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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를 막 시작했거나 시작하려는 아마추어 작가분들에게 드리는 조언

우리말 공부 사랑방

by 지구촌사람 2022. 11. 2.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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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를 막 시작했거나 시작하려는 아마추어 작가분들에게 드리는 조언

최근 어떤 아마추어 글쓰기 모임에서 발간하려는 책자에 관여하고 간여했다. 처음에는 조언 수준에서 관여 (關與. 어떤 일에 관계하여 참여함)했는데, 나중에는 단순한 교정이 아니라 초고 교열(校閱. 문서나 원고의 내용 가운데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고치며 검열함) 수준으로 간여(干與. 어떤 일에 간섭하여 참여함)하게 되었다.

 

글쓴이들은 40대 후반 ~ 50대의 중.장년인데, 한 번도 출간용 글을 써보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글쓰기를 통해서 세상 껴안기를 가다듬으려는 공통 주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일로 그 출발점을 삼으려는 갸륵하고도 의미 있는 작업에 처음으로 뛰어든 이들이었다. 

 

아래 글은 <서평>의 형식을 빌렸지만, 실제로는 출간 전 초고 교열 후 그분들을 모아놓고 짧게 했던 강의 내용을 압축한 것이기도 하다. 

 

짧지 않은 글이지만, 글쓰기를 막 시작했거나 시작하려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전재한다. 원문에는 각개 작품에 대한 짧은 평도 들어 있지만, 분량 관계로 생략했다. 

 

-溫草 최종희(2 Nov.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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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안아 봄: 3모작 인생을 위한 아름다운 전야제 

안아 봄 

 

‘저마다의 마음 밭갈이를 통해 일궈낸 작지만 소중한 열매들’. 

 

이 책을 대하고 나서 내 안에 저절로 고여 든 여러 생각들을 압축하여 이름 짓자면 그랬다. 전문 작가가 아닌 열네 분이 걷어붙이고 저자로 참여하여 2모작 인생을 의미 있게 마무리하고 3모작 인생을 위한 아름다운 전야제를 저마다의 방식으로 준비하고 있는 모습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안아 봄’이라는 독특하고도 뜻깊은 통과 의식을 찾아낸 것도 참으로 멋진 착상이었다. (이하 편의상 책명을 <안아 봄>으로 약칭한다.) 

 

모든 사람에게는 생채기 혹은 상처가 있다. 그게 없는 사람은 없다. 외상(外傷)의 크기로야 상처가 생채기보다 윗길이다. 하지만, 때때로 우리의 의식을 날카롭게 찔러오는 것은 생채기일 때가 많다. 손쉬운 예를 들자면, 자신을 버리고 집 나간 엄마가 있을 때 엄마의 가출이라는 상처보다도 그 가출 당시에 뒤도 안 돌아보고 허위허위 떠나간 엄마의 뒷모습이 생채기가 되어 그 모습이 떠오를 때마다 온몸의 신경이 순간적으로 기립하곤 한다. 마치 아문 생채기의 껍데기를 살살 떼어내거나(혹은 무언가에 스쳐서 떨어져 나갈 때) 기겁할 정도로 따가워하게 되는 것처럼, 큰 상처가 아닌 작은 생채기들이 도리어 우리의 삶을 더욱 깊이 자주 따갑게 간섭할 때가 있다. 그런 생채기도 없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다. 

 

그런 생채기나 상처가 있을 때 나의 그것들을 껴안을 줄 아는 사람이(혹은 껴안아 본 이가) 타인의 그것도 껴안아 줄 수 있다. 마치 행복한 사람만이 타인의 행복까지도 챙겨줄 수 있는 것처럼... 자신이 불행한 사람은 자신의 것에 우선 매몰되기 쉽고 그것부터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여서 타인의 불행까지 챙겨줄 여력이 없다. 내게 떨어진 불똥 해결이 우선이지, 남의 집 불을 끄러 갈 짬이 없어서다. 설사 그러고 싶은 마음이 있더라도 실제로 행하기는 어렵다. 

 

그처럼 삶의 현장에서는 행복한 사람이 타인(들)의 행복을 생각해 줄 수 있게 된다. 불행한 이는 자신의 불행부터 껴안고 신음하기에 바쁘다. 벗어나려는 몸부림만으로도 바쁘고, 스트레스로 안이 쪼그라든다. 타인에 관심할 겨를 자체가 없다. 행복한 이는 그와 반대로 껴안기 쪽이다. 받아 안으려 들고, 그러면 그럴수록 안은 넓어진다. 맘씨가 태평양이라는 말을 듣는 사람은 우주까지 껴안는 너르디너른 사람도 될 수 있다. 

안아 보기와 안아 봄은 다르다. 안아 보기는 단순한 일회적 시도로만 그칠 수도 있다. 언어적 상상이나 소망 사항으로 끝날 수도 있다. 그러나 안아 봄은 실천적 결행이다. 실제로 행하는 몸수고다. 

