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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의 제주도 여행, 그중에서도 한라산 등반은
우리 가족사에서 그야말로 기념비적인 일대 사건이다.
그 정도를 갖고 일대 사건 운운하니
남들에게는 웃기는(?) 말이 될 수도 있겠지만
우리끼리는 그렇다. 아주 절실하게 일대 사건이었다. ㅎㅎㅎ
마나님은 관절염 환자로서 무릎이 시원치 않고
20여 년 전 교통사고로 고관절 부위에 문제가 있는데다, 견비통이 있어서
좋아하는 운동 중에서 볼링과 배드민턴, 수영 등은 의사의 비권장 종목에 든다.
달리기도 물론 금지 대상이고 경사도가 심한 등산도 사양해야 한다.
오직 한 가지, 완만한 경사지를 포함한 곳에서 걷기만 할 수 있다.
그게 유일한 의사 샘의 권장 운동이다.
우리 공주님은 여중 1년생이다.
요즘 여학생들이 대체로 체력이 좀 부실하거나 운동량이 약간 모자라는 편인데
요행히도 울 공주님은 공부파가 아닌지라 엄마를 따라서 걷기 운동도 좀 했고
학교에서도 체육 시간을 꽤나 좋아하는 편이다.
(그런데, 줄넘기를 매일 하는 것도 아닌데 종아리는 쇳덩어리 같다. 굳어서... )
주말엔 4킬로 정도 되는 야산 쪽으로 산책을 할 때가 있는데
올 때쯤이면 다리가 아프네 어쩌네 할 때도 가끔 있다.
그런데... 그러하신 분들인데...
이번 제주도 여행에서는 한사코 한라산에 오르시겠단다. 그것도 정상까지.
내가 그 코스가 왕복 9시간짜리라서 아침 일찍 나서더라도
저녁 해질 무렵에야 내려오는 엄청 고달픈 짓(?)인데다
오르내리는 시간 내내 그저 땅바닥의 돌들을 딛지 않으려고
고개를 숙이고 걸어야 해서 주변의 볼 것 하나 없는
그런 재미 없는(?) 길을 오가는 것이라고 해도 막무가내.
심지어, 왕복 4시간 남짓으로 가볍게 다녀올 수 있는 영실 코스를 내가 적극 추천했음에도
두 분들은 정상에 오르지 못하고 백록담 남벽 아래에서
그저 위를 쳐다보기만 하고 내려오는 게 무슨 한라산 등반이냐며
한라산 정상 등반이 아니면, 제주도에 가는 의의 자체가 반감된다고 했다.
그동안 숱하게 다니면서도 한라산 한 번 오르지 않은 게 한스럽다며... (아이고야...)
이번 여행의 일정 전체를 두 뇨자덜에게 전폭적으로 맡긴 게 탈이었다.
그리고 둘째 날은 한라산에 가겠다고 해서 나는 당연히 짧은 코스인 영실 쪽이려니 했다.
(성판악 코스를 제외하고는 한라산 휴식년으로 정상 쪽은 등반로를 막아 놔서 정상에는 오르지 못한다)
그런데 두 뇨자덜이 작당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온종일 다리품을 팔아야 하는 성판악 코스였다.
꼭 정상에 오르겠노라면서.
요즈음에는 겨울이라서 날도 쉬 어두워지는지라 자칫하면 하산길에
미아 신세가 되기도 하는데...
위에 보인 안내도를 잠시 살펴 두시는 게 도움이 된다.
해발 고도가 대충 드러나 있고, 구간별 등산 소요 시간이 보인다.
거기서 가장 중요한 것, 그것은 진달래매점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12시 안에 도착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야 정상 등반이 허락된다. 그 시각이 지나면 출입을 통제한다.
명심 또 명심해야 할 사항이다.
성판악에서 오르기 시작했다.
성판악 휴게소에서 200여 미터쯤 오면 해발 800미터 표석이 보인다.
저게 보일 무렵, 얼마나 반갑던지...
게다가 울 따님이 어찌나 자랑스러워지기 시작하던지 모른다.
다리 아프다는 투정이나 불평이 시작되어야 할 텐데도
전혀 그렇지가 않았던 것.
위에서 간단히 설명했던 진달래매점의 입산 통제 표지판이다.
