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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언어의 관행] ‘4시 50분’이라 쓰고 ‘네 시 오십 분’이라 읽지, ‘사 시 오십 분’이라 하지 않는다

우리말 공부 사랑방

by 지구촌사람 2023. 11. 16. 0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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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언어의 관행] ‘4시 50분’이라 쓰고 ‘네 시 오십 분’이라 읽지, ‘사 시 오십 분’이라 하지 않는다

 

수사와 기본 규칙

 

우리말에 수사(數詞)가 있다. 사물의 수량이나 순서를 나타내는 품사로 셈씨라고도 하는데, 양수사와 서수사로 나뉜다. 하나, 둘, 셋 따위처럼 수량을 셀 때 쓰는 수사가 양수사이고, 순서를 나타내는 수사가 서수사인데 첫째, 둘째, 셋째 따위의 고유어 계통과 제일, 제이, 제삼 따위의 한자어 계통이 있다. 양수사의 관형사는 ‘한, 두, 세...’ 등으로 변형된다.

 

여기서 좀 까다로운 것으로는 일(一/壹), 이(二/貳), 삼(三/參)... 따위가 있다. 까다롭다고 한 것은 이것들의 품사와 표기 방식이 위의 것들보다는 조금 더 복잡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二/貳)’의 경우를 보면 수사로는 ‘일에 일을 더한 수’이지만, 관형사로는 각각 그 수량이 둘이거나 [예: ‘이 년'], 그 순서가 두 번째임을 뜻한다 [예: ‘삼국지 이(2) 권’]. 더구나 이것들의 표기는 아라비아 숫자로도 표기할 수 있어서 ‘일’의 경우는 ‘일, 一, 壹, 1’의 네 가지 표기가 가능해진다.

 

그런데 이러한 수사들이 실생활에서 쓰이는 양상을 보면 꽤나 복잡하다.

 

기본적인 규칙이 없는 건 아니다. 수량 표시의 경우, 고유어 계열은 고유어 계열끼리 결합하는 특징을 보인다. 즉 ‘열여섯 살, 연필 일곱 자루, 콩 여섯 말’ 등을 ‘십육 살, 연필 칠 자루, 콩 육 말’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한자어 계열도 ‘십육 세, 삼십 분’은 가능해도 ‘열여섯 세, 서른 분’은 불가능한 것처럼 역시 한자어 계열끼리 결합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칠 명, 일곱 명’, ‘오십 권, 쉰 권’이 다 쓰이는 것에서 보듯 그 제약이 그리 엄격하지는 않다.

 

수사는 수사끼리 결합하여 ‘열다섯·스물다섯·서른다섯·이백오십·삼백오십’ 등의 복합어를 자유롭게 생성한다. 이때에도 백 이하의 수에서는 ‘육십다섯’이니 ‘쉰육’이니처럼 고유어 계열과 한자어 계열이 뒤섞이는 일은 피한다.

 

그럼에도 요즘 일부 아이들을 포함하여 어른들까지도 이따금 ‘육십다섯’과 같은 기피 어법을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한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는 게 문제다. 재미로 한두 번 해댈 수는 있지만 습관적/고의적 어법 파괴는 그 자신을 뒤틀리게 이끌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언어가 그 사람을 만들 때도 많다!

 

실생활 속에서의 재미있는 변형들

 

그럼에도 이러한 기본 규칙들이 잘 통하지 않는 경우들이 적지 않다. 일례로 위 제목에 쓰인 ‘4시 50분’이 있다. 똑같이 아라비아 숫자로 쓰였음에도 ‘네 시 오십 분’으로 읽는다. 누구나 예외 없이.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는데도 저절로 그리들 읽는다.

 

‘1일, 2일, 3일’을 고유어로 표기하거나 말하라고 하면 모두들 ‘하루, 이틀, 사흘’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때의 ‘하루, 이틀, 사흘*’은 날짜나 기간을 뜻하는 명사다. 수사를 사용하여 표기한 ‘1일’을 ‘하루’라는 명사로 바꾸어 말하는데, 그렇게 말하는 이도 그러한 품사 변화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거의 자동적이다.

