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우연히 KBS의 방송 ‘2023 퀴즈 온 코리아’를 봤다. ‘전세계 한류팬들의 퀴즈 서바이벌’이라는 부제를 달고 올해로 12회째라는데, 난 어제 처음 봤다.
그러면서 얼마나 감동 또 감동했는지 모른다. 참가자들 모두가 순진하고 열정적이며 빼어난 학구파들이었는데 무엇보다도 착했다. 하기야, 뒤늦게 안 것이지만 전 세계 각국에 흩어져 있는 5000여 명의 지한파(知韓派) 내지는 한류 팬 중에서 자국 내의 치열한 예선전을 거쳐 뽑힌 21명의 인재들이었으니...
퀴즈 대항전답게 단계별로 출제 수준도 조금씩 높아갔다. 그중에서도 내가 놀란 것이 몇 가지 있었다.
가장 크게 놀란 건 마지막 문제의 정답 ‘치미(鴟尾)’였는데 놀랍게도 우승자인 캄보디아의 찐니가 그걸 단번에 맞혔다. 박물관에 갔을 때 봤는데, 그것이 ‘치마’라 아니라서 그 이름을 유심히 기억했다면서. 역시 학구파다운 날카로운 관찰이었고 기억법이었다.
사진: 문제 화면과 정답. 맨 아래 사진에 보이는 모양이 치미. 우승자가 이름 기억법까지도 설명했다. '치마'가 아니라서 관심했다며
이 치미(鴟尾. Finials)는 전통 건축 용어로서, 전각 ·문루 등의 용마루 양쪽 끝머리에 얹는 상징적인 장식물을 총칭한다. 국어사전을 보면 ‘전각(殿閣), 문루(門樓) 따위 전통 건물의 용마루 양쪽 끝머리에 얹는 장식 기와. 매의 머리처럼 쑥 불거지고 모가 난 두 뺨에 눈알과 깃 모양의 선과 점을 새겼다.’로, 조금 더 친절하게 설명돼 있다. 이 치미는 중국에서 유입된 양식으로 우리나라의 고구려 시대부터 모방한 외래 양식인데, 초기 형태는 봉황의 머리에 가까웠으나 나중에는 매 쪽으로 쏠린 것으로 나온다.
나 또한 국어사전 작업을 하면서 이 낱말 앞에서 건축 사진을 삽입할까 말까 망설였다. 사진으로 보이는 것이 가장 확실한 설명이 될 듯해서다. 하지만 출판사에서 특정 낱말에만의 사진 삽입에 난색을 표해서 하지 못했다. 그러곤 잊었다.
어제 그 문제를 대하자 내 안에서 예전의 기억이 떠올랐고, 외국인이 저걸 맞힐 수 있을까 염려되었다. 사용된 한자 치(鴟)는 올빼미 치 자인데, 한국인조차도 제대로 의미 구분을 해내는 이들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즉 ‘치미’를 직역하면 올빼미 꼬리 (모양)라는 뜻이 된다.
하지만 내 염려는 기우였다. 단번에 멋지게 정답을 말했고, 그걸 기억하게 된 계기까지도 특별했다. 그 덕분에 그 직전까지의 최고 득점자가 2위로 밀렸다.
사진: 1~3위 수상자들. 좌로부터 3위 알제리의 루이자, 2위 미얀마의 카잉, 1위 캄보디아의 짠니
하지만, 등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물론 상금 액수의 차이는 컸지만. 1~3위 모두가 기본 실력이 탄탄했고, 성실한 공부 태도가 고스란히 엿보였다. 특히 알제리에서 온 3위의 루이자는 공부벌레형이었다. 유관순 문제에서 ‘열사 유관순’이라고 ‘열사’라는 표기까지도 덧붙였고, 마지막 문제에서는 일반인 중에서도 제대로 관심하기 어려운 ‘정림사지(定林寺址)’라는 답까지도 유추했다. 비록 오답이긴 했지만.
사진: 루이자. 유관순 문제가 나오자 '열사 유관순'이라 답했고, 한국인 중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도 꼽았다. 마지막 문제 '치미'에서 건축물 사진이 나오기 무섭게 '정림사지'를 답했다. 비록 오답이긴 했지만.
또 하나. 내가 놀란 게 두 개 있었는데, 우리들이 그냥 지나치거나 그다지 관심하지 않는 것, 또는 예전엔 한번 대했지만 지금은 잊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외국인인 그들이 더 정확하게 알고 있거나 기억하고 있는 점에서였다. 그 순간, 솔직히 말하자면, 나 자신도 부끄러워져 왔다.
그 두 가지 사례가 바로 아래의 것들이다.
