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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신 거부] 이별 연습, 혹은 차이기 체험 학습
느닷없는 수신 거부. 그것도 각별하게 아껴 온 사람의 안위가 걱정되어 전화를 했을 때 그런 일을 당하면 황당하기 짝이 없습니다. 안부가 궁금하여 먼 길을 걸어 찾아간 사람에게 안에서 ‘나 없다고 해’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치나요. 바로 제가 며칠 전 수술을 앞두고 있는 동성의 후배에게서 겪은 일입니다.
짐작조차 되지 않는 그 까닭과 소통 단절. 그 연유가 명쾌히 석명(釋明)되지 않은 채로 겪는 일방적 차단. 처음에는 당황스럽고, 시간이 흐르면 짜증과 분노가 스멀거립니다. 만약 분통(憤痛)에 뚜껑이 있다면 거기서 달그락거리는 소리도 날 겁니다. 슬픔이 배경음악처럼 깔리면서 그 복잡한 심사가 가라앉으려면, 폭풍우를 헤치고 나가는 돛단배처럼 극심하게 흔들리는 일들을 한참 겪은 다음입니다.
그런 일들에는 쌍방 간에 충분하고도 확실하게 공유되지 못한 진실 문제가 늘 끼어 있기 마련입니다. 잘못된 정보에 불순함까지 가세하고, 그 정보 수용자가 성급한 판단을 하게 되면, 십중팔구 그리되기 쉽죠. 과정이야 어떻든, 행위자의 판단 내용이 어떻든, 일은 이미 벌어진 다음이고요. 출입구 셔터는 내려지고 문은 이미 굳게 닫혀서, 안에 있는 사람에게 해명을 하려 해도 그 소리를 전달할 길조차 없습니다.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는, 강요된 이별입니다. 강제 이별!
(좌) 기념물로 남은 베를린 장벽 (우) 장벽에 막힌 아랍 국가와 기독교 국가의 상징화
(사진) 트럼프의 멕시코-미국 간 국경 장벽. 여인의 어깨가 쳐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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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 정보원으로부터 얻은 내용에 오류가 있을 때 그것을 확인하지 않고 기사화하면 오보(誤報)가 됩니다. 그렇다는 걸 뒤늦게라도 알게 되어 정정 기사를 내면 바로잡히게도 되지요. 하지만, 우리의 인생살이에서는 그리되기 쉽지 않습니다.
손쉬운 이해를 위해 좀 과격한(?) 예를 들어보죠. ‘아무개가 누구의 사생아를 낳았다더라’와 같은 이야기가 입방아로 떠돌 때, 방점은 사생아로 상징되는 떳떳하지 못한 관계에만 찍힙니다. 그 두 사람이 실제로는 손을 잡기는 고사하고 대면조차 하지 않은 사이였음에도, 그런 것까지 챙겨서 친절하게 정정 기사를 써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입소문을 바로잡아주는 사람은 매우 드뭅니다. 뒤늦게 진실을 알게 된다 하더라도, ‘아 그랬던 거였어?’ 정도일 뿐, 그들의 일상은 무정차 무심 운행으로 이어집니다.
그럼에도, 그런 말의 진원지나 확인 없이 퍼뜨리는 데에 열중한 사람[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사람[들] 중 어느 누구에게도, 피해자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확인되지 않은 첩보, 그릇된 정보는 독감균과도 같아서입니다. 엄청 못된 독감에 걸려도, 그 독감의 보균자나 감염자, 전파자를 탓할 수 없음과 비슷합니다. 특정되지도 않거니와, 설령 알 수 있다 하더라도 탓해 봤자입니다. 이미 피해자는 독감에 걸렸는 걸요. 거기서 벗어나는 길은 얼른 독감에서 낫는 일뿐입니다. 그 지독한 독감과의 조기 이별을 목표로 삼는 것이 유일한 탈출 방식입니다. 통증과의 이별이 급선무이자 필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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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아픔과의 이별 연습도 꼭 필요합니다. 대상이나 내용을 가릴 필요도 없습니다. 부모 자식 간에서부터 부부간, 남녀간, 동성 간, 친구 사이... 등, 어떤 사이에서고 예견되지 않은 이별은 항상 잠재하니까요. 그 별리가 짧은 것이든, 단순 이격이든, 아니면 회복 불가능한 이별인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사유 또한 죽음/불화/오해/증오/분리/질시... 등 갖가지인데, 그것들 또한 우리의 예견/대비 수준을 뛰어넘을 때가 더 많고 잦습니다.
그 이별이 어떤 것이든, 이별 연습의 핵심이자 요체는 ‘미련(未練)을 남기지 말자’인 듯합니다. 미련(未練)을 글자 그대로 보면 ‘연습하지 않은 것’을 뜻합니다. 정확하자면 정리하는 연습을 하지 않는 상태를 이릅니다. 영어에서도 이 미련을 regret이라 하는데, re+gret에서 온 말입니다. 뒤의 gret는 침통/비애를 뜻하는 ‘grief/grieve’와 그 뿌리가 같습니다. 본래 ‘무겁게 하다’의 뜻으로, 사실 침통/비애는 마음이 무거워지는 일이지요. re-는 '뒤쪽으로, 다시' 등을 뜻하고요.
