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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병신이다 : 공황장애

[1事1思] 단상(短想)

by 지구촌사람 2013. 1. 14. 0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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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도 병신이다 : 공황장애

 

  나도 병신 축에 든다. 아니, 확실하게 병신이다. 내게는 남들이 잘 모르는, 가족이나 가까운 친지만이 아는 병증이 있는데, 그게 아주 웃기는 거다. 바로 공황장애. 김장훈과 이경규가 그걸 고백하면서 세상 밖으로 아주 널리 알려진 병명인데, 공황증이라고도 한다.

  이 공황장애는 정말 웃긴다. 남들에게는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 어떤 현상들이 특정인에게는 견딜 수 없는 공포를 안긴다. 내가 글 첫머리에 병신이라고 적은 이유다.

 

 

  전문가들은 공황장애 증세를 이렇게 설명한다.

  ...공황장애는 특별한 이유 없이 예상치 못하게 나타나는 극단적인 불안 증상, 즉 공황발작(panic attack)이 주요한 특징인 질환이다. 공황발작은 극도의 공포심이 느껴지면서 심장이 터지도록 빨리 뛰거나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차며 땀이 나는 등 신체증상이 동반된 죽음에 이를 것 같은 느낌을 들게 한다...

 

 

   김장훈의 공황장애 원인 기제는 어둠이다. 거기에 폐소공포증도 더해진다. 그는 불을 끄면 잠을 자지 못한다. 그런데 불을 켜 놔도 불면증이 사라지지 않을 때가 있다. 그게 한번 나타나면 장기간 이어진다는 특징도 있다. 한숨도 못 자고 사흘을 내리 시달린 적도 있다고 하니, 한마디로 악성이다. 이경규의 경우는 대사 공포증이라고 하는데, 정확한 건 나도 잘 모른다.

   김장훈의 어둠과 폐소공포증은 그의 어린 시절과 청소년 시절에서 연원하고 있는 듯하다. 아버지 없이 자랐고, 어머니는 자주 아팠으며, 중고교 시절 밥 먹듯이 왕따를 겪으며 지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그러한 환경에서 자랐다고 해서 그처럼 어디서고 불을 켜놔야 하고, 좁은 공간에 갇히면 ‘미칠’ 정도가 되거나 ‘죽을 것 같은’ 공포를 맛보게 되는 건 아니다. 그게 공황 장애의 특징이다.

   다른 이들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는 어떤 환경이 주어졌을 때, 특정 당사자만 죽을 것 같이 된다. 심장이 터질 듯하고 ‘곧 죽을 것만’ 같다. ‘미칠’ 것 같다는 표현은 약과다. 그리고 그런 극한상황을 10초 이상 견디기가 어렵다. 나 같은 경우는 그 환경에서 최대한 빨리 벗어나야 한다. 그러면, 또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씻은 듯 사라진다.

 

 

                                                                    *

 

   내가 두려워하는 공황장애 환경은 두 가지다. (한 가지도 아니고 두 가지씩이나 된다. 부자 될 게 따로 있지.) 하나는 저음(低音) 공포이고 또 다른 하나는 승용차의 상하 요철 운동에 따른 공포심이다. 아마 다른 이들이 들으면 정말이지 콧방귀를 낄 게다.

   그래서 미칠 일이다. 멀쩡한 사람이, 게다가 남들에겐 전혀 아무 것도 아닌 것들이 내게만 죽을 것 같은 고통으로 돌아오니 말이다. 정말이지 '돌아버릴 일'이다.

 

 

  나는 음악 소리 중에 저음부가 지속적으로 나오거나 베이스음이 유달리 크게 인지되는 그런 환경에 처하면 처음에는 두렵다가 슬슬 공포심이 부풀어오기 시작하고 심장 박동이 빨라지면서 이윽고 죽을 것 같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찾아온다. (실제로 육체적으로 심장마비 증세와 같은 통증은 아니지만, 그 심리적 통증이 하도 심해서 육체적 고통과 거의 다를 바 없는 수준이 된다.)

   예컨대, 예전에 관광버스 안에서 노래방 기기를 작동하면 쿵쾅거리는 소리 속에 노래 맛을 높이기 위해 유난히 크게 믹싱한 베이스음들이 있었다. 그게 나에게는 무형의 창날이었다. 심할 때는 어디서고 버스를 세워 나만 내려서 걸어가야 할 정도로. (내가 지금은 원행 산행을 일절 하지 않게 된 데에는 유명하다는 산만 찾아다니던 철없는 등산을 반성한 탓도 있지만, 돌아오는 길에서의 그 노래방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를 견디지 못하는 까닭도 작용했다.)