 

안기 위해서는, 실제로 안아 보기 위해서는, 수용(받아들이기)과 포용(감싸기)을 거쳐 포옹(껴안기)의 단계를 거친다. 그것들을 실제로 몸수고로 행해야 한다. 

 

그럴 때 가장 먼저 거치는 것이 돌아보기다. 거기서 유용하게 쓰이는 것들에는 명상이나 기도 등도 있지만 가장 효과적인 것은 글쓰기다. 문자로 기록되는 순간 기억이나 생각들이 더욱 선명하게 각인되거나 의미 있게 소환되고, 재생산이나 확대 등도 가능해진다. 반성해야 할 일이 있을 때 그것을 마음속으로만 치르는 것과 반성문으로 기록할 때의 차이점을 떠올려 보면 글쓰기의 실용성이 더욱 뚜렷해지리라.

 

글쓰기는 기술(art)을 필요로 하는 수공업이기도 하다

 

글쓰기의 효용으로는 여러 가지가 꼽힌다. 그중에서도 약방에 감초 격은 카타르시스(catharsis) 이론이다. 당초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詩學)>에서 비극이 관객에 미치는 중요 작용의 하나로 든 것인데, 문학적으로는 비극을 봄으로써 마음에 쌓여 있던 우울함, 불안감, 긴장감 따위가 해소되고 마음이 정화되는 일을 뜻한다. 이를 자기정화(自己淨化)로 번역하기도 한다. 그 뒤 이 말은 심리학 용어로도 쓰이게도 되었는데, 마음속에 억압된 감정의 응어리를 언어나 행동을 통하여 외부에 표출함으로써 정신의 안정을 찾는 일을 뜻하게 되었다. 나는 이것을 이따금 자기위무(自己慰撫)라 부르기도 했다. 

 

내가 글쓰기의 두 번째 효용으로 짚고 싶은 것은 ‘새 지도 만들기’다. 

우리를 스쳐가는 수많은 느낌들 중에는 의미 있는 것들도 적지 않다. 그런 것들을 글로 정리해 보면 새삼 깨달음으로 다가온다. 깨달음은 기록될 때(문자로 응결될 때) 막연한 소망의 리스트에 머물지 않고 확실한 지표가 된다. 그 지표들이 연결되거나 쌓이고 모여 내 인생 지도의 행로가 된다. 새 길이 생긴다. 그 새 길이 담긴 지도가 내 인생의 새 지도다. 

모든 지도는 발길로 만들어질 때 그 의미가 더욱 진실해진다.​ 글쓰기는 문자로 발품팔이를 해내는 일이기도 하다. 내가 사람들에게 말 대신에 직접 써 보기, 곧 글쓰기를 권장해 온 이유 중의 하나다. 그리고 그런 글쓰기를 직접 해낸 까닭에, 이 책자의 작업에 참여한 14분들 모두 자기 나름대로의 새 길들을 찾아내셨다. 즉, 자신만의 새 지도 한 페이지를 저마다 이뤄냈다. 이제 남은 페이지들을 어떻게 채워나가야 할지는 각자의 몫이지만.

 

<글쓰기의 기술>을 영어로 표기하면 art of writing이 된다. 에릭 프롬의 세계적인 명저 <사랑의 기술>의 원 제목은 The Art of Loving이다. 이처럼 art는 라틴어 ars/artis/artitus/artire 등에서 유래한 말인데, 본래 의미는 손으로 해내는 기술(skill)이란 뜻이다. 그래서 artificial은 손으로 꾸민 것이므로 '인공적'이라는 의미가 되고 artisan은 장인(匠人)이 된다. 참고로 이와 같은 뜻인 technique(technic)은 프랑스어에서 온 말이다.​

 

글쓰기는 수공(手工)이다. 글자 하나하나를 불러내어 손으로 직접 써야 한다. 그러므로 거의 모든 것이 기계화된 현대에서도 가장 후진 수공업이다. 한 땀 한 땀 기워내는 자수와 같다. 컴퓨터가 보편화되었다고는 하지만 문자 하나 하나를 키보드에서 불러내어 꽂아넣는 것이니 글쓰기는 여전히 언어의 자수 작업이다. 언어가 처음부터 끝까지 기본이자 필수 연장으로 참여하는 수공업이다. 그렇기 때문에 글쓰는 이는 항상 언어 앞에서 차려자세를 해야 옳다. 글을 잘못 쓰는 이들 열 중 아홉은 연장 탓을 해대는 서툰 목수와 같을 때가 많다. 언어 구사력이 뒷받침되지 않을 때, 어휘력이 딸릴 때 특히 그런 결과를 낳는다.

