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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성 스님의 파격적인 육두문자 법문

[차 한잔]

by 지구촌사람 2013. 6. 27.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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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성 스님의 파격적인 육두문자 법문

 

지금은 많이 잊혔지만 1960년~1970년대에 "욕쟁이 스님"으로 유명한 분이 계셨다. 화엄법사(華嚴法師) 춘성(春城 1891년 ~ 1977년)스님이 바로 그분. 기골이 무척 장대하여 깡패나 경찰들도 스님의 위세에 눌렸을 정도.

 

춘성 스님의 속명은 이창림(昌林)이고 본관은 평창인데, 태어난 곳은 백담사 입구 주차장 근처인 용대2리 907번지. 그는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좋고 기골이 장대하고 총명하였다. 9세 되던 해에 모친을 따라 설악산 신흥사에 가서 불공을 드리다가 불상을 본 후 출가할 뜻을 밝혔는데, 부모는 아들이 승려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아 허락하지 않는 바람에 다시 수년을 기다렸다가, 1903년 세속 나이 13세 때 다시 부모를 간곡히 설득하여 출가했다.

 

만해 한용운의 유일한 상좌이자 대선사 만공의 법제자였던 스님은 허위의식 없이 알몸을 그대로 드러낸 선(禪)지식인의 표본. 한국 선종의 맥을 이은 선승이자 한평생을 탈속한 무애도인(無碍道人)으로 살았던 스님의 진면목은 갖가지 기행과 걸쭉한 육두문자로 행한 호탕한 설법, 철저한 무소유의 실천에서 드러난다. 도올 김용옥은 그의 욕을 두고 <벽암록>을 뛰어넘는 시대의 공안(公眼)이자 카타르시스였다고 평했다.

 

그분의 걸쭉한 육두문자와 기행을 몇 가지 짚어보기로 한다.

 

* 양복 차림의 탈속과 보시

스님에게 신자들이 당시로선 고가인 양복을 해주곤 했는데... 스님은 그 양복에 나비넥타이까지 매고 중절모를 쓴 채 서울 시내에 나가서, 지인에게 맥주 한 잔 얻어먹는 것을 즐겼다. 하지만, 양복은 그의 몸에 이틀을 붙어있지 않았다.

 

헐벗은 걸인과 빌어먹는 거지들이 거리에 즐비한 시절인지라 자신의 새 양복을 벗어주고는 팬티 차림으로 공중 화장실에 숨어 있다가 한 밤중에 절에 돌아오곤 했다.

 

* 내 좆을 믿어라

스님이 서울역 앞에서 전차를 타셨다. 당시에도 "예수 믿으면 천국, 불신지옥"을 써서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도 그 전차에 탔다. 웬 늙은 중을 보자 그가 앉아 있는 곳으로 몰려와 이렇게 말했다.

"스님, 죽은 부처 같은 거 믿지 말고 부활하신 우리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래야만 천국 갑니다."

 

그러자 전차 안의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스님의 기골이 장대한데다가 한눈에 보기에도 험악하달 정도로 심상치 않은 모습이었기 때문에, 필시 싸움이 일어날 듯했다.

 

스님이 그 말을 한 사람을 가만히 올려보며 물었다.

"부활이 뭔데?"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거지요. 부처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지 못했지만 우리 예수님은 부활하셨소. 그러니 죽은 부처보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더 위대하지 않소? 스님도 예수님을 믿으시오."

 

스님이 다시금 그 사람을 빤히 쳐다보더니 물었다.

"죽었다가 살아나는 게 부활이라? "

"그렇소."

"그럼 너는 내 좆을 믿어라.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죽었다가 도로 살아나는 것은 좆밖에 보지 못했다. 내 좆은 매일 아침 부활한다. 예수가 내 좆하고 같으니 너는 내 좆을 믿거라~ "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던 전차 안 승객들은 박장대소했다.

 

* 이불과 불심

그는 평생 이불을 덮지 않고 잤다. 그것은 이불이 이불(移佛) 또는 이불(離佛)이라 하여 부처와 불심에서 떠날 수 있게도 할 수 있다는 것 때문. 몸이 따뜻해지면 마음이 게을러진다는 이유였다.

 

그 바람에 덩달아 고달파진 것은 수행자와 상좌들. 광복 이후 춘성 스님이 도봉산 망월사에서 수행을 할 때인데, 젊은 동자승이나 상좌들이 이불을 덮고 자다가 춘성 스님에게 들키면 그 자리에서 이불을 빼앗기고 벼락이 떨어졌다.

