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의 단위계(SI*)는 10의 4승 기준이다. 예를 들면 10의 4승이 ‘만’인데 십만, 백만, 천만 하고 나가다가 ‘억’으로 바뀐다. 즉 10의 8승이 ‘억’이고 10의 12승이 ‘조’, 10의 16승이 ‘경’이다. 따라서 '억' 이후로는 새 명칭마다 10의 4승씩 뛰어오른다. [*SI: 프랑스어 Système International의 약자로서, 미터법을 기준으로 한 국제 단위 체계를 뜻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단위가 ‘억(億)’이고 국가 예산 규모는 ‘조(兆)’ 단위로 표기된다. 그 위에 ‘경(京)’이 있고, 그 너머로는 ‘해(垓)’가 있는데, 일반인들 기준으로는 대체로 ‘경’에서 머문다. ‘해(垓)’를 쓸 일도 없고 본 적도 없어서다.
이 거대 단위들을 살펴보면, 억 이상으로는 ‘억(億. 10의 8승)→조(兆. 10의 12승)→경(京. 10의 16승)→해(垓. 10의 20승)→자(秭. 10의 24승)→양(穰. 10의 28승)→구(溝. 10의 32승)→간(澗. 10의 36승)→정(正. 10의 40승)→재(載. 10의 44승)→극(極. 10의 48승)→항하사(恒河沙. 10의 52승)*→아승기(阿僧祇. 10의 56승)→나유타(那由他. 10의 60승)→불가사의(不可思議. 10의 64승)→무량수(無量數. 10의 68승)’의 순서다. ‘무량수’는 10의 68승으로서 현재로서는 동양계 표기 수치 중 가장 큰 수로 꼽힌다. [*항하사(恒河沙): '갠지스강의 모래알' 숫자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그 반면에 서양의 단위계는 세 자리마다 쉼표를 찍어 구분한다. 동양계에 비하여 약간 뒤지는 10의 3승 기준이다. 동양의 단위계는 10의 4승 기준으로 성큼성큼/엉큼성큼 나아가는데, 서양의 단위계는 10의 3승 기준으로 상큼상큼/앙큼상큼 쪽이다.
서양의 숫자 단위를 알아보기 쉽게 실물로 표기하고, 그것을 동양계 단위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이 된다.
1,000: 1천. 10의 3승
1,000,000: 백만. 10의 6승
1,000,000,000: 10억. 10의 9승
1,000,000,000,000: 1조. 10의 12승
1,000,000,000,000,000: 1000조. 10의 15승
1,000,000,000,000,000,000: 100경. 10의 18승
1,000,000,000,000,000,000,000: 10해. 10의 21승
1,000,000,000,000,000,000,000,000: 1자. 10의 24승
즉 이것들은 각각 천, 백만, 10억, 1조, 1000조, 100경, 10해가 되는데 이것을 킬로(천) →메가(백만) →기가(10억) →테라(1조) →페타(1000조) →엑사(100경) →제타(10해) →요타(1자)로 부른다.
이것을 작은 순서로 표기하는 말들도 있다. 요즘 흔히 쓰는 ‘나노’는 기가분의 1, 곧 10억분의 1을 뜻하는데 천분의 1부터 표기하면 밀리 →마이크로 →나노 →피코 →펨토 →아토 →젭토 →욕토가 된다.
이것들을 알아보기 쉽게 표로 표기하면 아래와 같다.
컴퓨터(이하 ‘컴’으로 약칭)의 등장 때문이다. 알다시피 컴은 2진법으로 작동한다. 그러다 보니 십진법에 의한 일상적인 숫자들도 2진법으로 바뀌어야 컴이 말귀를 알아듣는다. 예를 들어 10진법상의 10, 100, 10000을 2진법으로 표기하면 각각 다음과 같이 된다.
10진법 표기 2진법 변환 후(이것을 컴에서는 ‘바이트’라 한다)
10 : 1010
100 : 1100100
10000 : 10011100010000
보다시피 10000이라는 10진법에서의 5자리 숫자가 2진법으로는 자그마치 14자리 숫자가 된다. 이처럼 2진법으로 변환해야만 유효한 정보로 바뀌는 컴에서는 모든 것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자꾸만 상위 단위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기가 바이트 시대를 넘어서 테라 바이트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 일반 PC나 스마트폰 등에서도 100기가(1조) 정도는 일상화되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동양에서의 단위계는 10의 4승을 기준으로 상위 단위 명칭을 갖는다. 억 이상으로는 ‘억(億)→조(兆)→경(京)→해(垓)→자(秭)→양(穰)→구(溝)→간(澗)→정(正)→재(載)→극(極)→항하사(恒河沙)→아승기(阿僧祇)→나유타(那由他)→불가사의(不可思議)→무량수(無量數)’의 순서다.