 

또 글쓰기는 어느 정도의 기본 기술도 필요로 한다. 목수가 나무를 깎아 다듬거나 구멍 등을 낼 때 끌과 자귀(낫 모양으로 된, 깎아 다듬기용 연장. 한 손으로 끌을 잡고 다른 손으로 망치를 내리쳐 구멍 등을 만드는 끌과 달리 한 손 또는 두 손으로 자루를 잡고 내리쳐 깎고 다듬는다)를 구분해서 쓸 줄 알아야 하듯이. 이런 기본적인 것들로는 주제 확립, 틀 짜기(plotting), 제재(에피소드 포함) 정리... 등등을 들 수 있는데, 이에 관해서는 뒤에 작품평란에서 언급하고자 한다. 

 

​글쓰는 이들에게 기본이자 필수 연장인 언어

 

인간과 언어의 관계, 즉 언어의 역할과 효용에 대한 현인(賢人)들의 가치 매김은 다음과 같이 풍성하고 다양하다. 

. ‘언어는 사고(思考)의 집이다’ - M. 하이데거

. ‘언어는 세계를 반영한다’ -프란츠 보아스(현대 인류학의 창시자. 독일 출신의 미국 교수)

. ‘우리는 모국어로 생각한다’ - 에드워드 사피어(독일 출신의 미국 언어학자) 

. ‘사람은 언어에 의해서만 사람일 수 있다’ - H. 슈타인탈(독일의 언어심리학 창시자)

. 아는 만큼 보인다(아는 만큼 사물이 읽힌다). - 일반상식화 된 말(본래 출처는 저암 유한준) 

. ‘언어는 그 사람이다.’ - 필자

 

이것들을 뭉뚱그리자면 이렇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사고하고, 사고한 내용을 언어로 표현하고, 나아가 언어를 창조한다. 언어는 세상 만물을 읽어내는 창(窓)이다. 사고 능력과 태도를 좌우하는 출발점에 언어가 있고, 언어에 의해서 그의 세계가 조립된다. 한 사람은 결국 그 사람의 언어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그래서 언어가 그 사람이다. 그의 모든 것이 언어에 담기고 저절로 드러난다. 그 사람의 언어로 사고하고, 그만의 언어로 세상을 읽는다. 즉 어떤 사람이든 그의 우주는 그의 언어에 의해 규정.해석되어 그만큼만 열리고, 자가발전을 통해 성장.확장.구축(構築)된다. 그 규모가 민족의 단위로 확산되면 민족의 언어가 되고 민족의 언어 내역이 그 민족을 규정하게도 된다. 

 

쉬운 예로 무지개를 살펴보자. 무지개를 영어로는 rainbow라 한다. 하늘에 걸린 빗방울(rain)이 만든 활(bow)이라는 뜻이다. 무지개를 뜻하는 프랑스어 arc-en-ciel도 하늘(ciel)의 활(arc)이라는 뜻으로 영어와 흡사하다. 그리고 두 언어권에서는 무지개 색깔을 7색으로 여긴다. 뉴튼 이후로 확립(?)되다시피 한 상식인데, 그 이전까지만 해도 유럽에서는 무지개 색깔을 빨간색, 노란색, 초록색, 파란색, 제비꽃 색(보라)의 5색으로 나누었다. 

 

뉴튼은 어째서 7색으로 나눴을까. 그것은 도레미파솔라시의 7음계 사고방식에 영향 받은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7음계 문화와 거리가 먼 데다 언어들이 미분화 상태였던 미주 인디언들은 무지개 색을 3색으로 봤고, 한국에서는 7색이 아니라 ‘오색 영롱한 무지개’ 등의 표현에서 보듯 5색이었다. 동양의 오행, 곧 화(火). 수(水).목(木).금(金).토(土)에 상응하는 청(靑).적(赤).황(黃).백(白).흑(黑)의 오방색 개념이 만물을 지배해 오고 있어서였다. 

 

5음계를 기본으로 하는 장중한 교회 음악이 지배하던 독일에서도 무지개 색깔은 5색으로 표현되었는데, 희한하게도 그것은 우리의 5음계(궁.상.각.치.우)에 상응하는 도레미솔라와 어울리는 발상이기도 했다. 미국에서는 무지개를 6색으로 인식하여 주로 사용해 왔는데, 예전 애플 로고의 컬러도 6색이며 성소수자 운동(LGBT. lesbian/gay/bisexual/transgendered)에서도 7색은 반으로 나눠지지 않아 행사를 할 때 난점이 있어 남색을 제외한 6색을 사용한다. 그걸 레인보우 식스라 한다.

 

이처럼 무지개 색깔 하나를 두고도 그것을 인식하는 집단의 언어 체계와 내용물에 따라서 각양각색이 된다. 개인 또한 이와 똑같다. 거듭 말하지만 언어가 그 사람이다. 그 사람의 모든 것은 그의 언어로 규정되고 그의 언어로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의 우주까지도 그의 언어로 채워진다. 