‘미련을 남기지 말자’는 말은 그러므로 미정리 상태로 두어 마음을 무겁게 만들지 말자라는 말과도 갖습니다. 길 잃은 동굴에서 출구 찾기를 포기하면(미정리 상태로 두면) 혼란/고통/공포... 등만 늘어나는데, 거기서 출구를 찾을 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들어온 길을 거꾸로 찾아 나가는 것입니다. 거꾸로 길 찾기, 그것은 각별히 아끼거나 사랑했던 사람들로부터 겪는 버려지기/잊히기/차이기에서도 효험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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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보기에 사랑은 대체로 다음의 순서를 거쳐 자리 잡게 되는 듯합니다 : (1)관심(attention) ⇒(2)주목(notice) ⇒(3)선호(preference) ⇒(4)애정(affection) ⇒(5)사랑(love). 예전의 제 잡문에서는 관심(attention) ⇒애정(affection) ⇒사랑(love)으로 대분하기도 했지만 호감의 구체적 응결체인 애정으로 이행하려면, 그 사람이 눈에 확 뜨여야 하고(주목), 다른 이들보다는 더 많은 호감으로 그를 바라보게 되는 일(선호)이 행동으로 실행되어야 하는 것 같아서, 그것들을 보탰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가을 산 단풍 구경에 대입해 봅니다. 가을에 산에 갔을 때 예전에는 그저 대충 훑어보는 것으로 무시하다시피 했던 산의 여러 풍광(하늘, 공기, 기암괴석, 나무...) 중에서도 단풍이 더 아름답게 보이고[관심], 그중에서도 막 물들기 시작한 모습에 주목하자, 공작단풍이라는 이색적인 이름표까지 단 채 머리 빗은 줄기를 아래로 늘어뜨린 한 녀석이 유난히 이뻐 보이면서[선호] 다가가 쓰다듬어 보기까지 하게 되면[애정], 그때부터는 사시사철 가리지 않고 공작단풍에 빠져 지내게[사랑] 되는 식이죠. 흔히 '눈에 콩깍지가 끼었다'라고들 하는 건 '선호'의 단계에서부터인 듯합니다.
아끼던 사람에게서 배제되고 차인다는 것은 사랑이라는 정상에서 무시(exclusion)라는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는 일입니다. 낭떠러지에서 등 떠밀려 추락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죠. 그래서 그 고통은 낭떠러지의 높이에 따라 다릅니다. 천길만길 절벽에서 떨어지면 즉사이고, 1~2미터 높이에서 떨어지더라도 최소한 타박상이나 골절상 정도는 되죠.
그럴 때의 대책이라면 상처 줄이기와 빨리 치유되는 일일 것입니다. 길을 잃은 동굴에서 출구를 찾을 때 가장 효과적인 것이 들어온 길을 거꾸로 찾아나가는 것인 것처럼, 사랑에서 배제되었을 때의 치유책 또한 사랑하기의 역순인 듯합니다. 그 대상을 역순으로 소거해 가는 겁니다.
우선 4단계에 위치했던 애정을 거둬야겠죠. 즉시, 망설이지 말고요. 거기서 중요한 것은 애정은 거두되, 증오는 키우지 말 일입니다. 증오는 타인을 향한 화살이 아니라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부메랑의 다른 이름입니다. 증오를 안고 살면 자신의 마음 안에 무거운 납덩이를 달고 지내는 일이나 진배없죠. 다른 사람 생각으로 더 많이 짓눌리게 되어 내가 내 일에 전념할 수 없게 됩니다. 바보가 되는 길에 자원 봉사하는 셈이랄까요.
애정은 그 대상이 현재적 실물이라는 점에서, 과거의 추억 속 대상을 향한 추모/추념과는 다릅니다. 돌아가신 부모, 앞세운 형제나 자식은 추모의 대상이지, 적극적으로 지워내야 할 소거의 대상은 아닙니다.
그 다음은 선호(3)와 주목(2) 과정을 떠올리지 말아야 합니다. 깨끗이 싹 지워야 합니다. 내가 처음에 어떻게 너[당신]를 찾아내고 주목했는데... 하는 식의 추억 일깨우기 넋두리 따위는 꽁꽁 싸매거나, 아예 밀봉해서 던져둬야 합니다.
마지막으로는 관심(1) 대상을 바꾸거나 넓힐 일입니다. 세상에는 내가 알지 못한 것, 해보지 못한 것, 접하지 못한 사람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눈길을 돌리면 새로운 사람들이 즐비합니다. 남은 생애의 시계 안을 채우고도 넘쳐날 정도로요. 그 새로운 세상은 멀지도 않고, 바로 가까이에 있습니다. 취미 하나만 보완하고 확대해도, 독서 모임/서예/악기/봉사... 등에서부터 헬스클럽이나 종교 활동까지, 시간을 쪼개야 할 정도가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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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유력하게 통용됐던 말이 있습니다. ‘버려진 여인보다도 더 불쌍한 사람은 잊힌 여인’이라고요. 이젠 그 말을 이런 말로 덧씌워서 지워버려야 할 것입니다. ‘잘 잊는 사람이 이긴다! 제대로 잘 잊은 사람은 버린 사람을 딛고서 더 넓고 높은 세상으로 올라설 수도 있다’고요.
성장통(成長痛)은 다가올 생에서 확실한 밑거름이자 가장 듬직한 밑천도 됩니다. 그걸 어떻게 치러내느냐에 따라서는요. 우리들의 인생길에서 맞이하는 수많은 생채기나 상처들이 경우에 따라서는 빛나는 훈장이 되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 자신에게 수여하는... 그런 것이라는 걸, 저는 믿고 싶어집니다. 어느 날 불쑥 솟아오른 소통의 장벽 따위에서든, 아니면 또 다른 거대한 장애물 앞에서라도요.
-溫草 [Dec.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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