이 중 ‘억(億), 조(兆), 경(京), 해(垓), 자(秭) 정도는 알아두는 게 좋다. 머지않아 슈퍼컴의 연산 속도가 1초당 1자(=요타)의 세계로 진입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현재 개발된 것이 엑사(100경)급인데, 1997년 1초에 1조 번 연산하는 테라급이 등장한 후 25년 만에 100만 배 이상, 즉 두 단위를 뛰어넘을 정도로 그 발전 속도가 무섭다. 향후 15년~20년 내에 요타급이 출현할 것으로 예상하는데, 그보다 더 앞당겨질 수 있다고 보는 견해들도 많다. 하기야 두 단위를 뛰어넘은 요타급의 양자컴퓨터도 이미 개발되었다.
예전에는 반도체 집적도가 2년마다 2배로 증가한다는 '무어의 법칙(Moore's Law)이 오랫동안 지배해 왔다. 그 주기를 1년으로 앞당긴 게 삼성 제품이다. 그 제품 개발을 맡았던 황창규 삼성전자 사장의 이름을 따서 이제는 '무어의 법칙(Moore's Law)은 사라지고 '황의 법칙(Hwang's Law)'이 새 법칙이 된 것처럼, 슈퍼컴의 개발/진전 속도 또한 무섭다.
슈퍼컴뿐만이 아니다. 슈퍼컴보다 1억(10의 8승) 배 빠른 양자컴도 이미 미국과 중국에서 개발돼 있다. 우리나라도 2026년까지의 개발을 목표로 2022년 6월 표준연과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국방과학연구소(ADD) 등 24개 참여 기관과 삼성디스플레이·LG전자 등 29개사가 손을 잡았다.
그럼에도 한국은 이 기술 경쟁에서 20년 이상 벌어져 있다. 우리가 개발을 목표하는 것은 50큐비트급인데, IBM은 2022년 하반기 433큐비트 양자컴퓨터를 시작으로 2023년 1000큐비트, 2025년 4000큐비트 양자컴퓨터를 내놓는다는 계획이다.
엑사급인 슈퍼컴을 단번에 두 단위나 뛰어넘는 요타급의 출현. 그 요타(10의 24승)가 동양계 단위로는 ‘자(秭)’다. 그래서도 ‘억조경해자’까지는 익혀둘 필요가 있다.
참 이처럼 끝없이 팽창하는 서양의 단위계의 끝은 어디일까. 그건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일찌감치 얼른 못질 하나를 해둔 사람은 있다. 미국의 수학자 캐스너(Kasner, E.)가 작명한 ‘구골(googol)’인데 10의 100승을 가리킨다. 전체 우주의 원자 수를 합산하여 추측해 낸 수치를 표기하고자 창안해 냈다.
숫자 단위의 팽창. 어쩌면 귀찮은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단위의 팽창은 꿈의 확대와 팽창, 그리고 그 꿈의 실현으로도 이어진다. 1광년이란 숫자는 그야말로 꿈만 같은 거리(약 9조4608억km)였는데, 지금의 웹 우주 망원경은 몇 광년 거리에서 보내온 자료들을 읽고 있고, 태양에서 45억 km나 떨어진 해왕성을 향해 미국에서 오래 전에 쏘아 올린 탐사 로켓은 명왕성을 지나 지금도 날아가고 있다.
이런 예가 어울리지 않겠지만, 요즘 서울에서 돈 좀 있다는 상위층에 끼려면 그 최소 단위가 100억 원이라고 한다. 20년 전만 해도 50억짜리 조그만 5층 빌딩 하나의 주인이면 그 대열에 낄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 두 배로, 두 자리 숫자에서 세 자리 숫자로 뛰어올랐다.
인류는 상위 단위로의 도약을 꿈으로 삼아 도전하는 생물들이다. 그 결과의 선악을 떠나서. 유아원 시절에는 양 손가락으로 꽉 차는 10이 최대이던 아이가 초교를 마치면 천만 단위로 비약한다. 중고 시절엔 대체로 억 단위이고 성인이 되어서야 조 단위에도 익숙해진다. 경 이후로는 학자들의 몫이고... <끝>
‘너무’를 너무들 사랑하다보니 듣기 어려워지고 있는 말들: 엄청/대단히/매우/몹시/훨씬/아주/정말/전혀/끔찍이/많이/잔뜩/마냥/사뭇/마구... (0) | 2022.12.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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