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에 금싸라기 줍기
최 종 희
“금가루가 아무리 귀하다고 해도 눈에 들어가면 병이 되느니라.”
오늘 아침 버스 정류장의 안내판 모니터에서 반짝거리고 있던 말이다. <오늘의 한마디>라는 제목으로 한 번 거기에 오르면 1주일 이상 간다. 글귀에 들어있는 금가루처럼 빛나는 말. 내 눈길이 그 금가루들을 오래 쓰다듬었다.
이 말의 한문 표기는 <금설수귀(金屑雖貴)나 낙안성예(落眼成瞖)니라>(瞖는 ‘안질 예’)인데, 임제 선사(?~867)의 말씀이다.
임제 선사는 당(唐)의 선종 고승으로, 요즘도 선문답에서 자주 쓰이는 ‘할’ 소리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그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만드는 것)’를 확실히 세운 인물로 요약된다.
그의 말 중 일반인들에게까지 널리 스며들어 있는 명언으로는 ‘수처작주(隨處作主- 어느 곳엘 가더라도 주인이 되라. 세상에/주변에 흔들리지 마라.)’도 있다. 은근히 속대가 단단한 많은 이들이 이 말을 좌우명으로 삼고 있기도 하다.
나 역시 10여 년 전에는 내 사무실 벽에 그걸 살짝 적어두었었다. 내 방에 드나드는 이들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의자를 돌려 면벽을 하게 되면 내 시선이 닿는 자리에 메모지로 붙여 두었다. 때로 씩씩거리는 마음을 다독이기 위해.
*
“공짜 치즈는 쥐덫 위에만 있다.”
러시아 속담이다. 임제 선사의 경구로 바뀌기 전에 정류장 모니터에 매달려 있던 말.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 이건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시카고 대학의 깐깐한 화폐론 학자 밀튼 프리드먼(Milton Friedman, 1912 – 2006)의 말이다. 경제 분야뿐만 아니라 정치 철학에까지 영향을 끼칠 정도로 속 깊고 폭 넓은 학자. 온 세계에 영향을 끼쳤지만 특히 그에게서 직접 배운 중남미의 경제관료들은 시장경제론의 실천에 앞장섰다. 그는 유태인이기도 했다.
유태인의 생활 성경이랄 수 있는 탈무드에 이런 말도 있다. ‘공짜로 처방전을 써 주는 의사의 충고는 듣지 마라.’
위의 말들은 공짜를 멀리 하라는 쪽이다. 러시아 속담은 공짜 좋아하다가는 목숨도 위태로울 수 있다며 공짜를 밝히는 건 확실하게(?) 신세를 망치는 길이라고 아예 겁까지 주고 있다. 이처럼 공짜를 가까이하다가는 큰 일 난다고 경계하는 게 서양 쪽 생각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떨까. 속담에 ‘공짜[공것]라면 양잿물[비상]도 먹는다[삼킨다]’라는 말이 있다. 공짜가 무엇이기에, 목숨 생각도 뒷전으로 미루게 할까.
*
우리말에 ‘형역(形役)’이 있다. 사전 뜻풀이를 보면 ‘정신이 물질의 지배를 받음. 또는 공명과 잇속에 얽매임.’이라고 되어 있다. 물욕 때문에 제정신을 팔아먹은 것, 소유욕/물욕 때문에 멀쩡한 사람이 인간 이하의 짓거리를 해대는 것을 뜻한다.
‘三日修心(삼일수심)은 千載寶(천재보)요, 百年貪物(백년탐물)은 一朝塵(일조진)’이라는 경구가 있다. 3일간 닦은 마음은 천년의 보배이고, 백년을 탐하여 모은 재산도 하루아침에 먼지가 될 수 있다는 말.