어딜 가든 사전에 정보 검색을 꽤나 바지런히 하는 편에 속하는데
이번 한라산 등반에서는 울 집 뇨자덜의 기습 작전에 말린데다
왕년의 성판악 등반 기억만 믿고 갔다가 큰일 날 뻔 했다.
나는 1990년을 전후해서 한라산에 두 번 올랐다.
한 번은 산악반 식구들을 끌고 성판악으로 해서 올랐고
(그러고 나서는 하도 그 코스가 지루하고 재미가 없어서
다시는 성판악으로 해서 한라산에 오르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ㅎㅎㅎ)
두 번째는 부서장 연수 프로그램으로 실시한 등정에서 영실 코스로 ...
그때는 지금과 같이 중간 지대에 매점도 없었고
중간 지점에서 입산 통제도 없었으니
저런 변화를 알 리가...
하여간 성판악에서 등산을 시작한 게 9시 반이었다.
12시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진달래매점까지 도착해야 했고
성인 기준 정상인들의 소요 시간은 2시간 50분인데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2시간 반.
게다가 무릎 때문에 행로가 걱정되는 마나님과, 왕복 8킬로 산책길에서도
이따금 다리가 아프다고 하시는 공주님과 함께이니...
이 사진은 해발 1700미터 표석.
진달래매점 근처의 해발은 1470미터쯤 된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되었는지, 짐작들 하시리라.
이것은 정상 바로 아래, 해발 1900미터 지역.
나와 공주가 꽤나 지쳐 있었지만, 그래도 씩씩하게(?) 헉헉거리고 있다.
그리고, 정말 놀란 것은 진달래매점 통과 시점부터
마나님이 앞서 오르고 계셨다는 것.
진달래매점도 12시 5분 전에 통과하여 12시 1분에 통과하는 우리를 위해
미리 입구 통제원 아저씨에게 보고+사정도 했고
정상도 13시 30분 전까지 도착해야만 백록담 구경 (1분 허락)을 허락하는데
마나님께서 우리보다 먼저 도착하셨다는 놀라운 사실... ㅎㅎㅎㅎ
바로 백록담.
이번까지 백록담 구경을 세 번 했는데, 두 번은 물 한 방울 없는 모습이었고
그나마 저렇게 조금 물기라도 있는 건 처음 대했다.
(두 번째 갔을 때는 물 한 방울 없는 백록담 안쪽 바닥-기슭쪽에서
노루 한 마리가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생각할수록 울 집 두 뇨자덜이 정말 대단+대단!
참, 저 정상에서는 하산 시간도 정해져 있다.
13시 30분 이후에는 정상에 머물 수가 없다.
그야말로 안내원/경비원 아저씨 표현대로
'인증샷'만 1분 안에 찍고 하산해야 한다.
그 말을 안 들으면 후회한다.
왜냐. 그날 일몰 시간이 5시37분이었는데
산 속이라서 그런지 5시 반에 이미 완전히 어둠으로 휩싸이는 상황이 되었으니까.
안내원 아저씨의 하산 독촉 명령에 따라
공주 뒤편이 서귀포 쪽인데
정상에서 날이 좋은 날이라고 해도 저 정도의 구름이 끼는 것은 기본이다.
누구 딸인지 참 이쁘당.
그날따라 더 예뻤다.
다리 아프다는 말 한 마디 없이 정상까지 쑥 올라와준 우리 딸.
(내려오면서 얼핏 들으니 모녀끼리 주고 받는 말이 있었는데...
모친 왈,
"앞으로는 '한라산 오르기보다 공부가 훨씬 쉬워요!'로 구호를 정하는 게 어떠냐"
공주 왈,
"아니 아니 되옵니다". ㅋㅋ)
우리는 미리 준비한 혹한 대비용 겉옷(방풍복)들을 걸쳤는데
이게 또 나중에 크게 효자 노릇을 하게 된다.
(두 뇨자덜은 모노레일 신세를 지게 되는데
거기에 앉아서 내려올 때 맞바람을 막아주는 지대한 역할을 했다)
서둘러 내려오기 시작했는데, 내려오기가 더 힘든 상황.
올라가면서 일분일초의 휴식도 없이 강행군한 탓이었다.
(가지고 간 점심과 간식들도 걸으면서 먹었고,
내려오면서 간간히 배를 채우는 식으로 허기를 해결했다. 내내 시간에 쫓겨서)
더구나 무릎 같은 곳의 불편함은 오름길보다 내리막에서 더 힘들기 마련.
