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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연장 전도사] 젊은이와의 대화 : 죽음과 만나다. 나와 만나다

[차 한잔]

by 지구촌사람 2020. 8. 21. 0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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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연장 전도사] 젊은이와의 대화 : 죽음과 만나다. 나와 만나다

나는 자칭 '자연장 전도사'다. 처음에는 봉분식 묘지가 수원시 면적의 9배를 넘기고, 살아 있는 자들의 주거 공간은 평균 4.3평인데 반해 묘지는 15평씩이나 되는 괴상망측한 '묘지 공화국' 현실을 개탄하다가 그 해결책으로 관심하게 되었는데, 지금은 거기서 10걸음 정도는 더 나갔다. '나의 죽음'을 내 손으로 준비해두어야겠다는 생각이 15여 년 전의 유언장 작성으로 발아하면서, 그 뒤로 다른 것들이 이어졌다. 모든 법적 서류들을 미리 한 파일철로 정리해 두기, 장기 기증에서 시신 기증으로 변경 및 관할 병원 변경, 연명치료 거부 의향서 작성, 가족장지로 자연장 설영(設營), 영정사진 촬영 등등으로.

재작년 나의 영정사진을 셀카로 촬영한 직후였던가. 불현듯 나의 죽음 준비는 이제 거의 다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건방진 소리이겠지만, '언제고 나에게 죽음이 닥치더라도 얌전히(?) 따를 수 있다, 죽을 준비가 돼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런 얘기를 블로그와 SNS 등에서 떠들었다. 공표(公表)는 확실한 공수표 방지 수단이기도 하고, '잘 죽기'에 합류할 동지 규합에도 도움이 된다.

그러자 나의 블로그 이웃이기도 한 학생 하나가 내게 인터뷰를 요청해 왔다. 죽음 문제를 전공하는 기특한 젊은이... 기꺼이 응했다. 죽음 공부처럼 인생의 알맹이 채우기에서 월반할 수 있는 것도 없으므로. 다음은 바로 그 인터뷰 설문에 대한 나의 답이다. 개인적으로 아끼는 젊은이인 까닭에, 내가 인생 선배로서 개인적으로 해주고 싶은 말들도 있었는데, 그 바람에 분량이 제법 된다. A4 5쪽. 나중에 그 젊은이가 보내온 인터뷰 제목을 보니 <죽음과 만나다. 나와 만나다: 준비된 죽음으로 삶 무게 덜기>. 내 말의 핵심을 정확히 요약하고 있었다. 역시 내 생각대로 멋진 젊은이었다. 죽음 공부를 빨리 해 둘수록 남은 삶의 무게가 가벼워진다. 엄청.

 

***

[Q1-1, Q1-2] 지역사회에 거주하는 65세 이상의 노인을 대상으로 ‘좋은 죽음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라는 단일 질문에 대한 인터뷰를 분석해본 결과, ‘주변 사람을 배려하는 죽음’, ‘천수를 누리는 죽음’, ‘내 집에서 맞이하는 죽음’, ‘편안한 모습으로의 죽음’, ‘준비된 죽음’, ‘원하는 삶을 누리다 가는 죽음’ 등 6개의 범주로 묶였다고 합니다.

Q1-1. 당신이 생각하는 좋은 죽음이란 무엇인가요?

 

나는 <준비된 죽음>이라고 생각해요. 그 말 속에 위에서 언급된 것들, 곧 ‘주변 사람을 배려하는 죽음’, ‘천수를 누리는 죽음’, ‘내 집에서 맞이하는 죽음’, ‘편안한 모습으로의 죽음’, ‘원하는 삶을 누리다 가는 죽음’ 등도 모두 포함돼 있다고 생각해요.

 

그 이유를 조금 더 설명할게요. 나는 꽤 오래 전인 이십여 전부터 유언장을 써 왔어요. 처음엔 남들 따라서 대충 썼지만, 그 뒤 조금씩 내용을 가다듬은 게 서너 차례쯤 될 거여요. 내 유언장은 2008년에 블로그에 공개해 두었는데 여기에 있어요: <나의 유언장 (3차 수정분)> https://blog.naver.com/jonychoi/20051449725.