 

그 때문에 글쓰는 이의 언어 구사 능력, 즉 어휘력과 적절한 낱말 구사 능력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여 영향을 끼친다. 일례로 자신의 언어 찾기 노력을 건너뛴 채 남들의 말을 생각 없이 베껴 쓰면 그 글 전체가 저품질이 된다. 흔하디흔한 소리들로 채워져 있어서 읽는 이들의 감동을 불러일으킬 수 없기 때문이다. 

 

언어 능력과 개발 습관은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는다. 오랜 훈련과 단련이 필요하다. 가장 좋은 방법은 많이 읽는 일, 즉 다독(多讀)이다. 이것은 뒤에 언급할 글쓰기 훈련의 최상책인 구양수[歐陽脩. 송나라의 정치가ㆍ문인(1007~1072)]의 3다(三多) 중 첫 번째 과정이기도 하다. 

 

작품 속으로(1): 구성의 중요성 그리고...

 

작품들을 대하면서, 창작 실무와 관련하여 가장 많이 눈에 띄는 게 구성 문제였다. 

 

어떤 글이든, 글의 길이와 형식 등과 무관하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주제 확정이다.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가가 명확하게 미리 정해져야 한다. 낱말 몇 개의 결합이거나, 한두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어야 한다. 여러 이야기가 있을 때는 그것들에 공통된 것들을 모으고 그중에서도 가장 으뜸이 될 수 있는 것으로 단일화해야 한다. 이 책에서처럼 ‘안아 봄’으로 미리 정해졌을 때는 더더욱 주제 확정 등으로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그다음은 그와 관련된 제재(에피소드 포함)들을 수집하거나 정리하는 일이다. 대체로 키워드로 그것들을 요약하여 미리 나열해 두면 글을 쓰는 도중에도 잊지 않게 된다.

 

그러고 나서는 이야기 전개 순서를 정해야 한다. 즉 이야기의 틀을 짜야 한다. 그것을 구성 작업(plotting)이라고 한다. 수집/정리된 제재들을 배치하여, 이야기를 풀어가는 순서를 정하는 일이다. 그럴 때 가장 많이 쓰이는 손쉬운 수법이 기승전결이다. 혹은 시조의 초장/중장/종장과 같은 3단계 수법도 쓴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전에 제재들을 해당 부분[그룹]으로 분류한 뒤 기승전결이나 초중종의 순서로 배치하기[틀 짜기]를 반드시 해두어야 한다. 

 

그래야 짜임새 있는 글이 된다. 독자들로 하여금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도록 하는 힘, 곧 흡인력을 갖는 글은 모두 구성에 신경을 쓴 글들이다. 그렇지 않은 것들은 산만해지기 쉽고, 글이 산만해지면 독자들은 지루해하거나 심심해하면서 딴전을 부린다. 대충 읽거나, 읽다 말고 페이지를 접는다. 쓰는 이는 온 힘을 들여 쓴 것인데도 구성이 엉성하거나 잘못된 글은 독자들의 손과 눈에서 멀어진다. 

 

구성의 단계에서도 항상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주제다. 주제는 그 글의 핵심이기도 하지만 집중력을 끌어내는 초점 역할도 한다. 읽는 이뿐만 아니라 쓰는 이에게도 초심으로 돌아가게 한다. 특히 제재들이 넘쳐날 정도로 넣어야 할 것들이 많을 때 그 중요도와 우선순위에 따라 잘라내거나 줄일 수 있도록도 해준다. 작가는 항상 주제를 의식하고, 거기서 벗어나지 않도록 해야 하고 주제와 거리가 먼 것들은 과감하게 버릴 줄도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작가 자신이 제재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 작가 혼자만의 생각으로 빛나는 에피소드일 듯해서 자꾸 끼워넣다 보면 백화점 식 진열장이 되고 만다. 모든 문학 작품은 단품(單品) 전문 판매점에서만 접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것도 전부 수제품이다. 위와 같은 과정을 생략하거나 경시한 채 늘어놓다 보면 잡품 전시장이 되고 만다. 

작품 속으로(2): 만연체보다는 단문으로

 

“제가 말씀을 확실하게 드릴 수 있는 것은 그 희생이 결코 헛되지 않게 대한민국이 다시 태어나게 하는 계기로 만들겠다는 그 각오와 그 다음에 여러분들의 그 깊은 마음의 상처는 정말 세월이 해결할 수밖에 없는 정도로 깊은 거지만 그 트라우마나 이런 여러 가지는 그런 진상 규명이 확실하게 되고 그것에 대해서 책임이 소재가 이렇게 돼서 그것이 하나하나 밝혀지면서 투명하게 처리가 된다. 그런데서부터 여러분들이 조금이라도 뭔가 상처를 위로 받을 수 있다, 그것은 제가 분명히 알겠습니다.”