 

 

   이 증상의 출발은 확실하지 않다. 1979년쯤에 돈 좀 생겼다고 제일 먼저 한 일 중의 하나가 아주 근사한 오디오 세트를 산 짓이었는데, 한 달 봉급도 더 되는 거금을 쾌척했던 것은 그만큼 그럴 듯한 클래식 음악을 듣고 싶어서였다.

   음악은 저음부가 확실히 살아야 한다면서, 스피커가 아주 큰 놈으로 일부러 골랐다. (그때 그걸 담은 장식장 무게가 백 킬로도 넘어서, 옮길 때마다 장정 셋이서도 낑낑거려야 했다. 왜 그처럼 장식장 무게가 무거워야 했는지는 나중에야 그 까닭을 알았지만.)

 

   그처럼 마련한 오디오 세트여서 애착했고, 나이가 들어서도 고쳐서 썼다. 스피커가 완전히 기능을 멈출 때까지.

   스피커가 돌아가신 것은 저음부를 맡고 있던 우퍼가 망가진 때문이었다. 고급 스피커를 보면 맨 아래에 제일 크게 입을 벌리고 있는 게 있는데, 바로 그게 우퍼. 그 녀석에게는 아주 큰 자석이 달려 있어서 소리를 낼 때마다 그 소리통 부분을 앞뒤로 밀었다 놨다 하는데 (그래서 소리통 부분은 고무 주름통으로 본체와 연결되어 있다.) 그 바람에 스피커가 늙으면 그 고무 주름통 부근도 낡게 되고, 구멍이 나거나 찢어지면 수명을 다하게 된다. 스피커가 무거운 것도 바로 그 우퍼 때문이다. 그래야 스피커 전체가 앞뒤로 흔들리는 불안정한 상태도 덜 생긴다.

 

 

  내가 그 저음부의 폭발적인 방출음을 대한 것은 그 우퍼를 손볼 때였다. 커버가 벗겨진 상태에서 그 우퍼가 앞뒤로 드나드는 것을 목도하고 있는데, 그때 갑자기 저격해 오듯 내쏜 저음의 소리 폭탄. 그때는 그 후유증을 잘 몰랐다.

   그러다가 20여 년 전, 아내가 음악 학원을 하면서 피아노가 십여 대 있었는데 발표회를 한다고 같은 곡을 몇 녀석이 떼를 지어 연주하는 걸 대하면서, 그때 다시 저음부 폭탄을 맞았다. 아마도, 내가 사무실 일로 민감해 있을 때였던 듯하다. 그 이후로, 피아노의 저음부 연주를 들으면 까닭 모를 공포심이 생기게 되고 심장이 터질 듯해지면서 곧 죽을 것 같은 상황으로 이어졌다. 그것도 순식간에. 그리고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그 저음 중에서도 첫 옥타브의 ‘도’음 (피아노 흰 건반 52개 중, 왼쪽에서 세 번째. 참 피아노 건반은 검은 건반 36개를 합하여 모두 88개다. 7옥타브에 음 세 개가 더 있다. 예외 없이.)이 내겐 특히 쥐약이었다.

   그 뒤로는 예전엔 가끔 뚱땅거리던 피아노에 얼씬도 못 했다.

 

                                                                        *

 

   또 다른 병신노릇은 승용차를 탔을 때 생기곤 한다. 즉, 차의 꽁무니가 위아래로 흔들리거나 심하게 털썩거리면 내겐 탈이 온다. 그것도 고급차라면서 현가장치(懸架裝置. 서스펜션. 승차감을 높이기 위해서, 노면의 진동이 직접 차에 전달되지 않도록 바퀴 축에 설치한 판형 용수철 묶음)의 성능을 한껏 높인 것들이 내겐 쥐약이다.

   요즘 버스 기사들의 근무 환경을 좋게 하기 위해 그 의자 아래에 설치해놓은 성능 좋은 용수철이 도로의 요철에 따라 크게 위아래로 출렁거리는데, 그걸 지켜보는 일만으로도 내겐 고통이 먼저 어른거려서 눈을 감곤 한다.

 

 

   그 증상의 출발은 농사 연습 때문이다. 70대 이후에 챙길 삼모작 인생 후반부는 귀농으로 작심한 지 오래였는데, 그 연습을 해두어야겠다고 생각한 게, 1998년 글쓰기에 매달리기 시작하면서다. 바람도 쐴 겸해서 운동 삼아.

