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6회(2013.3.18) KBS 우리말 겨루기 문제 함께 풀어 보기(1)
1. 개괄
-출연자들의 면면 : 박상우(31. 일본어 통역사). 학교 설립을 꿈으로 지니고 다니는 야무진 젊은이. 꿈은 구체적일수록, 그리고 젊은 시절에 명확하게 그리면 그릴수록 빨리 이룰 수 있고, 그 꿈을 이룰 때까지의 삶이 명징/단순해진다. 집중력이 배가되는 건 물론이고. 참으로 멋진 일이다. 지켜보는 이들까지도 기쁘게 만든다.
그가 한 말 중 진리(?)라고 해야 할 만한 게 있었다. 바로 외국어를 잘하기 위해서는 우리말을 제대로 잘해야 한다는 것. 나 역시 그걸 몸으로 느낀 사람 중의 하나다. 하도 오래 직장 생활 내내 영어를 상용하다시피 해서, 무슨 말이 나오면 그걸 영어로 떠올리는 게 더 빠르거나 명확해지는 못된(?) 버릇이 저절로 몸에 밸 정도로 살아왔기에, 나는 그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잔소리 삼아 늘어놓자면 예전에 이 우리말 겨루기에 출연했을 때 우승자 결정전에서 십자말풀이를 했는데, 첫 문제의 제시어가 ‘공기 중의 작은 물방울들이 모여서...’였는데 내 머릿속에 먼저 떠오른 것은 안개류에 속하는 fog, mist와 같은 영어 단어들이었다. 정답은 ‘구름’이었고.)
이곳에서 길게 말할 수는 없지만, 고급 외국어를 구사하려면 우리말 실력이 빼어나야 한다. 진리라고 해도 좋다. 외국어를 제대로 하면 좋은 것 중의 하나는 삶의 지평이 넓어지고, 생각하는 삶에서 우물 안 개구리를 확실하게 면한다는 점인데, 그런 도약의 과정에서 꼭 필요한 것은 우물 안을 확실하게 제대로 알아두는 일이다.
이종선(19. 고교 3년생). 십대들이 주로 잘못된 말들만 쓴다고 생각하는 편견을 바로잡는 데에 도움이 되었으면 싶어서 출연했다는 속 찬 청년. 어른들이나 사회에서 십대를 그렇게만 바라봐서는 아니되오! 소리를 구호로 만들어 들고 나온 아주 예쁜 젊은이였다. 이런 젊은이들이 이 나라 도처에 더 많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나는 믿는다. 이른바 이런저런 사유로 문제아로 몰리는 그런 학생들보다는 종선 학생 같은 아름다운 청년들이 더 많다는 걸 나는 믿는다.
그리고 그렇다는 것을 실물로 보여주는 방송 프로그램이 바로 이 우리말 겨루기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공중파 방송들까지도 거의 대부분 이제는 내놓고, 기를 쓰고 이 나라를 <예능 공화국>으로 만들어가고 있는 데에 앞장서는 듯한 와중에...
한재옥(54. 조리사). 중국에 머물고 있는 딸이 엄마의 방송 출연을 응원하기 위해 날아올 정도로 자식 농사를 멋지게 해낸 참으로 멋진 분. (따님 이름에도 부모의 슬기가 담겨 있는 ‘조슬기’.) 삶에서 맞이하는 굴곡을 사물놀이와 에어로빅 등의 몸수고와 땀내기로 정면 돌파를 해내신 멋쟁이 여인. 이런 분들이 그 짧은 시간에 단편영화처럼 내비치는 윤기 나는 삶의 조각보들이 알게 모르게 다른 이들에게 얼마나 영양가(?) 있게 작용하는지 모른다.
정희연(28. 남원시 공무원). 그녀 자신이 회식 이야기를 하면서 언뜻번뜻 내비쳤듯, 외유내강형. 멋진 이중생활자(?)였다. 5년이라는 긴 시간의 전투 끝에 공무원으로 진출했듯이, 뭔가 맘 먹으면 기어이 해낼 위험한(?) 예쁜이.
30대 후반쯤에 또 다른 사건을 치실 듯하다. 그때쯤이면 10억대의 몸 생활 도전 문제 같은 게 나올지도 모르고, 어쩌면 그런 자리에 완연히 달라진 모습으로 나타나실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전국 아마추어 기타리스트 솜씨 겨루기에서 대상 자리를 거머쥐실 지도 모르고. 하하하.
참, 이제는 주민센터를 찾아오시는 분들께서도 한마디씩 건네실 듯하다. 티브이에서 뵀어요... 소리를 덧대는 것으로.