 

"수행을 한다는 자가 편하고 따뜻한 잠을 자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야~ 이 씨부랄 놈아~ 그 담요 당장 이리 내 놓거라!"

 

스님은 그렇게 해서 젊은 승려들이나 수행자들로부터 기어이 담요를 빼앗았다. 물론 그 자신도 평생 이불을 덮지 않음으로 제자들에게 언행일치의 모범을 보였고.

 

*떨어져 봤어야 알지

하루는 제자가 스님에게 물었다.

"스님 백척간두에서 다시 한발을 더 내디디면 그 다음 경계는 어떤 것입니까?"

스님으로부터의 심오한 답변을 기대하고 있던 제자에게 돌아온 대답.

"야 씨발놈아~ 내가 떨어져 봤어야 알지."

 

*무소유 정신

스님은 돈을 저축하거나 서랍에 넣어두는 법이 없었다. 돈이 생기면 필요한 사람에게 손에 잡히는 대로 줘버렸고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았다. 심지어 외출을 하면서 문단속도 하지 않았다.

 

제자가 걱정이 되어 스님에게 문단속이라도 하고 나가시라고 하자, 이렇게 답했다.

“내게 지켜야 할 부모님도 계시지 않는데, 간수하고 지킬 것이 뭐가 더 남아 있기에?”

 

그는 시주에 의존하지 않고 사찰 주변에 직접 화전 밭을 일구기도 했으며, 한 알의 밥알도 남기는 걸 허용하지 않았다.

 

*본적은 아버지 X지, 주소는 엄마 X지

6.25전쟁 동안 스님이 떠나지 않고 지켰던 망월사. 전쟁이 끝나고 나자 급히 보수할 곳이 생겨서 사찰 근처의 나무 몇 그루를 베어 보수를 하다가, 산림법 위반으로 경찰서에 끌려가 조서를 받을 때다.

 

경찰이 본적을 물었다. "우리 아버지 자x(신두)".

경찰이 주소를 묻자 "우리 어머니 보x"라고 답했다.

 

스님은 즉시 풀려났는데, 전해오는 바로는 그 이유가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담당 경찰관이 ‘별 미친놈이 다 있네’ 하면서 풀어줬다는 설과, 그런 담대한 대답에 놀란 경찰이 범상치 않은 귀인임을 알아보고 합장배례로 돌려보냈다는 설.

 

* 내가 중대장이다

야간 통금이 있던 시절 방범 순찰을 하던 경찰관이 밤길을 가는 행인을 보고 누구냐고 묻자 돌아온 대답은 "중대장이다"였다.

 

순경이 다가가 플래시로 얼굴을 비춰보니 중대장이 아닌 어떤 스님.

"아니, 스님 아니시오? "라고 묻자

"그래, 내가 중(僧)의 대장이다." 라고 대답했단다.

 

*뽀뽀나 하자

스님이 강화도 보문사에 있을 때 육영수 여사가 찾아와 인사를 했다. 그러자 스님은 대뜸 "뽀뽀나 하자"고 달려들었다.

 

육 여사는 당황하지 않고 웃으며 응대하고 돌아와서, 박 대통령에게 그 얘기를 전했다.

박 대통령 왈, "근래 보기 드문 큰스님이 나왔구먼." 하더란다.

 

*육 여사 생일날의 법어

육 여사의 생일날 스님은 청와대로 초대되어 갔다. 불자인 박 대통령과 육 여사가 법문을 청하자 스님은 아무런 말도 않고 마이크 앞에 그냥 잠자코 있었다. 30분이 넘도록.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서 스님께 독촉을 하려들자, 스님 한 마디 법문을 했다.

 

"오늘은 국모이신 육영수 보살이 지 에미 보x에서 ‘응애’ 하고 나온 날입니다."

 

* 내 큰 것과 네 좁은 곳?

매사에 조급해하고 동동거리는 딸을 둔 보살이 있었다. 이 딸이 장성하자 걱정이 된 보살은 딸을 스님 처소에 보내서 소갈머리가 좀 터지는 법문을 청해 듣도록 했다.

 

스님이 소갈딱지 없는 딸에게 말했다.

"내 그 큰 것이 네 그 좁은 곳에 어찌 들어가겠느냐?"

 

딸은 얼굴이 벌게지면서 방문을 박차고 울면서 달아났다. 집에 돌아와 스님의 법문 내용을 말하고 "큰 스님은 엉터리이에요."라고 어머니께 푸념을 하였다.