게다가 화장실 욕구가 까다로운 울 집 식구들인지라
(공주와 나는 비데가 없는 곳에서는 거의 볼일을 보지 못하는 아주 못된 버릇이 들어 있다)
공주님의 배변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꽤 고생했다.
암튼 그렇게 그렇게 어렵사리 내려왔을 때다
샘터 휴식장 직전의 간이 쉼터용 평상이 있는 곳에서
나뭇가지를 올려다 보다가 희한한 것을 발견했다.
이미 어둠이 살짝 내리기 시작해서 사진 발이 어두워
제대로 식별하기 어렵겠지만...
저건 겨우살이다.
나무에 기생하는 약초.
바로 위의 사진 속 모습들이다. 말리면 오른쪽 모양이 된다.
넣고 끓여서 숭늉 마시듯 마시면 된다.
우리 집에서 가끔 써먹는 수법.
이 겨우살이가 샘터 휴게실 근처에서부터 계속 아래로 이어져 있었다.
길가 나무들에. 마치 군락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등산객들이 주는 먹이에 길들여진 까마귀들이 어찌나 많은지
이 녀석들은 우리가 가는 곳마다 한참을 따라 왔다.
정상 근처에서부터 샘터 근처까지 내내... 거참.
사진 왼쪽의 모습에서 주황색 점퍼을 입고 등을 보이는 게 울 공주.
그 뒤 두 번째로 앉아 계신 분이 마나님이다.
요약하자면, 샘터 근처에서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고
두 분의 상태는 좋은 편이 아니라서, 걸음 속도가 떨어지기 시작.
약간의 통증과 많은 불편을 참고 걷고 있는데
씩씩하게 걸으며 우리를 추월하시는 등산객이 하시는 말씀.
조금 있다가 진달래매점에서 내려오는 모노레일(오른쪽 사진)이 곧 있으니
관리원 아저씨한테 부탁해서 여자분들을 태워달라고 하라는 것.
아닌 게 아니라 그로부터 일 분도 안 되어 모노레일 소리가 나고...(오매 기쁜 거)
자신은 모노레일을 타지 않고 걸어서 내려오는 용감하고+착하고+미남인
관리원 아저씨와 만났다...
모노레일을 잠시 멈추고
울 집 두 뇨자덜을 실어주는 아저씨가 어찌나 고맙던지...
그 뒤로는 나는 날듯이 걸었다.
(본래 난 하산 속도가 엄청난 사람이닷. ㅎㅎ히. 정말이닷).
하강 모노레일보다도 훨씬 더 빨리 종착역에 도착하여 울 식구들을 기다린 끝에
반갑게 해후.
예정된 5시 반 하산보다도 한 시간이나 늦은 6시 반이어서
그날 북제주에서 저녁 약속을 했던 지인에게는 만남 시각을 늦춰야 했다.
내가 걸은 마지막 하산 구간 40분 정도는 완전 암흑 속에서였고.
그리고...
그 다음날 티브이 방송에서 조난자 소식이 나왔다.
헬기로 구조되었다는.
내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내달리듯 내려오고 있을 때
휴대폰 불빛에 의존해서 내려오고 있던 어떤 모자와 마주쳤고
괜찮으냐고 묻자 오히려 불 없이 가는 나를 걱정해주던 그들이었다.
밤 10시 경에 샘터 근처에서 무사히 구조되었다는
뉴스를 그 다음날 아침 식사 직전에 대하고
나 혼자 후유 소리를 길게 뱉었다.
모노레일 신세를 안 졌으면, 그것이 남의 얘기가 아니었으므로.
우리 뒤에도 두세 팀이 더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중국 대학생들.
제주대와 광주대로 우리말 유학을 와서 한 사람은 졸업을 했고
한 사람이 3년차여서 둘이 한라산에 처음 왔다는 팀.
제주대생이 몹시 힘들어 해서 자꾸만 뒤쳐지고 있었다.
또 다른 한 팀은 중등 남학생과 어머니.
어머니가 자꾸만 쉬는 쪽이었다.
어둠 속에서 무사히들 하산했으리라 믿어 본다.
티브이 뉴스에 다른 나쁜 얘기들은 나오지 않았으므로... [Dec. 2013]
- 溫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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