 

이것은 박근혜 대통령 시절에 세월호 유가족들이 대통령과 면담까지 했는데도 시원치 않아 아쉽다는 유가족의 말에 박 대통령이 그 아쉬움을 시원(?)하게 처리해 주고자 정성 들여 답변한 말이다. 유가족들이 시원해 했을까. 그 답은 박 대통령만 빼고 다 안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듣는 이들이 괴로워진다.

 

위의 말은 잘못된 만연체의 전형적인 경우로도 꼽힌다. 박 대통령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으려면 ‘박근혜용 번역기’를 돌려야 한다는 말까지 번졌다. 위의 말 중 일부만 번역기를 돌려보면 이렇게 된다.

 

(원문) 그런 진상 규명이 확실하게 되고 그것에 대해서 책임이 소재가 이렇게 돼서 그것이 하나하나 밝혀지면서 투명하게 처리가 된다. 

(번역문) (먼저) 세월호 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이 이루어져 책임 소재가 명확히 드러나게 되면, (유가족 여러분들의 트라우마를 포함한 여러 가지 관련 사항들은) 자연히 적법 절차를 거쳐 하나하나 투명하게 처리된다. 

 

만연체(蔓衍體)란 많은 어구를 이용하여 반복ㆍ부연ㆍ수식ㆍ설명함으로써 문장을 장황하게 표현하는 문체를 말하는데, 쉽게 말하자면 한 문장이 길게 늘어지는 문체다. 위의 경우는 ‘제가 말씀을’에서부터 ‘투명하게 처리가 된다’까지가 한 문장이다. 한 문장이 자그마치 5행 가까이 차지한다.

 

만연체의 장점은 정보를 충분히 담을 수 있다는 것이지만, 단점이 한 보따리다. 산만해져서 초점이 흐려진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헷갈린다. 주어나 목적어가 누락되기도 하고, 술어나 시제의 불일치도 흔하다. 한 문장 안에서 피동과 사동이 뒤섞이는 괴상한 일도 흔히 일어난다. 한마디로 듣는 이(읽는 이)들이 엄청 피곤해진다. 

 

이러한 만연체를 즐겨 사용하는 이들은 대체로 과시형일 때가 많다. 지식/지위/권위 등을 은연중 그 표현에 담아내려고 한다. 하지만, 그 결과는 반대로 돌아온다. 언어심리학으로 들여다보면 문제아[사고장애자]들일 때도 많다. 비경제적으로 사고하는 사고 장애의 하나로서, 이야기를 중요한 줄거리에 따라 요령 있게 하지 못하고, 사소한 점에 구애되어 지루하게 만드는 우원사고형(迂遠思考形)일 때가 가장 흔하다. 연상(聯想)이 끊임없이 비약하여 사고의 목표를 정할 수 없는 관념 분일(觀念奔逸), 생각하는 진도가 늦고 착상(着想)능력의 결핍 ·전도곤란(轉導困難) ·결단의 지체 등이 나타나는 사고 억제, 그리고 사고의 연관성을 잃어버리게 되는 멸렬(滅裂) 등이 뒤섞여 있을 때가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중에 만연체를 즐겨 쓰는 이들이 있다. 글을 쓰는 이라면 그러한 만연체 사용 습성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 방법은 간단하다. 단문(短文) 쓰기를 훈련하면 된다. 자신이 쓴 글을 되돌아보며 단문으로 자를 수 있는 것은 모두 자르는 게 그 출발이다.

 

김훈 작가가 있다. 밀리언셀러 <칼의 노래>와 <현의 노래>에 이어 최근 <하얼빈>을 출간했다. 각각 이순신, 우륵, 안중근의 생애를 그만의 시각으로 재조명/재조립한 명작들이다. 그의 앞에는 ‘우리 시대 최고의 문장가’라는 수식어가 붙는데, 그 주무기가 단문(短文)이다.

 

<현의 노래> 중에, 여인이 남정네와 급히 산길을 가는데 더 이상 오줌을 참을 수 없게 되자 사내에게 양해를 구하고 사내가 보지 못할 숲속으로 뛰어들어가 방뇨하는 부분이 있다. 필자가 그 표현을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김 작가의 단문 표현 방식으로 섣불리 재구성해 보면 이렇다: ‘여자의 속옷이 화급히 내려갔다. 쌓여 있던 가랑잎들에서 후드드드드득 소리가 났다. 억눌렸던 소리들이 시원하게 한참 쏟아져 내렸다.’ 

 

이것은 단문이 가진 힘을 보여주는 흔한 사례의 일부일 뿐이다. 만연체 대신 단문 쓰기를 권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번 작업에 참여한 분들 중 적지 않은 분들에게서 이 만연체증후군이 읽혔다. 앞으로 많이 써 보면 이 단문 쓰기도 저절로 몸에 배게 되리라 믿는다.