송용주(46. 주부). 오랜 직장생활 끝에 주부 자리로 돌아와 그동안 충분히 맛보지 못했던 가정생활의 회복 덕분에 가장 행복하다는 분. 주말의 외출과 외식이 주는 충만감을 맛있게 맛보는 그 소박한 삶의 회복 앞에서 이분이 짓는 천연 미소. 우리는 이런 분들의 표정을 대하는 것만으로도 행복의 실물이란 게 뭔지를 깨닫게 된다. 어제 출연자들의 응원진 중 유일하게 전 가족(동갑내기 남편과 13살짜리 장녀를 포함한 두 아이)이 동원된(?) 터여서 더욱 반가웠다.
-공부량과 공부 자료 문제 : 재미있게 표현하자면, 어제 출연진들은 아마추어 냄새를 지워내지 못한 분들의 잔치였다. 무엇보다도 공부에 투자한 시간들이 넉넉지 못했고, 공부 자료량 쪽에서도 두어 분을 빼고는 두께가 아주 얇았다. 시청자들도 이내 눈치챌 정도로 공부량에 비례하여 3단계 진출자들이 정해졌다.
특히, 어제의 경우 초성 문제에서 얻은 점수들이 낮았다. 종선 군의 200점이 최고점이라 할 정도로. 초성 문제 획득 점수가 모든 실력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지만, 어제 제시된 초성 낱말들은 일반적인 사용 빈도가 높은 것들인데다 까다로운 게 없었는데도 그랬다.
우리말 겨루기 공부를 제대로 하면 좋은 것 중의 하나는 공부 과정에서 반복해서 대하는 수많은 낱말들이 살아난다는 점이다. 그동안 잠자고 있던 말들이 살아서 돌아다니게 된다고나 할까. 달리 비유하자면, 달리는 전철 창밖으로 스쳐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순간적으로 대하고 마는 경우들이 많아서 나중에 아무 사람도 떠오르지 않게 되는데, 전철 안에서 대화 한마디라도 나눈 사람은 그래도 일정 기간 기억되기 마련이고, 과정과 대화 내용에 따라서는 한참 세월이 지난 후에도 떠오르는 것과도 같다.
어떤 분은 우리말 겨루기 공부에서 찾아낸 낱말 하나를 금과옥조로 삼은 이도 있고, 어떤 분은 그 낱말을 자신의 아이디로 삼아 잊지 않고 되새기는 분들도 적지 않다. 공부가 주는 가장 큰 베풂 중의 하나는 그 과정이나 결과를 통해서 우리가 뭔가를 크게 (혹은 새롭게) 깨달아 우리 자신의 좌표 설정을 다시 하게 한다는 점이다.
점점 더 오락과 예능 쪽으로 기울고 있어서 (출연자들을 급조된 예능인 수준으로까지 강제하기도 하면서) 눈살을 찌푸리게도 하는 다른 퀴즈 프로그램에 비하여 우리말 겨루기 프로그램이 더 가치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기도 하다.
시청자들을 사로잡는 진정한 문제풀이의 묘미는 정신적 도전이 엮어내고 풀어내는 정신적 긴장에 있다. 출연자와 한마음으로 문제풀이에 도전하고 그 결과를 지켜보는 정신적 긴장도가 높기 때문에 시청자들을 흡인하는 것이지, 어설픈 눈요기거리를 보려고 화면 앞으로 오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풀이 사이에 끼워넣는 방담은 출연자와 시청자의 긴장을 잠시 해소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하거나 해야 하는 것이지, 그 자체가 주목적이 되어서는 그런 주객전도도 없다.
뿌리 없는 지식에서는 새싹이 돋지 않는다. 그런 조각 지식을 수단 삼아 눈요기에 더 가까운 포맷으로 진행하는 퀴즈 프로그램을 내가 전혀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은 (시청 시간대도 안 맞지만) 무엇보다도 그런 게 내 삶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삶의 알갱이가 되지 않는 일에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는 일을 이젠 되풀이해선 안 될 형편이기도 하고. 하하하.
2. 1단계 초성 문제
-제시어 분포 : '양/막/배/재/날'. 관심사인 ‘?0?’ 문제를 통과한 분은 한 분도 없었다. 취득 점수대가 100점에서 200점 사이이다 보니 도전조차도 못 해보고 접어야 했고, 이종선 군만이 도전 기회를 얻었다.
이 군이 걸려 넘어진 ‘0막0’에 해당되는 평이한 낱말은 '개막식/폐막식'이나 '단막극/장막극', 혹은 '주막집/천막집/움막집' 등에서 보이는 것들. 하기야, 나이가 있으니 눈이나 글로도 '주막집/천막집/움막집'을 대할 기회가 적긴 했을 터. 사회자가 언급한 '나막신' 같은 것도 이 군에게는 잘 떠오르지 않을 말이었다.
