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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情恨)의 예향(藝鄕)’ 광주를 다녀오다

[촌놈살이 逸誌]

by 지구촌사람 2022. 12. 23. 0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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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전] ‘정한(情恨)의 예향(藝鄕)’ 광주를 다녀오다

 

정 많고 한 많은 민족!’. 가슴속 기준으로 정의된 우리 민족의 이름표다. ()은 마음()이 맑아서 푸를() 때 나고 고인다. 그래서 따뜻하다. ()은 마음()에 금을 긋거나 막힐 때() 생겨서, 마음의 옹이로 남는다. 한탄/회한/후회는 그 옹이에서 나고 자라나 소리 없이 홀로 나부끼는 깃발. 그래서 그 깃발은 외롭고 춥다.

 

나를 실은 기차가 광주로 들어선다. 나지막한 노변의 건물들은 퇴색의 기미를 가리려 들지 않는다. 낡은 옷이 일상인 촌로들만 같다. 새 옷을 걸친 날렵한 고층 건물 숲에 익숙한 눈길은 퇴색+후락을 일상 삼은 건물들에 낯설다. 그래도 광역시 이름이 붙은 곳인데... 라는 생각이 덧붙여지면 더욱 짠해 온다.

 

역 안에서 기다리던 동갑내기 오랜 지인과 초대면한다. 블로그를 통해 인사한 지 19년 만의 해후. 스산한 인생 날씨가 끼얹은 신산(辛酸)의 역정을 몸으로 받아내 온 사이에 이제는 온몸이 리모델링 여력조차 없어진 전직 초교 교사. 그런 어미의 헌신을 거름 삼아 자라온 세 아이들이 이쁜 효자/효녀로 자라나 이제는 반듯한 어른의 길로 들어선지라, 버스 노선 번호조차 읽어내지 못하는 시력으로도 나들이가 잦단다. 아들딸과 사위들까지 대기 기사들이 항상 차고 넘치는 덕에.

 

전라도의 자랑스러운 음식 중 하나인 홍어. 늦게 배운 도둑이[도둑질] 날 새는 줄 모른다던가. 소주를 못 먹으면 한국 사회에서 월급쟁이 하기 어렵다며, 내게 소주를 가르치기 위해 여러 해를 무던히도 애 썼던 나의 주사부(酒師傅)가 끌고 다닌 곳 중에 이 홍어 요리를 제대로 하는 곳이 있었다. 난생처음 입에 넣었던 홍어찜 한 조각이 내 입천장을 홀랑 날렸지만, 그 뒤로는 제대로 된 홍어찜을 찾아 다녔다. 소득은 3할대도 안 될 정도로 만족스러운 곳은 드물었지만... 벗은 자신이 어렵게 찾아낸 홍어 전문집으로 안내한다. 우리를 위해 기사 노릇을 자청한 둘째딸 덕분에 우리는 식당 문 앞까지 순간 이동하다시피 했다. [주사부 관련 글은 아래에]

 

홍어찜의 성패 중 9할은 살의 두께가 좌우한다. 삭힘은 집집마다 다르고, 기간과 방식별로 그 차이는 천차만별이지만, 아주 세게 삭힌 것을 달라고 강조하지 않는 한은 주인장이 알아서 내온다. 합격이었다. 두께와 삭힘 모두. 회나 무침으로만 익숙한 벗은 찜이 처음인 듯, 중급 수준의 삭힘이었는데도 세단다.

 

홍어찜이 나오기 전, 열 가지쯤 되는 반찬류가 나왔다. 반찬이라기보다는 부메뉴 수준의 것들이 절반쯤은 되는. ‘푸짐하다는 말 하나로는 모자란다. 푸지고(‘매우 많아서 넉넉하고) 걸쭉하다(‘음식 따위가 매우 푸지다).

 

문득, 속담 [쌀독]에서 인심 난다가 떠오른다. 사전 뜻풀이야 자신이 넉넉해야 다른 사람도 도울 수 있음의 비유어라 돼 있지만, 그 출발은 먹을거리의 베풂이다. 먹거리 해결이 최우선인 시대에 그걸 너르게 나누는 일은 크고 따뜻한 맘이 앞서지 않고는 해내지 못한다. 가장 가치 있는 일을 선뜻 해내기. 그걸 음식 베풀기로 시작한 조상들은 착한 이들이었다. 정이 많은 이들... 문득 이 나라에서 가장 많은 반찬 가짓수가 지금도 여전한 곳이 전라도라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날아와 제대로 박힌다. 완벽하고 완고하게 머릿속에 가부좌 자세로 자리를 잡는다. 가장 확실한 복습은 실물의 확인이다.