 

그러자 보살은 "그러면 그렇지 바늘구멍도 못 들어갈 네 소견머리에 어찌 바다 같은 큰 스님의 큰 법문이 들어가겠느냐" 하며 혀를 찼다.

 

딸은 어미의 말을 듣고서야 스님의 속 깊은 법문을 자신이 잘못 알아차린 줄을 뒤늦게나마 알았다.

 

* 부처는 똥이고 똥통 속에도 있다

스님이 기차를 타고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오는데, 함께 탄 젊은 목사가 기독교를 믿으라면서 하나님은 무소부재(無所不在)라고 했다.

 

그러자 스님이 물었다

"그러면 하나님은 없는 데가 없다는 말이냐? "

"그렇습니다! "

"그러면 하나님은 똥통 속에도 있겠네?"

 

이 말을 들은 목사는 하나님에게 불경스러운 말을 쓴다고 화를 내며 따지듯 물었다.

"그럼 부처님은 없는 데가 없습니까? "

"없는 데가 없지! "

"그러면 부처님은 똥통 속에도 있겠네요? "

"허허 맞어. 부처가 똥이고 똥이 부처인데 똥통 속에 있고 말고 구분해서 말할 것이 뭐 있어? 허허~."

 

* 졸음한테 항복 받았다

금강산 유점사에서 수행 중의 일. 정진 중에 사정없이 몰려오는 졸음을 물리치기 위해 스님은 비법을 만들었다.

 

한겨울인데도 법당 뒤 구덩이를 파고 큰 항아리를 묻은 다음 그 항아리에 냉수를 가득 채웠다. 그리고는 참선수행을 하다가 졸음이 밀려오면 옷을 훌렁훌렁 벗어 던지고 그 얼음물 항아리 속으로 들어가 머리만 내밀고 정진을 했다. 그러면서 이랬단다.

 

"허허! 이제야 졸음한테 항복을 받았다!"

 

* 시집/장가에는 보x와 자x가 제일이듯

서울 근교 어느 비구니 사찰 중창불사를 위한 법회에서 스님이 남긴 파격적인 법문 한 토막.

 

"시집 장가가는 데는 자x와 보x가 제일이듯 중창불사 하는 데는 돈이 제일이니 오늘 이 법회에 온 귀부인년들아~ 돈 많이 시주하고 가거라!"

 

*신도를 위해서 사냐?

스님이 입적을 앞두고 있을 때 후학이 스님에게 물었다.

"열반에 드신 후에 사리가 나올까요? 안 나올까요?

스님의 대답. “내겐 필요 없다."

그러자 후학이 말했다.

"스님, 사리가 안 나오면 신도들이 실망할 터인데요."

스님 왈 "시발놈의 중놈아! 내가 언제 신도 위해 사냐?"

 

스님은 입적 후에 절대로 사리를 찾지 말고 비석과 부도도 세우지 말 것이며 오직 수행에 힘쓰라고 당부했다.

 

투철한 수행과 특이한 기행으로 한 생을 살다 간 그를 보내는 날 밤, 명진 스님(봉은사 주지)을 비롯한 후배 선승들은 다비식장에서 그가 생전에 즐겨 불렀던 <나그네 설움> 등을 부르며 노래자랑(?)을 벌이는 것으로 그에게 화답했다. 제자들답게. <실제로 영롱한 사리들이 많이 나왔지만, 스님의 유언에 따라 모두 바다에 버렸다고 한다.>

 

*어찌 따뜻한 방을 쓰랴

만해 한용운 스님이 기미 독립선언서에 백용성 스님과 함께 불교계 대표로 서명, 33인 중의 한분으로 왜경에게 체포되어 갇히자 지극 정성으로 스승의 옥바라지를 했다. 스승이 감옥생활을 하고 있는 동안 엄동설한에도 아궁이에 불을 피우지 않은 채 냉방에서 견뎠다.

 

그런 사정을 모르는 다른 스님이 절에 와서 돌아보니 땔감도 많이 있는데도, 냉방에서 지내는지라 이상해서 물었다

"아니, 저렇게 땔감이 많이 있거늘 어찌하여 아궁이에 불을 피우지 않고 냉방에서 덜덜 떨면서 자는 게요?"

"장작이야 물론 넉넉히 있다오. 허나 스승께서 독립운동을 하다 왜놈들한테 붙잡혀 지금 서대문형무소 추운 감방에서 떨고 계신데 제자인 내가 어찌 따뜻한 방에서 감히 잠을 잘 수 있겠소? 스승께서 나오시기 전에는 결코 아궁이에 불을 넣지 않을 것이오."

