차휴가 Monthly Leave의 머리글자와 생리휴가 Period Leave의 약자야.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그녀는 잘 나가는 외국인 합작회사에 다니고 있었다고.

 

  암튼 그 날은 둘이서 저녁을 먹고 노래방을 갔다가 다시 칵테일 바에까지 가서 한 잔을 더한 날이었어. 그녀의 표정이 많이 달떠있어서 낌새가 조금 다르긴 했지. 그 전에도 노래방까지 간 적이야 몇 번 있었어. 나란히 서서 노래할 때나 노래방을 벗어나면서 그녀의 허리에 손을 두르기도 하고 엉덩이를 슬쩍슬쩍 스치기도 했지만, 입을 맞출 정도로까지 진척되진 않았을 때여서 나도 조금 의외이기는 했어.

  집에 가서 차 한잔 하고 가라는 말이 그녀의 입에서 나왔을 때 말이야. 그때 든 생각이기는 하지만, 남녀관계라는 게 어디 표준전과대로만 진행되라는 법이 있던가. 건너 뛰기도 하고 일보 후퇴도 하고 그러는 거 아닌가.

 

  그녀의 방은 과연 내 짐작대로였어. 잘 정돈되어 향수 냄새 솔솔 풍기는 방이었느냐고? 천만에. 모르는 사람들은 그리 생각하기들 쉽지만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지. 정돈이 제일 잘 되고 향긋한 냄새까지 나는 방은 몸을 파는 여자들 방이고, 혼자 사는 능력 있는 여자들의 방은 모든 것이 불규칙적이라는 점이 특징일 거야.

  마지막 밥을 한 게 언제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한 밥솥과 햇빛 사냥을 한 지 오래된 침대 위의 스프레드시트가 생활의 불규칙성과 나태를 상징한다면, 여기저기에 나동그라진 옷가지들과 꽁초로 넘쳐나는 재떨이 같은 건 구멍 뚫린 자유, 농도가 잘못 희석된 방종의 깃발이기도 하지. 통털어 뭐랄까. 방안에서는 음지식물군의 냄새가 나고 있었어. 조명이 아주 밝았는데도. 땡볕에 질겁하면서 몸을 가리려고만 하는 사람들의 냄새와 비슷하달까. 하기야, 그런 사람들은 세탁물까지도 햇볕에 말리려고 하지 않지.

 

  하여간, 기대되면서도 은근히 두려워지는 시간이 다가왔어. 술까지 몇 잔 한 터여서 나는 속으로 조금 안심했지. 그렇게 안심하려고 노력했다는 편이 더 옳겠지만... 그녀를 안고 있는 동안 침대 이불에서 좀 눅진한 냄새가 난다 싶었을 때, 그것 또한 내가 그녀에게 집중하지 않고 다른 곳으로 신경을 쓸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 싶어서 나는 반겼지.

  그런데도, 여전했어. 내가 이내 나동그라진 거지. 내가 올라선 동그란 지표면이 상하좌우로 심하게 움직이고 있다고 느껴지는 순간 그만 신경줄이 내 통제를 벗어나 스르르 풀리고 말았어. 정말 낯 뜨겁더군.

 

  담배 한 대를 피어 물고, 어색한 표정으로 커피 한 잔을 나누며 시간을 번 뒤 나는 이를 악물고 다시 도전을 했지. 집에서의 경험을 떠올리면서 말이야. 정말이지 이를 꽉 깨물고 재도전을 하면 좀 더 시간을 끌 수 있었거든. 하지만, 결과는 여전했어.

  이번에는 그 자리에 가만히 머물고 있던 그녀의 안이 어찌나 조여 오는지 거기서 내가 견뎌내지 못했다고 하면 궁색한 변명이 되려나? 그녀 얼굴을 쳐다보기조차도 민망해서 담뱃불을 붙여 건넨 뒤 나는 아예 방바닥으로 내려와 침대에 등을 기대고 그녀와 외면한 채 담배를 피워 물었지.

 

  그때 그녀의 담배 연기 사이로 클클거리는 웃음소리가 새어나오더니, 말

소리가 따라 나왔어.

- 솔직히 말해서, 세상 종말이 온다고 가정하고 최후의 5분이 주어졌다고 했을 때 무엇을 하겠느냐는 우스갯소리를 들었을 때, 나는 그걸 웃자고들 하는 소리로만 알았어요......

- 무슨 얘긴데?

- 두 사람이 있었는데 그 5분 동안 뭘 하겠느냐고 묻자, 남자가 말하길, 당연히 자기하고 찐하게 사랑을 해야지 했대요.

- 그런데?

- 그러자 여인이 대답하기를, 그럼 나머지 2분은 뭐하고? 하고 물었대요. 푸하하하하...... 이런 저런 사람하고, 솔직히 말해서, 양 손가락이 모자랄 정도로 사랑을 치러봤지만, 이런 경우는 정말이지 난생 처음이에요. 나는 그게 우스갯소리에나 있는 줄만 알았는데, 쿡 프흐흐흐흐.

 

  어떻게 그 집을 빠져 나왔는지 모르겠어. 아무렇게나 옷가지를 주워 꿰고 그녀의 방 하나가 매달린 건물을 벗어나 정신없이 걷고 있는데, 그녀의 그 웃음소리가 내 머리꼭지에서 떨어져 나가지를 않는 거야.

  그녀 안을 꽉 채우고 있었던 그 느긋함이란 게 수많은 남정네들과의 실전 사랑 경험에서 거둬들였던 흡수물들로 이뤄져 있었던 거라는 생각이 들자, 그 웃음에서 오물 냄새까지도 나더라고. 어쩐지 방안에서도 좀 퀘퀘한 냄새가 난다 싶더라니.

 

  풍물연습? 말도 꺼내지 마. 다시는, 절대로, 죽어도, 안 나갈 거야.

                                                                 [Dec.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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