 

점심이 끝나갈 무렵, 저녁 약속 시간 전에 와도 좋다는 메시지를 받은 순천 친구 하나가 광주 도착을 알린다. 그 또한 온라인으로 절친한 사이지만 막상 실물은 처음 대하는 사이. 손주까지 있는 50대 사나이임에도 맘씨는 어린애 같이 곱고 따뜻한 직진파. (길을 잃은 어린아이들은 똑바로만 가기 때문에 만약 낯선 동네 따위에서 아이를 찾으러 나설 때면 이걸 기억하는 게 무척 도움이 된다. 어른들처럼 옆길을 기웃거리는 일이 아주 드물다. 특별히 끌리거나 익숙한 것이 그 옆길 쪽에서 눈에 띄기 전에는).

 

그를 맞으러 가려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택시가 눈에 띄지 않는다. 카풀 항의 건으로 데모하는 데에 갔단다. 버스를 타고 오가느니, 그에게 우리 쪽으로 오라 하고 우리가 기다리기로 했다. 한국은행 광주지점 사거리. 한때 그곳의 지점장으로 근무한 사람 중에, 나와 같이 공부한 이가 있었다. 학번 하나 차이를 잊지 않고 사석에서는 꼬박꼬박 나를 형이라 불렀던... 착하고 이뻐서 홍콩사무소장을 하고 있을 때는 일부러 출장 스케줄을 변경해서 그와 만남을 만들기도 했다. 퇴역 후에도 모 대학의 섭외처장 자리를 자청해서, 학교 발전 기금을 걷으러(?) 다니면서 자기가 먼저 천만 원을 쾌척한 멋진 사내... 어디서고, 그런 따뜻한 기억의 주인공들이 떠오르면 기다림의 불편 등은 문제가 안 된다. 옆에 앉아 있던 갑장이 앉아 있어도 허리가 아프다는 말로 내 추억 소환을 멈춘다.

 

셋이 된 우리는 목적지를 향해 버스에 오른다. 몸이 그래서 버스나 전철을 타 본 적이 없다는 갑장이 버스 안 풍경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버스는 목적지인 운천저수지에서 우리를 해산(解産)한다. 버스처럼 쉽게 몸을 풀어대는 게 또 있을까. 옆구리만 벌리면 줄줄 쫙쫙이다. 난산이 거의 없다. 출퇴근 전철 문에서 쏟아지는 사람들을 보고 전철 김밥 옆구리 터진다고 묘사한 어느 여류 시인의 독기 어린 관찰과는 거리를 두고 싶어진다. (그녀는 요즘 도저히 감당할 수도 없는 거액의 손해배상 소송의 피고다.)

 

예전에 그 저수지에는 배에 차려놓은 멋진 카페가 있었노라는 갑장의 기억과 우리의 추리가 가세하여 카페를 찾아냈다. 가장 편한 자세로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사이에, 6시 반에서 5시 반으로 앞당겨진 모임 시각에 맞추느라고 식당 쥔장과의 부산한 대화를 끝낸 네 번째 사나이가 이미 그 식당 앞에 도착했노라고 알려온다.



   (좌)  갑장과의 해후                                                        (우) 순천의 '새 동생' 맞이   

     

그 또한 순천 사내와 난형난제. 아니, 그 이상인 것이 상호를 달인 세무사라 했을 정도로, 우리말 공부와 글쓰기에 진지하게 열심이다. 얼굴 또한 부처님 사촌... 무공해 자연산의 은은한 미소가 기본형으로 배어나온다. 나의 광주행을 알리자, 즉석에서 형님. 제가 그날 로열설루트 21살짜리 한 병을 들고 가겠습니다.’ 소리부터 했을 정도로, 정이 많아 기본 체온이 다른 이들보다 최소한 0.5도 정도는 높을 듯한 사나이.

 

  사진 : 4인방의 첫 축배. 특별한 안주 중 하나는 돔 그을린 뒤의 회 요리.