다시 말해서 마음은 3일만 제대로 닦아도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귀중한 보배가 될 수 있지만, 재물이란 건 백년을 모은 것이라도 하루아침에 먼지로 화하는 헛된 것일 뿐이라는 뜻으로, 불교의 동자승들이 공부하는 ‘자경문’에 나오는 말이다. (이 ‘百年貪物 一朝塵’은 나의 글 창고 격인 네이버 블로그의 대문 명패로 10여 년째 붙어 있는 말이기도 하다.)
내 주변에 참으로 ‘불쌍한’ 이들이 제법 된다. 그럴 듯한 아파트 한 채씩도 있고,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서 전혀 불쌍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지만, 안을 뒤집어 보면 참으로 불쌍하다. 하우스푸어에다 깡통아파트 주인들도 적지 않다. 그뿐만이 아니다. 더욱 안쓰러운 것은 그들의 정신 상태다.
그런 집의 부부들은 최소한 둘 중 하나, 혹은 둘 다, 외양 중심으로 산다. 집이고 옷이고 차고 아이들이고 간에, 중산층이라는 허울에 어울리는 것들을 고집한다.
그런 행태에다 겉치레라는 말을 붙이면 그들은 펄쩍 뛴다. 어째서 그런 ‘기본적’인 것에 신경 쓰는 것이 겉치레냐고 되묻는다. 핏대를 세우며... 어떨 때는 그 핏대조차도 어디서 공짜 점심을 먹으며 공짜로 빌어온 거 아닌가 싶은 생각을 나는 하곤 한다.
그만치, 어이없는 변명들을 늘어놓곤 한다. 하기야, ‘형역(形役)’ 상태인 그들은 자신이 멀쩡한(?) 줄로만 착각한다.
물질/외양/명예욕 등에 꿰여서 인생 망치는 사람들 정말 많다. 장관 후보자 인사 청문회장에서, 어린애가 봐도 부동산 투기임이 분명한 짓거리를 해놓고도 자신은 몰랐다던가, 뭐가 어떻고 어떻고 해서 그랬다는 식의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는 머리 좋은 바보들 늘비하다. (두어 해 지켜내기도 힘든 장관 자리 하나 따위가 무에 그리 비겁하고도 치졸하게 매달릴 거라고 제 이름 석 자에 똥칠되는 걸 부끄러워 할 줄 모르니 바보랄 수밖에 없다.)
이런 이들의 생각 바탕에는 이 세상에는 머리만 조금 쓰면 제 손으로 잡을 공짜 돈이 널려 있는 것으로 보이는 모양이다. 공짜 치즈는 쥐덫에만 있다는 걸 어째서 모를까.
문득 문단 행사장에 입고 나갈 옷과 꾸미개들을 마련하기 위해 상상도 못할 짓거리를 해댄 어떤 중년의 싸구려 여류 시인 생각이 난다. 겉치레용 빚더미 아파트에 머물면서 형역 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면 옷가지와 신발 따위 때문에 몸까지 팔아대는(그것도 버릇처럼), 그런 기상천외한 일도 자연스럽게 벌어진다.
그런 이들과 치즈 한 조각 때문에 쥐덫에 걸린 쥐의 모습은 한판이다. 공짜라고 들입다 양잿물을 밝히면 결과는 죽음뿐이듯, 탐욕의 끝은 멸망이다. 금가루조차도 눈에 들어가면 병이 된다. 공짜는 물질에 정신을 팔아먹은 사람들에게만 보이는 법이고, 그 끝은 자명한 자멸이다.
이 세상에 공짜는 없고, 정신은 언제나 물질보다 상위에 있다. 금보다도 더 빛나는 진리다. 정신의 밭을 올바르게 경작한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그랬다.
[28 Feb. 2013]
나의 앤은 책을 읽는다 (0) | 2013.07.18 |
---|---|
소설 한 편으로 주고받은 연애편지 (0) | 2013.07.11 |
장한나의 친구 황병기, 황병기의 친구 장한나 (0) | 2013.06.22 |
사랑은 앨범이다 (0) | 2013.06.02 |
아. 자존심 상한다, 상해! (0) | 2013.05.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