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안방 베란다 창문이 박살날 때도 있다
어느 날 안방 베란다 창문이 박살났다. 그 원인이 중요할 때도 있지만, 따질 필요가 없을 때도 있다. 지진/폭발/특급 강풍/화재나 돌에 맞아서일 때도 있지만, 유리 피로도 있다. 잔모래 따위에 오래 얻어맞거나(?), 강한 햇볕에 장기간 노출되어 내상이 쌓인 끝에 끝내 자진하고 만다. 차의 앞 유리창처럼. 나는 그걸 ‘유리 피로’라 부른다. 오래 오래 쓰인 금속 부품이 저절로 파괴되는 금속피로와 사촌 간. 사람 또한 그와 같아서 '인간피로'의 극점에 이르면 자진한다.
박살난 베란다 창문. 그것도 안방의 것. 순간 망연해지면서 아무 생각도 안 난다. 가슴 안에서 나는 철렁철렁 소리가 도리어 나를 거머잡고 정신 차리라고 흔들어댄다.
한참 시간을 흘려보낸다. 그저 그냥 시간을 바라본다. 한동안. 이윽고 이미 벌어진 사태 앞에서는 하릴없음을 수긍할 수밖에 없다.
뒤섞여 뒤죽박죽 피어오르는 생각의 갈피들을 꼭지를 지어 늘어놓는다.
1. 박살난 유리 조각들을 테이프로 모아 대충이라도 형체를 수습하여 창문에 붙인다.
2. 조각난 유리 모음보다는 차라리 큰 비닐 하나로 그 자리를 때우는 편이 깔끔하지 않을까
3. 아예 유리 없이 며칠 지내보는 건 어떨까. 더우면 더운 대로, 추우면 추운 대로 외기(外氣)를 그대로 맛볼 수 있지 않은가.
4. 뭘 그리 복잡하게 생각하나. 새 유리창 끼우면 되지... →아이고. 저 큰 유리창 새로 끼우는 비용과 수고를 새로 해야 하는데???
5. 새 유리창을 끼운다 하더라도, 이번 사건의 원인도 알아보지 않으려 한 채로 하면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 말란 법이 없잖은가. 그럴 때마다 바보짓을 되풀이한다?
1번 안은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보기에도 쓸모에도 영 아니다. 그저 그 자리에 유리창이 있어야 할 것을 고집하는 욕심일 뿐. 게다가 깨어진 조각들을 바라볼 때마다, 그 파괴 현장의 기억들도 함께 떠오를 것 아닌가. 2번 생각은 손쉬워서 편리한 대책이지만, ‘유리창’의 자리에 ‘비닐창’이 들어서게 된다. 목적 대상의 가치와 실체(외관 및 본질), 그리고 효용이 통째로 저급화되는 일. 아무리 미인도가 필요하다 해도 맘에 담아두고 있던 미스코리아가 있던 자리에 어디서고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창녀의 그것을 갖다 걸어둘 수는 없다.
3번의 생각은 그럴 듯하다. 문제는 그 기간이다. 언젠가는 그 자리를 무엇으로든 메꿔야 한다. 1년 한 철도 제대로 넘기기 어려울 걸... 바깥 날씨들이 틀림없이 나를 쓰러뜨리고도 남는다. 4번 생각이 제일 확실하다. 단번에 원위치 되고, 대체물이나 그 대체 방법 생각 등으로 괜히 시간을 허비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문제는 남는다. 5번.
이윽고 내 생각에 매듭 하나를 짓는다. 서두르지 말자.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자. 방법은 한 가지뿐이 아닐 수도 있다. 아니, 정작 중요한 것은 이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는 내 마음이다. 내 마음에 시간을 주면, 가라앉는다. 그럴 것이다. 한방에서 아주 좋은, 손쉬운 해독제로 쓰이는 지장[수](地漿.地漿水. 황토(黃土)로 된 땅을 석 자쯤 팠을 때에 그 속에 고이는 맑은 물)도 처음엔 황톳물이다. 시간을 주어 맑게 가라앉았을 때, 해독제가 된다.
모든 인간사(人間事)의 으뜸 해독제는 역시 시간이다.
-溫草[Jul.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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