그렇게 대답하면서 끝까지 아궁이에 불을 넣지 않았다.

 

춘성 스님은 세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스님이 아니었고 젊은 시절 주지를 두 군데 역임한 것을 빼고는 큰 감투를 별로 쓴 일이 없었기에 매스컴에 자주 소개되는 일도 없었다. 그러나 1960년대와 1970년대 한국불교계에서 ‘욕쟁이 스님’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춘성 스님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걸쭉한 육두문자를 쏟아냈다.

 

지나치게 화장을 하고 사치스런 옷을 걸친 채 으스대기 좋아하는 여자가 절에 오면 스님은 고관대작의 부인이라고 하더라도 즉석에서 “씨부랄 년”이라는 욕부터 쏟아냈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처럼 거침없이 쏟아내는 스님의 무지막지한 욕설을 들어도 누구 한사람 감히 항의하거나 대들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 뿐만 아니라 이상할 정도로 스님의 욕에서는 천박한 냄새가 나는 게 아니라 상큼할 정도로 속 시원한 지혜가 번뜩이기도 했다고 하니, 그것은 아마도 육두문자와 욕설 속에조차도 파격적인 선지(禪旨)를 담아낸 탓이 아닌가 싶다고들 한다. 그 바탕에는 철저한 무소유의 정신이 들어 있었다. 명리든 무엇이든. 후학들이 그를 회고하는 글편에 하나같이 담겨 있는 내용들이 그러하다.

 

*화엄법사 춘성[春城] 스님

선승(禪僧). 성은 이씨, 속명은 창림(昌林). 강원도 설악산 설악동 출신. 13세 때 설악산 백담사(百潭寺)로 가서 한용운(韓龍雲)의 제자가 되었는데, 그때의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한용운을 찾아가 승려가 되겠다고 간청하였으나 승려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며 허락하지 않았다. 한용운이 방문을 닫자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는데, “아! 경계 좋다. 이곳에서 살지 않는다면 어디에서 산단 말인가.” 하는 노래가 들려왔다. 한용운이 문을 여니 발가벗은 춘성이 비를 맞으며 춤을 추고 있었으므로, 제자로 삼았다고 한다.

 

 

그 뒤 10여 년 동안 백담사에서 공부하다가 안변 석왕사(釋王寺)로 가서 불교전문강원(佛敎專門講院)의 대교과(大敎科)를 수료하고 29세에 설악산 신흥사(神興寺)의 주지에 취임하였다. 그 뒤 석왕사 주지를 거쳐 39세 때에 만공(滿空)을 스승으로 삼아 전법수행(傳法修行)에 골몰하였다. 그러나 결코 한 절에 오래 머무르려 하지 않았다. 도봉산 망월사(望月寺), 강화도 보문사(普門寺) 등을 전전하면서 운수납자(雲水衲者)의 인생을 살았으며, 신도들과 친하게 지내지도 않았다.

 

 

6^25 전쟁 중에는 혼자 망월사를 지켰고, 전쟁이 끝나자 절 주변의 나무를 벌목하여 절을 중수하다가 의정부 영림서에 적발되었다. 그때 조서를 꾸미던 서장이 본적을 묻자 아버지는 신두(腎頭:남성의 성기)라 하고, 고향을 묻자 내 어머니라 하여 서장은 조서 작성을 포기하고 풀어주었다. 또한 길을 가다가 가난한 자를 만나면 가진 돈을 몽땅 주었고, 추위에 떠는 사람을 보면 그 자리에서 입고 있던 옷을 벗어주기도 하였다.

 

 

극락과 천당이 마음을 떠나서 따로 없고, 종교도 본래 없는 것인데, 한번 빠지면 나오기 힘들어 사람을 버리게 된다고 하여 역으로 종교의 참뜻을 깨우치기도 하였다. 불가(佛家)에서는 그를 탈속한 무애도인(無碍道人)이라 평가하고 있으며, 거침없이 육두문자(욕)를 썼으므로 욕쟁이 스님이라고도 한다.

 

 

한평생을 철저한 무소유(無所有)의 일의일발(一衣一鉢)만으로 깨친 본래대로 자재롭게 살다가 봉국사(奉國寺)에서 입적(入寂)하였다. 다비(茶毘)한 재를 몽땅 바다에 뿌리라고 유언하였으므로, 제자들은 그의 사리까지도 모두 서해에 던졌다. 그 사리는 매우 크고 영롱하였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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