 

마지막으로 합류한 다섯 번째 사람이 모임 장소를 찾아 왔을 즈음에는 왕족 예포 술과 소주 두어 병도 비워졌을 때. 그 또한 그날 여수에서 연수 교육이 있음에도 그걸 마치자 허위허위 달려왔다. 모두들 일터와 우리말 공부를 바지런히 오가는 사람들. 몸으로는 삶의 현장을, 머리와 마음으로는 글공부 현장을 오가는 이중 생활자들. 그들의 육신은 肉身이 아니라 육()과 신()의 결합체에 더 가깝다. 정신이 온몸을 관통하여 차렷 자세로 살아가게 만드는...

 

아쉬움이 더욱 짙어지는 건 시간이 우리를 지배할 때다. 다음을 기약하는 악수의 손길에 밴 끈끈함에서 따끈따끈한 온기들도 읽힌다. 빠짐없이.

 

뒤늦게 나온 바둑 얘기에 꼬리표가 달리고, 달인 세무사에 이끌려 그 집의 무례한 틈입자가 된 나. 담날 아침 가장 편한 자세로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아침 밥상까지 받았다. 임금님 수라가 부럽지 않은 것이 안주인의 정성이 한가득인 매생잇국. 매생이는 무심하게도 찬바람이 한창일 때가 제철이다. 그래서 예전에는 그걸 채취하는 손길들에 살얼음이 달라붙을 정도의 수고 덕분에 먹을 수 있었다. 부인에게 고맙다는 인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담날 종일 나를 따라다녔다.

 

마지막 여섯 번째 사나이는 함께 대학물을 먹은 친구. 그는 하필 외유 중이라서 그 전날 밤 늦게야 귀가한다며, 술자리에 합석하지 못함을 사전 사죄(?)했다. 랑데부 장소인 사무실 위치 설명을 위해 세무사를 연결해 주자, 둘은 금세 광주 시내 전용 특급 직통이 됐다. 내 친구의 친구를 세무사가 그 자리에서 알아본 것.

 

졸업 후 나의 오랜 외유가 끝날 때쯤에 그는 순천대에 둥지를 틀고 거기서만 30몇 년을 보냈다. 간간이 얼굴을 대하긴 했지만, 나의 국내 터전도 당진에까지 뻗친 적이 있는 터라 서울에서의 모임(남들은 우리 모임을 ‘11악당(惡黨)’이라 했지만, 우리는 시비락당(是非樂黨)’으로 읽었다. 시시비비를 잘 가려서 즐겁게 살자는 그럴 듯한 뜻풀이를 고집하면서)에서도 엇갈릴 때가 많았다.

 

그가 첫 성악 발표회를 순천에서 열었을 때, 그 날짜에 맞춰 조정해 놓은 내 해외 출장이 틀어지는 바람에, 비행기 안에서 그의 성공적인 데뷔를 빌어야 했다. 그의 포스터에 쓰인 문구는 이러했다. ‘국어학자의 우리말 가곡 발표회’. 그는 당시 국어학 전공의 순천대 대학원장[기세관 교수]이었고, 평생소원이던 성악 공부를 제2의 인생 목표로 삼은 지 1년 반 만의 용기 내기였다.

 

그는 퇴임한 이후에 더 바쁘다. 여기저기 불려 다니느라. 바리톤 가수로 분류되지만, 엄밀하게는 베이스 가수다. 우리나라에서 서너 분도 채 되지 않는 최저 음역대를 그는 자유자재로 넘나든다. 피아노의 최저음 이하로도 내려간다. 울림통의 크기를 놓고 보자면,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사람에 뒤지지 않을 듯하다. 하기야, 그는 예전에 호흡 내구력이 2분 이상이었다. 후렴부를 제외한 애국가(큰악절 2)를 두 번의 호흡으로 완창할 수 있다. (한 번에 해내는 이는 현재 김동규 한 사람뿐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와 내가 음악이란 끈으로 생래적으로 연결돼 있다는 느낌을 예전부터 받았다. 나는 이것저것 악기 욕심이 많고 그저 잔재주 수준으로 그것들을 다루지만, 그는 몸통이 악기인 성악의 꿈을 평생 꿔 왔다. 나는 목소리로든 악기로든 악보를 잘 읽어내고 장난삼아 편곡도 할 정도로 이론 쪽에  강한 편인데, 한정식 집에서 펼쳐진 친구와의 짧은 음악 세상 한담에서, 내가 작년에 드럼 공부를 대충 마쳤다고 하자, 대뜸 박자 얘기를 거들 정도로 미진한 부분의 공부 얘기로 맞장구를 쳐왔다. 모두에 완벽할 수는 없다. 음악 공부에서도. 하기야, 파바로티는 아예 악보를 읽어내지 못했다. 연주음을 듣고 귀로 악보를 익혔다.