 

[참고: ‘사흘’] 요즘 문해력 저하 문제가 심각하다. 모 방송 조사에서 요즘 아이들에게 ‘사흘’이 며칠을 뜻하냐고 물었더니 대학생을 포함하여 절반 가까이가 ‘4일’을 찍었다고 한다. ‘사(4)흘’로 여긴 탓에. 웃고 넘어갈 일만은 아니다.

 

 

사진: 음주운전 등으로 시끄러웠던 래퍼 노엘 장용준의 웃기는 가사. '하루 이틀 삼일 사흘...' 녀석은 장제원의 아들인데 시끄럽게 하는 데엔 부전자전 꼴.

이러한 수사 읽기가 우리말에서 영어로 건너뛰면 더욱 달라진다. 천태만상이라고나 할까.

 

위에서 다룬 ‘4시 50분’을 우리는 ‘네 시 오십 분’으로 고유어와 한자어를 뒤섞어서 말하는데, 영어에서는 아라비아 숫자를 그대로 읽는다. ‘포(4) 피프티(50)’라고 말하고, 필요하면 그 뒤에 오전(AM)이나 오후(PM)라고 보탠다. 군대에서처럼 신속 정확해야 할 때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달리 말한다. 오후 7시라면 19:00라 쓰고 ‘나인틴 헌드레드’라 읽는다.

 

날짜에서도 그렇다. 8월 25일이라면 우리는 한자어끼리이므로 ‘팔월 이십오 일’이라 읽는데 영어권에서는 'August 25th'로 읽는다. 쓸 때는 ‘25th August'로 적지만 요즘은 ‘25/08/(년도)’ 등으로 번거로운 서수사 표기 ‘25th’ 대신 그냥 ‘25’라 적기도 한다. 그럴 때도 반드시 날짜가 월 앞에 온다.

 

호텔 방 번호가 ‘812호’라 치자. 우리는 ‘팔백십이 호’로 812를 수사로 읽는다. 하지만 영어에서는 그걸 ‘8 헌드레드 투웰브’로 읽지 않는다. 번거로워서다. ‘에이트(8) 투웰브(12)’로 나누어 읽는다. 1812호라면 ‘에이틴(18) 투웰브(12)’가 된다.

 

이러한 나눠 읽기는 연도 읽기에서도 마찬가지다. 2023년이라면 우리야 ‘이천이십삼 년’으로 수사로 읽지만, 영어에서는 ‘투웬티(20) 투웬티스리(23)’로 나누어 읽는다. 하지만 여기에도 예외는 있다. 2000년의 경우에는 나눠 읽기의 장점이 없고 도리어 복잡해지므로 'year two thousand'로 풀어 읽는다. ‘year'가 붙는 것은 'two thousand'가 단순한 수사로만 이해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정리한다.

 

우리말에서의 수사는 대체로 고유어는 고유어끼리, 한자어는 한자어끼리 결합하여 쓰이고 읽힌다. 하지만 ‘칠 명, 일곱 명’, ‘오십 권, 쉰 권’이 두루 쓰이는 것처럼 완벽하게 엄격한 규칙은 아니다.

 

‘4시 50분’이라 쓰고 ‘네 시 오십 분’으로 읽는 것은 관행 때문이다. 관행적으로 굳어진 읽기 법이어서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저절로 그리들 한다.

 

이처럼 언어의 관행은 동일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 내에서는 일반적인 규칙보다도 힘이 세다. 영어권에서의 수많은 사례들도 그 좋은 예가 된다. 나는 이것을 '언어사회의 모태적 학습 효과' 내지는 '무의식적 언어 기반(base) 구조주의 효과'라고 부른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의식하지 않아도, 어느 틈에 저절로 익히게 되는 것들이어서다.

 

-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溫草 최종희(10 Nov.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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