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비엔날레 유감(有感), 유감(遺憾), 유감(流坎)*!
광주 비엔날레. 1995년부터 시작되어 올해 12회가 되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국제적 행사다. 세 군데서 열리는 비엔날레 중 규모도 최대. 올해는 43개국의 작가 165명이 300여 점을 전시하고, 전시 장소도 본관 격인 용봉동의 비엔날레관 외에 구 도청 근처의 문화창조원도 있고, 몇 군데에서의 야외 전시도 있다.
연륜이란 게 뭔가. 세월의 더께가 쌓이면 모든 면에서 발전해야 한다. 솟구치거나 도약하지는 못하더라도 퇴보하진 말아야 한다. 특히, 행사 주최/진행/홍보 등과 관련된 실무 분야에서...
이번 행사? 그런 점에서는 낙제점이다. 퇴보라 이름 지어도 모자랄 정도로. (내 개인적 감정 표현이 아니다. 점잖게 표현해야만 하는 중앙지들의 평 또한 그다지 아름다운 편은 아닌 것이 그 증좌이고, 외국 작가들이 입장을 기다리면서 내 옆과 앞에서 한 시간 가까이 끼리끼리 웅성거리는 말들 또한 칭찬보다는 비판 쪽이 드셌다. 특히 다른 나라 사례와의 비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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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6시에 파주 집을 떠나 광주역에 점심때쯤 도착했다. 이전에 광주를 경유지 삼아 한 끼니를 채운 뒤 목포나 순천/해남 쪽으로 간 적은 있어도 1박을 전제한 방문은 난생처음. 그야말로 초행길이나 다름없다.
역 앞의 드넓은 사거리 길.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 한 군데에도 광주비엔날레 행사나 행사장 안내 현수막이 보이지 않는다. 하나도 없다. 자그마치 66일간이나 펼쳐지는, 광주 최대의 행사인데도.
역에 딸린 관광안내소로 갔다. 어딜 가든 그곳 시내의 대형 지도를 갖고 다니면 혼자서도 잘 찾아가 노는(?) 게 내 기본기라서. 안내소 직원도 그날이 광주 비엔날레 시작 날이라는 걸 모르고 있었고, 그런 사정은 문화원을 갈 때와 행사장으로 향하기 위해 이용했던 택시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누구 하나 알고 있지 못했다.
되레 시큰둥했고, 날 선 비판을 쏟아내기도 했다. 시 예산 낭비는 물론이고, 행사 때마다 초중고 학생들을 죄다 동원하고 심지어 유치원생들까지도 동원하여 단체 표를 파는 사업이라고.
‘문화창조원’이라는 생경한 이름 대신 더 많이는 문화의전당으로 불리는 그곳이 비엔날레 전시장 중 하나라는 건, ‘아시아문화전당’이라는 커다란 옥상 간판을 달고 있는 건물 내 사람들도 모르고 있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전시장 중 하나로 공식 자료에 표기된 ‘아시아문화전당’이란 곳을 찾아 갔을 때. 분명 초대장에 명시된 전시장 명칭은 아시아문화전당인데 그곳을 가보니, 5.18 항쟁으로 유명한 구 도청 자리. 거기가 이름표를 그렇게 바꿔 달고 있었다. 내가 찾는 전시장은 그 전당의 5층이라 표기돼 있었는데, 주변 건물을 보니 제일 높은 게 3층짜리와 3.5층짜리 건물. 그중 하나에 현수막이 걸려 있길래 들어가 물어보니, 내가 찾는 곳은 거기서 좌측으로 100여 미터 떨어진 곳이란다. 정확히는 지하에 위치한 선큰 가든 지역. 그러니 건물명 간판 표기가 지상에서 보일 리가...
다가가서야 보이는 그 건물 이름 표기도 가관이었다. 영문 간판에는 ACC(Asia Culture Center)라 되어 있고 그 위에 표기된 한글 이름표는 ‘문화창조원’. 그럼 행사용 리플릿에 표기된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워디 있는 겨?? 그곳 단지 전체? [사족 : 문화센터가 광주 시민을 위한 것이면 광주 문화 센터면 족하지, 그 앞의 아시아는 또 뭘까. 한국 사람들조차 제대로 수용할 수 없으면서... 허울부터 부풀리는 그런 짓, 제발 그만둬야 한다.]
어찌 됐건 속칭 ‘문화원’은 지하 3층(4층?)짜리의 선큰 가든. 그럼에도 내가 찾아가야 할 행사장 출입구에조차 전시작(작가나 주제명 따위)에 대한 정보는 하나 없이 그냥 일반적인 비엔날레 공통 안내판뿐(광주 어쩌고저쩌고. 기간. 표어인 Imagined Borders... 따위).