 

서로 시계를 힐끔거려야 하는 아쉬운 시간. 나는 기차가, 그는 선약이 우리의 남은 시간들에 빗금 모래시계가 되었다. 그런 순간에 그의 입에서 나온 얘기 한마디. ‘내가 이 노래를 부를 때, 친구를 생각하며 불렀어.’ 주섬주섬 유튜브에서 꺼내 들려준다. <청산은 깊어 좋아라> (이공전 시, 송은 곡)

 

https://www.youtube.com/watch?v=weiBVJ7WMJE

 

더 무슨 말이 필요하랴. 이따금 내가 혼자서 악기를 잡고 흘러간 노래책을 펼칠 때면, 노래마다 떠오르는 사람이나 추억들이 있다. 나도 <My Way>를 건드리면, 세 사람이 떠오른다. 세 사람 중 하나가 그다. 그리고 그 친구가 반드시 떠오르는 곡 하나가 있지만, 여기서 거명하진 않는다. 그는 개사해서 부르고, 나는 본래 가사대로 부르는 노래지만...

 

서로의 다음 시각표 때문에 역 앞에서 나를 내려놓는 친구가 서둘러 시디 두어 장을 꺼내놓는다. 판매용이 아니라 보존용으로 녹음한 실황 중계 음반들...

 

종착역이자 시발역인 광주를 떠나는 기차. 예전의 증기기관차가 내뿜던 그 첫소리 쉬익 칙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것 같았다. 나 대신 기차가 광주에게 던지는 ‘So long’.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아이들이 노래를 부르다가 안녕(so long) 소리와 더불어 독일군 앞에서 의심을 안 받고 하나씩 사라지는(탈출한) 그 장면의 so long 소리만 같았다. 새 세상을 향해 더 크게 열려 있는 안녕! 살아 있는 환청...

 

바로 어제의 일이지만, 오늘도 그 환청이 살아있는 듯만 하다. 광주에서 함께했던 이들, 그 시간들, 내 친구와의 그 짧아서 더 아쉬운 시간들... 비록 입으로는 So long!이었지만, 맘속에서는 항상 <사운드 오브 뮤직>의 그것으로 오래오래 남아 떠돌게 분명하다. 오늘 아침 서너 번을 되풀이해서 들었던 친구의 노래 <청산은 깊어 좋아라>를 내가 수시로 듣게 될 것이 분명한 것처럼.

 

그럴 때마다 함께 떠오르리라. 광주를 중심으로 한 남도가 더욱 예향(藝鄕. 예술을 즐기는 사람이 많고 예술가를 많이 배출한 고을)인 것은 오랜 정한(情恨)이 정화(精華)의 단계에 이르게 되어서일 것이라고... 무릇 모든 예술은 맺힘의 승화에서 나오는 게 아니던가. 그곳에 내 사랑하는 이들이 적지 않게 있다. 그 또한 내게 얼마나 큰 복인가.

                                                                        -溫草[Dec. 2018]

 

[追記]

오늘 아침, 울 집의 고명따님께오서 추가 합격에 들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그 얼마나 혼자서 속을 끓이며 밤늦게까지 기다렸을 소식인가. 감동의 광주행 뒤끝 마무리로는 최고의 감동 선물이기도 하다.

 

[청산은 깊어 좋아라]의 가사 : 이공전 사, 송은 곡

 

청산은 깊어 좋아라 말이 없어 너무 좋아라

말없는 청산 데리고 나 이렇게 혼자 사노라

강물은 맑아 좋아라 잔잔해 더욱 좋아라

흐르는 강물 데리고 나 이렇게 이뻐 사노라

 

영롱한 뭉실 흰 구름 고운님 손짓이어라

솔바람 실갓 사이로 밝은 달 더욱 좋아라

저 멀리 흰 돛단배 그이가 오심이어라

정다운 강산 데리고 나 이렇게 즐겨 사노라

 

[주사부 관련 글]

https://blog.naver.com/jonychoi/20159806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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