 

유언장을 써 두고 나면 좋은 점들이 아주 많아요. 당사자가 생각지도 못했던 소득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이곳에 다 적을 수는 없지만, 몇 가지만 추려도 아래에 적은 것과 같아요. 자세한 내용은 작년에 따로 정리했는데 내 블로그 중 이곳에 있어요: <죽음은 삶의 가장 좋은 스승 : ‘죽음’ 얘기 먼저, 성찬(盛饌)은 뒤에> https://blog.naver.com/jonychoi/221522500354.

 

- 삶의 지향점이 명확해지면서 남은 삶이 엄청 홀가분해진다: 내 경우는 무소유의 삶을 확실하게 실천하게 되었음. 아등바등 살아내려는 그 탐욕(소유욕+명예욕) 따위에서 완전히 졸업했고. 큰 집과 차, 좋은 옷, 세상 기준의 성공 등에 관한 생각 자체를 하지 않게 되었다.

- 사망 후 필요한 각종 개인 서류(보험/통장/인감/계약서/등기증/진단서/연락처/의향서... 등)을 한 곳(비닐 파일 하나)에 모아, 남은 가족들이 각종 사후 처리를 편리하게 할 수 있게 했다.

- 그 과정에서 나의 죽음과 관련된 일들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고,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크게 변하며 끝내는 죽음 자체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 연명 치료, 시신/장기 기증, 자연장... 등에 관해서도 미리 가족들에게 확실히 알릴 수 있었다.

 

내가 왜 저 위에서 ‘좋은 죽음’에 드는 모든 것이 <준비된 죽음> 항목에 다 포함될 수 있다고 했는지, 이제 좀 이해가 되나요? 일례로 유언장에 적은 ‘연명 치료 거부, 시신/장기 기증, 자연장...’ 등은 ‘주변 사람을 배려하는 죽음’과 ‘편안한 모습으로의 죽음’의 대표적 사례가 되고, 무소유의 삶을 확실하게 실천하는 건 ‘원하는 삶을 누리다 가는 죽음’에 드는 식이어요. 다른 항목들도 마찬가지인데, 그런 것들은 아래의 관련 질문들에서 언급할까 해요.

Q1-2. 당신은 어떤 죽음을 경험하고 싶은가요?

위에 적은 것처럼 <준비된 죽음>이어요.

 

자신에 관해서만큼은 대체로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인간이지만, 딱 두 가지,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이면서도 전혀 모른 채 진행되는 게 두 가지 있어요. 그건 자신의 출생과 죽음인 듯해요.

 

이 세상에 태어날 때 그 순간을 기억하거나 어떻게 해서 자신이 태어났는지 그 과정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죽음도 타인의 죽음에 대해서는 보고 들어 알지만, 정작 자신이 이 세상을 떠나는 그 마지막 순간만큼은 전혀 몰라요.

 

그런데, 죽음만큼은 조금 달라요. 자신이 준비하기에 따라서는 그 무섭고 두렵기만 한 죽음이라는 과정도 큰 두려움 없이 맞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동안 여러 번 유언장을 손질해 온 덕분에, 나는 내 죽음의 준비도 조금씩 해오게 된 것 같아요.

 

나는 그동안 장기 기증이라는 용어에만 익숙해서 처음엔 남들 따라서 그걸 했는데, 나중에 그 처리 절차와 결과 등을 자세히 알고 나니, 내겐 그런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을 듯해서 시신 기증으로 바꿨어요. (이 두 가지의 차이점과 상세 절차 등에 대해서도 내 블로그의 이곳에 상세히 적어뒀어요. <장기 기증과 시신 기증, 그 종류와 차이> https://blog.naver.com/jonychoi/221517458299)

 