박상우 님은 ‘00양’이 장애물이 되었는데, ‘-양’은 일견 꽉 막히는 기분을 주는 말이기도 하지만, 그럴 때는 얼른 일본어 쪽으로 생각하면 편리할 수 있었다. ‘양’을 열면서 ‘洋/讓/瘍’을 떠올렸더라면 ‘오대양/동서양/태평양/대서양/인도양...’에다 ‘안내양/뇌종양/위궤양’ 등이 떠올랐을 게고, 그렇게 한번 열리면 쉽게 ‘겉모양/뒷모양, 속죄양, 미분양’ 등이 줄줄이 사탕 격으로 쫙 꿰어졌을 터.
외국어를 오래 사용하다 보면 저절로 그쪽 말로 생각하는 버릇이 들게 마련인데, 상우 님의 경우는 이 洋의 발음이 ‘요오’가 되다 보니, 도움이 안 되었던 듯하다. 언어는 문자 이전에 소리로 더 먼저 기억되는 법이므로. 글자를 모르는 아이들이 엄마 소리를 먼저 익히듯이.
한재옥 님은 실력 발휘 기회를 빼앗겼다. 시원시원한 성격 탓에. 하하하. 조금만 (0.5초만) 차분하셨더라면 ‘배00’에서 ‘뱃멀미’를 답하기 전에 생각을 바꾸셨을 터인데.
‘배우자/배신자/배반자/배교자/배신감’식으로 ‘배0자’만 떠올려도 좍 떠오르셨을 듯하다. 시원시원한 성격을 두고 때로는 급한 성질머리라고 자책하게 되기도 하는데, 어제 재옥 님은 딱 0.5초만 느리게 가셨더라면 좋았을 뻔했다.
정희연 님은 ‘00재’를 못 넘고 주저 앉으셨다. 남원에는 ‘문화재’도 많고 ‘한약재’도 많지만, 그 대신 못 넘을 정도로 높은 고개(재)는 없는데... 하하하. 하기야, 이 ‘-재’는 남성용 낱말이긴 하다. ‘건설재/부자재/건자재/자본재...’ 등의 말들이 물기가 거의 없어서 재미없는 딱딱한 말들이니까.
송용주 님은 제시어 ‘날-’ 앞에서 무척 당황하신 듯하다. 마치 ‘날벼락’만 같지 않았을까. 그럴 때 마음속으로 ‘당당하게’ 에구머니나 웬 날벼락이람... 만 하셨어도 이 ‘날00’ 문제를 거뜬히 통과하셨을 터인데. (용주 님의 출연 포부 소개 내용 중에 ‘당당하고자’ 출연하셨다는 게 들어 있었다.)
참, 어제 문제풀이에서 사이시옷 때문에 좌절하신 분들이 있었다. 이 나라의 사이시옷 문제가 제대로 떠오르고 그 답이 구석구석 미치게 된 게 바로 <표준국어대사전>이 발간되면서부터다. <국립국어원>이 제 할일을 제대로 해내면서다. 항용 ‘꼭지점/등교길/하교길’으로 아주 쉽게 써오던 것들이 어느날 갑자기 ‘꼭짓점/등굣길/하굣길’이라는 괴상한 문자로 등장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가급적 ‘소리 나는 대로’ 음운론을 바로 잡으려는 노력의 일환이기도 하다. 즉, 원리를 찾아 원칙을 바로 세우려는 노력. 그러니 따라야 한다. 어제 ‘날갯짓’을 ‘날개짓’으로 조심스럽게 (똑똑하게) 답하는 바람에 낙마하신 게 안타깝기는 하지만, 우리가 공부를 통해서 우리말을 바로잡아야 하는 것이기도 하므로, 이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분들에게 타산지석이 되고도 남을 것임을 확신한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이 사이시옷의 ‘원리’를 설명하고자 한다. 원리를 익히고 나면 쉽다. 마치 수학 문제에서 공식을 무조건 외우기보다 제대로 이해를 하고 풀면 문제 풀이가 쉽고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게 되듯이.
참고로, ‘날00’의 낱말은 주변에서 흔히 대하는 것들 중에서도 많다. 위에서 언급한 ‘날벼락’ 외에도 ‘날고기/날짐승/날갯짓/날치기/날건달/날라리/날파람’ 등이 있고, 조금 더 들어가면 ‘날곡식/날보리/날고추/날고치/날가죽/날간장(-醬)/날가지’ 등이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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