   그래서 시작한 게 옥상 텃밭 가꾸기. 아내가 둥지를 틀고 있던 상가 건물의 옥상이 100평 정도 되기에 거기에다 흙을 갖다 붓기 시작했다. 좋은 흙을 써야겠다 싶어서 산 흙을 퍼다 날랐다. 부엽토를 중심으로, 대형 쌀 포대자루에 가득 가득 담아 날랐다. 산에 가서 흙을 퍼 담은 다음, 무거워서 들지 못하는지라 경사를 이용해서 끌고 내려온 다음, 낑낑거리면서 50~60킬로짜리들을 승용차에 실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산길이 문제였다. 비포장도로인데다 비가 온 뒤에 깊게 파인 자리들이 메워지지 않은 그 길. 타이어가 묻힐 정도로 깊게 파인 웅덩이들이 즐비한 길을 운전해 오는데, 차는 요동을 쳤다. 살살 모는데도 차가 위아래로 얼마나 출렁거리는지, 운전석의 내 머리가 차의 천장에 닿을 정도였다. 하기야, 차에 실은 흙 포대가 보통 7-8개였고 뒷좌석에도 실을 때는 열 개도 넘었으니 그 무게만도 400킬로 이상이었다.

   차가 위아래로 심하게 출렁거릴 때마다 운전을 멈추곤 했지만, 그 길을 벗어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참고서, 운전을 계속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의 까닭 모를 공포심이란...

 

 

   이런 장애로 인한 불편을 죄다 얘기하자면 길지만, 요약하면 이렇다. 나는 승용차 앞좌석에만 탄다. 어른이 세 사람 탄 승용차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사양한다. 울 딸내미까지 해서 셋은 괜찮다. 그리고, RV나 SUV같이 현가장치가 좀 무딘 차는 괜찮다. 내게 최고의 안전 차량은 1톤 픽업이다. (나중에 전국 해안선 일주를 6달에 걸쳐 하려고 하는데 그때 사용할 개조 차량을 1톤 픽업으로 미리 정해놓은 것도 실은 그 때문이다.)

   회사 생활 중 내 직급에 할당된 차량이 3천 시시급의 고급 차량이었는데 그 차는 출퇴근용으로만 썼고, 접대 건으로 동승자가 있을 때는 그 차를 회사에 두고 접객 차량 중 하급 직원들이 이용하는 SUV를 썼다. 처음에 까닭을 모르는 배차 담당 직원은 내 차 기름값을 아끼려고 그처럼 치사한 짓을 하는 것으로 오해까지 했단다. 그처럼 내 병신노릇은 가끔 회사 일에서도 오해를 받았다. 예컨대, 식사를 하러 나간다든지 할 때 내 처지를 깜박한 직원들이 내 차에 끼어 타고 함께 가려 할 때마다 내가 한 사람 이상은 타지 말라고 해야 했으므로.

 

 

                                                               *

 

   지금 상황은? 두 가지 모두 상당히 많이 개선된 편이다. 장식장 무게가 그처럼 엄청났던 낡은 오디오 세트를 버리고 새로 장만할 때, 아주 작은 녀석으로 골랐다. 예전처럼 무식하게 큰 자석이 달린 우퍼가 아니라도 그 기능이 엄청 개선된 스피커 기술 덕분이기도 하지만, 이제는 오디오가 집안 장식용 기능을 벗어난 지 시절 덕도 입었다. 우리처럼 FM 클래식 방송을 고정시켜 놓은 채 하루도 빠지지 않고 가동되는 집에서는 그런 발전과 변화가 반갑기도 하지만 요긴하기도 하다.

   우퍼가 앞뒤로 움직이는 현상이 현저하게 줄어든 그 오디오 세트의 발전된 가시적 스피커 기능이 첫 번째 공로라면, 스피커의 방출음 방향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한 것도 덕을 봤다. 일반적으로 최고의 가청음 품질 확보를 위해 쓰이는 삼각형 배치에서 좌우 스피커를 최대한 멀리 떼어놓는 방식 대신에 좁게 붙였다. 그리고, 저음부 음이 들리더라도 신경을 덜 쓰려고 노력했다. 지금은 한 해에 한 번꼴이거나 아니면 거의 없을 정도로 지낼 정도가 되었다.

 

 

   위아래로 출렁거리는 승용차 못 견디기 병증은 병원 신세를 졌다. 김장훈과 이경규 덕분이다. 나는 내 병신 짓이 내가 못나서 나만 앓고 있는 최고의 병신노릇인 줄만 알았지, 그게 공황장애라는 어엿한(?) 병명까지 달고 있는데다, 약물로도 치료가 가능하다는 건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서 한참 지나서야 (뒤늦게 생각이 나기에) 병원엘 갔다. 아주 용감하게 정신과에 등록을 했다.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다 들리도록 공황장애 환자라고 크게 말하면서. (나는 그런 일에는 되게 웃기게 씩씩하다. 하하)

 

   그리곤 서너 번 열심히 다녔다. 세 번째인가. 담당 의사가 응급약도 주었다. 승용차 탑승할 일이 있으면 30분 전에 먹으라며. 그리곤, 그만 갔다. 담당 의사가 아주 예쁘고 착한 여의사였음에도.