시신 기증은 대학병원에 직접 하는데(해부학 교실), 대학병원마다 관할할 수 있는 지역의 한계가 있어요. 예를 들면 부산의 대학병원이 서울 기증자의 시신을 거둬 가기엔 무리지요. 나는 충남 지역에 거주할 때 그걸 했는데, 그 뒤 이곳 파주로 이사하자 애초의 그 병원의 관할을 벗어나게 되었어요. 그래서 작년에 파주 지역에 합당한 병원으로 바꿨어요. 아래에 보이는 카드의 앞뒷면이 바로 그 바뀐 병원의 것이어요. 이 카드를 지갑 안에 넣고 다니면 언제 어디서 변을 당하더라도 그 대학병원으로 연락이 되어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실체적인 죽음을 실제로 그 자신이 받아들이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어요. 그 한 가지 예로, 시한부 생명을 선고받은 암 환자들의 경우 대체로 다음과 같은 3단계를 거친다고 해요. 처음에는 하고많은 사람들 중 왜 하필 내게 그런 가장 혹독한 운명을 안기느냐면서 몸부림치는 항거의 시기를 겪고, 그 과정을 넘기면 죽음의 공포와 고통을 줄이기 위한 쪽으로 애를 쓰다가 마지막에는 운명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포기와 순응의 단계가 그것이어요.

 

내 경우도 인간인지라,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을 수는 없지요. 13년 전 장모님의 갑작스러운 폐암 말기 판정으로 놀라게 되면서, 오랫동안 담배를 피워 온 나도 슬그머니 겁이 나서 폐암 검진을 받았어요. 국립암센터로 그걸 받으러 가기 전날, 별의별 생각이 나더군요. 만약 나도 폐암이라면? 등줄기로 찬물 한 바가지가 흐르면서 덜컥 겁이 몰려오기도 했어요. 검진 결과 다행히도 아닌 것으로 나오고, 매년 그 검진을 받는 것으로 했지만요.

 

그러다가 재작년이었어요. 어느 날 뜬금없이 ‘나는 이제 언제 죽어도 돼. 죽을 준비가 끝난 것 같아’라는 말을 내 자신에게 대놓고 하는 나를 발견했어요. 나 자신도 놀랐지만, 그 이유를 곰곰 생각해 보니 ‘갑자기’는 아니었어요. 그동안 나는 내 죽음과 장례, 특히 가족 자연장 등의 실무적인 것들을 준비하거나 챙겨왔거든요. 그런 것들이 자연스럽게 내 안에서 무르익은 결과였어요. 그래서 나의 영정 사진을 셀카로 찍고서 사람들에게 어느 게 가장 나을 듯하냐고 물어보는 웃기는(?) 짓까지도 마음 편하게 할 수 있었어요: <나도 셀카 첨으로 찍어 봤유, 내 영정 사진을. 영정 사진 추천해 주세요> https://blog.naver.com/jonychoi/221324079812

 

아래의 두 사진이 내가 골라본 나의 영정 사진이에요. 괜히 엄숙/장엄/근엄을 강조하는 걸 싫어하는 내 스타일이랄 수 있어요. 하하하.

 

 

또 하나. 나는 나의 장례 절차의 처음부터 끝까지 불필요한 낭비를 하지 않게 되기를 바라고 있어요. 그 또한 나의 <준비된 죽음>에서 중요한 내용 중의 하나이고, 나의 <준비된 죽음>을 통해서 그걸 이뤄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요. 내가 작년에 블로그에 올린 나의 장례 관련 글 제목을 <나의 아름답고 성대한 장례식, 단돈 백만 원에 치르다>로 한 것도 그 때문이에요 : https://blog.naver.com/jonychoi/221690556784

 

마지막으로, 내가 바라는 것은 나의 좀 웃기는(?) 죽음 방식이 다른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거예요. 내가 그동안 써 오던 글 사이사이에 새로 쓰기 시작한 글 묶음 제목을 <노년을 당당하고 뻔뻔하고 아름답게>로 정한 것도 그 때문이어요. 내 블로그에 별도 게시판을 만들어 그와 관련된 글들을 올려오고 있는데, 전체로는 100여 편 되지만, 출판용으로 작심하고 쓴 것은 30여 편이어요. 지금 작업하고 있는 다른 저작물이 끝나면 그것들을 작업해서 출간하려고 해요. 현재 우리나라에는 노년 관련이나 이른바 ‘웰 다잉’이라는 어설픈 작명(그 이유는 이 말이 콩글리시라서)으로 출간된 책자들이 적지 않지만, 내 나름대로는 그런 책자들과 상당 부분 시각을 달리하면서도 훨씬 더 자유로운 삶/선택에 관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어서, 내 책이 출간돼도 라면 냄비 받침으로만 쓰이게 되진 않을 듯해요. 하하하.

