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事一思] 안철수와 “부인, 들어가도 되겠소이까?”
지난번 <부인, 들어가도 되겠소이까?>라는 제목으로 긁적인 글이 있다. 몇 해 전에 방영되었던 <여인천하>라는 사극의 한 대목을 인용하면서.
그때 그 대사는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동생 윤원형으로 분(扮)했던 이덕화가 당시 첩의 신분으로 별채에 머물고 있던 정난정의 방문 밖에서 했던 말이다. (그 대사를 처음 듣는 이들에겐 이 말이 좀 이상했을 듯하다. 존댓말을 쓰는 건 좋지만, 첩에게 ‘부인’이라니 싶어서. 그건 정난정이 첩실이 되는 조건으로 윤원형에게 미리 ‘부인’이라고 부르기로 받아낸 영악한 약조 중의 하나였다. 정난정은 부총관을 지낸 정윤겸(鄭允謙)이 아버지이긴 했어도 관비 출신의 어머니로 인하여 천민으로 매김 되자, 잽싸게 머리를 써서(?) 기생으로 나선 뒤에 척족인 윤원형이 장차 크게 한몫할 것을 짐작하고 건달이나 다름없던 그에게 착 달라붙은 것부터가 엄청 영악한 짓이긴 했지만......)
암튼, 그 대목을 접하자 나는 그 말이 지닌 중의법 때문에 처음엔 킥킥거렸다. 그리고, 나중엔 살짝 감동했다. 부인에게 맞존대*를 하는 그 당당한 의젓함과 기품 있는 언행 앞에서 주눅 들면서...... 그때 긁적인 글이 바로 위에 제목을 인용한 잡문이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맞존대’라는 말은 아직 표준어에 오르지 못했다. 국립국어원이 좀 한가해지면, 이러한 말들은 표준어 사정에서 우선적으로 다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 글에서 다시 되새김질 하자면, 부부간의 맞존대는 참으로 아름다운 습속이다. 가능한 한 대대손손 물려졌으면 싶다. 그리고, 존대까지는 어렵다 하더라도, 대놓고 하대하는 어투만큼은 사라졌으면 한다. 한 발 물러서서 돌아봐도 그렇다.
어투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상대방에 투영된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쉽게 말해서, 아내를 하대하는 사람은 그처럼 하대 받거나 경시되는 여인의 남자일 따름이다. 남편이 아내를 하대하는 말을 뱉는 것은 그가 제 발로 하대 받는 여인의 옆자리로 찾아가는 일이나 진배없다.
*
내 경우, 평소엔 ‘~요’ 체를 쓴다. 전화를 받으며, “나요!” 하는 식이다. 물론, 아내가 “언제 올 거예요?” 하고 물으면 “응, 곧 갈 거야.” 하는 식으로 어미를 달리하여 어물쩍하는 반말 평어체도 많이 쓰지만.
그렇지만, 아내에게 대고 “네가 그랬잖아.”라거나 “지가 뭘 안다고...” 하는 식의 마구잡이 하대어는 거의 쓰지 않는다. 내가 전화기 너머로 흘러나오거나 주워 담는 남정네들의 어투를 들으며 아주 질색하는 말은 부인에게 ‘너’라고 할 때다. 그런 이들은 아예 사람값을 제대로 쳐주지 않을 정도로 나는 알게 모르게 금을 긋는다. 그렇다는 걸, 드러내놓고 말해도 될 만한 이들에게는 기회가 오면 정색하고 말하기도 하고.
이렇게 적으면, 내가 항상 아내에게 아주 잘하는 모범생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진 않다. 사내란 게 술 한잔 하게 되고, 그게 부부싸움이나 언쟁 등으로 연결되면, 평소에 어렵게 적금 들듯 모았던 걸 한방에 다 까먹게 되듯이, 나 또한 그렇다.
자주는 아니지만, 어쩌다 좀 심한 말이 오가게 되고 하면, 어쩔 수 없이 동원되는 말이 ‘너’이긴 하다. 씩씩거리긴 해야 하고 욕을 할 순 없고, 그럴 때는 할 수 없지 않은가.
그런데, 이 술 먹고 해대는 말실수란 것도 그 후유증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꽤 복잡하고 미묘하다. 남녀 간에 다르고, 상대방의 성별로 파장과 잔영이 다르다.
남자가 한잔했을 때 여자가 남자에게 하는 말은 대체로 뭐든 오케이다. 그리고는 쉽게 잊는다. 기억하려 들지 않는다. 하지만, 사내가 술 한잔하고서 여인에게 던지는 말들 중에는 여인의 가슴에 가시로 박히는 게 많다. 쉽게 빠지지 않는다. 빠지고 나도 그 아픔의 흔적은 상처로 남는다. 녹아 없어질 때까지.
사내들끼리 술 한잔했을 때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던진 말은 그 옹이가 깊게 남는다. 술 취했을 때 삐져나오는 한마디는 진담일 때가 많으므로. 술상대가 남자가 아닌 여자일 때도 그럴 때가 있다. 여인이 내숭파거나 이중인격자의 경우에 특히 더. 그럴 때 여인이 꽁꽁 숨겨두었던 진실이 드러나기도 한다.
하지만, 아내들은 아니다. 대체로 이미 거의 다 드러나 있을 때가 대부분이므로 남편에게 아내는 더 이상 내숭파가 아니다. 되지 못한다. 아내가 오랫동안 남편 뒤에서 자신을 억압해 오지 않은 한은.
*
안철수. 그는 남녀 상하를 불문하고 막말을 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의 아내에게도. 그는 나이 스물아홉에 (1991) 해군장교로 군복무를 시작했는데, 그때 아내에게 보낸 편지들을 보면 징그럽다(?).
부부간에 주고받는 편지가 아니라, 이제 막 연애 초입에 들어선 남자가 여자를 꾀기 위해서 보내는 연애편지보다도 더 징그럽다. 내용이 그렇고 어투만 봐도 그렇다. 연애 초기에 상대방에게 꼬박꼬박 존댓말로 편지를 써댈 그때의 어투를 안철수는 시종일관 고수한다.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
아내에게 보낸 편지 속의 어투. 그리고 남녀상하를 불문하고 반말을 하지 않는 것. 그것은 그의 인생철학이 배어 있는 언어 행위인 발화 습관이기도 하다. 내가 아내에게 하대어를 쓰지 않는 것과 같다. 내가 편하자고 하는 짓이다.
아랫사람이나 아내에게 하대어를 쓰는 것은 되나 못되나 군림부터 하려 드는 짓이고 그렇게 되면 상대방으로부터 ‘되나 못되나’ 항상 그만큼 받들림을 받고자 하는 심사가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타인들에게 까발리는 어리석은 짓이기도 하다. 그런 게 아예 고정 장치로 붙박여 있게 되면 말버릇도 거기서 벗어나지 못한다. 아주 못된 버릇이 된다. 그래서, 하대어를 써서는 안 된다. 누구에게도.
안철수. 나는 정치 쪽에 아예 무관심파인지라 정치인 어느 누구에게도 특별히 관심하거나 하지 않는 편이지만, 나는 그가 좋다. 다른 건 몰라도 말버릇 하나만큼은 정말 예쁘다.
그것이 표로 연결된다는 보장은 없다. 정치적 판단은 내 나름 또 다른 판단 기준이 있기 때문에. 하지만,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만약 저울대가 한쪽으로 기우는 일이 없다면 어쩌면 그를 선택할지도 모르겠다. 이유야 뻔하다. 말이 모든 것의 씨앗이 될 수도 있다.
[Dec.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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