 

작품 속으로(3): 완성도(完成度)/완결성도 의식하자

 

개인사적 행적으로는 뒷말도 적지 않은 고은(高恩. 1933~). 그는 시인 고은으로 불릴 때 큰 울림을 지닌 작가가 된다. 그의 작품 중 30권으로 간행된 <만인보(萬人譜)>가 있는데, 과장하자면 세계사적 의미를 갖는다. 세계 최초로 사람만을 노래한 연작시로 총 작품 수 4001편, 등장 인물 5,600여 명으로 24년간(1986∼2010)에 걸쳐 완간되었다.

 

알다시피 <만인보(萬人譜)>는 연작시로 구성돼 있다. 하지만, 낱개의 시들은 독립된 작품들이기도 하다. 제재가 된 한 사람에 대해서는 완결된 작품이다. 즉 어느 작품을 떼어내도 완벽하게 독립적인 생명력을 지닌다. 

 

연작 안의 낱개 시 작품이나 한 제목 안의 에피소드들은 세트 메뉴(定食) 중의 단품(單品) 메뉴라 할 수 있다. 단품 메뉴(à la carte)는 알다시피 그것 하나만을 떼어서 독립 메뉴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만치 독립적으로 완결성을 지닌, 완성된 낱개다. 꽃밭이 아름다울 때는 저마다의 여러 꽃들이 제 역할을 제대로 낱개로 해내고 있을 때다. 그렇지 않으면 꽃밭이 덜 아름답거나 심지어 지저분하게 보일 때도 있다. 

 

이 책 <안아 봄>에는 연작시도 있고, 한 제목 안에 소제목으로 편성된 것들도 적지 않다. 성격이 다른 에피소드들도 섞여 있다. 거기서도 중요한 것은 독립적 완결성이다. 그것들이 지니는 어떤 의미가 그 나름대로는 완성된 모습으로 담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단순 나열이나 일방적 제시로 그치면서 감동의 구성체로는 응결되지 않는다. 

 

한 편의 글은 낱개의 감동들이 모여 하나의 통일된 울림으로 전달될 때, 작가 자신을 정돈시키고 독자를 편안하게 해준다. 그 통일성을 끝까지 유지시켜 주는 게 주제 의식이다. 그래서 구성 단계에서나 글을 쓰는 내내, 늘 잊지 말아야 하는 게 주제다. 

 

작품 속으로(4): 띄어쓰기/맞춤법은 작가들의 기본 필수 규칙 

 

십여 년 전 국립국어원이 우리나라 교사들의 국어 실력을 조사한 적이 있다. 백점으로 환산했을 때 교사들은 평균 65점이 나왔고 국어 교사들은 75점이었다. 그처럼 낮은 점수로 이끈 주범 중의 하나가 띄어쓰기*/맞춤법이었다. (*띄어쓰기: 띄어쓰기는 맞춤법 규정 5장에 들어 있어서 실제로는 맞춤법의 일부지만, 대부분 맞춤법.띄어쓰기로 구분해서 말하고 있다. 그만치 띄어쓰기가 별다르고 까다롭게 여겨져서인 듯하다.)

 

이런 문제는 작가들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띄어쓰기를 제외했을 때, 가장 문제적인 것은 비표준어의 남용이다. 대화체와 같이 언어를 통해서 화자의 모든 것을 드러내고자 할 때는 예외지만, 작가의 서술이나 묘사에서는 표준어를 사용하는 게 원칙이다. 

 

그럼에도 작품 속에서 비표준어가 등장하는 일은 매우 흔하다. 작가의 무지와 무관심 탓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어떤 유명 여류 작가의 글에서는 ‘바지랑대’라고 하면 될 것을 ‘빨랫줄을 받치는 긴 막대기, 빨랫줄 받침용 대나무’ 등으로 장황한 표현이 여러 번 나온다. 심지어는 유명 작가들이 써 댄 엉터리 말들도 적지 않다. 오죽하면 <작가들이 결딴낸 우리말>(권오운. 2006)이라는 책자까지 나왔을까. 

 

<안아 봄> 속에도 비표준어 또는 비표준 어법 사용 사례들이 눈에 띄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나름’을 들 수 있다. 요즘 이것을 부사로 착각하여 ‘나름 한다고 했다’ 식으로 표기하는 경우가 지나치게 많은데(백만 명 중 999,999 명 정도로), 이것은 반드시 그 앞에 앞말이 와야 하는 의존명사다. ‘그/나/제 나름(나름으로/나름대로/나름껏) 한다고 했다’에서처럼 반드시 앞말 ‘그/나/제’ 등의 꾸밈말이 와야만 한다. 하지만, 이러한 비표준어 또는 비표준 어법 사용 사례는 아마추어 작가들로서는 넘어야 할 산의 하나일 뿐이고, 그 숫자도 그다지 많지 않았다. 