Q2. 당신이 생각하는 ‘장례 절차의 의미와 기능’은 무엇인가요?

예를 들어, 장례 절차는 죽은 자의 시신을 처리하는 관습화된 방식임과 동시에 고인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며, 남겨진 유가족의 슬픔과 고통을 위로하는 기능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내게 드는 생각은 ‘고인과의 의미 있는 송별 인사’여요. 장례조차도 살아 있는 자들을 위한 것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 의미가 퇴색돼 가고 있기도 한데, 그런 점이 조금 불만이기도 해요.

 

장례 절차가 관습화된 절차의 하나인 건 맞는데, 그것이 형식 강조의 측면으로 흐르다 보면 체면치레나 과시용의 허례허식이 장례를 지배하게 되어, 고인과의 마지막 송별이라는 진정한 의미는 뒷전으로 밀리는 결과로 이어지기도 하지요.

 

한 인간의 마지막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조용히 정리하면서 그를 떠나보내는 일, 곧 고인 추모의 시간/장소/방식이 현재의 판박이 식 장례식장 이용 방식을 보면 좀 못마땅해요. 의례적으로 흐르기 마련이고, 시간도 짧고, 술자리의 담소를 빌려 형식적으로 정리하는 경우들이 대부분인 듯하고, 실질적인 유가족 위로 측면에서도 뭔가 늘 모자라거나 흡족하지 않다는 느낌이 들곤 해요.

Q4. 내 장례를 치러 줄 사람에게 남기고 싶은 말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이미 내 유언장에서 다 다룬 것들이기도 해요.

 

다시 요약 정리하자면요. 일체의 허례허식 배격. 형식적/과시적 상심도 하지 말고, 무엇이든 실용적으로. 이미 떠나가고 없는 사람 때문에 살아 있는 이들이 생고생하는 일 결코 없게 하라. 최대한 비용 아껴라... 등등.

 

이미 연명치료 거부, 시신 기증, 화장 및 가족 자연장 등에 대해서 전부 확실하게 서류 및 현물 정리를 해두었으므로 내가 부탁한 대로 이뤄질 것을 믿어요. 위에서 인용한 내 블로그 글의 제목대로 <나의 아름답고 성대한 장례식, 단돈 백만 원에 치르다>가 실현되리라 믿어요.

 

내가 바라는 것들을 요약하자면, ‘떠나는 이나 남은 이나, 장례 이전이나 이후나 홀가분하자!’쯤이 될 거여요. 그리고 그런 건 떠날 사람이 미리 준비해 두면 해둘수록, 제대로 이뤄지리라 생각하기에, 내가 시종일관 ‘준비된 죽음’, 곧 <잘 죽을 준비를 해두자>를 강조하는 것이기도 해요.

Q3. 현재 장례 절차나 환경 등에서 고쳐지거나 발전했으면 하는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ex) 엄숙한 분위기, 복잡한 의례 절차 등

 

위에 적은 것처럼 현재의 장례는 대부분 ‘영안실’이라 불리는 전문 장례식장의 한 칸을 빌려 진행되는 천편일률적인 방식인데, 갈수록 형식화돼 간다는 느낌이 들어요. 위에 적은 ‘고인과의 의미 있는 송별 인사’의 알맹이가 빠져 있거나 장례식 내내 어디선가 부유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하지만, 이 문제는 다소 추상적일 수도 있으므로 여기서는 논외로 쳐요.

 

현재 가장 문제가 되는 것으로는 비용 낭비 부분을 얘기하고 싶어요. 우리나라에서 흔히 대표적인 경조사 평균 비용을 말할 때, 혼사 비용은 1200만 원, 장례 비용은 1400만 원이라고들 하지요. 그만큼 장례 비용이 만만치 않다는 말도 되고요.