사진: 국보 중의 국보인 백제금동대향로
이것은 1993년 부여의 능산리 개발을 하면서 대하게 된 고분에서 횡재(?)하다시피 한 백제 시대의 최고급 국보다. 발견 당시에 온 나라가 떠들썩할 정도였다. 중국의 것들보다도 두 배 정도나 시원하게 큰 크기, 정교한 조각들, 세공 솜씨의 빼어남, 전체적인 조형미, 그리고 1500여 년이나 세월이 지났지만 보존 상태가 거의 완벽에 가까웠던 점... 등에서 후손들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출제된 문제는 이 향로에 쓰인 꽃 조각이 무슨 꽃이냐는 것이었는데, 정답인 연꽃을 정확하게 맞힌 것도 맞힌 것이지만, 그 설명이 나를 놀라게 했다. 백제에서 돌아본 왕릉 안 벽 전체가 연꽃으로 돼 있었던 게 생각나서, 혹시 그 연장선상에 있는 것 아닌가 싶어서 답으로 연꽃을 골랐다고 했다. 정확한 설명이었다, 세상에나...
짠니가 언급한 왕릉이 백제 무령왕릉이다. 백제를 중흥시킨 무령왕(462∼523)이 세상을 떠나자 뒤이어 왕위에 오른 성왕은 아버지 묘소를 황제급으로 꾸렸다(왕의 죽음은 훙[薨]으로 표기해야 하는데 황제나 쓸 수 있는 붕[崩]으로 표기할 정도로. 그런 성왕도 554년 신라와 관산성(현 충북 옥천군)에서 벌어진 전투 중 고립된 아들을 구하러 적진으로 달려가다가 신라 복병에게 기습당해 전사했다). 아들 성왕이 무령왕릉 무덤방을 가득 채운 벽돌에 새긴 게 활짝 핀 연꽃무늬였는데, 삼국을 통틀어 연꽃무늬 벽돌만으로 무덤 내부를 장식한 건 무령왕릉이 유일하다.
우승자 짠니는 그 무령왕릉은 수박 겉 핥듯 눈요기만 한 게 아니었다. 제대로 그 배경과 각종 부장품들을 눈여겨 봤다. ‘금귀걸이’ ‘금동신발’ 등이 왜 국보인지조차도 주목했다.
또 하나. 우리가 불국사에서 대하는 대표적인 걸작(?) 중의 하나인 다보탑에 관한 문제가 나왔다. 네 기둥 안에 자리하고 있는 조각상의 동물이 무엇이냐 하는. 그 순간 나도 머리가 띵해 왔다. ‘보긴 분명 봤는데, 그게 뭐였지? 궁궐 건축에 빠지지 않았던 엎드린 모습의 해치상이었던가’ 하면서. 그것도 정확히 맞힌 게 아마 짠니였던 듯하다. 그녀는 한 번 본 것들을 아주 매서울 정도로 정확히 각인해 두고 있었다.
사진: 다보탑 1층 기단 위에 네 기둥이 있고, 정중앙에 동물상이 보인다. 사자다.
마지막으로 우승자나 준우승자, 아니 모든 참가자들에게 공통적으로 느껴진 건 훈훈한 인간미였다. 하기야 그들은 각국의 예선을 거쳐 본선 참가를 위해 한국으로 초청된 인재들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모두 '된사람'들이었다. 인재들은 대체로 인간적으로도 멋진 모습을 보인다. (세상살이 후에는 좀 못된 쪽으로 오염되는 축들도 생기긴 하지만... 그 좋은 예가 의원 배지를 달고 나면 개판을 쳐대는 법조계 출신 패거리들이다.)
한국 곱창을 노래하던 짠니는 우승 상금으로 가장 먼저 자신이 한 약속, 곧 참가자 친구들에게 곱창 한턱을 쏘겠다는 그 약속을 지킨 뒤 엄마에게 남은 걸 드리겠다고 했다. 우승 후 짠니가 잊지 않고 한 것은 캄보디아의 아동센터 봉사자로 자신을 가르쳐 준 한국인 여자 선생님께 감사를 표현한 일이었다. 그 순간 사제지간의 두 사람은 눈물들을 글썽였다. 전국의 한국인 시청자들의 심금까지 울린 장면이 아니었을까.
사진: 우승 후 곱창 약속을 지키겠다고 거듭 다짐하는 짠니
사진: (위) 잊지 않고 선생님께 고마워하는 짠니. (아래) 그런 제자 앞에서 눈물을 글썽이는 봉사자 선생님
여러모로 뿌듯한 프로였다. 성적을 떠나 모든 참가자들이 진국이었고, 온 세계에 한국을 공부하고 사랑하는 20~30대들이 그처럼 널리 포진하고 있다는 것을 재삼 확인하게 된 것도 또 다른 뿌듯함이었다. 그 한편으론 한국인들 중 상당수가 그런 외국인들보다도 훨씬 밑도는 수준의 노력들을 하고 있지 않나 하는 서글픈 생각도 고였지만...
[참고] 오늘 KBS1의 <우리말 겨루기>에서는 각국의 세종학당에서 우리말을 공부하고 있는 이들을 대상으로 겨루기가 펼쳐진다. 이른바 5부작으로 구성된 ‘글로벌 우리말 겨루기’의 첫 편이 방송되는데, 11월 6일까지 방송된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溫草 최종희(9 Oct. 2023)
[참고] 어제 겨루기에 참가한 이들의 명단이다. 먼저 참가자의 이름을 한글 캘리그래피로 보인다.
사진: 예쁜 한글 캘리그래피로 담은 참가자 이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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