 

그와 반대로 크게 놀란 것도 있다. 띄어쓰기 실력들이었다. 띄어쓰기 공부들을 별도로 하셨는지, 일반인 수준으로는 놀라울 정도로 기본기들이 탄탄했다. 조금만 힘을 내어 가다듬으면 유명 작가들보다도 더 나은 실력을 갖추게들 되실 듯해서, 개인적으로 무척 기뻤다. 이 나라에서는 유일하게 띄어쓰기와 맞춤법을 함께 다룬 <달인의 띄어쓰기.맞춤법>을 개정 5판까지 출간할 정도로 관심해 온 필자인지라, 개인적인 기쁨은 두 배였다. 

 

비표준어와 관련해서는, 글을 쓰면서(혹은 쓰고 나서도) 긴가민가할 때는 비표준어인지를 점검해 보는 걸 버릇 들이는 게 중요하다. 요즘 인터넷 대형 포털에는 국어사전이 들어 있다. 그걸 불러내어 띄워놓고 수시로 이용하면 좋다. 다만 주의할 것은 <고려대한국어대사전>은 참고용일 뿐 표준어만을 등재한 사전이 아니라는 점을 꼭 기억해야 한다. 국립국어원에서 편간.유지하고 있는 <표준국어대사전>만이 표준어 준거 사전인데, 국립국어원이 우리나라의 표준어 사정 기관이다. ‘자장면/짜장면, 허섭스레기/허접쓰레기...’ 등과 같은 말들을 필요할 때마다 관련 학자들의 심의를 거쳐 복수표준어로 인정하는(2010년) 유일한 국가 기관이 국립국어원이다. <고려대한국어대사전>에서 표제어로 등재된 것을 <표준국어대사전>으로 훑으면 비표준어로 나오는 것이 1/4쯤 된다. 그 정도다. 예를 들어 앞의 사전에서 한 낱말의 복합어로 편제된 것을 뒤의 사전으로 찾아보면 두 낱말로 나오는 것은 비일비재다. 다시 말해서 고대 사전에서 붙여 적은 것들을 표준어 사전으로는 띄어 적어야 바르다는 뜻이다. 

 

작품 속으로(5): 글은 작가의 몸수고와 짝짜꿍을 이룬 마음눈이 바라보는 대로 써진다

모든 문학 작품은 작가의 시선으로 세상을, 사물을, 읽어낸 결과물이다. 따라서 같은 사상(事象)을 대하더라도 작가의 마음눈에 따라 저마다 다른 작품 속살을 만들어낸다. 마음눈이 따뜻할수록 작품에 더 많은 온기가 서린다.

 

이 책 <안아 봄>의 가장 큰 미덕은 바로 그런 작가들의 마음눈이 한결같이 따뜻하다는 점이다. 그만치 작가들의 기본 심성들이 곱고 따뜻했다. 타인이나 세상을 안아 보기 위해서는, 앞서 적은 대로 수용(受容. 받아들이기)과 포용(包容. 감싸기)에 이어 포옹(抱擁. 껴안기)의 단계를 거쳐야 하는데, 참여한 작가들 모두가 ‘안아 봄’에 성공한 것은 바로 그러한 따듯한 마음눈들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여인은 흔히 산딸기 처녀와 도회 여성의 두 유형으로 나뉘기도 한다. 과일로 비유하자면, 시골길 가판대에서 대하는 과일과 마트 안에서 포장 값이 더 나갈 듯한 과일이랄 수 있다. 자연품과 기성품의 대비로도 압축된다. 그럴 때마다 자연품이 우위에 놓인다. 그것은 자연 상태에서의 사물, 덜 인공이 가해진 것을 그리워하는 인간들의 영원한 향수(鄕愁)가 작동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연을 닮고 싶어할 때, 그리하여 자연 속의 일부로 자신을 편입시킬 때 가장 편안해지고 진실해진다. 

 