지상에서 처음 일러준 지하 3층에는 찾는 전시관이 없어서 지하 2층으로 올라가 두 번째 전시장 비슷한 곳을 기웃거리고서야 목적지를 찾았다. 같은 층에 젊은이들이 꽤 많이 몰려 있었는데 그곳에는 연예인 아이들인지 뭔지 하는 이른바 ‘아이돌’의 소품 행사 중. 그 안내 간판이 바깥에서부터 요란해서 처음엔 나는 그게 비엔날레 전시 간판의 하나인 줄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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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전시장에 이르는 그 복잡한 길 찾기와 안내 정보 부재를 뚫고 내게 훅 끼쳐 온 공기(空氣)가 귀띔해주는 말, ‘광주는 아직 문화 후진 지대’라는 것이었다. 하기야, 호남선 복복선 공사도, 고속철 공사도 가장 늦게 이뤄진, 제일 오래 하대 받는 지역이었음을 떠올리면 안쓰러움도 차오른다. 하지만, 지역의 최대 문화 행사 안내와 같은 기본적인 것들 따위야 중앙의 손길을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것임에랴.
우리가 생각 없이 후진 문화 지역으로 여겨 왔던 중국. 그렇지만, 그곳의 전시장들을 가보라. 초행길 외지인이라도 누구나 쉽게 찾아갈 수 있게 돼 있다. 심지어 호텔 방 안에 행사 관련 자료들이 비치돼 있기도 한다. 북경, 상해, 광주만 해도.
국제 전시 행사가 주 수입원의 하나로까지 발전된 밀라노에서는 택시 기사에게 행사명만 얘기해도 알아서 데려다 준다. 심지어 전시 행사 중 어느 부분이냐고 물으면서 (전시관들이 엄청 많다), 바로 해당 전시관 출입구와 가장 가까운 데서 내려준다.
독일의 뒤셀도르프 같은 데서는 택시 기사가 민박형 숙박업소까지도 꿰고 있어서, 호텔을 잡지 못했거나 교민 집 예약을 놓친 이방인들에게 얼마나 고마운 존재가 되는지 모른다.
시카고는 아예 전시관 건물들이 클러스터를 이루고 있고, 그 구역 전체가 전시용 블록으로 특화되어 있다. 전시 기간 중에는 셔틀 버스 운행을 하는 곳만도 넘쳐날 정도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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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진짜로 황당한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개막식 VIP 좌석 찾기.
야외에 마련된 행사장에 이르니, 여러 대의 보안 검색대가 보였다. 그 주변에 보안 요원과 행사 담당 직원들도 여럿. 예술 행사가 아니라 마치 무슨 국가원수 참례 행사 수준. (나중에 알고 보니 김정숙 여사가 이른바 ‘내빈 축사’자였다.)
초청장을 내밀었더니, 여러 장으로 짧게 짧게 구획된 명단을 뒤지고 또 뒤졌다. 한참을 대충 찾더니 못 찾겠다면서, 왼쪽 보안 검색대로 가란다. 가방을 열고 그 속까지 뒤지고, 호주머니의 것들도 죄다 꺼내 놓으란다. 검색대를 넘어서서는 공항에서의 ‘그 팔 높이 들고 벌려’ 자세로 다시 검색. 그렇게 해서 줄을 쳐서 만든 길을 따라 자리를 잡고 보니, 단하에서 멀리 떨어진 곳. 뭔가 이상해서 옆 사람에게 물어보니, 자기들은 초청장 없이 그냥 왔단다.
다시 나가서 초대객들의 입장 장소를 물었다. 그러자 ‘아. VIP시군요’ 하더니, 방송국 중계차가 있는 쪽으로 가란다. 그곳으로 가니, 출품 작가, 초대객, 언론, 미술계 인사... 등등이 끼리끼리 담소 중. 하기야 행사 시작까지는 시간이 꽤 많이 남아 있었다. 나도 지면이 있는 이들과 두어 번 악수를 하는 사이에 초면이거나 이름으로만 익힌 이들과도 악수하고 명함들을 주고받고 하는 일을 했다.
그 사이 시간이 된 듯하여, 입장용 비표(祕標)를 받기 위한 줄에 섰다. 식탁용으로 흔히 쓰이는 테이블 앞에 세 직원이 앉아 명단 확인을 하는데... 그 명단이라는 게 가관. 참석자들의 소속이나 직업, 등급 등에 따라 세분한 것까지는 좋은데, 전체 명단이 없었다.
지정좌석제로 참석자들을 구분할 때는 가나다순으로 작성된 전체 명단을 원부로 삼고, 그룹이나 각 열별로 참석자들을 세분한다. 즉 방문객들을 상대할 때는 전체 명단을 보고 그 그룹과 좌석 배치를 확인한 후, 그룹별(좌석별) 명부로 가서 비표를 떼어 주는 것이다. 그런데, 그 기초적이라 할 수 있는 가나다순 명부가 없이 그룹별 명부로만 쪼개져 있었다.