 

그런데 이 중 상당 부분은 이른바 ‘멍텅구리 금액’, 또는 ‘눈먼 돈’이라고들 해요. 미리 잘 알아두고 제대로 준비만 해 둬도 나가지 않을 돈들이 적지 않다는 뜻이지요. 일례로 수의만 해도 몇십만 원대에서부터 몇백만 원짜리까지 다양해요. 이른바 바가지를 씌우려는 업체에서는 ‘마지막 가시는 길에 마지막으로 해드리는 효도’ 운운하면서 무조건 고가의 수의를 은근히 강매하기도 하지요.

 

그런 수의에 단 한 푼도 쓰지 않아도 되는 길, 있어요. 수의 대신 그냥 깨끗한 평상복을 입혀 드리면 돼요. 나는 20여 년 전에 어느 분의 생전에 수의 대신 그리하라고 꼬드긴 적이 있는데, 실제로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을 때 그리해 드린 적도 있어요: <즐겁고 홀가분하게 묻히자> https://blog.naver.com/jonychoi/20041581319.

 

결혼식 준비 등에 대해서는 거의 모든 이들이 웬만큼은 알고 있지요. 관심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장례에 대해서는 대부분 남의 일이거나, 닥치면 하게 돼 있다는 생각들을 하고 있는 듯해요. 그러다 보니 늙은 부모를 둔 자식들은 상조회사 하나쯤에는 가입해 둬야 한다는 생각들까지 하게 되는 듯도 하고요. 사실 알고 보면(혹은 알아두려고 조금만 노력하면), 가입까지는 할 필요없을 때도 있지요. 아예 신경 쓰기 싫어서 전체를 상조회사에 넘기려면 몰라도. 때로는 그런 회사에 가입을 해뒀어도, 질이 안 좋은 곳에서는 수의나 관 등에서 이미 약정돼 있는 수준을 넘어서 고가의 것으로 바꾸기를 은근히 종용하는(바가지를 씌우는) 곳도 적지 않지요. 괜찮은 장례식장에서는 상조회사 수준 못지않게 해주면서도 그 비용은 훨씬 저렴한 업체와 연결돼 있는 곳도 적지 않은데, 문제는 그런 장례식장에 관한 정보가 널리 알려져 있지 않고, 그걸 이용해 본 이들에 의해서만 입소문으로 전해진다는 점일 듯해요.

 

참, 상조회사에 가입해 두고 있어도 반드시 유족의 손으로 해야 할 게 있지요. 바로 화장장 예약. 예전에는 상조회사들이 대행도 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반드시 유족이 직접 해야 하지요. 그 상세판도 이곳에 있어요: <화장장 이용법도 잘 알아두면 큰 힘이 된다 : 기억해 두자 1577-4129>

https://blog.naver.com/jonychoi/221521559266

 

마지막으로는 장지 비용 문제. 현재 널리 번진 공원 묘원 등의 사설 묘지는 그게 분양이든 임대든 이용료가 적지 않지요. 가장 좋은 건 자연장. 비용 절감은 물론 국토의 효율적 이용 측면에서도 최선책. 이에 관해서는 오래 전부터 내 블로그 곳곳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종합판은 이곳에 있어요: <내가 자연장 전도사가 된 까닭> https://blog.naver.com/jonychoi/222025480204.

 

Q5. 젊은 세대들이 죽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길 바라시나요?

 

위에 적은 대로에요. 죽음이란 자신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잘 알고 있다는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깜깜해요. 죽는 순간을 알지 못한 채(혹은 알더라도 발설하지 못한 채) 맞이해야 하는 것. 그리고 타인들의 죽음을 통해 전해진 두려움부터 껴안고 살아가도록 운명 지워진 그런 불가사의한 존재 겸 대상이 죽음이죠.

 

하지만, 그런 죽음조차도 정작 자신의 것이라는 걸 깨닫지 못할 때가 대부분이어요. 따라서 자신의 죽음에 대한 관심은 미리 가질수록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피할 수 없는 죽음이 강박해 올 때야 죽음을 생각하게 되는 것처럼 억울하고, 어리석은 일도 없으니까요.