그러한 자연과 인생의 합일은 머릿속에서가 아니라 실물의 자연 앞에서 몸소 배우게 될 때 이뤄진다. 한 그루의 나무와 꽃, 심지어는 잡초로 몰리는 것들 앞에서도 눈길과 손길이 가면 배울 것들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어느 때는 개망초 앞에 쪼그리고 앉은 채 일어날 줄 모르고 놀게(?) 될 때도 있다. 그러고 나면 어디서고 쉽게 눈에 띄는 개망초조차도 더 이상 잡초로 보이지 않는다. 개망초는 나라를 망치게 했다는 망초(亡草) 앞에 낮춤을 뜻하는 ‘개-’자까지 붙여 이중으로 핍박부터 받는 존재지만, 어릴 때는 좋은 나물도 된다. 사촌인 망초보다 앞서 꽃을 피워올리는데 보라색 꽃이 주력부대인 망초와는 달리 새하얀 꽃이 주종이다. 꽃대를 밀어 올릴 때 즈음이면 잎들을 전부 희생하여(잎의 크기를 절반 이하로 줄여서) 온 힘을 꽃대로 쏟는다. 꽃대를 밀어 올린 개망초의 몸뚱이 잎들은 어릴 때의 그 풍성한 모습과는 천양지차로 추레하기 그지없다. 자신을 희생하는 모성애의 전형이다. 개망초가 다 크면 제 씨앗 크기의 800~1000배 정도가 된다. 인간은 기껏해야 10배 정도만 자란다. 개망초는 다른 잡초들과도 사이좋게 지낸다. 사람들이 받드는 소나무 아래에서는 아무 것도 자랄 수 없는데 그것은 소나무가 다른 식물들의 씨앗 발아를 방해하는 테라핀이라는 독성 물질을 방출하기 때문이다. 키가 큰 개망초 아래에서는 철 이른 가을냉이 씨앗도, 철 늦은 질경이도 기지개를 잘만 켠다. 

 

자연교(自然敎)가 종교인 사람들일수록 겸손해지면서 진실로 신실해지고 튼실해진다. 자연교 신도들의 필수품은 경전이나 기도가 아니라 몸수고다. 그 몸수고를 통해 가르침을 얻고 깨달음에 이르게 되는데, 그것은 언어로 응축된다. 다시 말해서 자연교 신자들은 자신의 몸수고로 자연이 일깨워 준 언어를 포획한다. 자신이 직접 온몸으로 채굴을 거듭한 끝에 비로소 손에 넣은 가치 있는 언어, 자신만의 언어이기에 최상품이 된다. 

 

한마디로 이 책은 작가들이 지금까지 살아내 온 2모작 인생의 진액 추출물이다. 남은 페이지, 곧 3모작 인생으로 이어져 채워질 정수(精髓)의 일부다. 이 책 <안아 봄> 속에 등장하는 것들의 대부분에는 그러한 자연들이 통째로 혹은 일부라도 다 담겨 있다. 실물 자연은 물론이고 타인이나 세상 사람들까지도 그러한 자연의 일부로 바라보고 있다. 그러고는 껴안는다. 따듯하고 포근하게. 그러는 사이에 작가 자신도 따뜻해지는 그런 선순환(善循環)의 수혜자들이 돼간다. 

 

작품 속으로(6): 작품 개괄 평

 

[생략] 

 

마무리하면서

 

글쓰기에는 지름길이 없다. 왕도도 없다. 그럼에도 가장 널리 권장되고 있는 것은 송나라 시대의 정치가 겸 문인으로 활약한 구양수(歐陽脩)의 세 가지 많이 하기, 곧 삼다(三多)다. 그는 많이 읽고(多讀), 많이 써 보고(多作), 생각을 많이 하면(多商量) 좋은 글을 쓸 수 있게 된다고 했다. 어찌 생각해 보면 매우 기초적인 것들이지만, 이 삼다론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아직까지도 가장 유효적절한 방식으로 꼽힌다.

 

그리고 이 방식을 따라서 글쓰기를 해보면, 첫걸음은 다독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생각을 많이 하기임을 저절로 깨닫게 된다. 글의 품질을 획정하는 것은 글속에 담긴 생각과 그 생각의 뿌리들이기 때문이다. 생각의 뿌리가 튼실할수록 글도 그만큼 단단하고 든든한 자식으로 태어난다는 것을 글을 쓰면 쓸수록 깨달아가게 된다. 

 

하지만 어떻게 해도 글쓰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글쓰기를 업으로 삼은 글쟁이들에게조차도 항상 가볍지 않은 등짐을 지고 나르기와 같아서, 선뜻 착수하기도 쉽지 않지만 끝까지 해내기는 더욱 어렵다. 막상 해보면 그런 대로 해내기도 하지만. 

 

그럴진대 글쓰기가 취미나 부업도 아니었던 분들이 안아 들기 위해서 돌아보기의 글들을 쓰는 일은 참으로 ‘큰일(大事)’였을 게 분명하다. 그럼에도 그 일을 끝까지 멋지게 해낸 분들에게 큰 박수를 보낸다. 

 

다음 편을 고대하는 마음으로 성원한다. 무슨 일이든 한번 해내고 나면 그다음에는 자신감이라는 든든한 힘이 생기고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지지 마련이다. 

 

마지막으로, 용혜원 시인의 대표적 단시 <꿈>을 이 책의 저자들에게 선물하는 것으로 축원을 대신한다.

 

꿈만 꾸지 않고

꿈대로 살았더니

꿈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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