게다가, 그 그룹별 명부 구분이라는 것도 주먹구구식. 공무원, 예술계, 언론계 등으로 크고 쉽게 구분하면 좋았을 터인데, 그걸 처음부터 직급이나 등급 구분을 해서 세분화했는지, 직업과 이름을 대면 그 좌석 번호를 찾는 데에 최소한 1분 이상은 걸렸다. 세상에나... 내 이름은 몇 번을 뒤져도 나오지 않았다. 제대로 찬찬히 살펴보기에도 불편한 것이 그룹별 참석자 이름조차도 가나다순이 아니었고.
그 초청장은 참석 여부만이라도 알려달라는 일반적인 수준의 RSVP 방식이 아니었다. 참석할 경우는 이름, 소속, 직업, 연락처... 등을 따로 적어서 반드시 이메일로 담당자에게 신고(?)해야 하는, 엄격한 방식. 바로 자신들이 명명한 VIP 좌석 배치 때문이었다. 이름과 좌석 번호가 일치해야 하는...
나는 ‘다시 한 번 더 찾아보겠습니다’ 하는 여직원의 말에, ‘됐어요. 뒤에 기다리는 사람들 많아요’로 만류했다. 광주역 앞에서 대한, 안내판/현수막 하나 없는 준비 자세들이라면 당연히 있을 수 있는 통상적인 빈 구멍이었으므로, 더 볼 것도 없는 일.
그러고 나서, 행사장 맞은편의 비엔날레 사무국 직원들이 쓰는 사무동(세종시의 중앙 부처 하나가 입주한 건물의 두 배 이상 크기) 안쪽으로 들어섰을 때다.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오후 내내 멀쩡하던 하늘이 행사 시작도 안 했는데, 훼방을 놓기 시작한 것. 빗방울의 굵기와 빈도가 점점 굵고 잦아지더니 개회식 스피커 소리가 빗소리에 묻힐 정도가 되었다. 일반석 손님들은 일기 예보를 챙겼는지 1/4쯤은 우산들을 펴 들었는데, 이른바 VIP석은 대체로 속수무책. 우산이 없는 일반석 손님 중 상당수가 동요했고, 이석자가 속출했다.
한참 뒤 직원들이 인근 편의점들을 한 바퀴 돌았는지, 1회용 비닐 우비들이 일부 공급되었다. 싹쓸이를 했을 것임에도, 절반이 넘는 참석자들은 1시간여의 짧은 행사 참석 후 비에 젖은 양복과 치마/바지 차림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쁜 말을 해주러 헬기를 타고 내려왔음 직한 우리의 김정숙 여사. 단상에서 축사를 읽어 내려가는 내내 비를 쫄딱 맞았다. 일반 회사나 어지간한 곳에서는 우산이라도 받쳐주기 마련이건만, VVIP의 경우에는 그게 안 된다. 화면에 비치는 모습이 엄청 감점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단상에 있을 때 VVIP의 상체를 우산 등으로 가리거나 하는 일은 경호에서 금기 사항이므로. 원격 경호자의 시선과 차단되는 그 순간이 적에게는 가장 좋은 공격 시기가 되기 때문이다. 귀경 후 감기나 드시지 않으셨기를.
건물 안에서 비를 피하고 서서 행사 진행 광경을 지켜보고 섰던 내게서 ‘픽’ 소리가 새나갔다. 참고 참았던 웃음이 터졌던 것... 그날의 그 비는 하늘이 알아서 내려준 것이라는 말은 차마 못 하겠다.
머리가 안 돌아가는 윗대가리들 몇이 문제일 뿐, 종아리가 붓도록 종종걸음으로 행사 준비를 해낸 아랫사람들이야 뭔 죄가 있으랴. 그날따라 스커트나 양장 차림, 또는 정장 차림으로 출근한 수많은 직원들은 옷을 다 버렸을 터인데, 재단 사무국에서 세탁비나 따로 주었을지...
광주 비엔날레 재단 책임자들은 체면치레나 과시용 행사 제목 따위보다도 행사 전체의 실무 부분에 대해서, 디테일에 대해서, 대기업 행사장이나 해외 전시장에 직원들을 보내서라도 세부 사항을 배워오는 일부터 다시 해야 할 듯하다. 고객/방문객 입장에서 생각해 보라는 말이다. 이번 행사에 대고 모 중앙지에서 제목으로 뽑은 것 중에 ‘벼락치기’라는 말이 있던데, 2년마다 치르는 행사인데다, 20여 년을 훌쩍 넘기며 되풀이해 온 행사가 그런 소리를 들어서야 쓰겠는가.
‘문화의 선진(先進) 지대’는 디테일들이 모여 만들어내는 감동들이 아름답게 결정(結晶)될 때 붙여지는 이름이란 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크기나 외양, 꾸미개용 행사 따위로는 그 내용물을 결코 좌지우지할 수 없다는 것도...
-溫草[Sep. 2018]
*[註]
유감(有感) : 느끼는 바가 있음.
유감(遺憾) : 마음에 차지 아니하여 섭섭하거나 불만스럽게 남아 있는 느낌.
유감(流坎) : 구렁텅이에 빠진다는 뜻으로, 벗어나기 어려운 불행한 지경에 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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