 

죽음 공부, 특히 자신의 죽음에 대한 생각은 일찍 해두면 해둘수록 남은 생에 훌륭한 등불 겸 스승이 된다는 생각을 해요. 왜냐. 그것은 언젠가 한 번은 거쳐야 할 관문이자 해내야 할 숙제니까요. 모든 숙제가 그렇듯 빨리 해두면 해둘수록 남은 시간들이 참으로 홀가분해지죠.

 

여기서 반드시 넘어서야 할 산이 하나 있어요.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말 자체를 피하려고 할 정도로 죽음의 문제에 대해 대뜸 기피하거나 할 수 있으면 회피/우회하고 싶어해요. 그래서는 죽을 때까지도 자신의 숙제를 자신의 손으로 해내지 못한 채, 베끼기의 삶을 떠밀려 살게 되지요. 자신의 죽음 문제만큼은 자신이 직시하려는 생각을 가졌으면 해요. 빠르면 빠를수록 좋을 것 같아요. 늦어도 40대를 마치기 전에요. 그러고 나면 그 이후의 삶이 새로운 의미로 반짝이기 시작할 거여요. 크게든 작게든.

Q6. 가까운 이의 죽음을 경험한 사람을 위로하기 위해 어떤 말을 전해보셨나요?

 

위에서 장례를 ‘고인과의 의미 있는 송별 인사’라고 정의한 것의 연장선들이에요. 내가 가장 강조하는 것은 지나치게 애통해하거나, 아주 길게 슬퍼하거나, 고인의 흔적 지우기 등에서 고생을 겪지 말라는 부분이에요.

 

사람들은 가까운 이를 떠나보냈을 때의 심정을 대체로 부풀리는 경향이 있는 듯해요. 그걸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는 듯해요. 깊이+길게+넓게 슬퍼하는 걸 사회가 너무나 당연시하는 사이에 유족은 슬픔과 마음의 상처를 그 정도로는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이 너무나 당연하게 스며들고, 그러다 보면 슬픔의 폭과 깊이가 더해지는 일, 아주 흔하죠. 진정한 슬픔은 뒤늦게 홀로 있을 때 오니까요. 어떻게 보면 사회나 타인들이 개인적인 슬픔을 부풀리는 걸 부추기고 있다고도 보여요. 그건 우리가 심중하게 돌아봐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한편, 고인을 떠난 보낸 유족의 슬픔은 나눠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해요. 그것은 유족의 슬픔을 실체적으로 덜어내 주는 쪽의 이야기/행동을 많이 하는 것이 진정한 위로가 된다는 생각으로 이어지고요. 유족이 깊이 슬퍼할 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등을 도닥여주거나, 어깨에 손을 얹는 것만으로도 나누어 짊이 실현될 때가 많더군요. 상투적인 빈말의 위로보다는 그게 되레 도움이 더 되기도 하고요.

 

내가 늘 빼놓지 않고 하는 말은 고인이 꼭 이루고자 한 일 중 환경이 허락지 않아 이뤄내지 못한 게 있는지, 평소든 사망 직전이든 유족에게 특별히 당부한 것이 있는지, 돌아가실 때의 표정이 어떠셨는지 따위를 묻는 거예요. 그 답을 굳이 들으려는 것보다는 그런 것들을 유족이 잊지 않고 떠올리게 하려는 목적이 더 많아요. 유족이 고인의 좋은 면을 떠올리면서 앞으로의 삶에서 고인의 뜻을 살려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가장 좋은 위로일 것이라는 게 내 혼자 생각이어요.

 

요컨대, ‘유족의 위로에서도 상투적인 언행은 하지 않는 게 좋다, 그런 것들은 진정한 위로가 되지 않는다’라는 걸 실천한다고나 할까. ‘기운 내시게. 산 사람은 살아야지’ 따위의, 누구 입에서나 흔히 나오는 그런 말은 차라리 하지 않는 편이 낫다는 생각에서 하는 말이기도 해요. 진정한 위로는 진심이 담긴 말, 행동, 물질, 기회나 편의의 제공 또는 공유... 따위가 돼야 하지 않겠어요?

 

-온초 생각[21 Aug.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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