   이유를 붙이라면 세 가지쯤 된다. 우선, 매주 일정한 날에 일산에 있는 그 병원까지 오가는 게 시간 투자가 보통이 아니었다. 겨우 10분 대화를 위해 일하다 말고 도서관을 나서야 하고 그러면 한나절이 휙 깨지곤 했다. 둘째로는 치료 기간을 1년 ~1년 반 정도로 잡으라는 예고편 상영 때문이었다. 의사는 조급해 하지 말고 느긋하게 맘먹으라는 좋은 뜻으로 한 말이었겠지만, 내 입에서는 ‘허걱. 아이고...’소리가 우물거리고 있었다. 세 번째로는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내 손으로도 치료가 가능할 듯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물론 의사가 그처럼 확신을 심어준 공이 컸다. 나는 의사가 준 그 응급약을 그 뒤로 한 번도 써먹은 적이 없다. 손도 안 댄 채로 고스란히 남아 있다.

 

   요즘은 자각 증상과 빈도 모두 훨씬 줄었다. 작년만 해도 셋이서 교회를 가기 위해 아내 차를 타고 가다가, 완만한 경사로의 턱진 도로에서 차가 덜컹 하는 바람에 차를 세우고서 내린 뒤, 한참 심호흡을 하고 다시 탄 적도 있다.

   어떤 때는 둘만 보내고 나는 버스를 타고 뒤따라 간 적도 서너 번 있었고, RV 차량인 장인 차를 타고 가기 위해 그분을 두어 달 정도 우리 집에 들러서 가시게 한 적도 있다. 그때는 엎드리면 코 닿을 곳에 사시기도 했고.

 

 

   그런 병신 짓이 나쁘기만 한 건 아니었다. 가장 좋은 건 대중교통 이용을 항상 고집하게 되는 일. 아, 그게 좀 좋은 일인가. 돈 절약되지, 음주 운전 걱정 없지. 하하하.

   아내 차가 올해로 10살이다. 몇 년을 더 타게 될지 몰라도, 다음 차는 틀림없이 RV 차량이 되지 싶다. 그 또한 좋은 일 아닐지. (난 본래 승용차를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하기야 차 말고 다른 것들도 모양새나 외양 따위는 거들떠보지 않고 그저 실용성만 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 그 모자란 짓이 불치병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도 수확이다. 치료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생각을 바꾸고 내 나름의 방식으로 노력하면서 점점 나아져 가고 있다는 것도 긍정적 표징인 듯해서 좋다. 정신과 병원 문을 용감하게 밀치고 들어서는 성깔을 확인하게 된 것도 부수입이고. 하하하.

   가장 큰 소득은 나와 같은 병신들이 이 세상에는 제법 된다는 점이다. 내 마음이 가벼워지면서 반가워진다. 병신끼리 도닥이고 싶어진다고나 할까.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바뀌기에 따라서는, 저마다의 생채기를 안고 사는 이들이 이 세상을 도리어 따뜻하게 할 수도 있다는 그런 건방진 생각까지 하게 된 것 역시 이 병신노릇이 내게 귀띔해준 소득이랄 수 있다. 억지 춘양*일진 몰라도. [Jan. 2013]

 

 

*‘억지 춘양’은 <표준국어대사전>에 없는 말. ‘억지 춘향(이)’라는 관용구로만 나온다. 억지로 어떤 일을 이루게 하거나 어떤 일이 억지로 겨우 이루어지는 경우의 비유적 표현으로 뜻풀이하고 있다.

 

  그런데, 이 말은 ‘억지 춘양’의 명백한 잘못이다. 경북 춘양의 소나무인 춘양목이 황장목으로 쓰일 정도로 유명해서 다른 데서 나는 소나무에도 (심지어는 충북 산 소나무에도) 죄다 춘양목이라고 붙여서 속였다는 데서 유래한 말이기 때문에, ‘억지 춘양’이어야 한다. 그 뜻풀이도 속이기 위해서 사실과 다르게 터무니없이 갖다 붙이는 것이나 우기는 것 등으로 바뀌어야 한다. <표준>의 흠으로 지적될 수 있는 게 몇 가지 있는데, 그 중의 하나에 든다. 이 춘양목 관련 얘기는 조선왕조실록에도 나올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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